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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순교자

이종호 지음 | 사과나무
과학의 순교자

이종호 지음

사과나무 / 2014년 2월 / 432쪽 / 16,000원





지식은 힘이 세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고전 경험론의 창시자, 부패실험 도중 폐렴으로 사망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1561년 국왕의 옥새를 관리하는 옥새상서를 지낸 니콜라스 베이컨 경의 다섯째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12살이 되던 1573년부터 2년 동안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지만 중도에 그만두었다. 그곳에서도 대부분의 대학들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을 중심으로 스콜라적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베이컨은 인간의 행복을 찾아내고 증진시키는 데 그러한 교육방법이 부적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6살인 1576년에는 그레이즈 인 법학원에서 법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해 영국 대사의 수행원 자격으로 파리로 갔다.

1579년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영국으로 귀국하여 다시 공부한 뒤 21살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23세가 되던 1584년부터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다방면으로 저술 활동을 했는데, 그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현대 개념의 과학이다. 그 후 이런저런 사건으로 궁정에는 베이컨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엘리자베스 여왕 때는 중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1603년 제임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한 뒤 베이컨의 정치적 지위는 급속히 상승한다. 1606년 법무차관, 1613년에 검찰총장이 되었으며, 1617년 옥새상서가 되었고, 1618년부터는 대법관까지 겸직하였다.

베이컨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여준 야심만만하고 패기 넘치는 청년이었지만, 지나치게 씀씀이가 헤프고 양심의 가책이나 주저함을 모르는 다소 뻔뻔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그의 방만한 생활은 항상 돈을 필요로 해서 소송 당사자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다. 이는 법관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1621년 부패행위로 기소되어 4만 파운드의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런던탑에 투옥되어 있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을 받고 벌금도 경감되었지만, 그의 정치생명은 갑작스럽게 끝나버렸다.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베이컨은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베이컨의 말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아는 것이 힘이다”이다. 이 말은 근대 과학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의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이 지식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생각했는데, 학문의 목적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 증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독단적인 신념에 빠져 사변(思辨) 속을 헤매거나, 일정한 원칙 없이 임의의 경험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베이컨이 말하는 지식의 힘은 학자들이 자기만족이 아니라 ‘지식을 활용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의 시도는 과학의 기본 해법인 수학적 결합이 결여되어 있어 생각의 의도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연구 방법론은 이후에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발명과 발견을 통해, 인류를 보다 편하게 하는 과학기술의 세계로 인도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베이컨을 현대 문명의 기본인 현대 과학 시대를 열게 한 장본인 중 한 명으로 거론한다.

실험 도중 사망하다: 베이컨의 지식 체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과학은 반드시 사실을 제공해준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 로버트 보일(1627~1691)이다. 보일은 갈릴레오가 낙하하는 물체를 연구하면서 비록 무게는 달라도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발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보가 추론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과학자들은 경험을 따라야 한다.’ 참고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는 베이컨의 말은 극도로 열악했던 당시 사람들의 생활환경을 개선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는데, 그는 지식의 습득을 위한 도구가 사람들에게 이미 주어졌다고 믿었다. 바로 이성(理性)과 실험이다. 그는 이 두 가지 도구를 이용해 식료품을 더 오래 보관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자신이 직접 실험에 뛰어들었다.

그가 도전한 실험은 온도와 부패에 관한 것으로, 닭 속에 차가운 눈(snow)을 채워 넣고 부패의 진행을 관찰하는 것이다. 온도가 낮아지면 부패가 늦춰진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 수 있으므로 이런 실험은 추울수록 더 효과를 볼 수 있다. 당연히 그는 바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영국의 축축하고 차가운 날씨로 인해 폐렴에 걸렸다. 그런데 병세가 순식간에 악화되어 시골집에 도착하기도 전인 1626년 4월 9일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치명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라고 종이에 썼다. 그것이 베이컨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그의 실험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어이없는 일이지만, 실험의 부작용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만은 사실이다. 베이컨은 과학의 창시자도 아니고, 그 자신이 과학자도 아니다. 또 동시대의 진보 성향의 사람들을 적극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베이컨이 과학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처럼 광범위하고 열렬하게 과학의 중요성을 주장한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베이컨은 탁월한 저술가로 과학을 대중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있었다.



번개 실험에 ‘산 제물’이 되다



게오르크 빌헬름 리히만(Georg Wilhelm Richmann): 전기 연구의 개척자, 번개에 맞아 즉사죽음을 담보로 한 벼락 연구: 과학사를 보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한마디로 별다른 유명세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고전적인 과학 연구의 희생자로 게오르크 빌헬름 리히만도 그중 하나이다. 물론 명성이 높지는 않지만 과학사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현대 과학에서 매우 중요한 분야를 규명하다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리히만은 1711년 발트 해 리보니아 지역의 페르나우에서 태어났다. 리히만은 레발(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독일의 할레와 예나의 대학에서 수학과 자연과학 등을 공부했다. 그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오스터만 백작의 아이들 가정교사로 들어갔다가, 173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학술아카데미의 조교를 거쳐 6년 뒤 물리 교수가 되었다. 그는 전기와 대기전기(大氣電氣) 연구의 선구자이며 열량측정법에 관해서도 연구를 했다.

