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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산책

리듬 지음 | 라이온북스
야밤산책

리듬 지음

라이온북스 / 2013년 7월 / 360쪽 / 13,000원





Ⅰ 산책길 하나 - 아주 보통의 어느 날



골 때리는 영국 청년의 스펙터클 거래일주_ 『나는 세계일주로 경제를 배웠다』, 코너 우드먼 지음경제학에서 우리는 관계와 소통을 배운다. 거래를 하면서 우리는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3000년 전, 초기 거래상들은 자신의 상품을 내다 팔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가 새롭고 진기한 문화를 만났다. 돈에 집착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익을 남기겠다는 욕망이 없었다면 거래는 애초에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래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바깥세상에 뭐가 있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주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80일이면 세계를 일주할 수 있다는 신문기사를 본 주인공 포그가 느닷없이 영국 런던에서 출발해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온다는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비단 나에게만 세계일주의 꿈을 심어준 게 아니었나 보다. 모험담의 주제는 다르지만 1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런던에서 또 한 명의 청년이 세계일주를 떠났다. 그것도 탄탄한 직장과 경력 모두 팽개치고, 전 재산 5,000만 원을 탈탈 털어 심지어 세계일주를 하는 180일 동안 1억 원을 벌어오겠다며 말이다. 무슨 이런 골 때리는 사람이 다 있을까? 무슨 이런 스펙터클한 여행기가 다 있을까?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에서 잘나가는 애널리스트와 트레이더로 일하던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한) 영국 청년 코너 우드먼. 그는 어느 날 고액의 연봉을 뒤로하고 회사를 박차고 나온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에, 연봉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조건이었지만 그에게 직장은 회의감만 던져주었다. 인간미 없는 숫자 놀이에, 사방이 꽉 막힌 사무실에서 컴퓨터 화면만 보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세계시장을 누비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가 경험하는 세상은 그저 책상 앞 작은 의자와 작은 모니터 안에서 펼쳐지는 글자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직접 세계시장에 뛰어들기로 한다. 과연 자신은 물건 하나라도 제대로 팔 수 있을지, 기회가 많다는 신흥국에서는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하고 싶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살던 집을 처분해 2만 5,000파운드(약 5,000만 원)의 자본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목표를 정했다. 6개월 동안 4대륙 15개국을 누비며 자본금의 두 배인 5만 파운드(약 1억 원)를 벌어오겠다고.

야심 차게 출발한 거래일주! 하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낙타를 팔아보겠다며 낙타 시장을 찾은 수단에서는 ‘외국에서 현금을 잔뜩 들고 나타난 청년’이라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바가지를 쓴다. 중간 역할을 하면서 차익을 노려보겠다던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최고가에 말을 사서 140만 원을 손해 보고 울며 겨자 먹기로 팔아 치운다. 타이완에서는 옥으로 그동안의 손실을 만회하려고 높은 가격만을 고집하다 결국 여행 내내 팔지 못한 채 엄청난 무게의 옥을 낑낑거리며 안고 돌아온다. 또 일본에서는 고기잡이배에 탔다가 고생만 죽어라 하고 달랑 150엔(1,700원)을 손에 넣는다.

장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처음 만나는 낯선 문화도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입국하는 데만 한나절이 넘게 걸리며 장사를 하겠다고 하면 범죄자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는 수단이나, 높은 가격만 제시하고 브로커가 엄청난 수수료를 챙기는(후에 안 일이지만) 중국이나, 깐깐한 행정절차로 외국인에게 보이지 않는 시장 장벽을 쌓고 있는 일본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이었다. 시장이라는 것은 그곳의 문화가 반영된 결과이며 그것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어떤 장사도 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직접 시장에 뛰어들어 협상과 거래를 해보면 경제와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겁도 없이 덤벼보기로 했다”던 저자의 야심 찬 포부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가 받던 연봉 이상의 이윤을 남기지 못했기에 형편없는 실패였다. 하지만 한 청년이 몸으로 부딪혀 배운 인생수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엄청난 성공이었다. 영국에서 더없이 잘나가는 애널리스트였던 그가, 실은 물건 하나 제대로 팔지 못하는 풋내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여행은 깨닫게 해주었다. 장사의 기본인 인맥과 거래의 기본인 신뢰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 유지해야 하는 팽팽한 평정심까지 저절로 배웠다.

