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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라디오 동의보감 2

조기호 지음 | 부광
MBC 라디오 동의보감 2

조기호 지음

부광 / 2013년 5월 / 256쪽 / 13,000원





백호의 서늘한 기운이 열을 식히는 해열제

열 받는 세상,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상의 삶에서 청량제가 필요한데, 한방처방 중에 백호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처방의 기원은 2천 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명성만큼 많이 쓰이는 약물입니다. 호랑이는 뭇짐승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백수의 제왕입니다. 그러므로 호랑이 앞에서 만물은 무서워하면서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지요. 분위기가 으스스합니다. 자연스럽게 찬 기운이 돌게 되겠지요. 여름의 더운 열기를 식혀주는 가을의 서늘함을 상상하시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서늘한 기운을 응용한 것이 《동의보감》에서 많이 나오는 백호탕이라는 처방입니다. 약물 구성은 석고, 멥쌀, 지모, 감초이며, 열이나 화가 치밀어 올라 침이 마를 정도로 입이 바싹 탈 때, 열기로 기름 같은 땀을 흘릴 때, 또는 염증질환이 심할 때 사용됩니다. 좀 더 전문적으로 이야기하면 체내의 열을 식히고, 중추성흥분을 억제하며, 조직액을 촉촉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당뇨병, 아토피피부염, 정신과질환에 응용되는 약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을 식혀주는 해열작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체액을 보충시키는 인삼을 넣은 인삼백호탕이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이 처방은 피곤하면 잘 생기는 구내염, 정신과 약을 대표하여 양약을 복용할 때 흔히 나타나는 입 마름 등에 널리 처방되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 처방 중에 가장 많이 들어 있는 것이 석고라는 광물인데, 이 역시 백호, 즉 흰 호랑이처럼 희다는 것입니다. 흰 것은 동서남북의 서쪽에 위치하며, 목화토금수라는 오행에서는 금에 해당하여 서녘 하늘, 가을의 서늘한 기운으로 열을 내려주는 청량제 작용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동의보감》에서는 고대인들의 소박한 자연관찰을 통하여 약물의 효능을 알아낸 처방들이 꽤 있습니다. 요즘처럼 스트레스로 인한 화가 많은 세상살이에서 백호의 서늘한 기운을 받아 음양이 조화된 생활이 필요해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리듬을 거스르면 병이 된다: 반상위병(反常爲病)

너무 피곤하여 모처럼 맞은 휴일을 잠으로 때운 다음 날 생각보다 피로가 풀리지 않고 더 힘들어진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쉬었는데도 오히려 몸은 말을 안 듣는 현상을 생체리듬이 깨져 일어나는 일이라고 설명을 합니다만, 《동의보감》에서는 반상위병(反常爲病)이라 합니다. 정상의 궤도에서 어긋나면 질병이 된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정상적인 궤도라는 것은 자연의 흐름입니다. 흔히 자연을 대우주, 인간을 소우주라고 합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자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의학서로서 《동의보감》은 자연현상을 음양이론의 기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태양과 달의 움직임입니다. 생체리듬에서 태양은 인간에게 양 기운을, 달은 음 기운을 주는 주체로 파악하고, 이들의 균형을 잘 조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따라서 인간도 이들 움직임에 맞추어 활동하는 게 좋다는 것이 음양바이오리듬의 핵심입니다.

