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3년 9월 / 352쪽 / 16,000원
프런티어 문화
철도는 어떻게 공간을 살해했는가? 대륙횡단철도의 건설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 1825년 9월 27일은 세계 최초의 기차가 출현한 날이다. 그날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이 손수 제작한 화물 전용 증기기관차 로코모션(Locomotion)호가 약 40킬로미터 구간을 시속 7~13킬로미터로 달렸다. 아버지의 작업을 이어받아 아들 로버트 스티븐슨이 기차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철도는 1830년 9월 15일에 운행을 개시했다. 이날 스티븐슨의 로켓호가 승객 36명을 태우고 항구도시 리버풀과 면화도시 맨체스터 사이 50킬로미터를 시속 46.8킬로미터로 달렸다.
바로 그해에 미국에선 뉴욕 출신의 기술자이자 사업가였던 피터 쿠퍼가 톰 섬(Tom Thumb)이라는 운송기관을 개발했다. 톰 섬은 볼티모어-오하이오 구간을 시속 28.8킬로미터로 달리는 데 성공했다. 지금 기준으론 매우 느린 속도지만, 터덜거리는 마차 속도에 익숙해 있던 미국인들에게 이 속도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1843년 열차를 타본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 무시무시한 전율과 전례 없는 공포감이 엄습했다”고 경탄하면서, 철도를 화약과 인쇄술 이래로 “인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삶의 색채와 형태를 바꿔놓은 숙명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시작은 영국이 빨랐지만, 철도의 성장 속도는 미국이 영국을 앞질렀다. 1861년 남북전쟁 발발 시엔 약 4만 8,280킬로미터에 이르렀는데 이는 영국철도 길이의 3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앤드루 잭슨이 1829년 대통령 취임식을 위해 마차로 한 달 동안 달려야 했던 테네시 내쉬빌-워싱턴 구간을 1860년대엔 철도로 단 3일이면 주파할 수 있게 되었다. 전선도 철도와 손에 손을 잡고 같이 발달했다. 1860년 약 8만 467킬로미터의 전선이 미국 대부분 지역을 연결했다.
1861년 3월에 출범한 링컨 행정부는 철도 건설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1862년 7월 1일 전쟁 중임에도 상원과 하원은 태평양철도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가설되는 철로 주변 약 60미터의 땅이 철도회사에 무상으로 주어졌는데, 이렇게 해서 무상 제공된 토지는 1억 에이커가 넘었다. 1억 에이커는 한반도 면적의 1.8배에 이른다. 또한 철도회사를 동시에 부동산회사로 만들어준 법이었다. 의회가 대륙횡단철도 노선을 승인하고 재정 지원을 한 지 7년 만인 1869년 5월 10일 드디어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전 미국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독립기념관의 종을 울려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했으며, 워싱턴 D.C.의 《이브닝 스타》는 사설에서 “오늘은 현재와 미래에 이 나라와 인류에 미칠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금세기에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라고 했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철도 건설: 대륙횡단철도의 길이는 약 3,069킬로미터였다. 이후 철도 노선은 극적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1880년에는 14만 9,000킬로미터로, 1900년에는 30만 9,000킬로미터로 급성장했다. 그런데 철도는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등 소수의 재벌에 의해 장악되었고 대륙횡단철도 건설 사업 자체도 부정부패의 복마전이었다. 부정부패는 철도 건설 공사 수주 단계에서부터 이루어졌다. 정치인ㆍ관료는 뇌물을 받고 계약액을 부풀리게 해주었고, 기업은 뇌물이라는 ‘껌값’을 주고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방식을 썼다. 기업들은 주가조작까지 저질러 추가 수입을 얻었다. 또 도시들은 철도가 자기 구역을 통과하도록 뇌물을 먹였다.
역사가 헨리 애덤스는 1870년에 쓴 글에서 철도회사 소유주들의 부정부패를 겨냥해 “이들 근대의 권세가는 전쟁을 선포하고 평화를 협상하고 의회와 법, 자주 국가를 자신들의 뜻에 순종하도록 만들었다”며 “기업은 민주주의의 해악”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하워드 민즈는 “위대한 업적은 반드시 위대하거나 도덕적인 행위의 소산은 아니더라도 위대한 발상의 소산이다. 미국은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한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뜯어먹은 것의 수천 배를 돌려받았다”고 말한다.
