생각의 한계
로버트 버튼 지음 | 더좋은책
생각의 한계
로버트 버튼 지음
더좋은책 / 2014년 3월 / 344쪽 / 15,800원
안다는 느낌
가장 흔히 인식되는 ‘안다는 느낌’은 누구에게나 친숙하다. 간혹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은 당장 떠오르지는 않지만 답을 알고 있음을 강하게 느낀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이 느낌을 ‘혀끝에 맴도는 감각’이라 한다. 잊어버린 이름이나 전화번호를 찾아 머릿속의 서류철을 뒤지면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알긴 아는데, 생각이 안 난단 말이야.” 이 예에서 당신은 이 안다는 느낌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모르면서, 무언가 알고 있음을 자각한다.
안다는 느낌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다음의 예문을 찬찬히 읽으라. 대충 읽거나, 도중에 그만두거나, 바로 다음 단락으로 건너뛰지 마라. 일단 다음 단락을 읽어버리면 이 경험은 두 번 다시 반복할 수 없으므로, 잠깐만 멈추어 이 예문에 대한 느낌이 어떤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설명하는 글을 읽은 뒤, 예문을 다시 읽으라. 그렇게 하면서, 부디 당신의 정신 상태와 그 단락에 대한 느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에 면밀히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신문이 잡지보다 낫다. 해변이 거리보다 나은 장소다. 처음에는 걷기보다 뛰기가 낫다. 아마 여러 번 시도해야 할 것이다. 어떤 기술이 필요하지만, 배우기 쉽다. 어린 아이들도 즐길 수 있다. 일단 성공하면, 말썽은 거의 없다. 새들이 지나치게 접근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비는 매우 빠르게 스며든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해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한 사람에게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말썽이 없다면, 매우 평화로울 수 있다. 돌멩이가 닻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거기서 떨어져 나가면, 다시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 단락이 이해가 가는가 아니면 말도 안 되는가? 당신의 마음이 가능성 있는 설명들을 찬찬히 가려내는 것을 느껴보라. 이제 단 한 단어를 제시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 연(kite). 예문을 다시 읽어보라. 뭔가 개운치 않았던 이전의 불편함이 옳다는 쾌감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껴보라.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모든 문장이 제구실을 하고 의미가 있다.
예문을 한 번 더 다시 읽으라.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을 다시 얻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한순간에, 마땅한 의식적 숙고 없이, 그 단락에는 돌이킬 수 없이 안다는 느낌이 주입되었다. 위 예문에 대한 다른 해석을 상상해보라. 내가 당신에게 이것은 3학년 학급에서 합작으로 지은 시라고, 또는 행운의 과자에 들어 있는 글귀들을 이어놓은 콜라주라고 말해준다고 가정하라. 당신의 마음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이 안다는 느낌의 존재가 다른 대안을 고려하려는 시도 자체를 물리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우리들은 아마도 각자 단락을 다소 다르게 읽겠지만, 어떤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연이라는 단어를 본 뒤, 우리는 재빨리 앞으로 돌아가 예문을 다시 읽으면서, 문장들을 이 새로운 정보와 대조한다. 어느 지점에선가 우리는 맞다는 신념을 얻는다. 하지만 언제 그리고 어떻게 말인가? 연에 관한 단락은 우리가 무언가를 어떻게 ‘아는가’를 이해하는 데 중심이 되는 몇 가지 다음과 같은 의문들을 일으킨다. ① 연이 그 예문에 맞는 답이라는 것을 당신이 의식적으로 ‘결정’했는가, 아니면 이 결정이 불수의적(不隨意的)으로 의식적 자각 밖에서 일어났는가? ② 어떤 뇌 기제(들)가 모름에서 앎으로의 이동을 일으켰는가? ③ 이 이동은 언제 일어났는가? (연이 맞음을 안 것은 예문을 다시 읽기 전이었나, 읽는 도중이었나, 아니면 읽은 뒤였나?) ④ 예문을 다시 읽은 뒤에도, 당신은 연이 맞는 답이라는 안다는 느낌을 추론에 의한 이해와 의식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⑤ 당신은 연이 맞는 답이라고 확신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뭘 아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수학과 물리학의 ‘진도가 안 나갈 때’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하는 가장 흔한 충고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문제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들의 가정은, 더 많이 노력하면 무미건조한 지식과 이해 사이의 틈새가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이 가정이 없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첫눈에 이해하지 못할 때마다 번번이 이해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만족스럽던 인생의 목적과 의미의 느낌들이 더 이상 ‘옳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순간들에 대해, 역사와 경험은 우리에게 다르게 가르쳐왔다. 논리와 이성이 ‘설득력 있는’ 경우는 드물다(여기서 ‘설득력이 있는’은 사라져버린 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느낌을 부활시키는’과 동의어다). 대신 우리는 금욕주의자, 신비주의자, 영적 구도자들의 이미지들을 불러낸다. 거친 고행자의 옷을 걸치고, 성 제롬처럼 걸어서 사막을 건너고, 동굴 속이나 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거나, 수도원에서 고립과 침묵을 추구해온 사람들을 말이다. 동양의 종교는 잃어버린 의미감에 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마음의 고요’를 강조한다.
