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늘 눈치를 보는 걸까
박근영 지음 | 소울메이트
왜 나는 늘 눈치를 보는 걸까
박근영 지음
소울메이트 / 2013년 8월 / 372쪽 / 15,000원
1부 우리는 왜 눈치를 보는가?
생존의 도구였던 사냥 기술과 눈치
언어와 풍속을 모르는 곳에 살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약 그곳에서 사람들과 무사히 어울리고 생필품을 얻을 수 있다면 눈치 덕분일 것이다. 특히 거주지의 언어를 익히기 전까지는, 전적으로 눈치 아니면 운이 있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눈치는 오랫동안 사람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어왔다.
원시인류, 눈치 덕에 살아남다: 원시인류가 식량을 구하는 주요 방법은 사냥이었다. 사냥을 하려면 사냥감의 움직임, 바람의 방향, 미세한 소리에 신경을 쓰면서 사냥꾼 무리의 전략을 알아차리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때문에 사냥꾼에게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융통성 있게 행동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혹시라도 사냥꾼 무리에 눈치 없는 사람이 있어서 혼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바스락거리는 날에는 사냥감을 놓치거나 오히려 공격받을 처지에 놓이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문제 해결에 필요한 비언어적 의사소통과 분위기 파악 능력이 눈치라고 할 수 있다.
원시인류가 사냥 외에 식량을 구하는 다른 방법은 채집이었는데, 채집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무리를 따라 장소를 이동하고,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하면서 다양한 식용식품을 구별하는 것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하는 복잡한 일이었으며, 개인이 혼자서 경험하고 알아가기에는 위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채집을 통해 음식을 섭취하려면 집단 지식을 활용하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학습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이렇듯 눈치는 원시 때부터 기원한 기제이며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해왔다. 한편 불안도 눈치처럼 원시부터 기원한 마음의 상태다. 불안이 높아지면 생각이 멈추는 대신 신체 반응이 활발해진다. 불안은 위험에 처했을 때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는 신체적 반응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눈치와 불안에는 차이점이 있다. 불안이 도망쳐서 살아남으려는 정서적 반응인 데 비해, 눈치는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표물에 접근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하는 원시적인 인지적 기제라는 점이다.
눈치란 무엇인가?: 눈치는 문제와 결과가 명확하지 않을 때 작동한다. 이때 눈치가 작동하는 시간은 아주 짧을 수도 있고 비교적 길 수도 있다. 대개 ‘눈치채다’는 순간적이고 반사적이다. 반면에 ‘눈치 보다’는 상대적으로 지속적이다. 또한 눈치 보기는 습관적일 수도 있고 의도적일 수도 있다. 눈치채기와 눈치 보기는 번갈이 나타나거나 동시에 나타난다.
그러나 눈치채기가 반드시 눈치 보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눈치채기는 사물이나 생물 모두를 대상으로 하지만, 눈치 보기는 대상에 의도가 있다고 여길 때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방에 다녀간 것을 눈치챘다.’ 혹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눈치챘다.’라는 말에서는 ‘눈치채다’가 ‘알아채다’와 같은 의미다. ‘눈치채다’와 ‘알아채다’를 바꾸어 쓸 수 있다는 것은 눈치채기가 알고 생각하는 능력의 초기 단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앞의 두 상황에서 사람들은 방이나 어둠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만약 방이나 어둠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방과 어둠에도 의지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이와 같이 눈치를 보는 대상에 의도와 인격을 부여하는 것이 눈치의 핵심적 특징이다. 이로 인해 전형적인 눈치는 대인관계와 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한다.
