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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vs 권력

스털링 시그레이브 지음 | 바룸
돈 vs 권력

스털링 시그레이브 지음

바룸 / 2014년 2월 / 348쪽 / 15,000원





두꺼운 얼굴, 검은 심장



하, 상, 주로 이어지는 고대 황금기의 세 왕조는 193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거북 등 껍데기와 길짐승의 뼈에 새겨진 갑골문자와 청동 제례기가 발견되면서 실재했던 왕국임이 밝혀졌다. 상나라를 개국한 제왕은 신석기시대 때 처음으로 농경문화를 보급하여 황하문명의 초석을 다지는 한편, 변방의 여러 오랑캐들을 물리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를 하늘과 같이 받들었고, 그 후 중국에서는 ‘제’를 ‘하늘’과 같은 뜻으로 쓰게 되었다. 상나라는 500년간 중국 북부지방을 다스렸으며, 직접적으로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변방은 친인척들을 제후로 파견하여 통치하도록 했다. 변방에 파견된 제후들은 자기 봉토 내에서는 독립적인 지배권을 누리며 농작물 생산을 위해 농민들을 보호했고, 더 많은 수확을 위해 거의 모든 노동을 농사일에 동원했다. 당시에는 잉여 농산물은 군주의 몫이라고 생각했으며, 농경은 삶과 종교의 중심이었다.

관료의 우상, 상인의 적

기원전 11세기, 상 왕조가 주지육림의 쾌락에 빠지면서 불행이 찾아들었다. 그간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서쪽 변방의 제후국 주나라는 타락과 반인류적 행위가 만연한 상나라를 정복했다. 넓은 영토를 차지한 주나라는 통치권을 양자강 이남 지방으로까지 넓혔다. 주나라는 도읍을 서안으로 정하고, 친인척들과 공신들에게 공적에 따라 봉토를 하사했다. 그러나 각각의 제후들에게 자치권을 주었던 상 왕조와는 달리 주 왕조는 엄격한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시행했다. 각 지방의 제후는 관료와 군사를 임면할 수 있었고, 관료와 군사에게는 일정 수의 농민을 귀속시켜 그들이 직접 생산한 농산물과 작물로 자체 살림을 꾸려가도록 했다. 농민들이 관료와 군사에게 바친 조공은 일부만 남기고 대부분을 황제에게 진상했으니, 최종 상납처인 궁궐 창고에는 농민들이 바친 조공이 가득 쌓였다. 이렇듯 잉여 생산물은 기근과 환난의 시기를 대비한다는 미명 아래 모두 황제의 소유물이 되었던 것이다.

주 왕조의 황제와 제후들은 매우 엄격했고 형벌 역시 가혹했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조공을 빼돌리는 행위는 감히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다. 관료들 또한 고지식하여 조금이라도 비축물의 누락이나 손실이 생기면 즉각 궁궐 대신에게 보고하였다. 실생활에서는 주연을 베푸는 것조차 사형에 처해질 만큼 극도로 엄한 법 적용이 이루어졌다. 술은 제사 때에만 허용되었다. 덕분에 중국은 급속히 깨끗해졌고, 검소하다 못해 살벌한 이런 생활은 2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주 왕조의 통치자들은 아무리 작은 죄라도 애당초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큰 죄악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순종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특히 행정관료 중 불순한 생각을 품거나 새로운 혁신을 원하는 자가 있다면 즉시 처형해야 마땅하다는 사회관념을 낳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모에게 불경한 자식, 가족 부양을 등한시하는 가장은 도둑이나 반역자들과 똑같이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에게는 얼굴을 불로 지지거나 코, 발, 성기를 자르는 형벌이 가해졌다.

