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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독인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독서독인

박홍규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4년 1월 / 348쪽 / 15,000원





제1부 독서, 권력을 훔치다



노예해방을 거부한 제국주의자 - 에이브러햄 링컨

링컨은 인권변호사인가: 2012년 대선 당시 야당 후보는 광고에서 자신의 서재 풍경을 내보였는데, 이는 그 후보와 가까웠던 전직 대통령의 서재와 관련된 책을 상기시켰다. 바로 이채윤 작가의 『노무현의 서재』이다. 사실 이 책을 열심히 읽어보아도 노무현의 독서 세계를 알기는 쉽지 않다. 『노무현의 서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노무현에게 특별한 책이 있었다. 링컨의 책이다. 그가 링컨을 좋아한 이유는 가난한 집안에서 고학으로 법률가가 되었고 대통령까지 된 삶이 자신과 같다고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켰다는 점이 자신의 진보성과 일치한다고 생각한 덕분인지도 모른다.

링컨을 좋아한 노무현은 역사적인 명화로 손꼽히는 〈젊은 링컨〉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1939년 미국의 존 포드 감독이 만든 그 고리타분한 법정 영화에서 링컨은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변론하는 영웅적인 인권변호사로 나오지만 그 내용은 모두 허구다. 그것은 1920년대의 진보 분위기가 사라지고 보수 일색으로 변한 미국에서 애국주의를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정책 영화였다.

링컨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보수의 깃발로 애용되어왔다. 1930년대에 나온 칼 샌드버그의 링컨 전기를 모방한 링컨 전기물이 성인용은 물론 아동용까지 우리 출판계를 휩쓸어왔다. 노무현도 그런 싸구려 할리우드 영화나 전기류에 감동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노예해방자로서 링컨도 실제와는 다르다는 견해가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노무현은 몰랐던 것 같다. 한국에서도 그런 견해는 이미 1986년에 번역된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저항사』를 통해 충분히 알려졌다.

물론 노무현이 그 책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진의 책이 나온 지 15년이 지난 뒤 나온 『노무현이 만난 링컨』을 읽고 정말 놀랐다. 하기야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서양이나 미국 것에 대한 숭배 등과 같은 가장 보수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을 보는 게 드문 일이 아니다. 반대로 터무니없이 서양 문화를 비판하고 중국이나 동양 문화를 숭상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 노무현은 링컨의 실상 자체에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2001년 전후로 대통령 후보로 회자된 노무현에게는 링컨이라는 이미지가 정치적으로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링컨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실상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관련 책이 이미 많이 나왔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이용 가치라는 것이 링컨의 노예해방과 관련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제국주의자 링컨: 노예해방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만으로도 링컨은 유명하지만, 지금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가의 필수 조건으로 회자되는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는 그런 정치가를 갖지 못해 링컨에 대한 책이 그렇게도 많이 나오는가? 우리나라에는 우리 정치가에 대한 연구와 저술이 정말 없다고 개탄하는 사람도 있지만, 논문이나 저서로도 연구할 만한 정치가가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런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서가 필요한데, 우리 정치가들은 독서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도 들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수많은 링컨 전기 가운데 임의로 하나를 선택해 보자. 가령 프레드 캐플린이 쓴 『링컨』을 보면 1장은 「손에 들어오는 책은 모두 다, 1809~1825」, 2장은 「셰익스피어 1825~1834」, 3장은 「번스, 바이런, 연애편지 1834~1837」로, 28세까지 링컨은 독서를 중심으로 살았다고 한다. 저자는 “링컨의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의 바탕에는 이렇듯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길러진 문학적 감성과 창의력이 있었고, 링컨의 삶은 아마도 문학과 언어가 리더십에 영향을 미친 가장 명료하면서도 극적인 실례일 것”이라고 하며 “링컨에게는 글이 무척 중요했다”고 강조한다.

