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사문화 여행
최정훈 외 지음 | 북허브
조선시대 역사문화 여행
최정훈 외 지음
북허브 / 2013년 7월 / 357쪽 / 15,000원
조선의 왕
왕의 성장과 교육 - 공부 게을리하면 폐위는 당연지사
조선 시대의 왕위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세습이 된다고는 하지만 왕위를 물려받는 것은 아니었다. 왕으로서 국정을 이끌어 갈 자격을 갖춰야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세자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선행 조건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왕으로서의 덕목을 갖추기 위한 교육이 매우 중요했다. 이렇다 보니 세자를 향한 왕과 왕비의 교육열과 정성은 실로 대단했다.
왕실에서는 임금이나 세자의 첫아들인 원자가 태어남과 동시에 보양청을 설치해 보호와 양육을 담당하게 했다. 원자는 나라의 근본으로, 성군이 되고 안 되고는 평소 쌓은 교양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바른 말과 바른 일을 보고 들으며 자라야 왕위에 오른 뒤에도 저절로 인의예지의 덕이 몸에 배고, 이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국가가 태평하다고 믿었다. 3∼4세가 되면 유치원에 해당하는 강학청에서 <효경>, <소학>, <동몽선습> 등을 가르쳤다. 강학청은 세자 책봉 전 조기 교육을 위한 임시기구로 원자가 글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설치된다. 원자는 강학청에서 매일 아침(조강), 점심(주강), 저녁(석강) 45분 정도씩 정규적으로 수업을 받았다.
수업 방식은 스승이 가르치는 대로 한문의 음과 뜻을 따라 외우는 것이었다. 어린 왕세자가 유학의 심오한 원리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해서다. 한마디로 암기 교육이었던 셈이다. 원자가 15세쯤 되었을 때, 조정의 대신들은 원자의 나이와 학문 수준이 세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되면 왕에게 세자로 책봉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면 왕이 결정하여 봄철 좋은 날을 택해 책봉례를 행한다.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은 세자에게 죽책문, 교명문, 세자인을 차례로 전한다. 죽책문은 책봉을 공식화하는 임명장이고, 교명문은 훈계문이며, 세자인은 세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이다. 조정의 백관을 모아 놓고 책봉례를 거행한 후 바로 종묘에 이 사실을 고하고 팔도에 알린다. 조상과 만백성에게 세자의 임명을 선포하는 것이다.
책봉받은 세자는 성균관 입학례를 행한다. 길일을 잡아 성균관에 가서 공자에게 절을 하고, 스승이 될 박사에게 제자의 예를 갖춘다. 실제로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를 입학례라고 하는 이유는 세자가 유학도임을 만천하에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균관 입학례를 마친 왕세자는 세자시강원에서 본격적으로 임금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배웠다. 시강원에 소속된 20명의 스승이 교육을 전담했다. 정 1품부터 7품까지 조선의 최고 석학 20명이 오직 왕세자 한 명을 가르쳤다. 정 1품 영의정이 왕세자의 사로 임명되었고, 좌의정이나 우의정 중 한 명이 부가 되었다. 세자는 <효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주역>, <예기>, <춘추좌전> 등 유교의 옛 경전을 익혔다. 수업은 전날 배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책을 덮고 외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배운 것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호된 질책은 물론이고 수업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또 매달 두 차례씩 그동안 배운 내용을 20명의 스승 앞에서 복습하는 시험도 치렀다. 이를 회강이라 한다.
배움의 목적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는 효제의 도리를 깨쳐 몸에 익히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왕세자는 유교 경전을 공부하기에 앞서 매일 아침 어른께 문안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왕세자는 아침마다 왕의 수라상을 미리 살피는 시선을 빼먹지 않았다. 만약 왕이나 왕비, 대비 등이 병환 중이라면 약을 먼저 맛보는 시탕을 해야 했다. 시선과 시탕을 마친 이후에야 조강이 시작되었다.