단순한 규제를 엄격히 적용할 때 백성들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며 사회는 안녕과 질서를 찾게 된다는 사고방식은 확실히 효험을 발휘했다. 수십 년에 걸쳐서 잔혹한 처형을 지켜본 사람들은 각자 어떻게 처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고, 대륙에는 다시 위대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침묵이 곧 수긍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세상은 칼로 자른 듯 그렇게 반듯하게만 재단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살벌하기 짝이 없는 정권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등지로 이주해 갔다. 일부는 바다 건너 일본까지 피난을 떠났고, 또 어떤 무리는 북방의 스텝지역이나 서쪽의 사막지방으로 숨어들었다. 기후가 따뜻한 곳을 찾아 양자강 이남의 시암족이 사는 곳으로 도피한 사람들도 있었다. 중국의 민족 대탈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근 1천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주 왕조는 기원전 256년에 멸망했으나, 그 통치체제와 봉건제도는 이후 2천 년간 후대의 여러 왕조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 사실은 주 왕조의 통치체제가 중국으로서는 최선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자를 비롯한 많은 성현들이 주나라 통치자들을 귀감으로 삼고 그들을 추종했다. 주나라 시대, 그 엄한 형벌제도와 전제적인 통치를 겪으면서 중국의 농민, 장인, 상인, 군사, 심지어 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들이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지나친 예의범절과 순종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규범을 만들어냈다. 모두가 절대 순종을 실천했다. 이러한 행동규범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두꺼운 얼굴을 지닌 중국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신분이 낮을수록 더욱 두꺼운 얼굴과 비열한 자세가 요구되었다.

최고 통치자인 왕은 자기 조상 앞에서만 무릎을 꿇으면 되었지만, 백성들의 사상과 행동은 극도로 경직되고 순종심의 표현은 일종의 생존 게임처럼 전국에 퍼졌다. 주 왕조는 왕실의 일가만으로도 그 방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다. 행정관과 일반 관리들 모두가 왕실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었고, 혼인관계 등을 통해서라도 인맥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의 높은 관직에서 변방 촌락의 관리자에 이르기까지 권력층의 인맥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부조직은 일가친척으로 구성된 하나의 기업체 조직과 다름없었다. 오직 왕실의 일가만이 진정한 중국인이었던 것이다. 가족의 계보가 중요했던 만큼, 중국인들은 다른 가족보다 우월한 혈통임을 밝히고자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 우수한 행적을 남긴 조상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청렴 시대에서 뇌물 시대로

주 왕조는 1천 년 동안 군림했으나, 실제적으로 400년이 지난 이후부터는 절대왕권이 쇠퇴했다. 이때부터 신성했던 왕의 권위는 단지 명목뿐이었으며, 인위적으로 왕명을 통해 그 신성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 누구도 감히 왕 앞에서 무례함을 보이지 못했던 시기가 지나가자 겉치레와 권모술수가 싹트기 시작했고, 황금 왕조는 타락의 늪으로 치달았다. 절대왕권이 끝없는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이른바 황금시절이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음을 의미했다. 타락의 주원인은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윤리관에 젖어 있기 때문이었지만, 사람들은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기만했으므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주 왕조는 황금시대에서 납 시대로 바뀌었고, 하늘 아래 온 세상이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북방 유목민족들의 침략을 견디다 못한 주 왕조는 도읍을 서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제후들은 부와 권력을 향한 탐욕과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바야흐로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겸양과 미덕의 시대는 사악과 음모의 시대로 탈바꿈했다. 관료와 귀족들은 영토와 세력 확장을 위해 거추장스런 도덕의 탈을 벗어던졌다. 도덕적 윤리관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지고 타락과 권모술수가 유행했으며, 왕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뇌물 수수가 성행했다.

춘추시대는 사회적ㆍ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동족도 잡아먹는 시대였다. 일가 사이에서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현상이 팽배했다. 통치자들 역시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었고, 때로는 친자식들에게 배반당하기도 했다. 피비린내 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고, 유혈사태 후에는 일부 집단을 제거하는 과정이 뒤따랐다. 서로 먹고 먹히는 과정을 거치면서 1천여 개 소국들이 난립했던 중국 대륙에는 칠웅과 몇 개의 작은 나라만이 생존하게 되었다. 이들 제후국들이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대륙은 이제 피 냄새가 끊이지 않는 전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일반적인 통치체제는 군주 혹은 국왕이 봉건통치의 수뇌였고, 그 아래에 재상과 장군이 있었으며 이들이 관료기구를 이끌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묘한 처신과 간사한 심성이 필요했고, 관료들은 이러한 재능을 잘 갖추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예의는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적 가식만 보여 주는 것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런 긴장감 넘치는 도박판에서는 조그마한 실수가 큰 재앙을 가져오는 법. 모두들 두꺼운 얼굴을 지켰고, 가슴속에는 검은 심장이 뛰고 있었다.

