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란
류서재 지음 | 청어람
석파란류서재 지음청어람 / 2012년 4월 / 512쪽 / 14,000원
1장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다
탕! 탕! 탕! 이하응은 사랑방에서 난을 치다가 어깨를 움칠했고, 붓질은 어긋났다. 집이 창덕궁과 가까운 탓이었다. 금년 들어 농민들은 서너 달에 한 번꼴로 궁궐 앞에서 시위했다. 나는 어느 쪽이냐. 왕족 아닌 왕족으로 살고 있으니, 어느 계급에도 끼지 못한 잉여의 존재였다. 그때였다. 한 사내가 방문을 급히 열고 들어왔다. 사내의 저고리는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길거리를 헤매다 대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왔소. 살려주시오.”“돌아가라. 국법을 어겨 총을 맞은 농민을 살릴 수는 없다.”“나는 농민이 아니고 선비요. 이름은 최갑수……. 경주 구미산으로 보내주면 꼭 보답할 것이오. 나를 살려주면 후천 개벽의 비밀을 알려주겠소. 이씨 왕조도 끝장이…….” 그때 급히 방 안으로 들어온 행랑아범이 몽둥이로 사내의 머리를 후려쳤다. 사내는 총에 맞아 죽었는지 몽둥이에 맞아 죽었는지 불확실했다. 농민이 이하응의 사랑방에서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칫 농민 시위에 연루될 가능성이 컸고 왕족이라는 이유로 대역죄를 덮어쓸 판국이었다. 이하응은 잠시 고민하다가 행랑아범에게 사내를 인왕산에 가매장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이씨 왕조가 끝나게 될 것이라는 사내의 말이 마음에 걸려 경주 구미산으로 가보기로 결심했다. ***이하응은 안개로 희뿌연 산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갑자기 안개 속에서 맥문동 꽃밭이 펼쳐졌다. 몽유도원도처럼 뿌옇게 퍼진 흰색 바탕에 이리저리 보랏빛 선이 그어진 풍경이다. 그때 풀숲 안개 속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하응은 사람들에게 이끌려 허름한 작은 기와집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에 나이가 사십은 됐음 직한 사내가 정좌하고 있었다. “나는 한양에서 온 이하응이오.”“나는 최제우요.”“최갑수라는 사내를 아시오?”“내 양아들입니다.”이하응은 문득 벽에 걸린 족자를 쳐다보았다.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라는 논리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사람 마음에 대한 가장 명쾌한 해석이었다. 이하응은 그 사내와 내공을 겨루어 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우리 바둑 내기로 천하의 이치를 논하는 것은 어떨지요.”잠시 후 바둑판과 차가 들어왔다.“창덕궁 앞에서 농민들이 모였소. 이유가 무엇이겠소.”“고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백성에게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대궐 문을 열어야 합니다.”“누가 누구에게 대궐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오? 모여야 해결된다는 생각은 무법이오.”“형평성을 상실한 법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지요. 그러니 힘없는 백성들은 모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최제우가 바둑판 모퉁이를 흰 알로 톡톡 두드렸다. “정치를 말씀하시니까 말입니다만 곧 유명해지실 관상입니다.”“나요? 하하하, 지금도 한양에서 유명합니다. 미친놈으로 말이지요.”“국부(國父)가 되십니다.”이하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내가 영조대왕 혈통인 것은 맞소만.”“후일 국부가 되시거든 우리 동학교도를 지켜주시지요.”“하루하루 미치광이로 사는 주제에 후일이 어디 있겠습니까.”“진짜 미치광이는 미친 줄을 모르는 법입니다.”“허면 내가 가짜로 미치광이 행세를 한단 말이오?”