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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몰랐던 우리 문화

강준만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우리도 몰랐던 우리 문화

강준만 외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4년 3월 / 320쪽 / 14,000원





두발 논란의 역사 - 왜 우리는 머리카락에 목숨을 거는가?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한국에선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지키는 것이 효의 근본이었으며, 그걸 훼손하는 건 인륜의 파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랬으니 1895년 12월 30일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단발령(斷髮令)을, 동시에 이루어진 태양력 도입과 더불어 ‘500년 조선사 최대의 개혁안’이라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단발령을 공포한 그날 고종은 태자와 함께 단발을 했다. 다음 날엔 정부의 관료, 군인, 순검 등 관인들에 대한 단발이 강행되었고, 1896년 1월 1일부터는 일반 백성에 대한 단발이 강요되었다. 당시 유길준과 조희연 등은 일본군을 궁성에 풀어 대포를 재놓고 “머리를 깎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머리를 깎는 사람들이 없자 강압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순검이 배치되어 신분을 막론하고 상투를 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위를 들이댔다. 이에 대해 이이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머리를 깎이지 않으려고 뻗대는 젊은이는 머리통을 잡아 무릎을 꿇리고 깎았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통곡 소리가 들렸다.”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의 부인 L. H. 언더우드는 『상투의 나라』(1904)에서 “그들의 긍지, 자존심과 위엄은 모두 비난받고 발아래서 짓밟혔다”며 “통곡과 비탄과 울부짖음 소리가 들려왔다”고 기록했다. 면암 최익현은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했으며, 아들이 상투를 자르자 아버지가 자살하는 사건마저 일어났다.

이승만의 자발적 단발: 매우 드물지만 단발령 이전에 개화의 상징으로 스스로 단발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인 가운데 최초로 상투를 자른 사람은 초기 개화파인 서광범이었다.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요코하마를 방문했다가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자인 언더우드의 권유로 양복을 입고 머리를 깎았다. 이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유길준 등 개화파들도 서슴없이 머리를 잘랐다. 단발령이 떨어지자 흔쾌히 단발에 응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21세기 청년 이승만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손세일은 “전국이 단발 반대로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승만이 단발을 결행한 것은 외국인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동안에 그가 급진적인 개화파가 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일생을 통하여 크고 작은 많은 결단의 고비에서 보여준 과단성의 한 보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때에 공포된 단발령은 조선의 정황을 파국으로 몰고 가면서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승만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바리캉과 이발소의 등장: 단발은 그렇게 서서히 이루어지다가 1904년 8월에서 1906년 9월까지 정부개혁과 국정쇄신을 부르짖은 이른바 갑진개화운동이 일어나면서 크게 확산되었다. 프랑스인 바리캉 마르가 1871년에 발명한 바리캉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도 갑진개화운동이 벌어지던 1905년 전후였다. 그 무렵 일본인들의 상권이었던 진고개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이발소가 생겨났으며, 조선 사람을 상대로 한 이발소는 1910년대 종로에 처음 생겨났다. 여성의 단발은 1920년대에 이른바 ‘신여성’의 출현과 함께 등장했으며, 이는 뜨거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신여성의 단발, 신남성의 장발: 신여성 가운데 단발을 한 최초의 여성은 당시 유행의 창조자 역할을 했던 기생 강향란이었다. 그녀는 1922년 서울 시내 광교에 있는 중국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고 남장을 한 채 남자들이 다니는 강습소에 나가 남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강향란 이후, 배우 이월화, 소설가 김명순, 허정숙, 주세죽 등이 머리를 잘랐다. 이들의 단발은 기성 체제에 대한 도전의 의미가 강했다. 한편 1920년대 후반 내내 신여성에겐 단발이 유행이었지만, 신남성에겐 오히려 장발이 유행인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그만큼 남성의 단발이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파마와 하이카라: 1933년 2월 초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안에 ‘엽주 미용실’이 문을 열었다. 1904년 황해도 사리원 태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오엽주가 차린 미용실이었다. 오엽주는 미용실이 붐비자 1년 후 다시 일본에 가 미용술을 연구하면서 전기 파마를 배워왔다. 오엽주가 선보인 파마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는데, 전기로 머리카락을 지진다고 해서 전발(電髮)이라고도 했다. 월간 《여성》 1936년 10월호 표지엔 파마머리를 한 여성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일제 말기, 총독부는 전시체제의 물자절약 차원에서 여성의 파마와 남성의 장발을 금지했다. 그로 인해 당시 유행했던 이른바 ‘하이카라’ 머리는 모두 사라졌고, 모두가 짧은 군인 머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발봉사대’와 ‘이발사 총파업’: 광복 이후 파마는 무서운 속도로 유행의 물결을 탔다. 일반 여성들도 그 물결에 가세했다. 물론 파마 유행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매우 어려운 경제 여건하에서 보통 사람들의 두발 관리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성의 두발 관리를 위해 ‘이발봉사대’가 등장한 것도 그런 사정을 말해준다. 《조선일보》 1946년 5월 14일 자는 “서울이발직원조합에서는 바쁜 각 산업기관 기타 직장 근무원의 시간경제를 위하여 직장에 가서 이발하는 봉사대를 조직했는데, 필요한 곳에서 동 조합에 연락하면 즉시 대원을 파견하리라 한다”고 보도했다.

