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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대통령 박정희

정만섭 지음 | 행복에너지
위대한 대통령 박정희

정만섭 지음

행복에너지 / 2012년 11월 / 312쪽 / 15,000원





제1장 사명감을 지닌 소년 / 제2장 가슴에 뜻을 품은 청년



박정희는 1917년 음력 9월 30일(양력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9세가 되던 해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소년 시절 그는 병정놀이를 즐겼고, 어린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이순신과 나폴레옹이었다. 그 후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대구사범학교에 합격했으며,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본래 운동을 좋아하던 박정희는 아이들과 체육훈련을 함께하는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또 그는 사범학교에서 배운 민족혼을 학생들에게 일깨워주며,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여러 번 강조했다. 한편 당시 교사들은 군대식으로 머리를 빡빡 깎게 되어 있었는데, 그는 일부러 머리카락을 길렀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도전이요, 반발이었다.

박정희가 교사로 있던 어느 날, 문경보통학교에서 연구수업에 대한 발표가 있었는데 시찰 나온 데라도 시학(장학사)이 강평하는 자리에서 “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 이것은 황민화 정책에 순응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라며 박정희를 겨냥하여 비판했다. 그리고 그날 밤 아리마 교장의 사택에서 열린 시학을 위한 술자리에서 또 데라도 시학이 박정희의 두발문제를 거론해, 박정희는 시학과 교장을 상대로 언쟁을 벌이다가 술잔을 던지는 등 소란을 벌이게 되었다.

다음 날 아리마 교장은 박정희를 교장실로 불러 질책을 한 다음, 데라도 시학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박정희는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 울컥하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아리마 교장이 조선인 주제에 너무 건방지다는 말을 하자, 박정희는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평소 쌓이고 쌓인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만 것이다. 그리곤 사표를 쓰고 곧장 학교를 뛰쳐나왔다.



제3장 뜻을 품은 군인의 삶



박정희는 1940년 봄, 만주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다. 당시 2기생으로 입교한 인원은 470명인데, 일본인 230명, 만주(한족, 몽고)인 228명, 조선인 12명이었다. 1942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특전을 갖게 된다. 그 후 박정희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3등으로 졸업한다. 졸업 후에는 만주군 소위로 만주군 보병 제8단에서 근무했다.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지 1년 남짓 된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박정희는 1946년 5월 6일 우여곡절 끝에 미 해군 수송함을 타고 천진을 떠나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귀국한 박정희는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다. 그런데 당시 군에서는 질서를 잡아줄 만한 지휘관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은 박정희와 몇몇 만주군 장교 출신자들이 곧바로 대위로 승진하였고, 박정희는 1947년 9월 27일부로 제8연대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보임 받는다. 그리고 곧 1948년 8월 1일자로 소령으로 진급한다. 마침 그때 군대 내의 좌익분자들이 박정희에게 접근해 왔다. 그들은 박정희가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를 포섭하기 위해 매일같이 술자리를 벌였다. 상황을 잘 모르던 박정희는 단지 그들과 술을 마시는 게 전우로서 고달픔을 나누는 일인 줄로 알았다. 하지만 함께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박정희도 그들에게 합류된 듯 보였다. 남로당원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버린 것이다.

그 뒤 군대 내 남로당원들이 기소되었을 때 박정희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사형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박정희 역시 살아남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평소 군내부에서 청렴 강직한 군인으로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에 백선엽 장군이 그를 구제해주었다. 박정희는 한 달 남짓 옥고를 치르고 1949년 초에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으로 부임한다. 현역군인 신분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그는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6ㆍ25전쟁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민간인 신분을 면하기 위하여 복직원을 냈고, 마침내 복직되어 1950년 7월,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으로 임명된다. 1950년 9월에는 중령으로 진급하며 육군본부의 수송지휘를 맡는다. 한편 그는 1950년 12월 12일 육영수와 결혼했다.



제4장 혁명의 길로 접어들다



부정선거를 목격하다

3ㆍ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사령관에 송요찬 육군참모총장, 부산지구 계엄사무소장에 박정희가 임명되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학생과 시민에게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박정희는 부정선거에 반대한다는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했고, 그로 인해서 무사할 수 없었다. 결국 5사단장에서 해임되고 육군대학 입교를 명령받았다. 하지만 그는 장군으로서의 첫발을 육군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며 임무를 다했다.