왕세자는 제왕으로서의 덕목을 갖추기 위해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었지만, 만일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처벌도 감수해야 했다. 태종의 왕세자인 양녕대군은 공부를 게을리하여 왕세자의 자리에서 폐위당하고 동생인 충녕대군(세종)에게 세자의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왕의 수라 - 하루 두 끼의 식사와 세 차례의 간식
왕의 일상생활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건강 유지에 필수적인 세 끼의 식사라고 할 수 있다. 밥과 국이 기본이지만 질과 가짓수에서 왕의 식사는 일반적인 밥상과 차별화되었다. 이 때문에 왕실에서는 수라 상차림을 매우 중히 여겨, 사옹원 관리들이 신선하고 품질 좋은 어류, 채소, 육류 등을 공급하면 소주방에 소속된 궁녀들이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올렸다. 왕의 식사는 조수라(아침), 주수라(점심), 석수라(저녁)의 세 끼 식사와 새벽녘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드는 자릿조반, 오후 늦게 먹는 낮것, 밤늦은 시간에 먹는 밤참 등 간식으로 구분되었다. 간식은 죽이나 식혜, 다과류가 일반적이었다.
수라상은 왕의 식성에 따라 종류와 양이 달랐다. 그러나 수라상을 차리는 기본 법식은 유지되었다. 수라는 기본 음식 외에 열두 가지 반찬을 올리는 12첩 반상이 원칙이었다. 12첩 반상은 왕과 왕비만 받을 수 있었고, 양반은 9첩 반상이나 7첩, 5첩, 3첩 반상을 이용했다. 기본적인 음식은 국, 김치, 장류, 찌개, 갈비찜, 전골류 등이다. 반찬은 도라지, 호박, 숙주나물 등 삼색 나물과 무생채, 구이, 조림, 산적, 자반, 젓갈, 육회, 생선회, 편육 등이다. 왕과 왕비는 각각 자신의 처소에서, 세자는 동궁에서 식사를 했다. 왕이 식사할 때는 큰방상궁 등 4명의 궁녀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들은 왕이 수라를 들기 전에 먼저 음식 맛을 보는 역할을 했다. 혹시 음식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독성 물질을 가려내기 위함이었다. 궁중어로 ‘기미를 본다’고 해 음식 맛을 보는 상궁을 기미상궁이라 부르기도 했다.
산해진미를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왕 자신의 인생관에 따라 수라상에 오르는 반찬이 달랐다. 산해진미를 즐긴 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검소함을 몸소 실현한 현주도 있었다. <계축일기>를 보면 연산군은 날고기를 좋아해 하루에 소 7마리를 잡게 하기도 했다. 반면 정조는 아침 및 저녁 수라에 반찬 서너 가지만 놓게 했다. 그마저도 작은 접시에 담도록 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아들의 건강이 염려되어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고 핀잔을 주면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은 재물을 아끼고자 함이 아니라 복을 기르고자 함입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할 만큼 수라상마저 알뜰히 한 군주였다.
양반과 서민 생활
관리의 하루 일과 - 새벽별 보고 출근, 하루 12시간 근무
조선 시대 관리들의 아침은 매우 바빴던 모양이다. 매일 아침 소속 부에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는데, 출근 시간이 묘시(오전 5∼7시)여서 새벽부터 서둘렀다. 해가 짧은 겨울에는 진시(오전 7∼9시)로 늦춰지기는 했지만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궁궐에서 일하는 고급 관료, 당상관들은 더욱 골치가 아팠다. 국왕에게 문안하는 새벽 조회, 즉 상참과 조참이 인시(오전 3∼5시)를 전후로 열리기 때문에 조회 전에 대문을 나서야 했다. 그야말로 새벽별을 보면서 출근한 것이다. 하급 관리의 경우에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상하 관계가 엄격했던 만큼 반드시 아랫사람이 일찍 출근해서 윗사람을 기다려야 했다. 윗사람이 출근하면 문 앞까지 나가서 맞이해야 했으니 시대를 막론하고 졸병은 불쌍한 처지였다.