이 책에는 그 어떤 경제학 이론도, 그 어떤 시장 논리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값진, 살아 있는 날것의 시장, 투박하지만 진솔한 거래의 방법이 담겨 있다. 과연 그는 목표액 1억 원을 벌어서 돌아왔을까? 그 결과가 어찌 되었든 우리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쏟아붓는 학비보다 더 값진 교육을 받고 왔음은 틀림없다. 나 같으면 감히 도전도 못했을 숨 막히게 멋진 모험담이자, 몸으로 부딪혀 배운 살아 있는 경제가 담긴 책이다.

이 막장 가족이 사랑스러운 이유_ 『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형제간의 따뜻한 우애와 건강하고 깨끗한 아이들, 서로에 대한 걱정과 배려, 유순하고 성실한 가족 구성원들, 사랑이 넘치는 넉넉한 저녁 식사……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했다.

소설을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몇 시간을 보내 버렸다. 책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사람들이 가득한 지하철에서 혼자 키득거리며 책을 읽어본 게 얼마 만인가! 5년 전 『고래』를 읽으면서 이 사람 범상치 않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토록 유쾌하면서도 정곡을 콕 찌르는 가족사를 그려내다니. 다시 한 번 작가 천명관의 입담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고령화 가족』은 근래 읽은 최고의 책이었다.

“도대체 이놈의 집구석에 멀쩡한 사람은 없단 말인가?”라는 주인공의 신세 한탄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 영화감독 하겠다고 투자자들로부터 10억을 받아 홀랑 날려 버리고, 그 사이 스튜어디스 아내도 도망간, 더 이상 갈 곳 없는 48살 주인공은 “닭죽 잘 됐는데 먹으러 오지 않을래?”라는 엄마의 전화에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받은 것처럼 마지못해 집으로 들어간다. 그 사이 전과 5범에 12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52살 먹은 변태성욕자 형 오함마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엄마 집에 빌붙어 있었다. 주인공이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에게 맞았다며 눈두덩이 시퍼레져서 돌아온 동생 미연은 중학생 딸 민경까지 데려와 또다시 이혼하겠다며 엄마 집에 눌러앉았다. 그렇게 평균 연령 49세인 ‘고령화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 가족 이야기는 요즘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는 막장 드라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막장이다. 큰형 오함마는 전과 5범인데 그 죄질도 폭력, 강간, 사기와 절도 등 말로 하기에 민망할 정도다. 게다가 아버지 보험금 탄 돈으로 성인 오락실을 하겠다고 엄마를 졸라 반을 가져가 홀랑 말아먹었고, 12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거구의 몸으로 엄마한테 빌붙어 하루하루를 그냥 보내고 있다. 동생 미연은 벌써 두 번째 이혼이다. 성인이 되면서 ‘아는 언니’의 소개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아는 언니’네 집에서 살겠다며 집을 나갔고, ‘아는 언니’가 소개해주었다며 첫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바람이 나서(남편이 아닌 미연이) 곧 이혼했고, 그 바람났던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또다시 바람이 나(남편이 아닌 미연이) 또다시 이혼했다.

엄마는 대한민국 전통 어머니상처럼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오로지 자식의 행복만을 빌며 살아오신 줄 알았으나, 형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주인공이 대여섯 살 무렵 집을 나갔다 갓난애 동생 미연을 데리고 아빠의 손에 붙잡혀 다시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또한 지금도 여전히 화려한 ‘빤스’를 입고 다닐 정도로 사랑을 갈망하는 그녀는 어머니가 아닌 여자였다.