그의 경력만 보면 학술 분야에서 매우 탁월하다는 인정을 받은 정통학자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성실함과 비범함에 그치지 않고, 위험한 분야에까지 과감하게 손을 댔다는 점이다. 번개의 전기 현상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이 연구를 위해 그는 전기의 세기를 측정하는 장비를 만들었는데, 그 장비가 그의 생명을 빼앗아갔다. 『범독일인 전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753년 7월 26일 천둥번개가 치자 리히만은 전기 세기를 측정할 수 있는 측정계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는 전기를 유도하기 위해 걸어놓은 금속이 만나는 지점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때 하얀 빛을 띤 시퍼런 불덩이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그 금속선을 타고 리히만의 머리로 들어갔다. 리히만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의 이마에는 피가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고, 몸에도 여러 곳 불에 그슬린 흔적이 남았다.’

번개를 연구하다가 번개에 맞아 즉사한 리히만의 사건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가 과학 연구를 위해 스스로 자신의 실험에 ‘산 제물’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처럼 크게 다루어진 것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연구할 때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도 벼락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리히만이 조심성 없는 사람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당시 과학 수준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이 수행하는 실험의 위험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자연을 연구하면서 ‘위험성 없는’ 현상들로만 연구 대상을 한정할 수는 없다. 천둥번개, 폭풍, 화산폭발 그리고 지진과 전기와 방사능, 게다가 독성을 가진 동식물 등에 대해 후대 사람들이 파악하게 된 경위는 단순하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 정보가 계속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를 다룬 사람들을 현대에서는 과학자로 부른다. 이들은 남이 경험하지 않은 분야를 다루다 보니 자연히 위험에 노출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위험하고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많은 현상들이 밝혀지지 않은 채 존재한다. 즉, 아직도 많은 과학자들이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만약의 위험에 대비해 지나치게 예방조치에 집착한다면, 연구 자체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죽음을 각오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예방조치를 포기하는 사람이 오히려 좋은 성과를 내고 앞서간다.



과학에 살고 과학에 죽다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산소의 발견자, 일산화탄소 중독

화학을 연구하는 신학자: 프리스틀리는 1733년 영국 웨스트요크셔 주 리즈 근교의 필드헤드에서 직물을 짜는 양모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모업자라고 해도 매우 가난했는데, 그의 집안이 양모와 관련된 것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관련이 있다. 한편 그의 아버지 제임스 프리스틀리는 영국 국교와는 다소 뜻을 달리하는 청빈을 좌우명으로 삼는 캘빈교도였다.

프리스틀리는 6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좁은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살기 어려워 4살까지 외할아버지 집에서 살았고, 이후 자식이 없었던 숙모 집에서 살았다. 그는 자주 잔병치레를 했지만 4살 때 이미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107개 질문과 답을 모두 외울 정도로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 그는 신동답게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언어감각에 뛰어나 버틀리 학교에 입학하여 12살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배웠다. 프리스틀리를 목사로 키우려는 숙모의 뜻에 따라 목사직에 필수적인 언어를 배웠는데, 16살부터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까지 섭렵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허약해 목사 직업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사업에도 필요한 언어를 습득한 것이다.

다행히 건강이 좋아진 그는 상인이 될 생각을 버리고 목사가 되기로 했다. 공식적으로 그의 직업은 신학자이다. 그는 1752~1755년 동안 디벤트리에서 신학 외에 역사, 철학, 과학 등을 공부했고, 신학교를 마친 후 1755년부터 작은 장로교회에서 목사 생활을 하다가, 1758년 낸트위치에 있는 교회로 옮겨 갔다. 한편 그곳에는 두 개의 학교가 있었지만 비국교도에게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고 교육과정 역시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프리스틀리는 자신이 학교를 세워 그곳에서 1761년까지 3년 동안 학생을 가르쳤다. 이듬해인 1762년에는 워링턴의 비국교도파 목사가 되었고, 제철업자 아이작 월킨슨의 딸인 18살의 매리 월킨슨과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는 한 명의 딸과 세 명의 아들이 태어났고 1765년에는 에든버러 대학교로부터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많은 면에서 제약을 받는 목사직은 포기하고, 가정생활을 위해 틈틈이 도서관 사서, 가정교사 혹은 여행 안내자로 일했으며, 각 교단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협동조합형 교회제도의 목사로 목회활동을 하기도 했다.