‘이발사 총파업’도 흥미롭다. 《조선일보》 1947년 10월 9일 자에 “지난 1일부터 이발요금 5십 원을 당국의 허가 없이 7십 원으로 인상한 이발업주들은 반분제(半分制)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4, 6제로 임금을 내리었다고 한다. 이에 시내 이발소 종업원들은 8일부터 업주들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파업으로 돌입하여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되는 바이다.”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ABC포마드’와 ‘헵번 스타일’: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이른바 하이카라 머리가 대세로 자리 잡아 가면서 포마드(pomade)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포마드는 머릿결에 바르는 반고체의 진득진득한 기름으로 광택과 방향(芳香)을 내는데, 머리를 매만져서 다듬기 위해 주로 남자가 사용했다. 한편 한국전쟁으로 인한 유엔군과 미군의 참전은 패션과 헤어스타일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롱스커트와 웨이브가 강한 파마가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도 여성들 사이에 인기를 구가했다. 또 국내에선 1953년에 〈로마의 휴일〉이 개봉되어 “오드리 헵번처럼 해주세요.”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영화의 여주인공 헵번의 머리 모양을 딴 이른바 ‘헵번 스타일’이 유행한 것이다.

‘빡빡대가리’와 가발 수출: 1961년 5ㆍ16쿠데타 직후에 이른바 ‘빡빡대가리’ 논란이 벌어졌다. 군사정권이 6월 1일 대학생의 교복착용과 중ㆍ고등학생의 삭발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삭발령으로 재미를 본 곳은 이발소였다. 아이들은 이발소 주인에게 삭발령으로 떼돈을 벌게 되었으니 장학금을 내놓으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이름하여 ‘빡빡대가리장학금’이었다. 한편 군사정권은 1962년 통화개혁 실패 이후, 수출 주도의 산업화 전략으로 선회했다. 당시 상공부 장관이던 박충훈은 백영훈에게 한국 내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세일즈맨 30명을 데리고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유명 백화점을 방문해 한국이 수출할 수 있는 품목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수출할 수 있는 제품을 찾지 못해 실의에 빠져 있던 순간 백영훈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띄었다. 백영훈의 말이다. “하루는 미국 유명 백화점에 흑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게 보였어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더니 가발이었어요. 저거면 우리도 만들 수 있겠다 싶었지. 그래서 가발을 수출상품 1호로 선택했어요. 대통령에게 가발을 수출하자고 건의했더니, 대뜸 ‘우리나라에 머리카락은 많지’ 하면서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어요.” 참고로 가발 산업은 고물상과 엿장수들이 머리카락을 수집하면서 시작되었다.

남성의 장발 단속: 가발 수출이 최고조에 이른 1970년 여름, 젊은 남성들의 장발 소동이 벌어졌다. 정부가 장발을 ‘히피의 한국 상륙’으로 보고 일제 단속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 여론을 정확히 반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일보》 1970년 12월 8일 자는 “장발족 단속은 고위층의 한 분이 TV를 보다 지나치게 긴 머리를 뒤흔드는 꼴이 보기 흉하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실시되었다는 헛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어떻든 시민들의 소리는 거의 찬성의 방향이었다.”고 주장했다. 어머니가 아들의 장발을 잘라 달라고 아들을 경찰서로 데려간 이색적인 사건도 있었다.