“정치의 본질은 백성에게 다만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옳지 않을뿐더러 또한 사람에게 정직하지 않고서 어찌 정치를 하겠습니까.”“아무리 정성을 다한다 해도 한쪽이 이익이면 다른 쪽은 손해인 법이오. 그게 세상의 이치지요.”“조선의 정치는 성리학을 내세워서 백성을 차별하고 있습니다. 소수만을 위한 학문은 학문이 아닙니다. 경쟁과 차별의 논리는 상생을 그르칩니다.”음, 이하응은 눈을 감았다. 최제우는 거물이었다. 공의와 명분이 무엇인지 아는 최제우는 양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하응은 조선왕조의 운명을 생각하며 잠시 침묵했다. 동학은 함부로 볼 사교(邪敎)가 아니었다. ***김병학은 고개를 돌렸다. 방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난 듯했다. 이하응이 행랑아범을 밀치고 벌써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하응은 기름진 주안상을 보고는 반색을 하며 앉았다. 술병을 들어 술을 한 잔 따라 마시고는 화전을 하나 덥석 집어 먹었다. “이 대단한 집에 친구 묵란 하나 걸어놓게. 대들보 밑에 구름이 걸린 것처럼 잘 어울릴 걸세.”“묵란이야 이름값인데 석파가 누군지 사람들이 알겠는가.”김병학은 이하응이 온 뜻을 알고 있었다. 함께 묵란을 치며 고수를 가르자는 말인데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흥선군이 붓을 놀리는 기술은 보통이 아니었다. 붓놀림에 관한 한 김병학은 흥선군보다 하수였다. 흥선군이 붓을 들면 난이 그려졌고 김병학이 붓을 들면 풀이 그려졌다. 마치 범을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 꼴이 되어 가슴이 쓰렸다. “이봐, 오늘은 조용히 술이나 얻어먹는 게 어때. 자네만 들어오면 방 안이 시끄러워. 맛이 시거든 떫지나 말아야지. 시면서 떫기까지 하면 버려야 해.”“내가 과일인가? 나가라는 말보다 더 무섭군. 자네 지방에 내려가 보았나? 화양동서원 소식을 들으니 서원의 횡포가 심하더군. 지방에서는 서원이 궁궐이야. 만인지상이라고.” 서원? 김병학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늘 꽃에 취해 있는 이하응답지 않은 말이었다. 이하응은 구미산을 들렀다 한양으로 오는 도중 불만서원에 갔다가 큰 봉변을 당한 이야기를 김병학에게 털어놓았다. 이하응은 또 술병을 들었다. 김병학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하응은 술을 먹으면 대취할 때까지 먹고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린다. 멸문지화를 걱정하며 몸을 사리는 다른 왕족들과는 달랐다.“이 나라에서는 서원이 문제야. 공자 말씀에 사람의 도리는 부지런히 배우는 것에 있다고 했는데 서원은 학문으로 정신을 수양하기는커녕 가난한 백성들의 꿈을 빼앗고 있어.”이하응이 합석하는 순간부터 술자리는 냉랭해지고 있었다. 좌중의 사내들은 불쾌한 표정만 드러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묵란을 가져왔으면 두고 가지.”“서원을 저리 놔두면 문제가 커질 거야. 서원이 서원 노릇을 해야 농민이 농민 노릇을 할 게 아니겠나?”“자네가 갑자기 농민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뭔가?”“최제우에게 한 수 배웠네.”“최제우?”“산에서 농사짓는 사내야.”“그런 천한 자가 눈에 들어오다니 석파는 확실히 죽었군.”“성리학은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궁구하는 학문인데 지금 시대에 성리학이 어찌 사람을 안다 하겠는가. 서학보다 못하고 동학보다 못해. 성리학은 죽었어. 조선은 죽었어. 선비는 사라졌고, 선비가 사라진 시대라면 서원도 사라져야지.”서원은 자네하고 관계가 없어. 내 정치적 배경을 건드리지 말게. 김병학이 눈으로 말했다. “선비가 묵란을 칠 때 집중하는 것은 생명이야. 자네는 왜 농민들이 창덕궁으로 모여드는지를 고민해야 하네.”“생명? 나는 기(氣)를 믿지 않고 리(理)를 믿기로 했네. 지금은 농민들을 제압하는 힘이 필요한 시대야.”“기(氣)는 리(理)의 바탕이 되는 생명이네. 농민의 마음을 모르고서야 어찌 정치를 안다 하겠는가.”