출근하기 싫다고 해서 함부로 결근을 할 수도 없었다. 각 관서의 중ㆍ하급 관리들은 매일 아침 출근부에 서명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출근부를 공좌부라 했는데, 왕은 각 부서의 공좌부를 검사하여 이유 없이 출근하지 않은 관리는 그 이름 밑에 점을 찍었다. 세 번 이상 출근하지 않으면 그 종을 가둬 징계하고, 열 번 이상 출근하지 않으면 부과(관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잘못을 종이에 써서 집 안에 붙여 두는 것)해 후일 인사고과에 반영했다. 만일 결근일이 20일 이상이면 파직시켰다. 그러나 이는 중ㆍ하급 관리에 한했고 당상관은 공좌부를 기록하지 않았다. 고급 관료들을 대우하기 위해 이들의 출근 여부는 의정부에서 감독했다. 이 정도의 품계면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직무에 충실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좌부에 기록된 출근 일수는 관리의 근무 평가와 승진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관리들 중에는 승진을 위해 공좌부를 허위로 기록하거나 조작하는 이도 있었다. 결근한 날에 자신의 이름 밑에 찍힌 점을 지우고 서명을 새로 하는가 하면, 동료가 출근하지 않은 날에는 대신 서명을 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허위로 기록한 사실이 밝혀지면 죗값을 달게 받아야 했다.
공좌부에 서명을 하고 나면 관리의 하루 업무가 시작된다.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관리들은 유시(오후 5∼7시)가 되어야 퇴근을 했다. 겨울에는 2시간 이른 신시(오후 3∼5시)로 퇴근 시간이 앞당겨졌다. 퇴근을 한 관리들은 곧장 집으로 가기도 했지만 때때로 술자리를 만들어 하루의 고단함을 잊었다. 그러나 숙직이라도 걸리는 날이면 술자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숙직은 일반적으로 중ㆍ하급 관리의 몫이었다. 숙직은 굉장히 엄격해서 마음대로 빼먹으면 관직을 박탈하도록 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숙직자의 근무 수칙은 매우 엄격했다. 숙직하는 관리는 군사들을 시켜 방울을 흔들면서 순찰을 돌게 하고, 창고 문에 봉한 순찰 표식을 수시로 살피도록 감독했다. 아침 일찍 새벽별을 보고 출근한 관리는 하루 12시간 이상 업무를 보고, 숙직이 있는 날에는 하룻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게다가 왕의 건강, 왕위 계승 등 왕실의 여러 가지 대소사, 화급한 정치적 현안이 발생하면 근무 시간을 넘겨 밤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농민의 삶 - 국가의 중추 역할 하면서도 각종 노역에 시달려
조선 사회의 지배 계층이 왕과 사대부라면 피지배 계층은 평민(양인, 백성, 상민)과 천민이었다. 이 중 양인은 농업, 공업, 상업 등에 종사하면서 국가의 정치적ㆍ경제적ㆍ군사적 기반을 이루는 역할을 담당했다. 법률상으로는 과거 제도에 응시하여 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법조문일 뿐 실제로는 신분 상승의 길이 막힌 채 각종 노역에 시달리며 일생을 마감했다. 평민의 역할은 국방과 치안의 보호 속에 온갖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평민 가운데 절대다수를 차지한 계층은 농민이다. 이들은 자신이 경작하는 땅에 대해 국가에 토지세를 내야 했다. 세종 26년(1444)부터 실시된 조세 부과의 기준을 보면 수확량의 20분의 1을 내도록 규정했는데, 이는 다시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전분 6등)으로 나누고 풍작, 흉작의 정도에 따라 9등급(연분 9등)으로 나누어 차등해서 내도록 했다.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던 탓에 수확량의 절반을 다시 양반 지주에게 바쳐야 했으니 농사를 지어 봐야 근근이 먹고 사는 정도에 불과했다.
농민은 또한 공납의 의무를 져야 했다. 공납이란 각 지방에 토산물을 할당해 이를 현물로 내는 세금 제도로,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농산물에서부터 가내수공업 제품, 해산물, 과실, 광산물, 조수에 이르기까지 공물의 종류가 다양하다. 지방관과 향리가 공물을 거둬 한양으로 보냈기 때문에 처음부터 부패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또한 현물을 보관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공물의 운반에 필요한 노동력도 제공해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이중고를 겪게 되었다. 공납을 대신 해 주고 농민들로부터 대가를 받는 방납 제도가 생겼지만, 권세가나 관리 등이 이를 악용해 폭리를 취하는 일이 빈번해 농민의 부담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국방의 의무를 지는 군역과 함께 일정 기간 궁궐, 산릉, 제방, 성곽, 도로의 축조나 보수공사 등에 차출되는 노역도 농민의 몫이었다.
