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이이 제국 일본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 펜타그램
가와이이 제국 일본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펜타그램 / 2013년 12월 / 232쪽 / 13,000원
‘가와이이’ 현상
이탈리아의 ‘세일러문’
1994년 이탈리아 볼로냐의 대학가에 체재하며 영화사를 공부하던 무렵의 일이다. 여름방학 직전에 기차역의 기둥이며 벽에 포스터가 일제히 새로 내걸렸다. 포스터 교체야 흔히 있는 일이겠지만, 내가 놀란 것은 포스터의 내용이었다. 거기에는 세일러복을 입은 금발의 여자아이가 이탈리어로 “여자애들아, 여름이야!”라고 외치는, 일본의 소녀만화가 그려져 있었다. 다케우치 나오코 원작의 애니메이션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이하 <세일러문>)이 얼마 전부터 이탈리아 전역에서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고, 이탈리아 국영철도가 그 폭발적인 인기에 편승해 여름철 여행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었다. 포스터는 역사 구석구석에 붙어 있었고, 나는 그 여름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세일러문>의 주인공 쓰키노 우사기의 웃는 얼굴과 함께하게 됐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역 구내매점에서는 <세일러문>의 만화 월간지를 눈에 잘 띄는 맨 앞자리에 깔아놓았다. 그것도 지난 호까지.
볼로냐는 웬만해선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지독히도 조용한 동네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기 때문인지 고서점이 많다. 호박색 주랑을 지나 산책을 하다 보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혼잡한 도쿄에서 정신없이 살아왔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런 볼로냐에서도 만화 전문점이 두 군데 있는데, 일본제 피규어를 신줏단지 모시듯 야단스럽게 장식해놓았다. 알고 지내던 학생들 중에는, 일본의 미소녀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나보다도 아는 게 훨씬 많은 젊은이도 있었다. 이듬해 나는 볼로냐를 떠나 도쿄로 돌아왔다. 들리는 소문에, 일본의 유명한 만화 고서점 ‘만다라케’의 유럽 1호점이 볼로냐에서 문을 열었다고 한다. 파리나 암스테르담이 아니고 볼로냐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만나는 일본
볼로냐에서 겪은 충격적인 만남 이래로, 나는 세계 곳곳에서 이 세일러복 차림의 5인조 소녀들을 맞닥뜨리곤 했다. 어느 해 연말에 찾은 중국 베이징의 거리에서는 그녀들이 보름달 아래서 졸고 있는 모습을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가 팔리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캠퍼스에서는 <세일러문>의 등장인물인 쓰키노 우사기며, 루나 네코며, 턱시도 가면 등이 그려진 동아리 모집 안내 입간판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2004년, 나는 코소보 난민캠프에 임시로 세워진 교사(校舍)의 대학에서 잠시 교편을 잡게 됐다.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이 거세게 반목하던 때였다. 초등학교 건물을 이용해 세워진 난민촌에 몇 번인가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서도 텔레비전 화면에서 <세일러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막이나 더빙에 쓸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원어 그대로 설명도 없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래도 난민촌 아이들은 화면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착 달라붙어서 보고 있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세일러문>으로 대표되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일본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들이 정말 그것을 일본이라고 인식하는지 아닌지는 별개의 문제다. 어딘지 무척 친밀하고, 귀엽고, 로맨틱하여 감정적인 일체감을 갖게 만드는 것. 소녀의 정열을 통째로 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미디어에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히도 일본 문화였다.