아주 오래된 눈치의 역사: 근원으로 보자면 불안의 목적과 눈치의 목적은 다르다. 정상적인 불안은 불안의 대상을 피하라는 신호다. 타당한 불안 신호에 반응하여 실제 위험으로부터 도망쳐서 안전해지면 불안반응은 종료된다. 진짜 불안을 일으키는 상대의 영향에서 벗어났다면, 긴장이 풀리게 되므로 힘이 빠지고 몸이 이완되는 것이 정상이다. 만약 불안이 사라져도 이완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불안은 병이 된다. 반면 눈치는 대상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대상에 접근해 상황을 살펴서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기 때문에 눈치를 보는 사람은 주의가 각성되어 있고 긴장이 지속된다. 만약 아무 이유도 없이 늘 눈치를 보고 있다면 눈치도 병이 된다.
문제는 불안이 필요한 상황과 눈치가 필요한 상황을 마음대로 분리하거나 조절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불안과 눈치가 동시에 활성화되면 쉽게 혼란에 빠진다. 유감스럽게도 현실에서는 불안과 눈치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황을 피할 수 없다. 때문에 도망가고 싶은 불안 속에서 원하지 않는 눈치를 보며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회가 조직화되고 복잡해질수록 눈치와 불안이 얽혀서 만드는 스트레스가 더욱 높아져서 무기력한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원시적 정서 기제인 불안과 원시적 인지 기제인 눈치가 개인과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방식은 매우 비슷하다. 환경적 요인으로 보면 개인이 상황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제한적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러나 비슷한 환경에 처한 사람이라고 해서 똑같은 수준으로 불안해하거나 눈치를 보지는 않는다. 즉 같은 환경임에도 더 불안해하거나 눈치를 보는 것은 개인의 심리적 요인이 문제가 된다는 의미다.
적응하기 위해 눈치 조절하기
사람들이 스스로 눈치를 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아마도 감시 카메라를 곳곳에 설치하고 높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서 눈치를 볼 것이다. 눈치를 본 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을 작게 나누어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하고 책임을 분산시키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일이 무엇이든 별 거리낌 없이 하게 될 것이다.
눈치의 척도는 생존 가능성: 사람들이 정착해서 생활을 하고 제도가 갖춰지자, 눈치의 목적이 개인의 일차적 욕구 충족에서 지배와 복종이라는 집단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농사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쉽게 거주지를 옮길 수 없었다. 식물을 재배하려면 토양과 기후가 좋은 장소를 찾아 땅을 갈고 씨를 뿌려서 물을 대고 수확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도시, 국가가 생겼고 사람들은 집단의 질서를 유지해줄 체제를 만들고 정비했다. 그러자 이러한 것들을 실효성 있게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고, 집단에 원시적 완력이 아닌 사회적 권력의 서열이 생겨났다.
농사로 식량을 얻으려면 계절을 넘기며 기다려야 했다. 때문에 일과 식량의 관계는 즉각적인 보상을 받는 사냥과 달리 매우 지연된 보상 관계로 변했다. 또한 고정된 집단의 서열과 권위에 순응해야 가뭄이 들 때 자신의 경작지에 물을 끌어와서 치수할 수 있거나 경작지를 보호할 수 있는 경비를 받는 등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재빨리 집단 내의 서열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상위 서열자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행동해줄 것이라는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눈치는 사회적 서열을 비교하고 상위 서열자의 의도를 파악해서 그 의도에 맞게 행동하려는 기능을 빠르게 갖춰갔다. 눈치는 기원상 도덕률에 따라 고안된 것이 아니다. 눈치의 척도는 생존 가능성이었다.
일차적 기능은 이렇게 분명하지만, 원시성을 잃은 복잡하고 제도화된 사회 안으로 들어오면, 그 기능이 모호해지고 작용이 혼란스러워진다. 눈치는 이제 순응해야 할 권력의 의도에 따라서 작용의 방향이 변화무쌍해지기 시작한다. 복종해야 할 권력이 선하면 선한 눈치가 되었고, 복종해야 할 권력이 악하면 악한 눈치가 되었다. 눈치는 마치 신속하지만 눈이 먼 인지적 에너지 덩어리처럼 폭주했다.