어린 시절 링컨은 ‘손에 들어오는 책은 모두 다’ 외우다시피 했지만, 이는 10대까지 그가 본 책이 몇 권 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몇 권도 『성경』과 성경적인 책이었다. 그 밖에 당시 아이들이 즐겨 읽은 『로빈슨 크루소』, 『이솝우화』, 『천로역정』 등을 링컨이 읽은 것은 11세에 만난 새엄마의 서재에서였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천일야화』도 읽었으나 좋아한 것은 잠시뿐이었고, 그 후 평생 소설을 읽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전기와 역사와 시에 집중했다. 특히 10대 초에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과 조지 워싱턴의 전기를 처음 읽고 감동했다. 그가 변호사가 된 것도 두 사람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신분 상승을 꿈꾸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대 내내 셰익스피어에 심취했다.

여기서 링컨이 읽은 책들에 대해 캐플런이 말하는 바를 분석하고 비판할 여유는 없지만, 그의 찬양과는 달리 『로빈슨 크루소』가 제국주의 소설의 효시라는 점 등은 지적해야 할 것 같다. 하워드 진은 링컨이 제국주의자라는 것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지만, 링컨은 당대 미국인 엘리트처럼 평생 제국주의와 식민 정책을 지지하고 주장하며 실천했다. 특히 그는 흑인을 아프리카, 아이티, 중부 아메리카로 보내는 방안을 지지했다. 그가 처음 선택한 곳은 라이베리아였는데, 그곳은 미국식민협회가 흑인인 미국인들을 식민하고자 구입한 땅에 1861년 건국한 나라였다. 링컨은 그 협회의 설립자이자 회장인 자를 자신의 멘토로 삼았고 자신도 임원으로 취임했다(아마 노무현은 그런 사람을 멘토로 삼지는 않았으리라). 또 대통령이 된 뒤로는 그 계획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이 점도 노무현은 달랐다).

링컨은 흑인과 백인은 인종이 다르고, 그 차이는 어떤 다른 인종의 차이보다 크다고 항상 말했다. 그리고 그런 신체적 차이가 서로에게 크게 불편하니 서로 격리되어야 하며, 그 이상적인 격리 장소가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나 아이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곳에 간 사람들은 대부분 일찍 죽었고, 링컨은 그 사실을 잘 알았지만 계속 그런 주장을 했다. 참고로 1861년까지 약 1만 2,000명의 해방된 흑인이 뉴잉글랜드에서 라이베리아로 추방되었고 대부분은 그곳에서 죽었다.

읽는 자들에게 자유를: 어린 시절 링컨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회상은 모두 그의 독서에 관한 것이었을 정도로 그는 언제 어디서나 독서에 열중했다. 링컨은 22세 때 시골집을 떠나 처음에는 잡화점의 점원을 했으나, 몇 달 뒤 잡화점이 도산하자 일리노이 주의 하원의원 선거에 나섰다. 선거에서 떨어진 뒤에는 우체국장과 측량사로 일했으나 이듬해 다시 선거에 나가서 당선되었다. 25세에 하원의원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미국에서는 큰 출세가 아니었다. 특히 재정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서 우체국장과 측량사를 겸해야지 겨우 먹고살 정도였다.

하원의원으로 일하면서 링컨은 독학으로 법을 공부했다. 논리와 암기를 요구하는 법 공부는 힘들었다. 법학서는 그가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과 전혀 달랐다. 법학의 기초를 배우는 데 10년이 걸렸으나 변호사 자격은 1년 만에 아무 시험 없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법학 공부에만 빠져 있지 않았다. 문학, 특히 로버트 번스와 조지 바이런을 열심히 읽었다. 당시 그가 받은 변론 비용이 건당 10달러에서 15달러였으니 지금 한국의 변호사가 받는 비용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러다 1850년대에 그는 새로 만들어진 철도회사를 위해 변호 활동을 하면서 그 회사의 로비스트가 되었다. 당시 링컨이 변호한 철도회사들은 세계 최대의 기업이어서 그런 링컨을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좋아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게다가 링컨은 대통령이 될 때까지 그 기업들을 위해 일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된 뒤에도 깊이 관련이 되었다. 또한 그는 내부자의 지위를 이용해 돈이 되는 여러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었다.

