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품격
석산 지음 | 북오션
리더의 품격
석산 지음
북오션 / 2012년 8월 / 416쪽 / 17,000원
제1대 태조 - 상자 밖에서 생각하라
이성계는 1335년 이자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성계의 조상인 전주 이씨들은 일찍이 함경도 영흥 지방으로 이주해 살았으나, 이 지역을 원이 강탈해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이자춘을 천호(촌장)로 임명했다. 그 당시 신흥국가인 명이 일어나 원을 압박하고 있었다. 원나라가 점차 기울어 가자 이자춘은 고려가 1356년 쌍성총관부를 치고 원에게 빼앗긴 땅을 100년 만에 되찾는 것을 돕는다. 고려 공민왕은 그 공을 인정하여 이자춘에게 병마사를 제수하여 함경도 일대를 다스리게 한다. 이자춘이 죽은 후에는 아들 이성계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성계는 전국의 변방을 돌며 여진족과 왜구를 섬멸하면서 백성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큰 전쟁에서 이길 때마다 직급이 올라 변방의 이름 없는 장수에서 1388년 고려의 수상인 문하시중의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까지 오른다.
당시 새로운 왕조를 세운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고려에 요구했다. 고려 우왕과 최영 장군은 명의 속국이 될 수 없다며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친명파인 이성계가 반대했다. 끊임없는 전쟁과 권신들의 수탈로 백성들이 헐벗고 있는데, 대규모 전쟁을 일으킬 여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우왕이 요동 정벌 명령을 내렸지만, 이성계는 요동정벌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압록강 중간의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여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1392년 왕의 자리에 올라 조선왕조 시대를 활짝 열었다. 고려의 지배층이던 귀족이 물러간 자리에 신진사대부가 개국공신으로 들어앉았고, 이들이 조선 초기를 이끌며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 관료의 모태가 되었다.
“변방의 무장 출신에 불과한 이성계가 어떻게 고려의 귀족 사회를 딛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 안정적인사회에서는 정답이 필요하나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현답이 필요하다는 게 그 답일 것이다. 현답은 목적의 개개 사건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건들이 야기하는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고 전체 사건의 해결에 필수적인 요소를 파악한다. 당시 중원은 명이 원의 권력을 대체하는 시기였다. 고려의 권문세가들은 이를 보지 못했으나 이성계는 이를 간파했고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최영 장군은 이성계 못지않은 용맹성과 황금을 돌처럼 보는 청렴성을 지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민중에게 미래를 기댈 만한 영웅의 자질을 보여주지 못했다. 전통 귀족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기 때문이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도 프레임 밖에서 길을 찾는 이성계와 달리 고려라는 프레임 안에서 길을 찾고자 했다. 이성계는 무치의 귀족 사회인 고려를 문치의 사대부 사회로 바꾸겠다는 웅대한 비전을 하나씩 실천해나갔다. 그리고 비전이 구체화되는 큼직한 정책을 터뜨렸다. 그는 고려의 수백 년 병폐인 토지 제도의 문란을 일거에 해결하고, 소수 귀족들을 제외한 전 국민적 환호를 받게 되었다. 때문에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 왕조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제3대 태종 - 결과에만 집중하라
이성계는 고향에서 얻은 정비 한씨에게서 6남 2녀, 후에 개경에서 얻은 계비 강씨 사이에 2남(방번, 방석) 1녀를 두었다. 강씨는 자기 소생으로 세자를 삼으려고 이성계와 정도전을 움직였다. 그 결과 이성계가 왕이 된 지 한 달 만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다. 이 처사에 한씨 소생 왕자들이 크게 불만을 품게 된다. 특히 이방원은 이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방원의 나이 26세였다. 왜 방원은 가족주의를 주요 가치로 삼는 유교의 나라를 열어놓고도 그 가치를 뒤집는 골육상쟁을 일으켰을까? 고려왕조가 문을 닫고 조선왕조가 열리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이방원이었다. 그는 심지어 측근을 시켜 정몽주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세자 자리가 엉뚱하게 강씨 소생 방석에게 돌아갔다. 이 배후에는 이성계의 신임을 받는 정도전이 있었다. 정도전은 강하고 불같은 성격의 방원이 왕이 될 경우 조선이 신권중심이 아니라 왕권 일변도로 나갈 것을 우려해 방석을 지지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지지하며 꿈꾸었던 나라란 권력의 중심을 군주가 아닌 현명한 신하들이 갖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달랐다. 