그래서 어떤 것이 답일까? 안다는 느낌의 부재를 치료하는 처방은 의식적인 노력과 생각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일까, 아니면 덜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일상적인 가르침들은 모두 기본적인 신경 생물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맹시(blindsight)라는 기묘한 현상을 생각해보자. 맹시는 아마도 지식이 존재하긴 하는데 안다는 느낌이 없는 경우를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연구일 것이다.
눈에서 멀다고 마음에서 먼 것은 아니다: 뇌졸중으로 뇌의 후두피질, 즉 1차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부위만 선택적으로 망가진 환자가 있다. 그의 망막은 여전히 들어오는 정보를 뇌로 보내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각 피질이 망막에서 보낸 정보를 등록시키지 않고, 그 결과 환자는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제 그의 시야를 사분면으로 나누고 빛을 비췄다. 환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위치를 사분면에 상당히 정확하게 대응시켰다. 그 환자는 자신이 추측을 하고 있다고 느끼며, 추측이 우연에 의한 것보다 조금이라도 낫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먼저, ‘보이지 않는’ 빛의 경로를 추적해보자. 망막에서 출발하는 일부 시각 신경 섬유들은 후두엽에 있는 1차 시각피질로 곧장 진행한다. 하지만 다른 섬유들은 의식적인 ‘보기’를 맡고 있는 영역을 우회하여 대신에 피질 아래 뇌간 위에 있는 영역으로 투사된다. 이 영역은 시각적 상을 만들지 않는다. 이 아래쪽 뇌 영역들은 주로 싸우거나 달아나기와 같은 자율적인 반사 기능들에 관여한다. 빠르게 접근하거나 불쑥 드러나는 물체를 보면 몸은 눈이 위협을 살필 수 있는 위치로 고개를 돌린다. 즉각적인 반사적 행위에는 더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의식적 지각과 숙고에 비해 분명한 진화적 이점이 있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 피질 아래 영역들은 시각적 상을 자각하지 않고도 위협을 ‘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맹시는 환자의 피질이 장님이 됨으로써 나타나는 원시적으로 무의식적인 시각적 위치 확인 및 반응 체계이다. 빛의 위치에 대한 환자의 ‘의식되지 않는 앎’은 안다는 느낌을 촉발하지 않는다. 이 의식되지 않는 앎은 느낌을 발생시키는 더 고차원적인 피질 영역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환자는 자신이 빛을 본 적이 없다고 맹세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분명 잠재의식에서 빛의 위치를 알고 있다. 섬광이 비치는 적절한 사분면을 선택할 때, 그에게는 그것이 맞는 답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이 뭘 아는지를 모른다.
우리는 맹시의 예에서, 지식과 이 지식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분리되는 것을 뇌 회로의 근본적인 결함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본다. 이 망가진 연결은 의식적으로 노력하거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힌다고 해서 회복되지 않는다. 문제가 우리의 통제권 안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임상적으로 증상이 뚜렷한 맹시는 대개 후두피질에 대한 혈액 공급을 방해하는 뇌졸중에 의해 일어나는 드문 현상이지만, 안다는 느낌의 그릇된 표현은 날마다 일어난다.
신경망
안다는 느낌이 어떠한 기본적인 지식수준에도 의존하지 않는 1차적 정신 상태라면, 우리의 다음 단계는 의식적 사고와 불수의적인 안다는 느낌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우리가 뭘 아는지를 우리가 안다고 느끼게 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복잡하고 상세한 바탕의 신경생물학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뇌의 위계 구조를 다스리는 주요 요소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신경망의 층들이 어떻게 이음매 없이 매끈한 의식이 있는 마음으로 창발(創發)하는지를 이해하면, 사고의 모순되는 측면들이 어디에서 충돌하며 어째서 확신이 기초 생물학의 원리에 위배되는지를 깨닫는 기반을 얻게 된다.