자발적 복종의 핵심에 있는 눈치: 관리자가 원칙과 규칙을 지키면 눈치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시스템이 관리자의 권력에 봉사하면 눈치는 다양한 문제를 만든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람들은 상위 관리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살피게 된다. 최악의 결과는 불안과 눈치가 폭력과 결합할 때 나온다. 이 조합은 복종을 유도하는 최적의 상태다.
한편 사회적 맥락의 눈치는 관찰학습과 대리학습에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러한 종류의 사회적 학습은 다른 사람이 한 행동이나 결과를 보고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배우는 것인데, 눈치가 없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다. “눈치 없이, 보고도 모르냐?”라는 말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선전이나 일벌백계의 처벌은 눈치 없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 그래서 부당한 권력은 불안과 눈치를 높여서 복종하는 사람을 만든다.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은 강제로 시키지 않아도 권하는 대로 하거나 혹은 권위자의 의도를 지레짐작해서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복종의 문제를 현대심리학의 한복판으로 가져온 사람은 스탠리 밀그램이다. 예일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사회심리학을 가르쳤던 밀그램은 실험실에서 복종의 문제를 다루었고, 『권위에 대한 복종』을 출판했다. 밀그램의 복종 실험 참가자들은 실험자의 지시에 따라 다른 참가자에게 전기충격을 주는 과제를 수행했다. 전기충격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상대 참가자는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전기충격이 실제로 가해진 것은 아니었다. 상대 참가자는 고통 받는 연기를 하는 실험 보조자였다. 그러나 실험 참가자는 실험이 끝날 때까지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진짜 전기충격을 주고 있다고 믿었다. 이 실험 결과 참가자 2/3가량이 권위자의 부당한 지시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다.
밀그램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 대리자 상태가 복종의 핵심이라고 실험 결과를 분석했다. 대리자 상태란 행위자가 자신의 소망이 아니라, 타인의 소망을 대신 수행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밀그램이 말하는 대리자 상태는 조직 내에서 사람들이 눈치껏 처신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전기충격을 주는 것처럼 극단적인 수행은 아니지만,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일상에서 변형된 여러 ‘복종 실험’을 경험한다. 조직이 개인에게 복종을 직접 강요할 수도 있다.
또한 개인이 자발적으로 집단에 복종하기도 한다. 자발적 복종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순응과 동조도 자발적 복종의 한 형태다. 강제적 복종보다 자발적 복종이 눈치를 더욱 강력하게 작동시킨다. 조직은 눈치가 없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친 눈치는 다른 이야기다. 지나치게 눈치를 요구하는 집단은 발전하기 어렵다. 또한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개인도 집단의 효율성과 자신의 능력을 모두 떨어뜨린다. 눈치를 조절해야 하는 이유: 현대인이 ‘지나치게 눈치 보기’의 역기능을 즉각적으로 알 수 없는 이유는 시스템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지면서 서열에 따른 사회적 역할과 직무 기능이 세분화되었기 때문이다. 앞의 밀그램의 복종 실험에서 참가자들이 터무니없이 쉽게 복종한 것도 전기충격 과정을 분업화한 조건 때문이었다. 참가자의 역할을 세분화해서 한 사람은 전기충격을 지시하고, 또 한 사람은 결정자의 지시를 중간에서 전달하고, 다른 한 사람은 스위치를 누르는 일만 하도록 분담했더니, 복종하는 사람의 비율은 높아지고 각 개인이 느끼는 책임감은 현저히 낮아졌다.
산업화와 분업화의 가속이 사람을 비인격화하고 개인을 부품화했다는 문명 비평은 익숙하다. 그럼에도 밀그램의 실험 결과는 서글프다. 선의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눈치를 보다가 자발적으로 악행에 복종하는 구체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서열화된 복잡한 사회에서는 눈치가 유용하게 쓰일지 혹은 악용될지가 조직의 건전성에 달려 있다. 개인이 속한 집단, 일터, 사회, 제도가 모두 건전하다면, 개인이 조직과 타인의 눈치를 살펴서 잘 학습하기만 해도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런 요구를 충족시킬 만큼 건강하기만 한 사회는 과거 어느 시대에도 실현된 적이 없다.
