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어질 때
김진황 지음 | 행복에너지
죽고 싶어질 때
김진황 지음
행복에너지 / 2012년 12월 / 280쪽 / 15,000원
제1부 다시 인생강의를 시작하며
나의 스승, 영원한 나의 벗 최윤희 선생님의 죽음
2010년 10월 8일 아침, 스승 최윤희 선생님의 부부 동반자살 소식을 듣고 저는 모든 일을 놓아야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부부를 무척 아끼셨습니다. 입에 담기 조심스럽지만 선생님과 남편 사이만큼 우리 부부와 깊은 인연을 주고받았으며, 강의가 없는 날에는 거의 붙어있다시피 하며 삶의 소소한 행복을 나누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부부 또한 사이가 좋아지고 행복의 의미를 새기며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선생님 옆에서 많은 것을 함께한 렌터카 대표이사이자, 최윤희 선생님의 행복강의를 위해 선생님을 전국으로 모셔다 드리는 ‘행복전도사의 운전수’로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분의 모습 하나하나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낮에는 강의를 했고 밤에는 책을 썼습니다. 그런 몸으로 너무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시니 저는 감히 혼도 내보고 타일러도 보았지만, 강단에 서서 인생의 행복을 전하는 일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병명은 ‘홍반성 루푸스’입니다. 항체가 자기 몸을 항원으로 오인해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자가면역질환입니다.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를 세상에 내보이면서 정작 자신은 그 소모한 에너지를 채우지 못해 병마와 싸우신 스승님. 마지막 죽음의 선택마저도 세상의 허락을 구하고 미안함을 전하는 그분의 죽음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장 가까이서 그분의 모습을 보았던 저로서는 세상에 그분의 죽음을 해명할 필요가 있기에 서두에 이렇게 그분과의 추억을 새깁니다.
내가 다시 인생강의를 시작하는 이유
최윤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저는 인생강의를 멈추었습니다. 여기저기 섭외 연락이 왔지만 더는 강의를 하는 일에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고,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준 분이 돌아가시자 의욕도 떨어졌습니다. 이제 2년의 세월이 흘러 지나간 추억이 무뎌짐을 느낍니다. 인생을 곱씹어 보면 스승님과 함께한 희로애락은 제 인생의 전성기와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약 10년 전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차를 타고 서울로 오는 도중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선생님 좀 쉬었다 갈까요?” 선생님은 잠시 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노을이 참 예쁘네요. 앞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또 볼 수 있을까요? 내가 죽더라도 김 선생님은 인생강의를 멈추지 마세요. 선생님같이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신 분이 또 어디 있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전 선생님에 비하면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선생님과 이렇게 운전을 하며 대화하는 게 제 인생의 낙입니다.” 선생님은 어쩌면 스스로의 죽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릅니다. 거대한 고통과 싸우고 있는 자신의 나약함을, 자연 앞에 인간은 하찮은 존재이며 병마 앞에 자유로울 인간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계속된 강의 요청에 저는 다시 강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히 제게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 사회가 힘들어하는 청년들을 잘 보듬고 있는지 의구심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꿈에 선생님이 나와 크게 호통을 쳤습니다. “김진황 씨, 나하고 다짐했던 거 잊었어요? 인생강의 멈추지 말랬잖아요!” 그래서 2012년 저는 강의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다니며 다시금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인생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촉매제가 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제2부 내 인생의 최고 수난기
베트남전 참전
서울에 올라와서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다. 카센터에서 일하며 겨우 자리를 잡을 무렵 카센터 사장은 회사를 정리한다고 했고, 졸지에 저는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단 한 순간도 등 따숩고 배부른 기억이 없기에, 군대에 가면 배는 곯지 않겠지, 잠자리는 걱정 없겠지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군대에 갔고, 열여덟 나이에 베트남행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베트남에 도착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덜덜덜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꽝!” 번쩍하는 빛과 함께 차가 붕 떴습니다. 그리고 몸이 어딘가에 처박혔습니다.
흙바닥에 처박힌 고개를 들려고 애를 썼지만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차가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두 다리를 질질 끌며 기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군의관이 다리를 잘랐습니다. 너덜너덜해진 다리를 다시 붙일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전에서 잃은 것은 다리가 아니라 생의 의지와 희망이었습니다. 다시금 살아야 할 이유도 목적도 용기도 희망도 송두리째 날아갔습니다. 베트남전쟁에서 다리를 잃은 것은 단순히 돈을 벌겠다는 인생의 좇음이 낳은 비극입니다. 젊은 시절 돈보다 중요한 것은 많습니다.