사고는 언제 시작될까?
타이밍, 그 착상은 닭인가, 갓 부화된 병아리인가: 당신은 어떤 착상에 대해 숙고한다. 관찰하고, 되새기고, 명상하고, 자면서도 생각한다. 당신은 점차 설득되어 자신에게 말한다. “그래, 바로 그거야.” 사고, 사고의 평가, 맞다는 느낌의 이 명백한 인과적 시간 순서가 바로 안다는 느낌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른 어떤 순서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고 안다는 느낌에서 모든 실제적 가치를 없애버릴 것이다. 하지만 경험은 우리에게, 안다는 느낌과 의식적 ‘추론’의 시간 관계는 가변적이라고 말한다.
가능한 타이밍 순서에는 다음 예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각본 A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고도 동반하지 않고 안다는 느낌을 경험한다. 신비 체험이나 뇌 자극 연구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이 느낌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은 모두 경험 이후에 일어난다. 각본 B에서는 일련의 무의식적 연상이 ‘맞다는 감’과 융합된다. 사고와 맞다는 느낌은 하나의 단위로 의식에 도달하고 통찰이나 ‘아하’ 하는 순간으로서 함께 경험된다. 많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자신이 찾은 돌파구를 체계적인 심사숙고의 산물이 아닌 ‘갑작스런 사고의 정지’로, 혹은 ‘그냥 머릿속에 느닷없이 떠올랐다’고 묘사해왔다. 그들은 준비(토대 쌓기)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말하지만 실제적인 통찰은 천만뜻밖의 것이었다.
각본 C에서는, 어떤 착상을 처음으로 맞닥뜨린다. 우리는 그것이 맞는지의 여부가 객관적으로 결정된 다음에야, 그 답이 맞음을 ‘안다’. 예를 들어, 친구가 초인종에 답해야 친구의 집을 찾은 줄 알고, 전화번호를 누른 다음에야 통화하려고 한 부서에 연결된다. 각본 C의 경우, 어떤 사고가 맞다는 느낌은 분명 의식적 평가와 시험 뒤에 온다. 안다는 느낌이 정당한 결론을 대변한다고 무조건 신뢰하려면, 이 세 각본들 가운데 실제로 일어난 각본은 어떤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타이밍이 전부다. 하지만 뇌 안에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지각을 재배열하는 기제들이 들어 있다면 어쩔 것인가? 뇌가 우리에게 속임수를 써서, 사실은 사건 X가 사건 Y보다 앞서는데 사건 Y를 뒤따른다고 믿게 만들 수 있다면? 앞뒤가 뒤바뀐 제안처럼 들리지만, 이 재배열이 일련의 사건들을 적절히 지각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또 다른 생리학적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면? 일단 착시는 우리가 실재라 일컫는 것을 우리의 뇌가 어떻게 조립하는지에 대해 통찰하게 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당신은 최근에 언제, 제시되는 시간을 착시라고 보았는가?
[주관적인 시간의 역방향 투사] 블로는 타격 부진의 수렁에 빠진 채, 호텔 방에 앉아 있었다. 그의 팀은 최하위이고, 그는 앞으로 삼진 몇 개면 2군으로 내려 보내질 판이다. 시합 날 아침, 여섯 살 먹은 아들 녀석이 전화로 아빠가 보고 싶다고 말하더니 속삭였다. “절 위해서 홈런을 때려주세요.” 블로는 지갑을 열어 구겨지고 노랗게 빛바랜 신문 쪽지들을 꺼냈다. 야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들 가운데 세 사람인 본즈, 테드 윌리엄스, 스탠 뮤지얼의 말들을 인용한 신문기사를 오려낸 것들이다.