박정희의 결단 / 5ㆍ16혁명의 정당성

1960년 가을 김종필 중령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 장교들과 박정희의 마음속에는 혁명의 꿈이 태동하고 있었다. 양쪽은 곧 김종필을 매개로 연결된다. 더구나 시국은 이들의 그러한 생각을 충동질할 만한 상황을 보이고 있었다. 마침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장도영 총장의 배신으로 교전이 발생하고 약간의 피해도 입었지만 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5ㆍ16군사혁명에 대한 의견은 지금도 분분하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 인기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결과를 보더라도, 박정희의 군사 독재 자체는 비난받을지언정, 그가 펼친 정책들이 나라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제5장 근대화의 별이 되다



울산공업단지의 기적

박 대통령은 경제인들의 건의에 따라 전문가와 민간인 24명으로 구성된 ‘울산공업도시 신설안 연구단’을 조직하고 즉시 현장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후 입지 조건이 충분하다는 판단이 서자 곧바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거행했다. 1962년 5월 10일 미국의 투자단 28명이 울산을 방문했다. 그중 밴 프리트 장군은 6ㆍ25전쟁에 참전했고, 전란 중 자신의 아들을 잃는 등 한국과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그는 미국 유수의 대기업 회장들과 함께 울산으로 내려왔다.

“이곳이 울산공업단지가 들어설 자리입니까?” 미국 대표기업인들은 보리밭이 넘실대고 백사장과 푸른 하늘만이 걸려 있는 모습에 실망한 눈치였다. 하지만 밴 프리트 장군은 이내 한국의 경제 사정에 관해 제스처를 취해가며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국 측 담당자도 그들 앞에 서서 적극적인 투자 유치를 호소했다. 눈썰미 좋은 미국 기업 대표들은 허허벌판이지만 입지 조건이 매우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서울로 상경한 미국 기업인들은 우리나라 기업들과 투자 협상을 진행했고, 한국을 떠나기 직전인 5월 25일 투자 유치를 약속했다. 투자 약속을 받은 울산공업단지에는 정유 산업을 비롯하여 화학, 전력 등의 기간산업들이 차례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훗날 석유화학공업단지에서 자동차, 조선공업의 세계적인 중심지로의 변화를 이끌게 된다. 오늘날 한국은 울산공업단지의 발전에 힘입어 세계 제1의 조선국가가 되었으며, 세계 6위의 자동차 수출국이 되었다. 또한 석유화학분야에서 세계 일류 기업과 겨루어도 손색없을 만큼 특화된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독일에 간 광부와 간호사들

당시 한국은 외화 잔고가 거의 없었다. 한국은행의 외화잔고는 2,000달러 정도였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한-서독 경제협력단이 구성되었고, 협력단의 각고의 노력 끝에 서독 측은 한국에 3,000만 달러를 빌려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한 담보는 한국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의 3년간 고용 계약서였다. 결국 외국에서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전단과 함께 광부와 간호사들을 모집했다. 당시 실업자가 많던 탓에 다양한 사람들이 나섰고 그들은 약 160여 달러를 받으며 독일로 향했다. 그 후 그들의 헌신은 서독사회에 화제가 됐고,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1964년 12월 10일 박 대통령 내외는 독일로 향했다.

그때 박 대통령 내외는 본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함보른 광산을 방문했는데,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동행했다. “근무 중 이상 무! 각하 안녕하십니까.” 공회당 안으로 들어선 박 대통령 내외를 파견된 광부들은 큰 목소리로 인사하며 반가움을 나타냈다. 박 대통령은 그들의 손을 일일이 어루만져 주었다. 육영수 여사 또한 뒤를 따라가며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무리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어머니, 어머니……. 고향 가고 싶어 죽겠습니다.” 그동안 쌓인 설움이 한순간에 폭발하자 너 나 할 것 없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육영수 여사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실내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감정은 절정에 이르렀다.

뤼브케 대통령이 지나가자 모두 큰절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가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뤼브케 대통령도 큰 감동을 받아 함께 눈물을 흘렸고, 주위에 있던 한국의 기자들은 물론 독일의 기자들까지 카메라를 내려놓고 울기 시작했다. 광산회사 사장도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의 눈에 그들은 직원이 아니라 애국자로 보인 것이다.

애국가 연주가 끝나고 박 대통령이 연단으로 올라갔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광부, 간호사뿐 아니라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 뤼브케 서독 대통령까지 손수건을 꺼내 들자 공회당 안은 또다시 눈물바다로 변했다.

다음 날 박 대통령은 에드하르트 총리를 만났고, 2시간의 회담 동안 돈 꿔 달라는 이야기만 했다. 결국 박 대통령의 진심을 안 에르하르트 총리가 박 대통령의 손을 잡고 “도와 드리겠습니다.” 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면서 한국경제의 기틀을 위한 충고를 했다. “고속도로를 닦으십시오. 각하가 내일 본에서 쾰른으로 가는 길이 히틀러가 만든 아우토반입니다. 독일경제를 키운 역사적인 길입니다. 그리고 그 동맥을 질주할 자동차를 만들 산업도 필요합니다. 자동차 산업은 고용창출을 일구고, 부품공장을 세우게 하고, 세금이 들어오게 합니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합니다. 제철 산업도 하십시오. 휘발유를 위한 석유화학도 필요합니다. 수출 한국을 위해서는 선박회사도 만들어야 합니다.” 에드하르트 총리가 조언한 산업 분야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견인차가 되었다.