개통 이후 승객들은 곳곳마다 정류장을 거치면서도 7일 만에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철도 건설 과정에서 노동자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 또한 환호 속에 묻히고 말았다. 동부철도 건설은 대부분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서부철도는 대부분 중국인 노동자들이 건설했다. 당시 구인광고에 자주 등장했던 “아일랜드인은 뽑지 않음”이라는 문구가 말해주듯이, 가톨릭교도가 대부분인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의 주류인 프로테스탄트 백인들의 차별에 시달렸기에 철도 건설 노동 외엔 달리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찌 중국인들이 받은 차별에 비교할 수 있으랴. 센트럴퍼시픽 철도회사가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 광둥(廣東) 지방에서 수입한 노동자 1만 4,000여 명이 서부철도 건설에 투입되었다. 이들 중 수많은 이가 작업 중 목숨을 잃어가면서 대륙횡단철도의 역사적 개통을 가능케 한 것이었지만, 일부 백인들은 이들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이들을 증오했다. 극심한 인종차별주의로 중국인 살해가 자주 저질러졌다.
1877년 경기 침체로 직원 해고, 임금 삭감, 임금 체불 등이 잇따르자 철도 노동자들은 대규모 파업을 감행해 전국 철도화물열차 절반가량의 운행을 중단시켰다. 이에 미국 정부는 강력 대응하고 나섰다. 파업이 끝났을 때 100명이 사망했고, 1만 명이 감옥에 갔다.
악당과 천사의 이미지: 노동자들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경제학자 헨리 조지다. 그는 철도회사들이 농민들을 총으로 위협해 본래 살던 곳에서 쫓아내는 현실을 보면서 철도회사를 비롯한 재벌들을 ‘노상강도’라고 비난했으며, 철도회사에 투자하는 중산층의 욕심도 꾸짖었다.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부추기는 동시에 그것에 편승한 대기업들, 특히 철도회사들의 횡포는 극에 이르렀다. 이들은 각 주 정부의 관리, 판사, 변호사, 목사, 언론인들에게 무임승차권을 제공하는 등 엘리트 포섭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893년 공황’이 시작되면서 6개월 이내에 8,000개 이상의 기업, 156개 철도회사, 400개 은행이 문을 닫았으며, 노동력의 20퍼센트 정도인 10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생사의 문제가 되었기에, 그해에 전투적인 성격의 미국철도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해고의 위협과 더불어 철도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악한 것도 노조 결성의 주요 이유가 되었다. 특히 보일러 폭발 사고로 매년 화부 수천 명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철도 건설도 여전히 무시무시한 작업이었다(1890년에서 1917년까지 노동자 7만 2,000명이 철로에서 사망했고, 20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기관차고와 정비소에선 15만 8,000명이 사망했다).
이후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열차게 전개되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900년 미국 철도는 32만 킬로미터로 전 유럽의 철도망을 합한 것보다 길었지만, 20세기엔 철도회사들의 오만과 탐욕에 치명타를 가할 적이 나타났으니 그게 바로 자동차다. 많은 사람이 철도는 악덕 자본가가 운영하는 악당의 도구라고 보았지만, 자동차는 그 반대 이미지를 풍겼다. 자동차업계는 이 이미지를 부각하는 데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정부정책에도 반영되어 ‘철도엔 규제, 자동차는 지원’이라는 원칙이 자리 잡았다. 이는 다른 나라들의 철도정책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은 것이었다. 영국과 캐나다는 공영, 다른 유럽 국가들은 국영으로 간 반면, 미국은 모든 걸 민영화했다가 그 부작용에 된통 당한 뒤 그걸 바로잡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자동차라는 대안으로 복수한 꼴이었다.