그런데 현실은 단일 가치만으로는 건전성을 판단할 수 없는 혼합적인 곳이다. 또한 직선적인 인과관계만으로 예측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양성과 불확실성 속에서는 각 개인이 잘못되고 불필요한 눈치를 조절하고 멈출 수 있어야 비로소 건강한 눈치가 유지된다. 즉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눈치를 어떻게 잘 보느냐’보다는 ‘눈치를 어떻게 조절하고 멈추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2부 삶을 힘들게 하는 눈치증후군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보는 눈치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대중 앞에서 말을 할 때 유난히 불안해하는 사람은 눈치를 많이 보기 때문일까? 흔히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적 불안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불안을 줄이고 불안을 회피하는 데만 몰두하기 때문에 제대로 주변 상황을 살피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여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불안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실제 반응을 살필 눈치가 거의 정지된 상태이며 경험에 대한 개방성도 매우 낮다. 이런 이유로 사회불안증은 폐쇄적인 눈치에 속한다.
남과 비교하느라고 보는 눈치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사람이나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본다. 이런 식으로 보는 눈치는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비교하는 눈치는 자신을 지치고 피곤하게 하고, 비하하는 눈치는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해친다. 2가지 눈치 모두 우울증과 관련 있으며 소진적이다.
의존심 때문에 보는 눈치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사람들은 왜 남의 눈치를 많이 볼까? 자기가 부족하고 자기 기준이 모호하며 주장하기를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동적인 사람들은 자신감과 자기존중감이 낮다.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사람들은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낮고, 이별과 상실에 대한 스트레스가 매우 높다. 자기가 없는 의존적인 눈치는 의존성 성격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관심을 끌려고 보는 눈치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고 싶은 사람은 눈치를 많이 본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아야만 비로소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므로, 의존성 성격과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남의 요구에 응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타인을 조종하고자 한다는 점이 의존성 성격과는 다르다. 또한 이들은 여러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변신과 변덕을 반복한다. 이러한 특징은 연극성 성격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어느 편인지 알려고 보는 눈치
행동이 극단적이고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대인관계에서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눈치도 극단적이어서 자신이나 타인의 감정과 행동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이분법적이고 균형이 깨진 눈치는 경계선 성격에서 두드러진다.
세상이 험해서 보는 눈치
유난히 남을 의심해서 함께 일하기가 어렵고 함께 지내기도 어려운 사람의 눈치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이들의 눈치에는 ‘다른 사람들은 악하다.’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눈치를 볼 때도 상대의 행동이 나쁜 의도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단서를 찾는 데 집착한다. 세상에 불확실한 것은 없으며, 다만 다른 사람들이 위선적이어서 뻔한 것을 모르는 척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고집이 세고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며 관용이 없다. 반면에 남의 잘못을 파헤치고 응징을 하려는 눈치가 높다. 이와 같은 눈치는 편집성 성격에서 두드러진다.
남을 이용하려고 보는 눈치
법이나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타인을 이용하려는 눈치만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남을 이용하려는 데만 재빠른 눈치는 즉각적인 만족과 이익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길게 보면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을 이용하는 착취적인 눈치는 반사회적이며 타인에 대한 공감과 존중 능력이 부족하다는 특징이 있다.
눈치 과잉으로 인한 불면증ㆍ신체화ㆍ핑계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은 근육 이완이 잘 되지 않아서 불면증이 생길 수 있다. 또한 하기 싫은 일을 눈치 때문에 억지로 하다 보면 같은 일을 해도 더 피곤하거나 괜히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도 한다. 그리고 눈치를 많이 보면 질문에 모호하게 답하고 자기 행동에 대해서 핑계를 많이 댄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기 때문에,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못하고 결과에 대해서 상대를 원망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