피의 대가

베트남 파병: 1965년 여름 박정희 대통령은 경남 진해에서 군 수뇌부와 모임을 가졌다. 당시 군 수뇌부는 무조건 파병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박 대통령을 압박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3만 6,000명의 전사자와 10만 명의 부상자를 냈고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원조를 해 주고 있는데,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지 이제 겨우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젊은이들을 베트남에 보낸다는 것은 손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약소국에게 현실은 냉정했다. 이에 대통령은 기왕 한국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이상 좋은 조건하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우리 측에서는 세계은행에 요청하여 차관을 들여오고 한국의 경제 발전에 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목숨과 돈을 맞바꾼 항목이었다. 그 후 1964년 7월 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8년 8개월간 한국군은 베트남에 파병되어 공산군과 맞서 싸웠다. 총 31만 3천 명이 참전해 4,96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부상자도 1만 5,922명에 달했다.

베트남에 파병된 젊은이들은 미국으로부터 월급을 받았다. 이 중 80%는 본인의 동의를 받아 강제로 한국에 송금되었다. 그렇게 파병한 용사들이 본국에 송금한 월급만 3억 달러였고, PX 등으로 벌어들인 돈은 무려 10억 달러나 되었다. 베트남전쟁은 젊은이들의 피를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외화벌이 수단이었지만, 그 피의 대가로 한국의 국가 이미지가 높아졌고 국가 신임도도 상승되었다. 이는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일으킬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반도의 맥을 잇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새벽 3시, 박 대통령은 독일을 다녀온 후 부쩍 자다 깨는 일이 잦아졌다. “거기 누구 있냐.” 박 대통령은 전속부관을 불렀다. 종이와 연필을 가져오라고 지시하고는 외투 하나만 걸치고 집무실로 향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오로지 고속도로건설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서독 방문 기간, 그 유명한 아우토반을 달린 기억이 생생했다. 당시를 기억한 박 대통령은 입에 담배를 물고 무엇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각 도시를 원으로 표시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어떻게 도로망을 구축할지 이것저것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에 투입할 예산을 놓고 고심했다. “먹고살 것도 없는 마당에 고속도로가 웬 말이냐”며 여야 정치인은 물론 언론의 반대가 극심한 가운데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예산을 줄일 목적으로 5개 유관 기관에 고속도로 건설 추정 예산을 산출하도록 했더니, 건설부 650억, 서울시 180억, 재무부 280억, 육본 공병감실 490억, 현대건설 380억 등 제각각의 결과가 나왔다. 결국 박 대통령은 금액의 중간 지점인 330억 원 선에서 예산 집행을 했고, 태국에서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는 정주영 사장을 불러들여 말했다.

“부족하지만 내가 공부한 서적들과 직접 그려본 것이오. 정 사장이 잘 알아서 하겠지만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내 진심을 담아 기록한 것들이니 참고하시오.” 정주영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문제는 적은 비용으로 짧은 시간 안에 도로를 완공하는 것이었다. “각하,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저는 태국에서 더한 조건으로도 고속도로를 건설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각하가 이렇게 원하시는데 예산이 적다고 안 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 예산에 맞춰 잘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렸다. 당시 공사에 참여한 기업들은 현대건설, 삼환기업, 대림토건, 삼부토건, 극동건설 등이었다. 그중 가장 긴 구간은 현대건설에 맡겨 총체적인 사업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마침내 1970년 7월 7일 공사 시작 2년 5개월 만에 서울-부산 간 428㎞의 전 노선이 개통되었다. 2년 5개월간 429억 원이 들어간 428㎞ 경부고속도로는, 동경에서 나고야를 잇는 총연장 340㎞, 공사기간 7년의 일명 ‘도메이 고속도로’보다 88㎞나 더 길다. 하지만 공사시간은 불과 2년 5개월밖에 되지 않고, 공사비용은 도메이 고속도로의 1/7 수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건설회사의 애국심이 만들어 낸 헌신의 결과인 것이다.

포항제철소 건립

박 대통령은 제철 산업의 적임자를 찾던 중 박태준을 떠올렸고 즉시 그를 청와대로 불렀다. “임자, 철은 산업의 쌀이야. 쌀이 있어야 밥을 해 먹지 않겠나? 그러니 자네가 제철소를 하나 지어 줘야겠어.” 사실 포항제철소 건설은 너무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박태준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제철소를 만들 수 있을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몇 차례에 걸쳐 박 대통령의 제의를 고사했지만, 박 대통령은 단호했다. “임자 아니면 안 돼! 아무 소리 말고 맡아.” 박태준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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