호구 통계의 자료인 호적 제도도 농민에게 각종 부담을 지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나라에서 3년에 한 번씩 호적을 작성하고, 16세 이상의 성인에게 호패를 차도록 하여 거주 이전의 자유를 막고 안정적인 재정 수입을 올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농민들은 결국 한곳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고된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풍년을 기원하고 가정의 안녕을 기도하는 세시 풍속을 통해 고단한 삶을 잊는 지혜를 스스로 터득했다.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질박한 문화를 가꿔 나가면서 한민족의 민속 문화를 형성했다. 조선 시대의 농민들은 농민을 중히 여기고 백성의 평안을 중시한 세종 같은 성군을 만나면 그나마 태평성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농민은 지배 계층인 왕과 양반을 위해 일생을 농업에 종사하는 피지배 계층일 뿐이었다. 가족의 노동력으로 일궈 낸 수확으로 한해살이가 가능했지만 천재지변으로 흉년이 들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 지배층이 부패해 당쟁만 일삼고, 관리라는 자들이 농민의 고혈을 짜내는 데 혈안이 되면 농민들은 집과 터전을 잃고 떠돌다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천민의 삶 - 사람 아닌 사람, 노비의 값은 말 1필
신분의 상하 질서가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조선 시대에 천민은 최하층을 이루는 계층이었다. 천민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노비였다. 노비란 남자 종을 가리키는 ‘노’와 여자 종을 일컫는 ‘비’가 합쳐진 말이다. 흔히 종이라 불린 집단이다. 노비의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노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노비는 국가에 예속된 공노비와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가 있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 함께 살면서 농사와 온갖 잡일을 하는 솔거 노비와 주인집 밖에 기거하면서 일정한 공납을 바치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는 독립된 가정을 이루면서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여 수확량의 일부를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사용했다. 외관상으로는 솔거 노비보다 처지가 좋아 보이지만 이들의 경제생활은 솔거 노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들 역시 주인의 마음에 따라 언제든지 솔거 노비로 전락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평생 동안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노비는 집이나 땅처럼 여겨져 양반 사대부들 사이에서 매매되기도 하고 대대로 상속이 가능한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고려 말에는 소나 말보다 가치가 낮아 말 1필의 값이 노비 2∼3명에 해당했다. 조선 시대에 와서 값이 올랐다고는 하나 신분은 매한가지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사노비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 상전은 노비에게 어떤 형벌도 가할 수 있었다. 죽였을 경우에만 해당 관청에 신고해 허가를 받았다.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참혹한 방법으로 노비를 죽였을 때만 상전에게 곤장 60대와 중노동(도형) 1년 또는 곤장 100대의 형벌을 주었다. 그리고 피살된 노비의 가족은 사노비에서 공노비로 바꿔 주었다. 노비는 상전의 모반 음모를 제외한 어떠한 범죄에 대해서도 관아에 고발할 수 없었다. 상전을 고발하는 것은 삼강오륜을 짓밟는 일로 간주되어 교살에 해당하는 중죄로 다스렸다.
조선 시대에는 노비 이외에도 법적 신분은 평민이면서 천민과 같은 지위에 놓인 집단이 있었다. 백정, 광대, 무당, 기녀 등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려 시대에는 법적 신분이 천민이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노비를 제외한 모든 백성을 양인으로 한다는 포용 정책에 따라 양인의 신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보다 많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한 정책의 소산일 뿐 이들의 삶은 천민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의 천민 집단 가운데 백정은 대표적인 천민 계층이다. 조선 시대의 백정은 가축 도살업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TV 사극에서 산발한 긴 머리에 커다란 칼을 들고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죄인의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도 백정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무사들이 형조에 배속되어 회자수라는 직책으로 사형 집행을 맡았다. 이들이 사람을 직접 죽이는 일을 꺼리게 되면서 아예 백정을 선발하여 사형 집행을 맡겼다. 가죽 제품을 만드는 일도 백정의 몫이었다. 이들은 갖바치로 불렸는데 ‘갖’은 가죽을, ‘바치’는 물건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외에도 버드나무로 키나 바구니 등을 만들어 파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나 춤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 떠돌이 광대도 모두 백정으로 불렸다. 백정은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사회적으로 심한 멸시를 받아 외딴 곳에서 집단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백정에 대한 신분적 차별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노비, 백정, 광대, 기녀 등 천민 집단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신분적인 해방을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