같은 시기에 링컨은 과거의 휘그당에서 공화당으로 옮겨갔다. 이 점도 노무현이 링컨을 섬기는 이유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토목기업에 대한 대량 지원 등을 중요정책으로 삼는 공화당은 노무현의 정당과는 전혀 다른 이명박의 정당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화당은 1860년 정강에서 노예제를 옹호하고, 새롭게 취득한 서부는 백인만을 위한 곳이 되어야 하므로 노예제를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즉, 흑인의 이주를 금지하고 백인만의 땅으로 유지하기 위해 노예제 금지를 명시한 것이다.

노예해방을 거부한 노예 사냥꾼: 링컨은 철저히 중간계급적인 사고를 했다. 그는 노예제가 나쁘지만 폐지론은 노예제의 폐해를 증대시킨다고 지적했다. 또 연방 의회는 노예제를 금지할 수 없고 주에서 주민들이 반대한다면 노예제는 폐지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탈주노예의 체포와 송환을 요구했다. 그래서 노예 사냥꾼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는 노예제에 반대했지만 흑인을 백인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흑인을 해방시켜 아프리카로 돌려보내자고 주장했다.

1860년 가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남부가 연방에서 탈퇴한 이유는 노예제 때문이 아니었다. 북부나 남부의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약하고 경제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노예와 관련된 전쟁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따라서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남부를 공격했다는 것은 허구다. 문제는 엘리트 간의 이익 충돌이었다. 북부 엘리트는 자유 토지, 자유 노동, 자유 시장, 제조업을 위한 보호 관세, 연방 은행 등과 같은 경제적 팽창을 원했다. 요즘 말로 하면 신자유주의의 요구였다. 반면 남부 노예주 엘리트에게 그 모든 것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남부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했다.

전쟁이 터지자 링컨은 남부의 노예제에 대해 간섭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하며 회유하고, 북군이 점령한 남부의 노예해방도 거부했다. 링컨이 노예제에 반대한 것은 한참 뒤, 사상자가 급증하여 북부의 승리가 어려워지고 노예폐지론이 극단에 이르고 난 뒤였다. 이런 링컨의 노예해방이란 당시 언론의 지적대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정당하게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미연방에 충성하지 않으면 소유할 수 없다는 것에 불과했다. 남북전쟁은 당시까지는 가장 처참한 전쟁이었다. 남북 3,0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62만 명이 죽었는데, 인구 증가를 감안해 지금으로 치면 500만 명에 가깝다.

노무현과 링컨은 많이 달랐다. 그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링컨이 인종 간의 평등에 반대한 백인주의자인 반면, 노무현은 모든 사람의 평등을 믿었다는 점이다. 링컨은 단 한 번도 흑인 노예를 변호한 적이 없고, 노예해방 선언은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도구였으며, 구속적부심 제도를 정지시키고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정적 수만 명을 투옥했으며, 자신을 비판하는 수백 개의 신문을 폐간시키고 남부 도시에 대한 포격과 민간인 살상에 일일이 관여했다. 특히 링컨은 연방 정부가 남부의 노예제도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헌법을 수정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런 링컨을 ‘정략적 독재자’라고 비판하고, 미국 중앙정부의 비대화, 로비의 횡행, 정경유착형 엽관제를 불러왔다고도 비판하는 견해를 알았더라도 과연 노무현이 링컨을 자신의 멘토로 삼았을까?

궁극의 독재자 -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는 독서광이었다: 히틀러가 매일 밤 책 1권 이상을 읽은 독서광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고 회상했고, 청년 시절에도 책 상자를 가지고 다녔으며, 정치를 시작한 뒤에도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뮌헨과 베를린의 저택, 산장(山莊)에 각각의 서재를 두었는데 각 서재의 책들이 모두 2만 권 정도에 이른 방대한 양이었다. 그중 반 정도는 정치적인 책이 아니라 군사와 관계된 책이었다.

그중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나폴레옹이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기 정도다. 그 밖에 프로이센 국가주의 역사가인 레오폴트 폰 랑케, 독재적인 힘의 정치를 숭상한 반유대주의 역사가인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 기타 국가주의자들의 독일 역사책, 휴스턴 체임벌린 등의 반유대주의 책 등이 있었다.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책은 예술에 대한 책이었다. 히틀러는 군인이 되기 전 화가로 자처한 만큼 회화는 물론 조각, 건축, 연극, 영화, 음악, 사진 등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는 초현실주의나 다다(Dada) 같은 당대의 예술 사조를 혐오했고 예술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보았으나, 그런 분야에 대한 책은 읽었다. 특히 자신이 열광한 음악가인 바그너의 책과 전기를 즐겨 읽었다.