그는 왕권을 위해 공신과 친척은 물론, 가족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두 사람은 결코 같이 갈 수 없었다. 결국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함께 강씨 소생의 방번과 방석 형제를 모두 참살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려 했다. 주위에서는 이방원을 왕으로 추천했으나 본인은 고사하며 둘째 형 이방과를 추천하였다. 이방과는 즉위하여 조선 2대왕 정종이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왕위는 이방원에게 가기 위한 징검다리임을 잘 알고 처신했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왕의 꿈을 꾼 사람이 방원 바로 위의 형인 넷째 방간이다. 방간은 정종 2년 정월, 사병을 동원해 방원을 공격했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방간을 죽이고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방원은 늙고 연로한 태조를 찾아가 인사했다. 태조는 골육상쟁을 꾸짖었다. 하지만 이방원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더 강력한 왕권 강화책을 내놓았다. 수백년간 이어져온 왕족과 귀족의 사병 집단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방원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사병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 과거에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하려 하자, “사병은 평소 국방비 부담을 줄여주고, 변란이 있을 때 병사를 동원하고 충원하는 데 용이하다.”는 명분을 들어 반대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군권을 쥔 이후에 그의 사병 혁파 명분은 “국가의 큰 권세인 병권을 분산해서는 안 된다. 통합해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이방원에게 대의명분은 오로지 목적을 위해 필요한 수단에 불과했다.
태종 같은 사람은 인정에 휘둘러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 그는 14년간 장남 양녕을 세자로 책봉해놓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양녕은 왕 노릇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태종은 셋째 아들 충녕이 왕재임을 간파하여 첫째인 양녕을 내치고, 둘째인 효령까지 제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건재할 때 충녕을 왕에 세워야 왕자 간의 분쟁을 막고, 노회한 신하들로부터 왕권을 농락당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는 평생 심복인 이숙번을 포함하여 양녕 주변의 인물들을 잘라낸 후 태종 18년 양녕을 세자에서 폐위했다. 그 뒤 충녕대군을 세자에 앉히고 3개월 후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그는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도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그냥 두지 않았다. 여기에 위배되면 평생 동지는 물론 세종의 처가까지 화를 입었다. 그 결과 태종은 조선의 기틀을 닦고, 세계 어느 나라 임금보다 훌륭한 세종을 후임자로 세울 수 있었다.
제4대 세종 - 군주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세종은 젊은 나이인 22세에 왕이 되었다. 조선왕조가 탄생한 지 30년이 채 안 된 때였다. 오랜 가뭄으로 백성의 1/3 가량이 기아에 시달려 죽거나 유랑민이 되었다. 이런 난국을 앞에 두고 세종은 자기가 왕 노릇을 하는 이유를 백성의 행복에서 찾았고, 재위 32년간 그 이유에 충실했다. 왕이 국가와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면 ‘짐이 곧 국가’가 되어 왕이 백성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다. 세종은 국가를 이루는 백성과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켰다. 세종이 말하는 백성은 양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선 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이었다. 세종에게는 천민조차도 ‘하늘이 낸 백성’이었다. 그는 삼복법을 만들어 비록 노비가 사형 받을 죄를 저질렀다 해도 반드시 삼심을 거치도록 했다. 또한 주인이 함부로 노비를 학대하고 벌을 내리면 처벌받게 하였다. 세종은 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벌일 때도 천민까지 불러 똑같이 공경했다. 힘없는 백성에게 은전도 많이 베풀었다. 사면령을 자주 내리고, 징발된 군인들은 임기를 채우기 전에 귀향시키기도 하였다. 그러자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임금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의 기강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세종은 할 수만 있으면 백성들을 어루만지려 했다.