‘10월 유신’으로 강화된 장발 단속: 1972년 2월 11일, 서울 명동 중심가에 있는 심지다방이 폐쇄됐다. 심지다방은 장발 젊은이들과 히피성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다방으로 대마초의 일종인 해피 스모크 암거래 등으로 인한 마약법 위반, 탈세, 식품 위생법 위반, 특정 외래품 판매금지법 위반, 음란행위 등 청소년 범죄의 아지트로 이용되는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오다가 퇴폐성 다방에 대한 당국의 단속이 시작되자 모델케이스로 적발된 것이었다. 겁먹은 명동 일대의 다방, 음악실, 살롱 등은 스스로 ‘장발족 출입 금함’이라는 공고문을 입구에 내걸었다.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장발 단속은 더욱 강화되었다. 단발령 공포부터 77년이 지난 1973년 3월 10일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단속하는 개정 경범죄 처벌법이 발효되었다. 물론 이 법이 발효되기 이전부터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이 이루어졌지만, 이제 법적 근거까지 마련한 셈이었다. 장발은 1970년대 내내 거의 매년 한 번씩 집중 단속령이 떨어졌다.

장발이 초래한 이발소의 불행: 사실 장발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이발소였다. 서울에 이발소가 가장 많았던 해는 1973년으로 5,234개소였는데, 이는 5년 전인 1968년(2,799개소)에 비해 두 배나 늘어난 숫자였다. 그랬던 것이 1974년 여름을 고비로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해 1975년 3월 말 기준 4,515개소로 12퍼센트가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이발소는 이른바 ‘칸막이 영업’으로 서서히 전환하면서 ‘퇴폐’ 서비스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1982년 중고생의 두발 자유화: 1980년대에 들어서도 장발 단속은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 서서히 장발 유행이 퇴조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0년 9월 6일 내무부 장관 서정화는 장발 단속을 일체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광주 학살의 원죄를 희석하려는 신군부의 ‘생활 민주화’ 조치는 1982년 1월 4일 중고교의 교육ㆍ두발 자유와 발표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두발은 1982년 새 학기부터, 교복은 신입생부터 자율화되었다. 오랫동안 억눌려왔다가 갑자기 터진 탓이었을까? 두발 자유화가 시작된 지 석 달도 안 돼 중고생들 사이에 장발이 늘어났다. 남학생은 뒷머리만 길게 기른 ‘제비꼬리형 머리’, 여학생은 ‘디스코 파마’가 유행했다. 한편 두발 자율화는 완전 자율화는 아니어서 파마ㆍ염색ㆍ장발 등은 금지되었는데, 여학생들은 파마와 염색으로, 남학생들은 장발로 학교 당국을 괴롭혔다. 각 고등학교의 장발 단속기준은 “머리카락이 옷깃과 귀를 덮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일부 학생들은 이 단속 기준을 우회하기 위해 파마를 했고, 한동안 남학생 파마가 고교생들 사이에 유행이 되었다. 남학생 파마가 미용실은 여성만의 공간이라는 오랜 금기를 깨나가면서 단순한 조발을 위해 미용실을 찾는 남성들도 늘어갔다. 이는 이발소와 미용실 사이에 갈등을 초래해, 1982년 6월엔 장발의 남자 손님을 같은 건물 내에 있는 미용실에 빼앗겨 불만을 품어오던 이발소 주인이 미용실 주인을 찾아가 행패를 부리다가 9일 즉심에 넘겨진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퇴폐 이발소’의 번성: 장발과 더불어 미용실로 인해 이중고를 앓게 된 이발소가 점점 하향 추세를 겪으면서 이른바 ‘퇴폐 이발소’도 크게 늘기 시작했다. 경찰도 본격 단속에 나섰다. 1982년 11월 서울시경은 칸막이를 하고 실내조명을 어둡게 한 후, 여자 면도사로 하여금 손님에게 퇴폐 행위를 하게 한 이발소 186곳을 적발하고 130명을 입건했다. 이후 한동안 ‘퇴폐 영업’이 이발소 관련 주요 뉴스를 차지했다. 이에 1983년 2월 보사부는 이-미용업소의 퇴폐-음란 행위를 뿌리 뽑기 위해 이-미용사법 시행규칙에 처벌 규정을 신설해 시행키로 했다.