본즈는 해설자에게, 자신은 스트라이크존을 아주 조그맣게 줄여놓고 거기만 바라본다고 말했다. 1986년, 테드 윌리엄스는 말했다. “투 스트라이크가 될 때까지, 1달러 은화 크기 정도의 한 영역에 들어오는 공 하나를 기다렸습니다.” 스탠 뮤지얼은 어떤 신출내기 선수에게 말했다. “땅볼을 치고 싶으면, 나는 공의 꼭대기를 때리지. 직선 타구를 치고 싶으면 중간을 때리고, 플라이를 치고 싶으면 맨 아래를 때리는 거야.” 이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요즘 나는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나는 것도 간신히 볼까 말까인데. 야구장에서, 감독은 “방망이만 갖다 대. 넘길 생각으로 휘두르지 말고. 걱정 마. 아마 스프링필드(마이너리그 트리플 A)에 가면 자신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블로는 결론을 내렸다. ‘감독이 말하는 대로 해. 공과 접촉만 하자. 아주 느긋하게 휘두르는 거야.’ 블로는 타석을 딛고 서서 준비를 끝냈다. 감아올리고, 던졌다……. 중간 속도에, 커브도 아니고, 보름달만큼 큰 것이, 타석을 향해 거의 둥둥 떠온다고, 공이 떠나는 순간 투수의 손을 보고 판단을 내리면서, 블로는 생각했다. 피질 아래 운동 중추들이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이 사건을 그냥 보낼 리 없었다. 그리고 블로는 그저 공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는 굉장한 좌월 홈런을 날렸다. 팀은 1 대 0으로 승리했다.
프로야구 투수들이 던지는 공의 속도는 시속 130에서 160킬로미터에 달한다. 공이 떠나는 순간부터 본루를 지나는 순간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0.380에서 0.460밀리초다. 공이 떠나는 상이 망막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스윙을 시작하는 순간까지 최소 반응 시간은 대략 200밀리초다. 스윙에는 160에서 190밀리초가 더 걸린다. 반응 시간과 스윙 시간을 합친 시간은 대략 속구가 마운드를 떠나 본루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과 맞먹는다. 당신의 망막이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고 있다는 최초의 공지를 전달하고 뇌가 그것을 받아 처리하기까지, 이 속구는 약 9미터를 날아갈 것이다. 투구를 완전히 지각하기까지는 상당히 더 긴 시간이 걸린다. 처리가 지연된다는 것은 공이 중심 위치에 있는 것으로 나타날 때쯤이면 실제 공은 더 이상 그 위치에 없다는 뜻이다.
공이 ‘있게 될 곳’을 보려면, 뇌는 동작의 속도를 시간에 대해 적분하여, 자세 이동의 정도를 추산한 다음, 이것을 현재 시점에 보이는 물체의 모습과 통합해야 한다. 타자가 스윙을 시작할 때 경험하는 ‘지금’이 의식되지 않는 복잡한 계산들에서 생기는 ‘가상’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놀랍다. 오로지 전망에만 근거한, 미시적 버전의 예지가 아닌가. 일단 공이 공중이 뜨면, 자세히 생각해보기에는 너무 늦다. 타자는 공이 떠나 행로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그다음에는 자동으로 움직인다.
우리 모두는 어떤 타자의 기량이 단순한 운동의 열의를 넘어, 사전의 연습과 광범위한 게임 연구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훌륭한 타자들은 상대 투수들의 성향을 광범위하게 꿰고 있다. 그 성향에는 투수가 어떤 유형의 공을 다양한 조건에서 언제 던질지도 포함된다. 훌륭한 선수들이 신출내기 선수들보다 월등하게 정확한 부분이 바로 이 영역이다. 공을 때리는 행위에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떼려야 뗄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사건 이전에 의식적으로 분석하는 것과 사건의 시작과 함께 거의 순간적으로 잠재의식적 계산에 의존하는 것이다. 피질은 스윙을 언제 어느 방향으로 할지 일반적인 지침을 제시한 다음, 더 빠른 피질 아래 기제들로부터 통제권을 넘긴다. 결론적으로, 타자는 면밀히 관찰된 공이 아니라, 미리 결정된 개연성에 의거하여 스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사고들
간단한 요약: 안다는, 친숙하다는, 낯설다는, 실제라는 느낌들은 복합부분 발작이나 측두엽 뇌 자극과 연관된 신경학적 호기심의 대상 이상이다. 정신적 기능들인 감정, 기분, 사고의 표준 범주에 깔끔하게 들어맞지도 않는다. 총체적으로 그것들은 정신적 활동에 속하는 별도의 한 유형, 즉 우리가 우리의 사고를 자각하고, 채색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게 하는 내부 감시 체계의 여러 측면들을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