2장 배신의 얼굴
이하응은 사랑방에 앉아서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대국하는 사람이 없는 바둑판에서 생각은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다. 이하응은 턱을 괴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한집안 싸움이었다. 다 같은 조선 사람이라서 적은 분명하지 않았고, 게다가 이파전이 아니라 삼파전이었다. 이하응은 흰 알을 꼭지에 놓고 검은 알을 하나씩 집어 들어 꼭지 아래 왼편과 오른편에 각각 놓았다. 전형적인 삼각형 구도에서 흰 알은 왕이었고 두 개의 검은 알은 백성이었다. 힘의 역학으로 따져보아도 밑바닥에서 균열을 일으키면 꼭대기는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동학이나 서학이나 구별할 것 없이 결국에는 계층 이동 싸움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동학과 서학이 한편이었고 성리학이 상대편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동학과 서학으로 또 갈라졌다. 양편의 백성이 모두 성리학을 공격하는 것이라면 성리학이 무너지는 자리에 서학이 치고 들어올 것인가, 동학이 치고 들어올 것인가. 오백 년 이씨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 해도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지상천국을 이룰 것인가.이하응은 삼각형의 꼭지에 성리학을 내려놓았다. 동학을 한편으로 두고 서학을 상대편으로 둔다면 결국에는 조선의 정체성 싸움이었다. 허면 어느 쪽이 더 많이 조선의 백성을 끌어들일 것인가. 성리학이 한편이고 동학이 상대편이라면 내란이 일어날 것이다. 성리학이 한편이고 서학이 상대편이라면 국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성리학은 어느 편과도 전쟁을 해야 하고 성리학이 무너지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바둑이나 두세. 간밤에 혼자 두었더니 영 재미가 없어. 술도 대작해야 하는 것처럼 바둑도 대국해야…….”또 무슨 말을 하려고 왔나. 김병학은 이하응의 말을 끊으며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자네가 알아야 하네. 농민들이 농사는 안 짓고 하늘나라 이야기에 홀렸다지 않나. 배를 타고 온 서양 신, 최제우가 발견한 동양 신. 자네나 나나 성리학자로서 꿈꾸는 세상이 다르지는 않을 터. 자네는 백성들이 왜 신에 미치는지 알아야 하네. 백성들은 산속에 터만 잡으면 자기들끼리 제국을 만든다네. 조선 안에 또 다른 나라가 있는 거지. 조선의 위정자 입장에서는 치욕이지 않은가.”“종교는 종교일 뿐 그것으로 제국을 만들 수는 없네.” “자네 말대로 종교로 제국을 만들 수는 없네. 허나 여러 종교가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면 제국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네. 백성들이 하느님 소리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끌리고 있어. 백성을 통해 뭔가 새로운 것이 꿈틀거리고 있는 거야. 새로운 시대를 근대라고 한다면 근대를 이루는 힘을 종교가 아닌 성리학에서 찾아야 할 것이네. 조선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성리학이 새로워져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을 이끄는 이념에 국가를 통째로 넘겨줘야 할 걸세.”이하응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건가. 이제 그만 편안히 사는 방법을 배우게. 자네가 불편하지 않게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보내주겠네.” “자네는 나를 권력에 아부하는 돼지로 보는 것인가.”“돼지로 살게.” 이하응은 화내지 않았다. 화를 내는 순간부터 정점은 확인되고 남는 것은 내리막이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괴롭게 사느냐고? 불행히도 나는 헛된 이상(理想) 때문에 살고 있네. 자네는 다 죽어가는 이씨 조선의 숨통을 끊어놓을 셈인가. 나라가 망해가는데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걷는 왕이 아니겠는가. 그런 왕에게 새벽은 오지 않겠지. 성리학은 지도자의 학문일세. 위정자는 성리학을 종교처럼 믿고 실천해야 하네. 공자는 백성의 신뢰를 잃으면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고 했네. 