돈 vs 명예
제가 돈을 벌겠다고 베트남전에 참여한 것처럼, 여러분도 청년 시기에 돈을 좇다가는 인생의 큰 낭패를 볼지도 모릅니다.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곧 죽게 된다는 생각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큰 도움이 된다. 사람들의 기대, 자존심,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거의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이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무언가 잃을 게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 당신은 잃을 게 없으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다.” 문제는 가슴이 시키는 의미를 ‘돈을 많이 벌자’로 정당화하고 해석하는 젊은이들입니다. 여러분은 돈보다 명예를 좇기 바랍니다. 명예를 좇는다는 것은 자신의 길을 꾸준히 간다는 의미로, 언젠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돈은 많이 벌게 될 것입니다.
자살시도
병원에서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날마다 짜인 프로그램대로 의족을 끼고 걷기를 반복하는 사이 계절은 계속 변해갔고, 만물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병원에서만 봐야 했기에 첫 휴가는 달콤한 듯 설레었습니다. 저처럼 베트남에서 사고로 불구가 된 친구와 동행했습니다. 막상 병원 밖을 나오니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습니다. 더군다나 두 명의 다리병신이 걷고 있으니 길을 떡 하니 막고 서 있는 기분이 들었고, 내 뒤에 몇몇 사람들이 짜증을 내는 듯했습니다.
저는 수치심이 몰려왔습니다. 낯이 뜨거워지고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려고 할수록 다리가 헛돌았습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다 의족과 맞닿는 면이 엇갈리더니 쿵 길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좀 도와드릴까요?” 보기 안쓰러웠는지 한 남학생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됐네. 가던 길이나 가게나.”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학생은 도와주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제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습니다. 일어서야 한다.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몸보다 힘든 게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친구야 그냥 우리 죽자.” “그래 이대로 살 바엔….” 근처에서 소주 한 병을 사 벤치에 앉아 친구와 나눠 마셨습니다. “영도다리로 가자.”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침내 영도다리에 도착해 등 뒤로 난간을 쥐고 바다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아득히 멀어 보이는 물이 아니라 절벽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같이 죽기로 한 친구 놈은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풀썩 몸을 날렸습니다.
허공에 잠시 뜨는 듯하더니 그대로 물속에 처박혔습니다. 코로 물이 들어와 미칠 지경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어둠의 공포가 엄습해오자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솟았는지 격렬한 몸부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근처에 의족이 떠 있었습니다. 저는 의족을 붙잡았습니다. ‘죽겠다고 뛰어내릴 때는 언제고, 이게 무슨 꼴이냐?’ 헤엄쳐 나올 때 정신을 생각하니 웃음만 나옵니다. 한편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그 정신만 있으면 입에 풀칠은 하고 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제3부 지지리도 배고프던 시절
자살의 결심?: 먼저 어머니께 허락받으세요!
최근 인터넷 자살카페에서 만난 회원들이 단체로 모여 자살을 시도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같은 부모로서 무척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경쟁시대로 넘어오면서 진짜 중요한 인성은 나 몰라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절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입니다. 특히 자식이 죽은 후 살아갈 어미의 가슴에는 평생 한으로 남을 겁니다. 여러분은 삶을 시작하는 순간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으므로, 삶을 마치는 순간도 어머니께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쉽게 태어난 존재들이 아닙니다. 작은 숨 하나를 위해 어머니는 수많은 인내와 고통을 참아내며 생명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당신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고마운 분입니다. 그런 어머니께 장례식을 안겨드릴 것입니까?
제4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평생의 내 짝을 만나다
그 후에도 저는 다리를 잃은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3~4년을 뿔난 당나귀마냥 세상을 원망하고, 내가 이러고 왜 사냐며 자책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돌아오는 말은 “NO.”였습니다. 매달 나오는 얼마 되지 않는 보훈연금은 모조리 술값으로 들어갔습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닥치는 대로 차 백미러를 부수며, 또 걸리는 사람마다 시비를 걸고 건들면 폭발하는 시한폭탄으로 살았습니다. 자기 학대에 빠져 하루도 맨 정신이 아니던 그때, 사람들의 시선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고독감이었습니다. 이런 저를 잡아준 여인이 있습니다.
부산 3육군병원에서 전역한 지 3년 뒤, 망나니 같은 삶을 이어가던 중 보훈청에서 저 같은 참전용사를 대상으로 취직을 시켜준다고 하였고, 보훈청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어머니는 결혼하라고 매일 성화셨고, 어머니의 거듭된 설득에 못 이겨 어느 날 선 자리에 나갔습니다. 평택의 약속장소에 앉아 차를 들이켰습니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지나도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6시간이 지났습니다. ‘배운 것도 없는 다리병신한테 누가 시집오려 하겠어. 내 욕심이 과했어. 그 사람은 오지 않을 거야.’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확답을 내리려는 순간, 주선자 아주머니와 한 처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 여자인가 보네, 내가 혼내줘야지.’라고 마음먹었지만 그녀는 너무나 고왔습니다. 그녀는 후리지아 향기를 내뿜는 봄의 여인처럼 나풀거리며 제 자리로 다가왔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그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들지 못했고, 저 또한 머쓱해서인지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렸습니다. 훗날 아내에게 들은 저의 첫인상은 이랬답니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라고 하기에 자기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일부러 늦게 가면 자리를 뜨겠지’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7시간이나 지나 나오니 남진과 비슷한 뽀얀 얼굴에 귀공자 같은 인상이 눈에 들어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7시간의 기다림 끝에 그 여자를 제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젊은이들의 결혼관에 대해
최근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은 서울 여성의 평균 초혼 연령이 2000년 27.25세에서 2010년 29.82세로 2.57세, 남성은 29.65세에서 32.16세로 2.51세 많아졌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늦게 하는 것은 국가로서도 손해입니다. 국방력, GDP, GNP는 물론, 초등학교가 학생 수의 부족으로 폐교되는 등 사회와 국가의 경쟁력 손실은 어마어마합니다.
