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의 기적, 카붐!
대럴 해먼드 지음 | 에이지21
단 하루의 기적, 카붐!
대럴 해먼드 지음
에이지21 / 2013년 10월 / 436쪽 / 15,000원
대체로 행복했던 시절, 인생의 철학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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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명의 형제자매 중 끝에서 두 번째로 1971년에 태어났다. 그때 우리는 아이다호 주 제롬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농장 일꾼으로 취직했고, 얼마 후 장거리 트럭 운전사로 직업을 바꿨다. 그리고 여동생이 태어난 해인 1972년의 어느 날, 아버지는 트럭에서 짐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는 집을 나섰다. 그렇게 나간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어머니는 8명의 아이를 혼자 기르기 위해 두 가지 직업을 가졌는데, 하나는 양로원에서 일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걸스카우트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해도 쌓여가는 것은 청구서뿐이었다. 사회복지사들은 어머니에게 우리를 의탁 가정에 맡기라고 충고했고, 결국 우리들은 무스하트(Moosesheart)라고 불리는 시설에 들어가게 되었다. 무스하트는 시카고에서 서쪽으로 7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무스하트는 역사가 깊은 곳이다. 1913년 무스 인터내셔널(이하 ‘무스’)이라는 자선보호회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오늘날에도 이 조직은 100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회원들은 매년 약 28달러를 내는데, 그 돈은 무스가 지원하는 주요 자선기구인 두 곳의 시설을 운영하는 데 쓰인다. 내가 무스하트에 들어갔을 때는 300명이 넘는 아이가 살고 있었는데, 무스하트는 보육원이라기보다는 대학 캠퍼스처럼 보였다. 490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울창한 수풀, 드넓은 호수, 가정집과 비슷한 기숙사. 수십 년 전부터 무스하트는 자체적으로 우체국과 소방서를 운영했다.
무스하트 캠퍼스에 도착한 나와 내 형제자매는 몇 주 동안 애리조나 홀이라 불리는 기숙사 건물에서 함께 지냈다. 그 후 나이에 따라 다른 집으로 보내졌다. 무스하트의 방침에 따라서 처음에 나는 ‘아기 마을’이라 불리는 곳에서 살다가 한 살 한 살 자람에 따라 또 다른 집으로 옮겨졌다. 무스하트에서 지낸 14년 동안, 한 번도 형제자매와 같은 집에서 산 적이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나를 고아로 여긴다. 하지만 나는 고아에 해당하지 않는다. 무스하트의 좋은 점은 어머니가 자녀 곁에 머물고 싶어 하면 캠퍼스 안에서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했다.
나는 캠퍼스 안에 있는 학교에 다녔는데,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노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교실보다 미식축구장에서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곳에서 배운 수많은 교훈은 내 인생의 지침이 되는 경구로 자리 잡았다. 카붐 사무실에서는 이러한 경구를 가리켜 ‘부머리즘(Boomerisms)’이라 부르는데, 부머리즘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목표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참고로 카붐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부머(Boomer)’라고 불린다.
그리고 무스하트에서 나는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무스하트가 나에게 해준 값진 일이었다. 당시 나는 다른 아이들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어서, 그때 내게 붙여진 별명이 ‘변호사’였다. 나는 누군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부당한 일을 보면 기꺼이 무스하트의 관리 책임자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다. 그들은 내 주장을 받아들여주진 않더라도 늘 공정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소리쳐 주장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또한 권위적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배웠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나는 무스의 상층부에 해당하는 인물 중 한 명인 빌 에어리와 친해졌다. 그는 현재 무스 조직의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고, 나는 지금도 그를 ‘에어리 선생님’이라 부른다.
가득 차지는 않았지만, 전부 비어 있지도 않은
고등학교를 졸업 후 나는 에어리 선생님의 집으로 이사해서, 와본시 전문대학에 다녔다. 그러나 나는 새롭게 얻게 된 자유를 잘 다루지 못했고 학업에 전념하지도 못했다. 그 뒤 학자금 대출을 받아 리폰 단과대학에 다녔지만, 이때도 수업 내용을 따라가는 데 힘겨움을 느꼈고 수업 시간보다 대학에서 맺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학점도 형편없고, 2년 동안 학자금 대출로 42,000달러를 빚진 상태가 되어 나는 다른 출구를 찾아야 했다. 그즈음 가족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은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그것은 키티 누나의 죽음이었다.
1993년 봄, 나는 노스웨스턴 대학과 미드웨스트 대학연맹(리폰 대학이 가입되어 있는)이 운영하는 도시학 협회에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시카고 공영주택에 살면서 비영리단체의 인턴으로 일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조디 크레츠만 박사와 한 팀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시민사회 조직 내에서는 일종의 전설로 불리며, 동료들과 함께 노스웨스턴 대학 내에 ‘자산기반 공동체 발달기구(ABCD)’를 설립했다. 자산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꾸리기의 철학은 공동체에 ‘없는’ 부분이 아니라 공동체에 ‘있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참고로 최근에 미셸 오바마는 ABCD에서 일했던 경험이 자신의 공직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 연설에서 밝혔다.