세종은 인재를 골고루 등용했다. 조선은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엄격한 사회였다. 그런데도 신분의 벽을 깨고 인재를 등용했다. 왕의 인재 발탁 기준은 오직 하나, 그 일을 해낼 수 있느냐이다. 그가 어느 가문이든, 어느 학파든, 어느 지방 출신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세종이 발탁한 인재 중 대표적인 인물이 동래현 노비 출신인 장영실이다. 장영실은 손재주가 좋아 관청 내 무기는 물론, 농가의 농기구까지 못 고치는 게 없었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던 해에도 동래현만큼은 장영실이 새로 만든 물길과 농기구 덕분에 풍년이 들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세종이 간절히 찾던 인재였다. 세종은 즉시 장영실을 불러 벼슬을 내리고자 했다. 하지만 신하들 대부분이 극력으로 반대했다. 노비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심지어 세종의 아버지 태종까지 나서서 반대했다. 하지만 세종은 아버지를 설득하면서 기어이 장영실에게 벼슬을 내려, 항상 자기 곁에 두었다. 세종은 신분과 유능함이 별개임을 익히 알았다. 임금이 신분에 매여 유능한 사람을 제대로 고르느냐 못 고르느냐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다. 주나라 문왕은 늙은 낚시꾼 강태공을 얻어 천하를 건졌고, 유비도 초야에 묻혀 있던 제갈공명을 삼고초려 끝에 자기 곁에 둠으로써 천하를 도모하였다.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 그래서 리더에게 인사가 만사이다. 만일 세종이 장영실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장영실은 동래에서 노비로 살다 죽었을 것이고, 세종 역시 과학 문명의 황금기를 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식 의사소통의 특징은 의논과 수렴, 그리고 결단에 있다. 세종은 독단의 정치가 아니라 공론의 정치를 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백관이 교대로 왕과 정사를 논하는 윤대법을 만들었다. 보통 지식이 뛰어난 왕은 주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보다 부족한 신하들의 견해를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었다. 신하가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래서 신하들은 자기 소신과 다른 결론이 나도 전심을 다해 동참했다. 세종은 신하가 임금의 의중을 살피며 대세를 추종하는 회의 태도를 싫어했다. 틀릴망정 왕의 면전에서도 과감하게 쟁간하는 신하들을 좋아했다. 세종은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신하들과 평등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사리사욕으로 법과 제도를 변경하려 할 때, 내시들이 교묘하게 의사소통 과정을 왜곡시킬 때와 같이 공적인 분야에서는 냉정했다. 여진족이 북방 지역에 수시로 침입하자, 신하들이 별 쓸모없는 땅이라고 포기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세종은 한마디로 거부하고 평안도 절제사 이천을 시켜 만주 깊숙한 곳까지 여진족을 추격해서 치게 했다. 너그러울 때와 단호할 때를 잘 구분하는 현명한 리더였던 것이다.
제7대 세조 - 오직 목적이 이끄는 삶
세종이 1450년 승하하고, 뒤이어 즉위한 문종도 2년 3개월 만인 1452년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집현전 학사들과 영의정 김종서, 좌의정 황보인에게 ‘어린 임금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왕이 된 어린 단종을 제대로 지켜줄 궁중 내의 어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신하들은 문종의 고명을 받드는 고명대신파와 왕족을 대표하는 수양대군파로 나뉘었다. 고명대신들은 수양의 개입을 차단하고 단종을 지켜야 한다며 의정부의 권한을 강화했다. 세종 때 정착된 왕권이 단종에 이르러 크게 약화되고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권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고명대신들이 안평대군과 손잡고 본격적으로 수양을 압박하자 수양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수양은 단종 원년(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관, 안평대군을 제거하고, 왕권과 신권을 장악했다. 수양은 단종을 당장 폐위시키지는 않았지만, 단종에게 충성하는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1년 9개월 뒤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함으로써 수양은 조선의 제7대 임금 세조가 되었다. 태종을 제일 많이 닮은 세조는 자기의 권력 구도에 장애가 되는 인물을 정확히 파악하여 거침없이 제거했다. 두 임금의 차이점은 태종은 거시적 원칙에 따라 과감하게 최측근도 버린 반면, 세조는 측근 중심의 정치를 펼쳤다는 것이다. 세조의 측근으로는 지략을 제공하는 한명회, 권람 등의 모사 그룹과 홍달손, 양정 등 무력을 제공하는 무사 그룹이 있었다. 이 두 그룹이 좌우에 포진하여 계유정난을 성공시켰다.