어느 날, A군이 “저는 결혼을 늦게 해도 좋은 배필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부모님은 결혼을 하라고 성화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A군의 생각이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나는 오히려 A군을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자신의 결혼관이 뚜렷하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지만 여자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의학적으로 여자 나이 33살에 아이를 낳으면 노산 소리를 듣는 현실 때문에 여성이 갖는 압박감은 심합니다. 나는 젊은이들의 결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놓치지 말라. 나이를 먹어 늦게 결혼해도 좋으니 인생의 낭만인 결혼을 꼭 해봐라. 만약 결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외로움을 대신할 무언가를 꼭 찾아라.”
제5부 인생의 또 한 번의 위기 속에서
두 번째 자살 시도
부인이 생기고 아들들이 차례로 태어나는 겹경사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저를 병신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연히 저는 주장이 강했고, 일이 안 풀리거나 협조가 잘 안 되면 큰 소리로 따지거나 욕심을 부려 직장동료들과 불화가 잦았습니다. 점점 사람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습니다. ‘남 밑에서는 도저히 일 못하겠다. 내 사업을 꾸리자.’ 이렇게 생각하고 보훈청에서 대출을 받아 안양에 카센터를 차렸습니다. 자동차가 늘어나던 당시, 기술자는 많지 않았지만 저는 자동차의 세부정비까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제 카센터는 입소문을 타고 제법 많은 손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1급 정비소에서 하는 일까지 서비스를 했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었지만 좀 해달라며 애원하는 단골고객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장사가 잘되어 대출금을 더 끌어들여 카센터를 이전ㆍ확장했습니다. 그런데 장사가 안되었습니다. 직원 월급 주기에도 빠듯한 날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자연히 죄 없는 직원들만 들들 볶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직원들에게 망치, 스패너를 던지면서 대판 싸웠습니다. 싸우는 모습을 보고 손님들의 발길은 끊겼고, 데리고 있던 모든 기술자들이 나갔습니다. 그 후 카센터를 재정비하려고 마음먹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신고가 들어왔다며 감사가 들이닥쳤습니다. 싸운 기술자들이 신고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억하심정이 있는 사람에게 밉보여서 제게 이런 고난이 주어졌는지 모릅니다.
감사 나온 사람들은 판금만 해야지 카인테리어나 정비 공장에서 하는 일을 하면 불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기술로 손님이 원하는 것을 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 서비스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웬걸…. 여태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졌습니다. 법원과 경찰서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며 경위를 설명하였고, 가게는 영업정지를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여윳돈으로 사업체를 꾸린 것도 아니어서 대출금은커녕 이자를 내기도 벅찼습니다. 저는 망했습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술에 곤죽이 되어 제2한강교로 향했습니다.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숨이 콱콱 막혀오고 하늘이 노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내 목덜미를 잡아챕니다. 저를 끄집어낸 사람은 예비역 군인이라고 했습니다. 차를 타고 오다가 제가 뛰어든 모습을 보고 뒤따라 와 저를 구해준 귀인이었습니다.
귀인은 술 한 잔과 회 한 접시를 사주며 저를 달랬습니다. 베트남전쟁으로 다리를 잃은 저를 아기 다루듯 달래며 삶을 지탱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줬습니다. 하도 고마워 이름을 물었지만 그분은 응당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니 왜 이리 젖었어요!”라며 깜짝 놀라 묻는 아내를 뒤로한 채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아이들이 자는 모습을 봤습니다. 아내는 제 어깨를 감싸주며 말했습니다. “애들 참 귀엽지 않아요? 여보, 우리 뭐든 다시 해봐요.”
저는 참회의 눈물을 쏟으며 무릎을 꿇고 아이들 앞에서, 세상 앞에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 아니 절대자님, 예수님, 저를 용서해주소서.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용서를 구하며 살 것입니다.” 자책하며 살지 마십시오. 삶의 용서를 구하십시오. 자기 탓이라고 여기는 모든 죄악과 허물을 고백하는 순간, 다시 삶의 의지는 돌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