한편 도시학 프로젝트의 일부는 시카고 파크 지구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훗날 카붐의 후원위원이 되는 헬렌 밑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그중 하나는 직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명함에 어떤 직위가 적혀 있든, 명함 자체가 있든 없든 모든 사람에게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대해야만 하고, 조직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다면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각 부서에서 일하는 실무자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카붐을 설립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는 교훈을 또 하나 배웠다. 시카고는 77개 지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77개 지구 중 대부분은 특정 인종이 모여 산다. 시카고 시는 오랫동안 각 지구에 사는 주민이 모여서 벌이는 마을연합 축제를 후원해왔는데, 초기에는 각 지구의 몇몇 상점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중심으로 모든 마을연합 축제의 준비를 돕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일을 준비하는 데 드는 수고는 적었으나, 대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테면 푸에르토리코계 주민과 그리스계 주민이 좋아하는 밴드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헬렌은 각 지구가 자신들만의 축제를 기획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시민 쪽은 예상보다 훨씬 신중했다. 헬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은 여러분이 사는 지역이고, 여러분의 축제예요. 우리는 단지 여러분을 지원할 뿐입니다. 이 행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수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새로운 마을연합 축제는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얻었다. 이를 통해 나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이와 같은 공동체 행사는 제3자가 주민들을 위해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가 주축이 되는 편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좋다는 것이다.과정은 결과만큼 중요하다
1994년 봄, 도시학 협회를 졸업한 후에는 사회를 위해 활동하는 것이 내 천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시카고에 머무는 동안 몇몇 곳에서 자원봉자사로 일했고, 곧 보스턴에 본부를 둔 자원봉사자 그룹인 시티 이어(City Year)가 창립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1994년 7월, 나는 시카고의 시티 이어 사무실에 고용된 첫 번째 직원이 되었다. 처음 몇 달 동안, 우리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거나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조직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해 가을, 나는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로 갔다. 그곳에서 열릴 첫 번째 시티 이어 전국회의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 내가 맡은 일이었다. 시티 이어의 전국회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 행사는 사이저지(Cyzygy)라고 불린다. 이 행사는 세미나를 통해 지난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보는 것과 더불어 대규모 자원봉사 행사를 개최하는 것도 포함하는데, 시티 이어의 모든 자원봉사자가 보스턴에 있었던 초창기에는 자원봉사를 장려하는 서바톤(serve-a-thons, 서비스와 마라톤을 섞은 합성어) 행사를 진행했었다. 처음에 시티 이어의 리더들은 콜럼버스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내가 꼼꼼히 조사해본 결과, 그것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콜럼버스는 보스턴만큼 대중교통 시설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리폰 대학 1학년 시절, 친구 어머니의 부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리노이 주 에번스턴에서 놀이터를 세우는 일을 도운 적이 있었다. 나는 시티 이어 최고경영회의에 이 안건을 올렸다. 여러 개의 작은 프로그램 대신,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어떨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놀이터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결국 콜럼버스에서 열리는 시티 이어의 첫 번째 전국회의에서는 두 곳의 놀이터를 건설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놀이터가 세워지는 곳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새로 건설된 주택 단지였다. 그 후 6개월간 이 계획을 준비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그리고 1995년 6월 두 번의 연휴를 이용한 작업을 거쳐, 놀이터가 완성되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 프로젝트는 성공했다. 그러나 많은 문제와 갈등을 헤쳐 나온 끝에, 이 프로젝트는 종착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놀이터를 세우는 게 최종 목표라면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가 공사에 참여하는 것보다, 놀이터 제작회사에 맡기는 편이 훨씬 빠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놀이터는 그 공동체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놀이터를 짓는 과정도 그 결과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그 경험은 내가 시카고 파크 지구에서 마을연합 축제를 기획했을 때 배운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했다.
2부 꿈꾸고, 모이고, 나누고, 짓고, 지키다
일곱 살 소녀의 웃음
콜럼버스에서 프로젝트를 마친 후, 나는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전국 규모의 사회봉사 단체인 유스 서비스 아메리카(YSA)에서 시티 이어의 사이저지 회의처럼 대규모 자원봉사 행사를 기획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1995년 여름, 나는 YSA의 계약직 사원으로 놀이터 공사 계획을 세우기 위해 워싱턴으로 이사했다. 워싱턴에 오자마자 돈 허치슨을 만났다. 마침 돈도 YSA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도 어색해하는 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놀이터를 세우기로 한 곳은 워싱턴 D.C 남동쪽에 있는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주택단지인 리빙스턴 매너였다. 콜럼버스의 에메랄드 글렌 주택단지를 건설한 회사의 이사는 내게 워싱턴에서 주빌리 엔터프라이즈를 운영하고 있는 자신의 협력자를 소개해주었다. 그 당시 주빌리는 리빙스턴 매너를 소유하고 있었다. 주빌리의 경영진은 주민자치회를 조직하는 데 놀이터를 짓는 것이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밖의 신청자는 없었지만, 우리는 주빌리 주민자치회에 다른 지역과 똑같이 놀이터 건설을 신청하는 서류를 제출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마을 주민들이 놀이터 설립을 놓고 다른 곳과 경쟁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들이 놀이터를 짓기 위해 온 힘을 다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그 교훈을 배웠다.