왕이 되기 위해 형인 금성대군과 조카인 단종을 죽인 세조에 대해 백성들은 패륜군주라고 수군댔다. 흉흉한 민심을 누르기 위해 세조는 왕권을 더욱 강화했다. 먼저 충절의 학자를 배출해 온 집현전을 없애고, 정국 현안을 토론하던 경연도 폐지했다. 국정의 문제를 지적하고 규제하던 대간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대신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했다. 세조는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누구라도 가차 없이 제거했지만 자신을 따르는 인물에게는 관대했다. 계유정난 공신 중 양정은 지나가는 말로 세조의 퇴위에 대해 몇 마디 했다가 바로 참형당했으나, 공신 홍윤성은 숙부를 구타해 죽이고도 세조의 몇 마디 나무람으로 끝났다. 세조는 조정은 공신들을 중심으로 방어막을 쳤고, 궁궐 밖 백성들은 호패법과 오가작통법으로 철저히 통제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은 군사부일체와 장유유서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혈통 중심 사회에서 가족을 해치는 짓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최악의 패륜이다. 이런 짓을 저지른 사람이 나라를 통치하다 보니 조선인의 정체성과 기존 가치관에 혼란이 왔다. 태종이 세종의 시대를 위해 공신을 제거했다면, 세조는 공신들의 이익을 위해 왕권을 이용했다. 이에 따라 태종 때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삶이 나날이 좋아졌다면, 세조 통치기는 공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백성들이 동원되며 나날이 고달파졌다. 태종이나 세조 모두 권력 제일주의 임금이지만, 그 권력을 사용하는 방향은 달랐다. 태종이 왕조의 번영을 위한 기초 닦이에 몰두했다면 세조는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데 더 집중했다.
제9대 성종 -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왕
예종이 승하하자 재상들은 예종의 어머니이자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에게 달려갔다. 그 자리에서 정희왕후는 ‘세조의 유명’이라며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을 지목했다. 재상 한명회가 자을산군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입지를 튼튼하게 보호해줄 새로운 왕으로 자을산군이 적임자였다. 사실 자을산군은 왕위 계승 서열 3위로 왕이 되리라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처럼 정통성이 떨어지는 자을산군을 왕으로 세워 놓고 스무 살이 될 때까지 8년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이 기간 동안 공신들이 조정을 쥐고 흔들었으나 어린 성종(자을산군)은 나서지 않고 자신의 기회를 조성해나갔다. 공신들과 불필요하게 부딪치지 않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대외적 유화 정책을 펼쳤는데, 즉위 직후 호패법을 폐지해 민간에 대한 관청의 감시를 줄여주고, 고리대금업인 내수사의 장리소 560개를 절반으로 줄여 235개만 남겼다. 또한 전라도에 뽕나무 밭을 조성하고, 황해도에 목화밭을 만들어 지역에 맞는 특산물을 생산하도록 장려했으며, 각 도마다 잠실을 만들어 농민들이 농사 외에 잠업을 병행해 소득이 향상되도록 했다.
성종은 25년간 통치하면서 넓은 도량을 지닌 리더의 족적을 많이 남겼다. 성종 3년 한 신하가 궁중에서 사냥용으로 매를 사육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지금 온 나라가 가뭄으로 난리입니다. 이러한데 전하께서 궁중에서 매나 기르십니다. 이는 놀기 좋아하는 군주라는 증거이며 군주의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성종은 이런 불경스런 말에 화를 내는 대신 궁궐 안의 매를 모두 날려 보냈다. “옛 말에 하늘의 태양과 달과 같이 임금이 잘못하면 일식 월식과 같다 했소. 앞으로 매를 기르지 않으리라.” 또 한번은 고위 관료가 지방을 순시하다가 비단 열 필을 뇌물로 받고 수령의 잘못을 숨겨주었다. 성종은 그를 편전으로 불렀다. “듣자하니 그대가 이 물건을 매우 좋아한다기에 준비해두었소.” 그렇게 말하고 관료가 받았던 비단과 똑같은 비단을 내놓았다. 관료는 사색이 되어 바닥에 엎드렸다.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죽여주옵소서.” 이에 성종이 다가가 그를 껴안아 일으켜주었다. “무엇이 잘못인지 깨달았으면 다시 그 죄를 범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오.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 자기로 인한 시빗거리는 빨리 없애 백성의 신뢰를 받았고, 신하의 잘못은 용서해주되 다시 재발하지 않게 하여 충성스러운 신하를 확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