《동의보감》에서는 《황제내경》의 〈사기조신대론(四氣調神大論)〉을 인용합니다. 사기조신대론이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각각 다른 기운으로 정신을 조화롭게 한다는 고대의학의 논문 제목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1Q84』에서 두 개의 달을 설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정신병이라는 용어가 달에서 나왔다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달의 움직임이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성의학에서도 생리와 관련하여 달의 작용을 무심하게 넘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 상관관계는 직접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인간의 삶은 해가 뜰 때 침대에서 일어나고, 해가 지면 일을 접고 쉬면서 잠을 드는 리듬을 가장 좋은 조건으로 봅니다. 밤늦게 활동하고 새벽에 늦게 일어나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긋나는 것으로 보지요. 낮잠을 깊이 자는 것도 활동시간에 오히려 쉬게 됨으로써 리듬을 깨뜨려 다음 날 더 피곤해집니다. 개인을 놓고 보면 양 기운이 시작되는 새벽에 일어나기 힘든 사람은 양기가 부족하다고 하고, 음 기운이 시작되는 저녁에 오히려 활동적으로 되는 사람은 음 기운이 부족하다고 진단하게 됩니다. 봄날은 겨울의 음 기운을 떨치고 양 기운이 상승하여 만물을 발생시킬 때인데, 이때 오히려 맥이 업고 밥맛이 떨어지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되며, 혹은 젊은 여성들이 흥분하는 계절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모두 양 기운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을은 겨울의 휴식기를 위하여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음 기운이 강해지기 시작하는 때인데, 이때 흥분과 우울이 교차하는 정신불안이 잘 나타납니다. 이때에는 양적인 남성들이 침울해지지요. 이것은 가을의 음 기운을 따라가지 못하여 생기는 음 부족 현상입니다. 겨울 같은 때는 태양의 양 기운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므로 햇볕을 쪼이라는 조언을 하지요. 실제 고혈압인 경우에도 음 기운이 가득한 이른 새벽에 혈압수치가 가장 낮아야 하는데, 이때 혈압이 높을 경우 조조(早朝)고혈압이라고 하여 위험도를 매우 높게 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가로 혈압을 측정할 때도 반드시 기상 직후 이른 새벽에 수치를 적어 오라 부탁합니다. 《동의보감》에서는 똑같이 원기가 부족하더라도 음 부족과 양 부족으로 크게 나누며, 이들 각각에 대하여 처방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보약처방에서 음 부족, 양 부족의 구별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효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스려 병을 치료한다: 이도요병(以道療病)

미국의 통계입니다만, 70세 이상 노인들이 병원에 입원하는 원인 가운데 약 30%는 약물과다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궁핍하였던 예전에 돈이 없어서 약을 못 먹었던 슬픈 기억에서 헤어나려고 하는 듯 요즈음에는 약을 손에 잡히는 대로 먹어대는 분위기입니다. 아울러 의사들도 환자들의 불평을 전부 약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75세 할머니가 떨리는 병으로 저에게 오셨는데, 잡수시고 있는 약이 무려 30종이 넘어 할 수 없이 입원시켜 약을 정리하여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약이 너무 난무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분의 떨림은 약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동의보감》에서는 무수한 약물처방을 제시하고 있지만, 기본은 질병을 고치는 데는 약이 우선하기 전에 마음으로 다스리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의보감》의 첫머리에 나오는 유명한 짧은 의학에세이로서, 이도요병(以道療病)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이도요병, 즉 마음을 다스려 질병을 치료한다는 뜻이지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최고의 의사는 사람의 마음을 다스려 질병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의사들은 질병을 다스릴 줄 알지, 마음을 다스릴 줄은 모른다. 이것은 근본을 무시하고, 끝만 쫓는 것과 같고, 근원을 파고들지 않고 가지만 치는 형상이다. 이렇게 하여 요행히 치료되었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이와 같은 의사는 속된 의사이므로 본받을 바가 못 된다. 질병을 치료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약을 복용하기도 전에 벌써 병은 낫는다.”

여기에서 보면 마음을 다스려 치료하는 것이 최선이며, 약으로 치료하기 전에 환자의 마음을 읽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400년 전의 책에 이미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귀중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서양의학은 치료가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돌보고 위로하는” 일은 정신과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비과학적인 일이라고 치부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화면만 주시하면서 일방적인 지시사항으로 끝나는 진료, 특히 눈 한 번 마주칠 시간 없이, 나아가 첨단기계와 나타난 수치에 의한 까칠한 분석자료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인간이라는 조직이 너무나 복잡합니다.