격변의 시대! 돌이켜보면 전쟁과 식량, 오직 이 두 가지만이 기억에 남는다. 전쟁은 끊임이 없었고, 치밀함을 요구하는 첩보활동ㆍ외교활동ㆍ군사활동은 걸출한 전략가 또는 전문가인 모사들에게 맡겨졌다. 경쟁 상대인 제후국이 강성해지면 그만큼 이들의 암술 역시 교묘해졌다. 행정 무대에는 음모와 뇌물, 사기와 협잡이 판을 쳤고, 그 무대 뒤에는 늘 전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군사들! 그러나 우습게도 이 많은 군사들이 돈에 쉽게 매수당하는 장군들을 따라서 끊임없이 이편에서 저편으로 옮겨 다녔다. 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역설적이게도 이렇듯 경쟁이 치열한 세태 덕분에 평민들 사이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 지배계급에 등용되기 시작했고, 최고위 관료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기회가 생겨났다. 이때 새롭게 등용된 학자 출신의 관료를 사인이라고 불렀다. 사인들 가운데는 귀족의 자식들도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은 평민 출신으로서 뛰어난 재능이 돋보여 발탁된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곧 아수라장이던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엘리트 행정관들이었다. 군주와 귀족은 권력과 영예를 갖고 있었던 반면에, 사인들은 재능과 두뇌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조상 대대로 군주와 귀족들에게 세습되어 오던 영토가 점차 출신성분이 애매모호하지만 총명한 이들 평민 출신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고대 중국에서는 뜻있는 야심가와 나쁜 짓을 예사로이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고문 또는 모사로서의 공식적인 직책을 찾아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그들 대다수는 자신들의 음흉한 계획을 여러 군주들에게 설파해서 군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직업적인 웅변가, 이른바 세객들이었다. 음모가 성사되면 그들은 훌륭한 직업을 얻게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끓는 물에 던져지거나 신체가 염장되는 처벌을 받는가 하면, 사지가 갈가리 찢겨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에 따른 보상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험이었다. 전국시대 당시 중국에서는 애국심, 도덕심, 기사도 정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오로지 의미 없는 충성심만 존재했다. 깡패인지 관료인지 도무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관료들은 악당들과 똑같이 행동했다. 거만하면서도 비굴하고, 무자비하면서도 아첨을 떨었다.

똑똑한 평민들 중에는 사업가 기질을 타고난, 즉 상업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도 많았다. 이들은 빨대로 컵 속의 물을 빨아들이듯, 왕실의 창고에서 물건들을 빼돌렸다. 이렇게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여 재력을 쌓으면, 곧 막후에서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도 갖추어 나갔다. 또 한편으로는 비밀리에 모험적인 물자 교역에 손대기 시작했는데, 선박을 사들이고 대상을 매수하여 이국으로부터 진주, 보석 세공품, 상아 조각품, 장식용 목공예품, 향료, 최음제 같은 사치품과 귀중품을 들여왔다. 때때로 이들은 높은 관직에 등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관료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직업적 상인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관직과 관복을 보호막으로 삼아 경쟁자들의 상권을 침해했고, 공권력을 이용하여 일반 상인들을 수탈했다.