세계를 석권하는 ‘가와이이’
오늘날 ‘가와이이’는, 세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현상이다. 시부야든 하라주쿠든 좋으니, 도쿄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번화가를 한번 걸어보자. 디지털 디스플레이에서 가게 앞의 간판까지, 거리에 내걸린 영상과 기호의 상당수에는 ‘가와이이’라는 향신료가 뿌려져 있다. 본래는 엄숙한 공간이었을 은행에서조차 만화 캐릭터를 귀하게 모시고 있다. 행인들의 모습을 어떨까? 작달막한 스트랩으로 꾸민 휴대전화를 쉴 새 없이 사용하고, 친구에게 줄 자그마한 물건을 고르느라 바쁘다. 가방에는 작은 봉제인형이 매달려 있거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져 있기 마련이다. 도쿄 젊은이들의 거리 패션에서는 런던의 펑크룩이나 모즈룩과 달리, 대항문화가 깃들인 정치성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들은 그저 귀여우니까, 즉 ‘가와이이’를 이유로 그러한 복장을 선택한다. 1980년대의 ‘마루문자(丸文子)’와 ‘노리P어(のりP語)’, 90년대의 ‘오타쿠’, 2000년대의 ‘모에(萌え)’ 붐까지, 일본의 ‘가와이이’ 문화는 세계의 서브컬처 중에서도 철저하게 탈정치성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독자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을 떠난다고 ‘가와이이’ 문화에서 이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다.일본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는 곳, 거대한 두 눈 속에서 별이 반짝이는 소녀들의 만화가 읽히는 곳, 마음에 드는 스티커사진을 뽑으려고 소녀들이 길게 줄을 서는 곳, 미소녀를 빚은 피규어나 키티 캐릭터 상품이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곳, 거기에는 예외 없이 ‘가와이이’의 미학이 군림하는 공간이 있다. ‘가와이이’의 미학은 국경을 넘어, 민족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사람들의 수집 대상이 되고, 코스프레(costume play, 분장 놀이)의 변신 원리가 되며, 소비사회의 중요한 참조 항목이 된다.
21세기 일본의 미학
‘가와이이’ 현상은 비방과 상찬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만큼 현대 일본의 신화로서 갖는 의미가 지극히 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삿갓처럼 일본이라는 사회를 덮어씌우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문화본질론의 시각에서 그럴듯한 말을 할 생각은 없지만, 11세기에 쓰인 《마쿠라노소시(枕草子)》의 유명한 서술에서도 보이듯, 일본 문화 속에는 작은 것, 어린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이 확고하게 존속해왔다. 이 점만큼은 역시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있다. 이는 구미의 경우에서처럼 미성숙을 성숙으로 가는 발전 도상의 단계로 간주하여 폄하하고 재단하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가와이이’를 그저 21세기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세계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만다면, 그것이 하필 일본에서 발신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공시적인 인식과 통시적인 인식을 동시에 구사하지 않고서 ‘가와이이’의 미학, ‘가와이이’의 신화학에 접근하기란 불가능하다.
일본의 미학을 되돌아보자. 일찍이 11세기 일본의 귀족사회는 모든 사물이 변해가는 무상함 앞에서 어딘지 쓸쓸하고 가련하다는 의미로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의 미학을 설파했다. 13세기의 가인(歌人)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암시로 가득한 표현으로 일관하는 것을 깊고 오묘하다 하여 ‘유현(幽玄)’이라 일렀다. 16세기의 다인(茶人)은 색채를 극도로 억제하고 우연과 불규칙성을 즐겼다. 호사스러움이 빠진 자리를 상상력으로 메운 것이다. 소박하고 차분한 아취를 일컫는 ‘와비(わび)’가 거기에서 나왔다. 그리고 19세기의 유녀(遊女)는 기개와 교태와 체념에서 나오는 세련됨, 즉 ‘이키(いき)’를 행동의 원리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제 작은 것, 어딘지 그리움을 자아내는 것, 어린 것을 ‘가와이이’라고 부르고, 이를 21세기 일본의 미학으로 본다고 해서 안 될 것도 없겠다. 게다가 그 미학은, 미학의 틀을 훌쩍 뛰어넘어 전 세계를 가로지르는 이데올로기로 드넓게 퍼져 있다.
‘가와이이’의 내력
이미 《마쿠라노소시》에서부터
‘가와이이(がわいい)’라는 말은 어떠한 기원을 갖고 있을까? 이 단어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문어(文語)인 ‘가와유시(がわゆし)’와 마주친다. 거기서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가오하유시(がほはゆし)’라는 말에 이른다. ‘가오(얼굴)’와 ‘하유시(비추다)’가 결합된 단어다. ‘하유시(はゆし)’는 ‘오모하유시(おもはゆし, 쑥스럽다)’, ‘마바유시(目映し, 눈부시다)’ 등의 어미로도 쓰이는 단어로, 그 원형은 ‘하유(映ゆ)’다. ‘하유’는 지금의 ‘하에루(映える, 빛나다)’에 해당하는 말로, 사물이 한층 선명하게 보이거나 비추어진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 상태를 뜻한다. 활력이 충만하여 한층 왕성해진다라고 해석해도 좋다. 따라서 ‘가오하유시’의 의미를 풀면 얼굴이 전에 비해 훨씬 또렷하게 돋보이는 모습, 흥분한 나머지 발그레한 모습 등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현재 유행하는 ‘모에(萌え)’라는 단어에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단어의 뜻이 먼 옛날로 되돌아가기도 한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그렇다면 ‘가와유시’라는 단어가 없었던 시대에, 일본인은 귀여운 것을 어떻게 불렀을까? 아무리 먼 옛날이라 해도, 나라(奈良) 시대나 헤이안 시대에 귀여운 여자나 작은 동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 답은 ‘우쓰쿠시(うつくし)’다. 귀족 계급의 말인 ‘우쓰쿠시’의 지시 영역이 신흥 세력인 속어(俗語)에 떠밀려 소유권을 넘겨주는 과정은, 중세 언어학에서 일어난 투쟁이었다.