무기, 식량, 백성 중에서 자네는 제일 먼저 버려야 할 무기에 집착하고 있어. 총은 나라를 지킬 수는 있으나 백성의 마음을 이끌 수는 없네. 백성은 적군이 아니지 않은가.” “방 안에서 묵란이나 치는 자네가 정세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는가. 총을 말하려거든 일본을 보고 이야기하게.” “다른 나라보다 중요한 국가의 근본을 말하는 것이네. 지금 백성들은 지도자를 믿을 수 없다는 걸세. 조선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떠나는 백성도 있네. 백성이 믿지 못하는 나라는 모래성이네. 성리학자들은 천주교도를 보며 배워야 하네. 보이지 않는 천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백성들이 있지. 그 믿음이 무섭지 않은가?”***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민씨 부인이 달려 나왔다.“또 취하셨어요.”이하응은 아내의 말을 등 뒤로 들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제발 다른 사대부들처럼 사세요.”“나는 조선의 사대부들과 싸우는 게 아니오. 나는 내 몸의 이상(理想)과 싸우는 중이오.” 이하응은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듯 까무룩 잠겨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새벽까지 난을 치며 밤을 새운 남편이다. 차라리 조선의 사대부들 틈에 끼어 일신의 입신양명을 하는 일이라면 쉬울 것인데 남편의 서원(誓願)은 조선이라는 거대한 이상 때문에 하늘의 달처럼 끝내 손에 쥘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왕족의 혈손으로 태어나서 가슴의 불꽃을 방 안에 묵혀둘 수는 없었다. 종이의 묵란. 검은 꽃. 석파란은 남편이 붓을 들면 방 안에서 활활 타오르다가 붓을 내리면 열기가 빠지면서 남은 시커먼 재처럼 변했다. 가슴에 불꽃의 인을 박듯이 얼마나 많은 불꽃을 피우고 재를 만져야 이루어질까. 남편 방의 수천 장의 파지들을 차라리 불쏘시개로 태워 버리고 싶은 마음도 수백 번이었다. 그러다가 묵란이 남편 생을 붙잡고 있는 유일한 힘이란 걸 알게 된 건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걸 뺏는 날에는 남편이 어쩌면 방 안에서 시름시름 죽어갈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조대비는 일전에 사가에 갔다가 가져온 두루마리를 천천히 펼쳤다. 종이를 펼치자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방바닥이 환해졌다.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묵란이었다. 검은 꽃은 노란 방바닥과 잘 어울렸다. 나인들이 숨죽인 얼굴로 조대비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까지 이처럼 오래 쳐다본 묵란은 없었느니라. 전혀 심심하지 않았고 권태로움을 몰랐으며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해 있던 시간 속에서 지극한 평화를 느꼈느니라.”조대비는 난초 한 포기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난초의 고고한 자태를 속되지 않은 아름다움이라고 명명해도 뭔가 부족함이 있었다. 흑백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려는 긴장감 때문에 타인의 눈길을 끌어당기지만 거기에는 어떤 결핍이 있었다. 지나친 긴장은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데, 그게 뭘까? 현실과 이상의 부대낌이랄까. 세상이 괴로우니 천국을 찾는 것처럼. 묵란의 주인은 하늘을 향해 자유롭지만 지극히 제한된 자유, 구속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 묵란은 결코 기녀의 것이 아니다. 묵란을 건네주었던 조카 조성하의 말은 틀렸다. 남의 시선을 끌면서도 숨이 막힐 듯 절제된 의지를 교방의 기녀가 알 리 없었다. 혹시 궁중에서 유출된 그림이거나 적어도 궁중 생활을 아는 사람의 묵란은 아닐까?이 묵란은 날 선 새벽에 깃을 치는 새 같구나. 그리고 이 묵란의 주인은 겹겹 속에 숨은 고갱이처럼 보이는구나. 남의 눈에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야심만만한 사람. 그를 한 번 보고 싶구나. 낯설지 않은 감정이었다.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은 기질이 비슷하거나 처지가 비슷한 사람이리라. 조대비는 천천히 되뇌었다.