세 번째로 많은 책은 점성술이나 심령술에 대한 것이어서 놀랍다. 이와 유사한 분야인 영양이나 식이 요법이나 채식주의에 대한 책도 채식주의자인 히틀러는 즐겨 읽었다. 또 손(手)에 대한 책들도 읽었다. 이는 히틀러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손으로 삼았다는 것과 관련된다.

네 번째는 대중소설이었다. 대중 추리소설, 탐험기, 전쟁물, 연애소설, 그림 백과사전 등이었다. 그중에는 현대 한국의 텔레비전 막장 드라마처럼 부자와 빈민, 강자와 약자가 대조적으로 그려지면서 명예와 순결이 승리하고 미인 비서가 그 상사인 미남 억만장자와 결혼에 골인한다는 식의 당시 인기를 끈 대중 작가의 로맨스 소설도 다수 포함되었다. 그 밖에 당시 독일에서도 인기가 있던, 미국 인디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년 모험소설도 늙어서까지 즐겨 읽었다.

다섯 번째는 가톨릭에 대한 책이었다.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가톨릭 신자였으니 그런 책을 읽는 것은 당연하겠다. 그중에는 나치가 고발한 성직자의 난행(亂行)에 대한 책이 상당수 포함되었는데, 히틀러는 그런 책 속에 노골적인 비난을 담은 글을 남겼다. 또 로마 교황이나 추기경들이 열병(閱兵)을 하는 등의 교회 정치에 대한 기록물도 있었는데, 그런 책들에도 앞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썼다.

토머스 칼라일의 영웅주의에 매료된 히틀러: 히틀러는 1923년 쿠데타에 실패하고 투옥된 뒤 감옥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 그중에 주목되는 책은 당시 출간되었으며 로맹 롤랑이 쓴 『마하트마 간디』다. 누군가 그에게 그 책을 보내면서 책 앞에 “그 존재 자체가 국가인 인간은 행복하다. 그의 국가는 한 번 죽었지만 다시 일어나리라”라고 썼다고 한다. 그런데 히틀러는 자신이 간디와 비교된 점에 불쾌해하며, 간디를 숭배함은 민족적 도착 현상이고, 호전적인 독일인에게는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맞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두 사람은 달랐지만 독서와 관련해서 공통된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감옥에서 독서를 집중적으로 했고, 같은 책을 읽은 경우도 있었다. 바로 영웅주의자 토머스 칼라일의 책이다. 칼라일은 세계에서 인류가 달성한 역사는 영웅들이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고, 특히 전제적 지도자를 옹호하면서 민주주의를 철저히 경멸했다. 또한 아일랜드와 유대인을 증오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점에서 히틀러와 같았다. 그런 칼라일의 책이 영국과 미국에서 읽히는 것도 문제지만, 한국에서 대단한 고전으로 대접받는 것도 의문이다. 간디는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특히 무함마드에 대해 읽고 이슬람교를 긍정적으로 이해한 반면, 히틀러는 『영웅숭배론』을 읽고 그 영웅주의에 감동했다. 히틀러는 청년 시절부터 칼라일의 책을 대부분 읽었고, 이는 그의 나치 운동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근원이 되었다.

또 간디와 히틀러는 공통으로 종교 책을 읽었다. 간디는 힌두교를 믿었으나 모든 종교가 하나라고 하면서 여러 종교의 경전을 모두 존중해 함께 읽었고, 종교적 형식이나 도그마는 싫어했다. 반면 히틀러는 매우 적극적인 가톨릭 신자였다고 『나의 투쟁』에서 상세히 말했다. 수도원장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긴 어린 시절의 기억은 나치스의 깃발이나 그의 열광적인 연설 등에 상징으로 남았고, 그는 자주 『성경』이나 가톨릭 의례를 인용했으며 ‘아멘’이라는 말로 열광적인 연설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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