‘우쓰쿠시’는 한자로 ‘美し’ 또는 ‘愛し’라고 쓰는데, 헤이안 시대에는 오늘날의 ‘우쓰쿠시’, 즉 ‘아름답다(beautiful)’라는 의미보다 오히려 ‘가와이이’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대의 ‘우쓰쿠시’에 해당하는 단어는 ‘쿠타시(くたし)’였다. 11세기 초 세이쇼나곤(?少納言)이 지은 수필집 《마쿠라노소시》에서, 유명한 146단의 한 대목을 보자.
귀여운(うつくしき) 것
참외에 그린 아기 얼굴. 찍찍찍, 부르면 새끼 참새가 팔짝팔짝 뛰어 가까이 오는 것. 또 발을 끈으로 묶어두면 어미 참새가 벌레를 잡아와 먹이는 것도 참 귀엽다. 두 돌 지난 아기가 막 기어 오다가 작은 티끌 하나를 발견하고 그 조그만 손으로 집어서 어른한테 보여줄 때는 정말이지 귀엽다. 어깨까지 머리카락을 기른 계집아이가 눈을 덮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려 하지도 않고 고개를 기울여 뭔가를 골똘히 쳐다보는 것도 너무나 귀엽다.
참고로 《마쿠라노소시》를 영역한 20세기 초 런던의 일본 문학자 아서 웨일리는 ‘우쓰쿠시’의 번역어로 ‘pretty’를 선택했다. 여기저기 의문스런 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의 번역문을 다시 일본어로 고쳐봄으로써 세이쇼나곤이 ‘우쓰쿠시’라는 형용사에 어떤 이미지를 담았는지, 오늘의 관점에서 확인해보자.
귀여운(かわいい) 것
멜론을 한 입 베어 문 어린아이의 얼굴. 새끼 참새를 향해 ‘츗츗’ 하고 부르면 뿅뿅 이리로 다가올 때. 이 새끼 참새를 붙잡아 실로 발을 묶어두면, 어미 새가 벌레 따위를 주려고 올 때. 세 살쯤 된 아이가 땅바닥에 떨어진 작고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갑자기 달려가서는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집어 어른한테 들고 와 보여주는 모습. 수녀와 같은 단발머리에 옷차림이 단정한 소녀가 무언가를 바라보기 위해 눈가에 걸린 머리카락을 젖히느라 이마를 쳐드는 모습.
이러한 기술을 보고 있자면, 작은 것, 귀여운 것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친근한 눈길은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실로 조금도 변함이 없구나 싶어, 묘하게 관심이 기운다. 세이쇼나곤이 ‘가와이이’의 예로 든 것은 어린 존재로, 천진난만하고 순진하고 어른의 비호를 필요로 한다. 그들의 사소하고 유희적인 몸짓에 세이쇼나곤은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에서는 성숙한 자가 높은 곳에 서서 미성숙한 자를 지배하고 내려다보는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미성숙한 것을 아름다움으로 긍정하고자 하는 자세가 엿보인다.
작은 것, 어린 것
미니어처가 주는 즐거움
미국의 비교문화학자 수전 스튜어트(Susan Stewart)가 쓴 『동경론(On Longing)』은 노스탤지어, 기념품, 수집 행위 등 인간이 일관되게 영위해온 심상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지극히 흥미롭다. 스튜어트에 따르면, 우선 미니어처는 자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드러지게 인공적인 산물이고, 인간은 그것에서 종종 장인의 작업이 낳은 정교한 솜씨를 발견하고는 만족스러워한다. 과연 담뱃대 끈 장식에서 휴대전화 스트랩까지, 황금빛 부처의 누각을 꼭 닮은 가정용 불단에서 치밀하게 만들어진 철도 모형까지, 모든 축소 모형은 현실에 실재하는 거대한 물체에 환유(metonymy)의 조작을 가함으로써 제작된 영상(닮은꼴)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미니어처는 기원이 되는 물체를 모방한 것이면서도 그 본체가 속한 현실 세계로부터 차단되어,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엄밀히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격리가 전제되어야만 미니어처를 손에 넣은 이가 현실과는 별개의 질서를 가진 미니어처의 공간을 즐기며 자아를 잊을 수 있다. 미니어처는 기원이 되는 것과 비교하면 그 크기가 실로 현저히 작다. 그런데도 (혹은 그래서) 미니어처가 체현하는 전체성의 관념은, 많은 경우 기원이 되는 것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공고하다.