이토록 화려한 전력을 가진 삼 남매가(거기다 왕 버르장머리 없는 조카까지) 쉰 가까이 다 된 나이에 사회에서는 인생 낙오자로 찍혀 한집에 다시 모였으니 이들이 벌이는 일들은 찌질함 그 자체다. 조카가 먹는 피자 한 조각 얻어먹겠다고 오함마는 뱃고동 성대모사를 하며 온갖 비굴함을 다 보인다. 동네 미용실 여자를 두고 두 형제가 번갈아 가며 집적거리지를 않나, 미연이 데려온 세 번째 남자에게 빌붙어 온 가족이 외식하러 나가기도 한다. 심지어 주인공은 미연이 딸에게 주는 돈을 뜯어내기까지 한다.

이 소설의 백미이자 최고의 사건은 ‘빤스 사건’이다. 오함마가 어린이용 빤스를 손에 쥐고 자위를 하던 순간을 주인공이 목격하게 된다. 주인공은 빤스를 조카 민경의 것으로 여기고 오함마에게 “그러고도 인간이냐”며 발길질을 한다. 그 소란에 미연과 엄마, 민경이 각자의 방에서 나와 빤스를 들고 있는 오함마와 주인공을 발견한다. 그렇게 빤스를 둘러싸고 온 가족이 거실에 모인다. 이 ‘빤스 사건’은 찌질함의 정점을 보여주며, 동시에 이들이 그럼에도 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어린이용 빤스 하나를 둘러싸고 온 가족이 거실이라는 공간에 모였을 때의 희극성과 동시에 몰려오는 코끝 찡함이란! 웃음이 터져 버렸던 순간도, 후에 그 사건의 뒤편에 있는 가족 간의 사랑을 느꼈을 때의 코끝 찡함도 다 이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 ‘빤스 사건’의 자세한 전말은 소설을 통해 꼭 확인하길 바란다. 이 소설 최고의 장면이니).

따지고 보면 이 가족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도 존재하며, 배다른 형제, 아버지 다른 형제 등 복잡한 가족 관계를 그리는 무늬만 가족인 가족이다. 하지만 이 찌질한 가족이 그 어느 가족보다 사랑스러운 이유는 이들이 피가 아닌 단순히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어떤 가족보다 끈끈하게 묶여 있으며 그들만의 방법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과 5범 오함마는 똑똑한 동생 앞날을 망칠 수 없다며 주인공을 대신해 감방에 갔었고, 이번에는 집 나간 조카를 되찾기 위해 다시 한 번 감방에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된다. 미연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 우리 오빠 기죽지 말아야 한다며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외제 양복을 뽑아줬으며 오빠들 뒤치다꺼리하는 엄마를 위해 단 한 번도 집에 손을 내민 적이 없었다. 겉에서 보면 이들 가족은 초 막장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방법과 모습으로 사랑하며 살 수는 없다. ‘왜 남들은 다 행복한데 우리 집만 이래?’ 하는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한 적 있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내 가족도 한 번쯤은 멀리서 바라보자. 어쩌면 누군가가 무진장 부러워하고 선망하는 그런 행복한 가족의 모습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Ⅱ 산책길 둘 - 문득 네 생각이 나서