리빙스턴 매너에서 진행한 첫 번째 일은 놀이터 지을 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한 건물 옆에 있는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도착하고 얼마 후, 애슐리 브로리라는 이름의 일곱 살짜리 꼬마가 내게 무언가를 말하러 깡충깡충 뛰어와 자신의 그림 두 장을 건넸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에는 그 아이가 꿈꾸는 놀이터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었다. 우리는 애슐리와 그녀의 친구들에게 놀이터를 디자인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처럼 아이들이 놀게 될 놀이터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디자인하는 것은 오늘날 카붐이 놀이터를 만들 때도 반드시 거치게 되는 절차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놀이터에 애착을 갖게 되고, 자신이 놀이터를 짓는 데 참여했다는 사실을 통해 자부심을 느낀다.
설계된 놀이터를 짓기 위해서는 적어도 100명의 자원봉사자와 4만 달러어치의 건축 자재와 물품이 필요했다. 그러나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싱글맘이 모여 사는 공동체에서 그만한 인력과 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내게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라고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조차도 가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놀이터를 짓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편 애슐리는 식당과 상점을 돌아다니며 놀이터를 짓기 위한 모금함을 설치했다. 차츰 놀이터를 짓기 위한 도움도 몰려들었다. 지역의 한 목재회사는 트레일러 트럭 한 대 분량의 목재와 놀이터 바닥에 깔 바닥재를 보내주었다. 페인트 상점에서는 흰 페인트 여러 통과 붓을 보내주었다. 피자 가게에서는 자원봉사자가 놀이터를 지을 때 먹을 325판의 피자를 보내주었다. 우리는 동부 해안을 돌며 타이어를 모았다. 비어 있던 리빙스턴 매너의 공터는 점점 건축 자재와 물품으로 가득 찼다.
놀이터를 짓는 공사는 1995년 10월 18일에 시작되었다. 공사는 나흘간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시작한 날부터 사흘 내내 비가 내렸다. 나는 내 가슴까지 차는 그 물구덩이에 빠진 적이 있다. 또 빗속에서 너무 열심히 일한 나머지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을 멈추고 쉴 수가 없었다(그다음 주에 흉부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폐렴에 걸렸다는 결과가 나왔다). 비가 내리는데도 사흘 동안 약 100명의 자원봉사자가 참가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애슐리는 언제나 공사현장에 있었다. 그 아이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누구를 위해 놀이터를 짓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조금씩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놀이터는 모습을 갖추어갔다. 공사 마지막 날인 나흘째 되는 날에는 수백 명의 YSA 회의 참석자를 포함해서 500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마침내 완성된 놀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은 좋아서 야단법석이었다. 웃고 낄낄거리며 깡충깡충 뛰었다. 자원봉사자 중 한 명은 ‘애슐리 브로디를 2020년 시장으로!’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붙였다. 돈과 나는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우리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지만, 정신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고무되어 있었다. 단순히 놀이터를 짓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해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빙스턴 매너에 놀이터가 세워졌다는 소식은 그 지역 방송국 뉴스 이외에도 《워싱턴 포스트》, 사회문제를 다루는 잡지 《후 케어스》 같은 매체에 보도되며 미국 전역에 전해졌다. 몇 달 후에 샌안토니오에서 회의를 개최할 예정인 신용금융사 디스커버 카드는 직원들이 팀 조직 활동으로써 놀이터를 짓는 일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들은 내가 회사 본부가 있는 시카고로 날아와서 어떻게 작업을 진행하는지 설명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시 나는 폐렴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출장을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 빠른 택배를 이용해 슬라이드 한 판을 보냈다. 그리고 전화로 설명했고, 우리는 그 회사와 함께 놀이터를 짓는 두 번째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그 즈음에 우리는 카붐을 법인화했다. 카붐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낸 것은 돈이었다. ‘카붐’은 우리의 열망과 희망이 품고 있는 폭발적인 잠재력을 설명하는 데 완벽한 단어였다. 1996년 2월에 디스커버 카드사와 샌안토니오에서 놀이터를 만드는 프로젝트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카붐이라는 법인을 공식적으로 설립한 상태였다. 우리는 세금 감면 비영리단체 유형인 501(c)3으로 등록했다. 비로소 합법적인 단체에 속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어!
나는 운 좋게도 일하는 동안 좋은 멘토들과 만날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단연 최고는 메리언 라이트 에델만이다. 그녀는 아동보호기금의 창립자이며, 무스하트의 에어리 선생님과 함께 나의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당시 우리는 나의 아파트나 식당 겸 술집인 코멧에서 일을 하던 초짜 기업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에델만 부인은 너그럽게도 일할 수 있는 사무실 공간을 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급여를 지급하지는 못했지만 직원도 있었다. 나와 돈, 새로운 동료인 데드 애덤스와 이언 피스크까지 합해서, 카붐의 조직원은 네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