3장 네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다
이하응이 조성하의 집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어지럽던 눈발은 그쳤다. 조성하가 달려 나와 이하응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했다. 화조도 병풍 앞에 앉아 있던 조대비의 얼굴은 길게 늘어진 주렴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주렴을 거두어라.”조성하가 조심조심 걸어와 주렴을 걷었다.“장안에 유명한 석파란을 모르고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망극하옵니다. 마마를 위해 준비한 꽃이옵니다. 늦봄에 피는 혜란이옵니다. 소신이 오늘 새벽에 새벽빛을 따라 달라지는 방 안의 음영을 넣어 그리며 마마를 생각했사옵니다.”“새벽과 함께 그렸다니 고맙습니다.”조대비의 눈가에 슬쩍 물기가 스쳤다. 이하응은 보기 드문 여장부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소신은 마마께 진심을 사러 왔습니다. 소신에게 진심을 파시겠습니까.”하하하, 느닷없이 터지는 여걸의 웃음이었다.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요. 진심으로 말하면 통할 거라고 믿는 사람과 진심이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진심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소신은 첫 번째 사람이옵니다.”“나는 세 번째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진심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만큼 정성을 다했을 터이고 상처가 더 많았겠지요.”“소신은 파락호로 살다 보니 세상인심을 겪을 만큼 겪었고, 이제는 진심에 승부를 걸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하지만 없는 진심을 어찌 팔겠습니까.”조대비는 대화가 무르익어도 상대에게 거리를 두는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그때 조성하가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석파란이 드러났다. 이하응은 벌떡 일어나 조대비를 향해 삼배를 했다. “어찌 소신의 묵란을…….”“이 그림의 화제(畵題)를 인연이라 붙여도 되겠습니까.”“망극하옵니다.”“나는 석파란을 얻었지만 그대에게 줄 것이 없어요.”그 후 조대비는 이하응을 자주 불러 자신이 홀로 삭여야만 했던 시간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이하응이 영원한 동지가 될 수 있는지를 시험했다. 이하응에게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기회가 필요했고 조대비에게는 뒤를 봐줄 정치인이 필요했다.“흥선군은 아들이 많지요?”“둘이옵니다. 첫째는 열아홉이고 둘째는 열두 살이옵니다.” 다음 날 조성하의 집에서 조대비와 이하응의 아들들이 마주 앉았다. 그날 조대비의 눈길은 차남 재황에게 꽂혔다. 얼마 후 풍양 조씨 집안의 증조부 기일에 조대비는 조성하의 집으로 떡을 담은 함지를 보내왔고, 조성하는 그 떡함지를 이하응의 집으로 보냈다. 이하응은 보자기에다 큰절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었다. 눈보다 흰 백설기였고 각이 분명한 네모난 떡이었다. 떡 안에는 어보(국새)가 들어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조대비가 보낸 것이었다. 천하의 김병학이라도 어보가 없으면 왕을 세울 수 없었다. ***초저녁달이 선명해졌을 때 대궐문이 조용히 열렸다. 열린 문은 대신들이 드나드는 금호문도 아니었고 왕이 드나드는 돈화문도 아니었다. 궁궐의 나인들이 내명부에 관한 일이 있을 때 드나드는 비밀의 문이었다. 이하응은 상궁의 안내를 받아 대비전으로 들어섰다. “대신들이 만인소를 올렸다면서요.”대원군의 서원 철폐 선언은 조선 사회의 근본을 건드린 것이었다. “서원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농민들이옵니다. 그들이 느끼고 그들이 울었습니다. 백성을 괴롭히는 자라면 소신은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그렇다고 서원을 전부 없애는 것은 과하지 않겠습니까. 명실공히 몇 개는 남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 없애려면 희생이 필요할 텐데요. 타협이 어떻습니까.”“소신에게 더 이상의 타협은 없사옵니다.”“이 나라 국부(國父)의 뜻이 그러하다면.”대비전을 나온 이하응은 희정당으로 들었다. 이하응이 방문을 열고 허리를 굽히면서 들어오자 고종은 반색을 하며 아버지를 맞았다. 이하응이 신하의 예를 표하고자 했으나 고종이 원치 않았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마주 앉았다. 이하응은 아들이 왕이 되던 날을 떠올렸다. 서학의 신도, 동학의 신도 왕실 문제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소원을 이룬 사람은 오직 이하응뿐이었다. 