오래된 연인들을 위하여_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서른아홉 살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폴. 그녀는 아직 미혼이지만 로제라는 오래된 연인이 있다. 로제는 비록 이혼 경력이 있지만 둘은 마음이 잘 맞았고 금세 서로 사랑에 빠졌다. 다만 로제는 한 번의 이혼 경험 때문인지 함께 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주말이면 폴을 찾아와 행복한 주말을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래도 폴은 로제를 사랑했기에 이 상황을 이해했다. 서로에 대한 독립성을 존중하는 더 나은 관계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둘 사이에도 권태가 찾아왔고, 권태 속의 독립성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 아닌 무관심으로 느껴졌다. 폴은 로제의 태도가 예전 같지 않음을 눈치챘다. 출장을 핑계로 주말에 도시를 떠나 있고, 연락도 뜸해져만 갔다. 정해 놓은 약속도 일을 핑계로 깨뜨리기가 일쑤였다. 그에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시몽이라는 젊은 청년이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녀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데다 지나칠 정도로 잘생겼고, 부잣집 도련님이었으며, 피 끓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시몽이 나이 많고 볼 것 없는 폴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 아닌가. 그는 젊은이의 패기로 그녀에게 적극적인 애정 공세까지 펼치기 시작한다. 밤새워 쓴 편지 보내기,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기, 간절한 눈빛으로 데이트 신청하기 등 그녀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격정적인 사랑의 표현들이었다. 시몽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적힌 쪽지와 함께 콘서트 티켓을 보내왔고, 그 쪽지를 받은 폴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그 등장인물인 ‘사강’이 마음에 들어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는 프랑수아즈 사강은 스물넷의 나이에 이 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썼다고 한다. 갓 스물을 넘은 그녀가 썼다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심리 묘사와 완숙한 감정의 처리가 놀랍다. 오래된 연인들의 권태로움과 새로운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그렇지만 이 사랑 역시 언젠가는 권태를 맞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는 한 여인의 복잡한 감정을 잘 그려냈다.

오래 연애를 하면 그 감정이 너무 익숙해져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더 이상 떨림이 아닌 평범함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새로운 사랑이 다가오면 누구나 흔들린다. 그것은 배신을 하는 것도,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다.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잔잔하던 물의 표면이 흔들리듯 우리네 마음도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강은 그 과정에서의 심정 변화를 너무나도 섬세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마치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듯이 말이다. 사랑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것, 그리고 그 변해가는 사랑을 지켜보는 일이 생각보다 고통스럽다는 것, 또다시 사랑은 찾아오지만 그 사랑도 변할 걸 알기에 선택할 수 없다는 것. 이 모든 복잡한 심정이 녹아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호기심이 익숙함으로, 떨림이 편안함으로 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진리다. 그리고 그 당연한 진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오래된 연인들을 위한 숙제일 것이다.

질투의 끝장을 보여주겠노라_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줄리언 반스 지음

예측할 수 없는 거야. 내 말이 그거야. 질투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지. 그리고 그때쯤이면 질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지.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 그의 모든 것이 궁금해진다. 그가 읽었던 책들이 궁금하고, 그가 즐겨 듣는 음악이 궁금하고, 그가 사랑했던 이전의 사랑이 궁금하다. 아주 우연히 옛사랑의 흔적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 궁금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처음에는 그래도 귀여운 수준이다. 그래, 얘도 한 때는 다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구나, 미래를 약속했구나, 나보다 멋진 여자였을까 등등. 그러다 그 질투는 의심으로 바뀐다. ‘혹시 지금 나한테 한 선물 예전에 그 여자한테도 했던 거 아니야?’, ‘그 여자한테 했던 똑같은 말로 내게 사랑을 속삭이는 게 아닐까?’, ‘혹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거 아닐까?’ 바로 여기서부터 위험하다. 그 의심이 광적인 집착으로까지 진행되면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 지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질투하고 사랑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 질투의 끝장을 보여주는 한 남자가 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책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에 등장하는 서른여덟 살의 그레이엄은 런던 대학의 교수다. 아내 바버라를 좋아하고, 딸 앨리스를 사랑하며 15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모범적이고 평범했던 15년의 생활이 자아를 구속하는 상실의 시대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친구인 소설가 잭의 소개로 전직 여배우 출신인 앤을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그레이엄은 그 순간을 “마치 오래 전에 끊긴 어떤 통신선이 20년 전의 자아에 갑자기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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