스튜어트의 논의는 미니어처를 개인이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크기의 물건으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독자적이다. 동물원도, 수족관도, 또 요즘 유행하는 테마파크도 보기에 따라서는 미니어처다. 말할 필요도 없겠으나, 현실의 코끼리나 호랑이를 축소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현실의 사바나 초원이나 바다로부터 격리된 폐쇄 공간 안에 동물들을 옮겨놓으면, 그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미니어처 앞에 선 것과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동물원을 방문하는 이는 이미 공상의 세계에 한쪽 발을 들여놓는 셈이다. 관람을 마친 그(그녀)들이 들르는 기념품점에는 실재하는 동물인 코끼리나 호랑이의 미니어처 키홀더, 이티나 유니콘 같은 공상의 생물을 이용한 기념품이 뒤섞여 진열되곤 한다. 동물원이란 곳은 격절한 질서가 지배하는 극소의 공간이고, 그곳의 주인공인 동물들이 귀여운(가와이이) 존재가 되는 것은 미니어처 일반이 ‘가와이이’ 오브제이기 때문이다.
미니어처를 논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현실에서 격리된 친밀감 넘치는 공간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동시에 시간을 동결시켜버린다. 지금 나의 책상 위에는 아키하바라의 캡슐완구회관에서 입수해 막 조립한 미소녀 피규어가 두 개 있다. 그중 하나는 비키니 차림으로 두 발을 물에 담근 채 오른손에 쥔 녹색 망치를 치켜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막 잠에서 깬 소녀가 파자마 차림으로 졸린 듯 눈을 비비고 있는 모습이다. 둘 다 일상에서 단락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어느 특정 순간을 포착하여 고정시킨 것으로, 거기에는 특권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나섰을 때 대평원에서 쿠투조프 장군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는 광경을 수백 개의 병사 인형으로 재현한 거대한 파노라마식 미니어처도 있다. 전에 모로코의 탕제(Tanger)에서 본 적이 있다.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순간이 뚝 떨어져 나와 타블로(tableau, 정지화면)로서 눈앞에 펼쳐진 셈이다. 이렇게 미니어처는 본질적으로 무시간적 오브제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좁고 작게 한정된 오브제임과 동시에 시간적으로도 딱 멎어 있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모든 미니어처는 역사를 기피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바꾸어 말하면, 미니어처는 유토피아라고 가정된 무시간성을 향해 사물이 빠져들면서 보여주는 상태라고 할 수도 있겠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이나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 <라이프 이즈 파라다이스>(2004)를 보면, 시시각각 급변하는 위기 상황에 둘러싸여서도 오로지 철도 모형을 완성하는 데에만 정열을 불태우는 역장이 등장한다. 그들은 현실 세계의 시간 질서를 거부하고 미니어처가 펼쳐 보이는 동결된 시간에 매혹된다. 그는 미니어처를 통해 잃어버린 세계의 전체성을 향해 다시 한 번 손을 뻗고자 한 것이다.
그리움, 아이스러움
노스탤지어와 ‘가와이이’
노스탤지어(nostalgia)란 그리스어 ‘노스토스(nostos, 귀향)’와 ‘알고스(algos, 고통)’를 조합한 말로, 17세기 스위스에서 병리학 용어로 고안된 것이었다. 처음엔 고향을 떠나 용병이 된 스위스 청년들이 걸린 정체불명의 질환을 가리키는 데 쓰였다. 노스탤지어는 공간적으로 격리된 데에서 비롯한다고 여겨진 것이다. 이 노스탤지어가 실은 내면적 상실감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18세기 철학자 칸트다. 그 뒤 이 개념은 임상의학의 현장에서 멀어져, 오로지 시간적 상실감과 관련된 인간 심리의 문제로서만 연구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