그날은 삼남지방에 민란이 한꺼번에 터진 날이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민란이 터졌고, 한양에서도 대대적인 농민 시위가 있었다. 수문군들이 하늘을 향해 총을 마구 쏘아대도 농민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대궐문을 지키던 수문군들은 밀려드는 농민들 때문에 겁에 질려 대궐 안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김병학은 창덕궁 앞에서 수십 명의 주검을 본 후에야 수문군들을 향해 총을 쏘지 말라고 지시했다. 총으로 해결될 일이 아님을 눈치챘던 것이다. 총을 쏠수록 군중은 광포해졌다. 농민들의 함성으로 삼남지방이 쩡쩡 울리던 날, 철종은 마지막 숨을 힘들게 내쉬었다. 그날 조대비는 이하응을 은밀히 조성하의 집으로 불렀다. 조대비와 독대한 이하응은 곧장 김병학의 집으로 갔다. 사면초가에 몰린 김병학은 이하응과 오래도록 밀담을 나누었다. 김병학은 정권을 넘겨주는 대신 자신의 딸을 국모로 삼아줄 것을 요구했다. 이하응은 김병학의 딸을 며느리로 삼겠다고 약조했다. 김병학의 도움으로 왕위 이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국상을 알리고 나서야 농민들은 흩어졌다. ‘역시 처세에 능한 김병학이야.’이하응은 고소했다. 천지가 개벽을 한다 해도 안동 김씨 가문의 딸을 궁궐에 들일 수는 없었다. 권력은 아들과도 나누는 법이 아니었다. 김씨 가문의 목숨들을 구걸해야 하는 마당에 감히 내게 거래를 하다니. 이하응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김병학은 거래를 하기에는 때가 늦었고 안동 김씨 가문의 명줄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 이하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김병학의 얼굴에는 아직 권력자의 오만이 남아 있었고, 권력을 누린 한때를 쉽게 잊지 못하고 있었다.고종은 고개를 끄떡이며 서안 위 만인소를 쳐다보았다. 만 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는 길고 길었다.“전하! 서원 철폐는 아니 되옵니다!”궁궐 안팎에서 만 명의 고함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홍복의 신하들과 성균관 유생들이었다.대궐 처마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하응이 걸어 나왔다. 대신들은 이하응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맨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김병학이었다. 김병학 좌우로 김 씨 가문의 사내들이 앉아 있었다. “나 흥선군은 전하의 옥음을 전하오!”이하응이 대신들을 향해 소리쳤다. 대신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왕의 말을 직접 듣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김병학이 말했다.“조선 역사에서 임금의 뜻을 그 아비가 전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그러나 김병학을 바라보는 이하응의 시선은 싸늘했다. 이하응이 원하는 것이 멸문지화임을 눈치챈 김병학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김병학은 신하의 예를 갖추며 포복했다.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김병학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백성 없는 나라는 유령의 나라! 학문을 기리는 서원에서 성현의 정신은 사라지고 허울뿐인 제사만 남았다.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부정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서원을 모두 없애노라.”“서원을 없애는 것은 조선의 정신을 없애는 겁니다! 서원 철폐는 아니 되옵니다!”신하들이 일제히 외쳤다.“지금 조선의 정신이라 했는가? 무엇이 조선의 정신인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성리학자는 앞으로 나오라!”신하들은 말없이 엎드렸다. 진정 한 사람도 없는가! 이하응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점점 커졌다. 이하응은 몹시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고, 대신들은 강한 두려움을 느꼈다. 조대비를 기다렸지만 조대비는 나타나지 않았고, 어린 왕을 기다렸지만 어린 왕은 침전에 있었다. 조대비의 수렴청정은 어린 왕을 세우는 명분이었고, 이하응의 서원 철폐는 조선을 재건하는 명분이었다.이하응은 오른손을 들어 대궐 문밖을 가리켰다. 창덕궁 앞에는 성균관 대사성과 천 명의 유생들이 앉아 있었다.“오늘
저 자리에는 농민들이 아니라 유생들이 있다. 천지가 개벽해서 저세상의 공자가 부활한다 해도 내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다. 부정부패한 서원 육백 개를 모조리 철폐하고 사십칠 개만 남길 것이니 그리 알라!”“그런 법이 어디 있나이까!”“내가 조선의 법이니라!”이하응은 대신들을 향해 크게 외치며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