세계 최초로 개발한 청량음료: 워링턴에 거주할 즈음부터 프리스틀리는 과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763~1765년 리버풀의 의사인 터너의 화학 강의를 들었고, 1765년부터 해마다 한 달씩 런던에 체류했으며, 적은 급료에도 공기펌프나 과학 기자재를 사들여 실험했다. 특히 런던에서 미국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벤저민 프랭클린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과학 연구는 화학 분야에 집중되었는데 우연히도 집 근처에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양조통에서 공기가 발생하는 것을 관찰하고 이산화탄소(당시는 ‘고정공기’라고 불렀다)에 눈을 돌렸다. 이때부터 기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발효된 맥아의 표면에 염산을 가하여 고정공기를 만들어낸 뒤 이를 물에 녹였더니 상큼한 맛을 내는 거품이 발생했다. 그는 거품이 생긴 물이 발포주를 만드는 데 유용할 뿐만 아니라, 공기로 선원들이 앓는 괴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틀렸다. 그렇지만 그의 이 실험은 청량음료 산업의 시초인 탄산수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영국왕립학술원은 그의 공적을 인정해 1773년 그에게 코플리 메달을 수여했다.

산소를 발견하다: 프리스틀리를 불후의 과학자로 만들어준 것은 1774년의 연구 때문이다. 그는 기체를 모을 때 사용되는 수은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다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수은을 공기 중에서 가열하여 산화수은을 얻은 후, 이 화합물을 시험관에 넣고 볼록렌즈로 모은 태양빛을 쪼이자 어떤 기체가 발생했는데, 이 기체 중에서 가연성 물질이 밝은 빛을 내면서 활활 탔다. 바로 ‘산소’의 발견이다! 사실 이보다 앞서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약사인 카를 빌헬름셸레가 2년 전에 이미 산소를 발견했지만 발표는 프리스틀리가 빨랐다. 프리스틀리는 ‘산소’를 발견했음에도 그것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나중에 라부아지에에 의해 산소로 밝혀진다. 즉, 프리스틀리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얼떨결에 산소를 발견한 것이다.

프리스틀리가 산소를 발견하기 전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기체는 공기, 탄산가스 그리고 수소, 이 세 가지뿐이었다. 그러나 산소의 발견은 “또 다른 기체는 없을까?” 하는 의문으로 발전되었고 그는 자신이 예상대로 암모니아, 염화수소, 일산화탄소(연탄가스) 등을 비롯해 10종류의 새로운 기체를 추가로 발견했다. 프리스틀리가 많은 기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작고 다루기 손쉬운 장치를 직접 제작하여 소량의 시료로도 정밀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식물이 숨 쉬기 좋은 공기, 광합성의 발견: 산소의 발견으로 프리스틀리는 과학사에 길이 남을 대박 중 대박을 터뜨렸다. 산소는 화학 혁명을 촉발시킨 원동력으로, 산소가 발견됨으로써 화학반응에서 원소, 화합물, 물질의 보존을 새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개념들을 통해 오늘날 염료, 플라스틱, 비료, 마약 등이 탄생했다. 프리스틀리 본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생전에 과학 혁명의 태동을 본 것이다. 프리스틀리의 공헌 중 산소 발견에 가려져 있지만 중요한 업적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광합성의 발견이다. 프리스틀리가 광합성을 발견한 것은 과학 입문 초기인 1771년경이다. 당시만 해도 인간이나 동물이 신선한 공기가 없는 공간에 오래 갇혀 있으면 살 수 없고, 식물도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리스틀리가 남달랐던 점은 그 이론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실험을 통해 검증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는 물 위에 매달아놓은 밀폐된 유리그릇 안에 박하 묘목을 키웠는데, 멀쩡히 잘 자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게다가 초와 쥐를 가지고 유리그릇 안의 공기를 시험해보았는데, 그릇 안의 촛불도 꺼지지 않고 쥐도 계속 살아 있었다. 점점 호기심이 생긴 프리스틀리는 타고 있는 초를 넣어 공기를 소위 ‘오염’시킨 뒤에, 박하 묘목이 공기를 다시 ‘신선하게’ 만드는지 두고 보았다. 그는 박하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식물들도 함께 실험하여 어떤 식물이 숨 쉬기 좋은 공기를 가장 빨리 만드는지 관찰했다. 첫 실험은 1771년 시작됐지만 본격적으로 매달린 것은 1777~1778년이다. 그는 이 실험으로 식물줄기와 녹조류 및 수초에서 공기방울, 즉 오늘날 산소로 알려진 ‘아주 순수한 공기’가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실험을 통해 녹색 식물이 대기에서 비활성 기체인 이산화탄소를 흡수해서 산소로 바꿔 내보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식물이나 녹조류가 산소를 뿜어내려면 햇빛이 필요하다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프리스틀리의 이 실험은 훗날 광합성의 결과로 산소가 생긴다는 것을 찾아내는 실마리가 된다. 녹색 식물이 산소를 생산하는 데 빛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네덜란드 의사이자 식물생리학자인 얀 잉엔하우스에 의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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