잔인한 군주와 교활한 관료들의 지배 아래에서 백성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다. 주 왕조 시절, 비록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살벌한 시대였으나 그때는 품속의 돈주머니만큼은 항상 안전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내 가족을 오락물로 취급하며 못살게 괴롭히지 않았고, 생존을 위해 뇌물과 상납금을 바쳤다는 이야기도 들어 보지 못했다. 이렇듯 백성들은 지나간 전제통치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 시절에 비하면 전국시대의 통치는 희망적인 요소라고는 전혀 없는, 온갖 종류의 타락과 부패로 가득 찬 폭정의 모습으로만 비쳤다. 주나라 시대의 상인들은 참기 힘들 정도로 억압적이고 엄격한 통치하에서 비교적 올바른 정신과 박한 이익으로 생활을 영위했었다. 그런데 군주들과 관료들이 사악해지고 재산에 눈이 어두워지면서, 뇌물이나 상납금을 바치지 않는 일반 상인은 고약한 놈이라는 사고방식이 팽배해졌고, 지배자와 상인 사이에는 한쪽이 월등히 우세한 일방적인 게임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상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권력을 추구했다. 상인과 관료의 투쟁에서는, 법을 만들고 집행하며 군대를 거느린 관료들이 일방적으로 상인을 지배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정책의 방향은 상인들을 멸시하고 최대한 수탈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이들을 속죄양으로 삼는 쪽으로 나아갔으며, 이것이 공식 노선이 되었다. 이에 따라 상인들의 사고방식도 변했고, 이런 변화된 사고방식은 사회 전체를 오염시켰다. “부패와 타락, 이것은 병이 아니다. 단지 수영장의 물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무릇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무리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상인들은 나름대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 이것은 상인들의 생각이었고 자기합리화였다. 이처럼 상인들은 과거의 황금시절은 빛을 잃었다고 말하면서 그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했고, 정신적ㆍ물질적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조정과 관료들은 상인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뇌물을 준 상인들, 그리고 뇌물 바치기를 거부했던 상인들 모두가 결국에는 조정과 관료들에게 배신을 당하여 가족과 함께 양자강 이남의 미개지로 유배당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양자강 이남의 월나라 땅에서는 또 다른 중국이 태동하게 된다. 그리고 슬기롭고 현명한 이들 추방자들은 유배지에서 출발하여 해외로 나아가는 모험을 시작했다.



실크로드 ; 돈의 길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 만리장성, 시황릉을 비롯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대규모 공사를 벌였다. 이러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당시 노예계층이던 장인을 비롯하여 가옥과 전답을 뺏기고 떠돌던 유랑농민, 파산한 상인, 복역 중인 포로병과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백성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시황제에 이어 제2대 황제 때까지 지속된 고역과 엄형가정(嚴刑苛政; 엄한 형벌에 가혹한 정치)은 결국 백성들의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왕실의 종묘를 돌보는 천직에 종사하던 꾀죄죄한 용모의 농사꾼 유방은 시정잡배들을 모아 조직적으로 반란을 주도했는데,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봉기이다.

군사적 전략이나 용병술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지만, 유방은 정치적 자질이 뛰어났다. 기원전 202년, 유방은 최대의 라이벌인 항우를 물리치고 새로운 왕조 한을 개국했다. 그는 정권을 장악한 후 신속히 봉건제도를 부활시키고 자신의 일가에게 봉토를 하사했다. 유방이 전국의 부와 주요 소득원을 일가에게 하사한 것은, 그 반대급부로 일가가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짧은 시간에 절대적 왕권을 구축한 유방은, 뒤이어 자신을 도와 농민봉기를 이끌었던 유능한 장군들을 처형하고 훌륭한 관료들을 유배시켰다.

유럽을 발견한 사람

유방이 황제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 지 7년 만에 죽고 이후 400년에 걸친 한 왕조 통치기간 동안 유가의 왕도사상이 통치이념에 도입됨으로써 백성들의 생활은 향상되었고, 나라 안에 풍요로움이 넘쳤다. 엄청난 활동력과 군사적 역량을 지녔던 문제와 무제는 눈부신 국가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무제는 영토 확장 정책을 활기차게 수행하여, 기원전 1세기에 이미 로마제국의 영토보다 더 넓은 땅을 중국의 통치 아래 묶어 두었다. 한 왕조가 번창하던 시기에는 거상들의 활동이 활발하여 대규모 물자 교역이 전국을 휩쓸었다. 원하는 물건은 무엇이든 구할 수 있었고, 세상의 온갖 물건 중에 유통되지 않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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