20세기 중반 세 차례(1944년, 1956년, 1968년)에 걸쳐 ‘연방 고속도로법’이 제정되었는데, 대중 교통시설인 철도 건설에 투입된 예산은 도로건설 예산의 1퍼센트에 불과했다. 아니, 기차는 ‘대중 교통’이라는 타이틀마
저 자동차에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철도는 초기엔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연결의 기술’로 여겨졌지만, ‘연결’보다는 ‘분리’를 기조로 삼는 자동차가 공간 파괴의 패권을 차지함으로써 철도는 단지 ‘연결’을 회고하는 ‘낭만’의 영역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자동차 공화국
포드는 어떻게 마르크스를 쫓아냈는가? 헨리 포드의 ‘자동차 혁명’
20세기 소비자 혁명의 씨앗이자 견인차: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1914년 1월 5일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하루 9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이고 하루 최저 임금을 5달러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동종업계의 평균 임금은 2.34달러였으니, 노동자들에게 통상 임금의 2배에 해당하는 일당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이직률이 매우 높아지자 내린 조치였는데, 이 발표가 있던 날 포드 공장의 문 앞에 노동자 1만 명이 몰려들었다. 노동자들은 환호했지만, 기업계는 경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경제적 범죄’라고 비난했으며, 보수 우파는 포드를 사회주의자로 몰아붙였다. 지금도 자주 거론되는 이 에피소드와 관련해서 포드는 ‘창조경제의 원조’라는 말까지 나온다. 2009년 4월 미국 포트폴리오닷컴은 경영대학원 교수들과의 협의를 통해 ‘가치창출과 파괴, 혁신, 경영기술’ 등을 고려해 ‘미 역사상 최고의 최고경영자(CEO)’ 랭킹을 20위까지 매겼는데, 이 조사에서 1위로 뽑힌 인물도 포드였다.
이상한 일이다. 포드는 천하에 아무도 못 말리는 고집불통으로 변화를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GM에 자동차업계의 패권을 내주고 파산의 위기에 내몰렸던 실패한 경영자가 아닌가. 빌 게이츠는 포드처럼 실패한 경영자가 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자신의 집무실에 포드의 사진을 걸어놓았다지 않는가. 그런데 왜 아직도 많은 경영 전문가가 포드를 위대한 경영자 반열의 수위에 올려놓는 걸까?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포디즘(Fordism)이라는 단어에서 그 답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포드는 일개 기업 차원에서 볼 인물이 아니라 체제 차원의 변혁을 촉발한 인물이며, 러시아혁명(1917년)으로 고조된 사회주의 열기를 봉쇄하면서 미국 자본주의를 유지ㆍ발전시킨 패러다임 메이커였다. 그런 관점에서 포드자동차라고 하는 기업의 쇠락은 너무도 사소한 일이라고 보는 건 아닐까?
포디즘은 이동형 일관 작업 공정의 도입과 노동자들에게 단순화된 임무를 할당하는 노동통제로 경제적 효율성을 극대화해 표준화된 제품을 대량 생산하고 대량 소비하게끔 하는 축적 체제를 일컫는 말이다. 포디즘은 전 산업 분야에 걸쳐 도입됨으로써 ‘20세기 소비자 혁명’의 씨앗이자 견인차가 되었다. 포디즘으로 대량 생산 체제가 작동함에 따라 광고를 중심으로 소비자를 양산하는 체제가 구축되었고, 이에 따라 대중의 정체성 변화가 일어났다. 진보적 관점에선 포디즘의 생산 측면, 즉 비인간적인 노동 방식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으나, 포드의 비전은 ‘복지 자본주의’까지 나아가는 원대한 것이었다. 포드는 이익공유제(profit-sharing)를 통해 노동자들이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일당 5달러’라는 파격 조치도 바로 그런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노동자들에게도 자동차를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드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1910년대에 어느 노동조합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들에게 왜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일한다는 사람은 25퍼센트에 불과하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은 10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기 위해 일한다는 사람은 무려 65퍼센트에 달한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1919년에는 6달러로, 1929년에는 9달러로 인상했다. 그래서 신입사원 뽑는다는 공고만 나가면 회사 앞은 지원자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또한 포드는 흑인, 여성, 전과자, 장애인 고용에 앞장섰다. 포드 공장에선 늘 다른 자동차 회사의 공장에서 일하는 흑인의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흑인이 일했으며, 1919년 4만 4,569명에 달하는 전체 인력 중에서 9,563명이 장애인이었다. 또 400~600명에 이르는 전과자들까지 고용했다. 포드에겐 인도주의자라는 찬사가 쏟아졌지만, 포드는 “인도주의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철학인 ‘자력갱생’을 역설했다.