두발의 패션화: 1990년대 들어 두발은 패션의 상징으로 본격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발소가 ‘퇴폐’ 딱지에 신음하는 반면, 미용실은 세계 최첨단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993년 11월 프랑스에 본점을 두고 세계 13개국에 450여 개 체인점을 갖고 있는 뷰티살롱 ‘자크 데상주’가 이대 앞에 문을 열었으며, 이어 1994년 2월과 4월에는 미국의 ‘팬터스틱 샘스’와 프랑스의 ‘모즈 헤어살롱’이 은평구 증산동, 이대 앞에 각각 체인점을 내고 영업을 시작했다. 이에 국내 미용실들도 경쟁력 확보를 위한 자구 노력의 하나로 체인화에 가세했다. 1993년 12월 ‘조앤리 헤어클럽’은 서울 압구정동과 포항 등 7군데에 체인점을 만들어 영업을 시작했다. ‘챨리 정’ 미용실도 1994년 5월 상계동 체인점을 시작으로 전국 체인망을 추진했다. 이 밖에 ‘박승철 헤어스튜디오’, ‘세종미용실’ 등도 체인점 개설에 뛰어들었다.

학생들의 두발규제 반대운동: 2000년대가 열리면서 두발계의 최대 이슈로 떠오른 건 1990년대 내내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던 고교생들의 두발규제 반대운동이었다. “학생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구호로 시작된 두발규제 반대운동, 또는 ‘노컷(no-cut)운동’은 전국적인 서명 운동과 텔레비전 토론을 거치며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마침내 2000년 10월 4일 교육인적자원부는 “학생ㆍ학부모ㆍ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해 학교별로 새로운 규정을 만들라”고 했다. 이는 학생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벌인 반대운동의 성과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노컷운동’에 몰두하는 동안, 성인들 사이에선 ‘최지우컷’과 ‘배용준컷’이 유행했다. 홈페이지 접속 건수 1,000만 건을 돌파하는 등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20대 시청자들 사이에서 ‘유행의 샘’이 된 KBS-2 드라마〈겨울연가〉때문이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최지우와 배용준의 패션 따라잡기 중 가장 유행한 것이 그들의 헤어스타일이었다.

머리카락은 의미 투쟁의 장(場): 어느 나라에든 머리카락을 둘러싼 논란은 있었겠지만, 한국처럼 그 논란이 뜨거웠던 나라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개화기의 조선을 다녀간 서양인들이 발간한 조선 관련 저서에는 조선인들이 머리카락과 모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놀라움이 자주 등장한다.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 L. H. 언더우드가 낸 책의 제목도 『상투의 나라』(1904)가 아니던가. 한국인은 개성을 표현하고 유행을 따르기 위한 ‘생활예술’의 차원에서만 머리카락에 집착한 건 아니었다. 단발령 시대부터 머리카락은 전통과 개화가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머리카락은 통제와 자율의 충돌 지점이었고, 억압과 저항이 동시에 표출되는 마당이자 상징이었다. 개인적인 심경과 결단의 표현 매체이기도 했다. 의미 투쟁의 장(場)으로서의 머리카락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우리에게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차출해간다. 한편 남성의 머리카락 관리도 맹렬한 속도로 여성의 뒤를 쫓고 있기에, 이젠 ‘여인의 마음’뿐만 아니라 ‘사나이의 마음’도 헤어스타일과 무관치 않은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헤어스타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그 커뮤니케이션은 역으로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지배할 수 있다. 머리를 상하로 흔드느냐 좌우로 흔드느냐 하는 동작에 따라 실제로 생각이 바뀌기도 하더라는 실험 결과가 타당한 것이라면, 헤어스타일에 의해 형성되는 개인의 이미지가 다른 사람들에 투영되고 되돌아와 생각과 행동마저 바꿀 수 있다는 가설도 가능하리라. 머리카락은 과거와 추억도 지배한다. 117년 전 목숨을 걸고 단발령에 저항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건 쉽지 않겠지만, 누구에게나 머리카락과 관련된 자신만의 추억은 있기 마련이다. 1980년에 발표된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흥얼거리면서 ‘머리카락의 성애학’에 잠시 빠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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