치의학을 전공한 최상묵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관적인 개념을 비과학이라고 폄하하는 풍토가 개탄스럽다. 현대의학은 위대한 기술과 그 효율성에 도취되어 인체를 마치 분해할 수 있는 기계나 부품으로 생각하고, 잘 기름 치고 닦고 관리하면 언제나 새롭고 반짝거리는 건강이 다가올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명성 있는 의사보다는 좋은 의사가 바람직하다. 의학은 자연과학적 기술의 성취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예술적 또는 인문학적 보완을 할 필요가 있다.” 또한 프랑스의 의성 트뤼도 동상의 비문에 ‘가끔 치료하고, 자주 돌보며, 언제나 위로하자!’라는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즉 치료는 가끔, 돌보는 일은 자주, 위로는 항상 해야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동의보감》 이도요병의 내용 그대로입니다.



대변청소: 솥밑의 땔감을 덜어내다, 부저추신(釜底抽薪)

봄이 오면, 겨울 동안 쌓였던 먼지를 털어내는 봄맞이 대청소를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에게도 몸 청소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먹을 것이 풍족한 환경에 살면서 늘 과식과 고칼로리 섭취의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현대인의 건강을 해치는 가장 큰 원인이 오버 칼로리라는 지적이 있기도 합니다만, 사실 살다 보면 식욕의 유혹을 이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은 작은창자를 지나면서 영양소로 흡수되고, 남은 찌꺼기는 큰창자로 넘어가 대변을 만듭니다. 큰창자에서 항문으로 이어지는 직장에 대변이 쌓이면 감지세포가 ‘대변이 마렵다’는 신호를 보내게 됩니다. 대변의 80%가 찌꺼기와 세균이기 때문에 장 속에 오래 두면 해롭습니다. 박테리아 같은 유해균이 증가하여 세균성 장염을 일으킬 수 있고, 대변의 독소와 발암물질이 장 점막세포를 자극해 대장암까지 유발한다는 학자도 있습니다. 한방에서는 변비를 장의 독소라고 하여 장독이라고 하기도 하고, 식사로 인해 생겼다고 해서 식독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경우 《동의보감》에서는 솥 밑의 땔나무를 꺼냄으로써 불이 활활 잘 타오르게 한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궁이에 장작불을 땔 때 불이 채 붙기도 전에 장작만 마구 밀어 넣으면 불은 타오르지 않고 연기만 잔뜩 납니다. 이런 경우 경험이 많은 시골 사람들은 오히려 장작더미를 꺼낸다든지, 아니면 장작 속에 긴 나무막대기를 넣어 장작을 살짝 들어 올려주면 공기가 통해 불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치를 이용한 것이 한방에서 말하는 대변을 청소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부저추신(釜底抽薪)이라고 합니다. 즉 솔 밑의 장작을 끄집어낸다는 뜻이지요. 현대인들은 섭취한 음식물이 소화ㆍ흡수가 되기도 전에 또 다른 음식을 먹고는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 타오르지 못하고 연기만 잔뜩 낀 상태에서 다시금 장작개비를 넣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럴 때는 과감하게 정체된 것은 끄집어내고, 조금씩 넣어 요령껏 불을 피우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상열하한(上熱下寒)에는 두냉족열(頭冷足熱)

2000년에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에 신화 열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때를 맞춰 신들끼리의 전쟁 혹은 신과 인간의 전쟁을 그리는 영화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공통되는 것은 하늘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기는 불이고, 바다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무기는 물이라는 점입니다. 2011년 〈신들의 전쟁〉이라는 영화에서 보듯, 결국에는 이들이 불과 물이라는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게 됩니다.