포드는 인도주의자가 아니라 온정주의자였다. 그는 노동자들을 가부장적 가족관계의 모델에 따라 보호ㆍ규제하는 온정주의(paternalism)를 광범위하게 실시했는데, 이를 전담하는 부서까지 두었다. 이익공유제의 참가 자격 조건을 심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노동자들의 과도한 음주와 도박을 엄격히 규제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포드의 온정주의는 철저한 반(反)노동조합 정책으로 귀결되었다. 노조 활동가들이 고용을 늘리기 위해 생산성 향상을 방해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고 본 포드는 노조파괴 전문 요원들을 고용해 노조 활동을 원천 봉쇄했다. 생산성이 올라 번영을 누리게 되면 결국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포드는 제1차 세계대전에도 격렬하게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전쟁은 어리석고 무서운 낭비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포드는 노조도 그런 ‘낭비’로 간주했지만, 결국 대세에 굴복해 1941년 6월에서야 노조를 수용했다.
“포드자동차를 사주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을래요”: 포드는 1918년 공화당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미시간 주에서 민주당 후보로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5,000표 미만의 차이로 낙선했지만, 전국적으론 큰 인기를 누려 1920년 대선 출마를 요청하는 지지자들의 압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1924년 포드 T모델의 생산이 200만 대를 돌파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고, 1924년에도 포드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대중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는 ‘제2의 링컨’, ‘노동자의 위대한 해방자’로 여겨진 가운데 여론조사에서 현직 대통령을 압도하는 정치적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포드는 금주법을 강화하는 것을 조건으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재선을 지지함으로써 대선엔 출마하지 않았다.
1925년 포드 T모델은 전 세계 승용차의 절반을 차지하는 표준 자동차가 되었으며, 자동차 산업은 미국 최대의 산업이 되었다. 그해 독일에선 야코프 발허의 『포드냐 마르크스냐(Ford oder Marx)』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사회주의자들에게 미국의 자동차 문화는 점점 더 열악해지는 노동조건과 그에 따라 고도로 발전하는 무자비한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매력적이면서도 그만큼 위험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포드자동차는 노동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노동자들은 중고차라도 몹시 갖고 싶어 했으며 일단 차를 갖게 되면 노조 모임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자동차 열광은 거의 전염병처럼 미국 사회를 덮쳤다. <포드자동차를 사주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을래요(You Can’t Afford to Marry Me If You Can’t Afford a Ford)>나 <뷰익을 타고 신혼여행 가요(Take Me on a Buick Honeymoon)>는 CM송이 아니라 1920년대 중반의 인기 가요였다.
1927년 12월 A형 포드자동차가 선을 보였을 때 모든 신문의 제1면은 온통 A형 포드자동차 뉴스로 가득 찼다. A형 포드자동차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광적이었다. 100만 명이 이 차를 보기 위해 뉴욕에 있는 포드 본사로 몰려들었다. 거리에 이 차가 나타나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주문이 폭주했다.
그러나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이다. 포드는 1920년대 말 GM에 추월당하고 말았다. GM이 전략적으로 차종을 다양화하고 디자인에 신경을 쓴 반면 포드는 미련할 정도로 가격과 기능에만 집착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포드도 자신의 그런 생각이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그건 그의 어찌할 수 없는 신념이었다. 포드는 “변화는 진보가 아니다. 도처에서 새것에 대한 열광이 진보의 정신과 혼동되고 있다”고 불평했지만, 새것을 진보로 여기는 미국인들의 습속을 어찌 바꿀 수 있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