《동의보감》에서는 물과 불을 우리 몸의 건강을 결정하는 2대 원소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에는 하체의 물 기운과 상체의 불 기운이 서로 교류하면서 건강을 유지하게 되는데, 이들 교류 간에 균형이 깨지면 괴로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느끼는 것이 가슴은 더운데, 팔다리는 차가운 증상입니다. 진료실에서는 몸은 더운데, 하체는 차다고 호소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동의보감》에서는 증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위에 열난다는 상열, 아래는 차다는 하한으로, 합쳐서 ‘상열하한’이라고 합니다. 환자들의 호소를 들어보면 ‘머리가 뜨끈뜨끈하다’, ‘머리에서 불이 난다’, ‘가슴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가슴에서 불이 난다’, ‘발이 시리다’, ‘양말을 벗고는 잘 수가 없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등 다양한 불편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른 것 같지만 상열하한으로 동일하게 진단합니다. 그래서 항간에는 머리는 차게 하고, 발은 따뜻하게 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환자들은 단순히 혈액순환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기의 교류가 안 되고 있는 현상입니다. 때문에 혈액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치료에 있어서도 열이 나는 증상이 없어지면 하체의 찬 기운도 사라지게 됩니다. 몸에서 느끼는 열감과 차가운 느낌은 하나의 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기운을 볼 때 하늘의 불 기운과 땅의 물 기운은 서로 교류가 이루어질 때 균형을 이루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주역 64괘를 보더라도 위에는 하늘 기운, 불 기운, 아래는 땅 기운, 물 기운이 그대로 있으면 불균형이라고 하고, 이와 반대로 위에는 땅 기운, 물 기운이, 아래는 하늘 기운, 불 기운이 있으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도 발은 따뜻해야 하고 머리는 차야 한다는 속설과 같이 상부에는 물 기운으로 서늘하게, 하부에는 불 기운으로 따뜻하게 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의보감》에는 청리자감탕, 청상보하환, 자음강화탕, 도담감기탕, 청상사화탕과 같이 물의 ‘수’와 불의 ‘화’라는 이 두 글자를 사용하는 처방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무서운 말이 있지만, 우리 몸은 물과 불이 적절하게 교류했을 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통즉불통(通則不痛, 痛則不通)

1999년, 국내 최대를 자랑하는 아산 병원의 개원 10주년을 기념한 국제심포지엄에 일본의 저명한 교수와 함께 초대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교수는 어혈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어, 자연스럽게 어혈이 화젯거리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명한 한 의사분이 “어혈? 어혈이 뭐지? 혈전인가?” 하고 질문했습니다. 전통의학을 전혀 모르시는 분이 어혈이라는 한 마디 듣고 혈전으로 해석하는 그 지혜가 놀라웠습니다. 물론 어혈의 범위가 간단하지는 않지만, 혈전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많기 때문에 상당히 일리가 있었습니다. 어혈은 현대의학이 생각하는 동맥경화의 범위를 훨씬 넘어 뚜렷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뭔가 만성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유용한 병리개념이 되고 있습니다.

병원을 찾는 사람의 80%는 만성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한방을 찾는 사람들은 급성기를 지난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보다 더 높은 비율로 만성병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한방에서는 혈액순환이 잘 안 된다는 진단을 내리고, 어혈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성병에 대해 《황제내경》에서는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則不痛, 不痛則通)이라고 하여 기혈순환이 통하면 아프지 않고, 기혈순환이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통즉불통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통하면 아프지 않다는 통즉불통(通則不痛)도 있고, 이와 반대로 아프면 통하지 않는다는 통즉불통(痛則不通)도 있습니다. 원인 결과로서 의미는 같습니다. 한의원에서 혈액순환이 안 된다는 진단을 남용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말보다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약처방도 혈액순환을 좋게 해주는 어혈제거약을 많이 사용합니다. 청나라 이후 중국의학을 보면 어혈을 제거함과 동시에 혈액순환을 활발하게 하는 방법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웃 일본 한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혈을 제거하는 약물이 양국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어혈이라면 여성들의 월경장애가 가장 대표적인 질환입니다. 월경장애를 치료했던 ‘계지복령환’이라는 어혈약이 오늘날 혈전증을 베이스로 깔고 있는 동맥경화증 치료제로 연구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월경통과 동맥경화증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의 질환에 어혈이라는 공통분모로 같은 약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월경통 치료제가 뇌경색 예방제로 임상연구되는 면을 보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 병태는 비교적 단순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한방에서는 많은 기초 연구를 통해 한방약의 확대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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