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마흔 이솝우화에서 길을 찾다
강상구 지음 | 원앤원북스
내 나이 마흔 이솝우화에서 길을 찾다
강상구 지음
원앤원북스 / 2013년 7월 / 348쪽 / 15,000원
지나친 욕심을 버리자
남의 것을 욕심내지 말자
▲ 고기를 물고 가던 개: 개 한 마리가 고기 한 덩이를 물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개는 강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곤 더 큰 고깃덩이를 물고 있는 다른 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는 상대편 개의 고기를 빼앗으려고 뛰어들었다. 그 결과 개는 이것도 저것도 갖지 못했다. 하나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것이었고, 하나는 강물에 떠내려가 버렸다.
이 세상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만의 소유물이 있다. 또한 내가 넘보아서는 안 될 다른 사람의 것도 있고,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채 공유해야만 하는 것도 있다. 그렇기에 눈앞에 저택이 있어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몇 시간을 걸어서 산골짜기에 있는 자기의 집을 찾아간다. 한 푼도 없는 무능력자일지라도 낳아준 사람을 부모라고 부르지, 억대의 연봉을 받는 이웃집 아저씨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 길거리에 멋진 외제차가 주차되어 있어도 내 것이 아니면 손대지 않는다. 소유의 개념을 서로가 인정하기에 사회는 순조롭게 흘러간다. 인간만이 아니다. 동물의 세계에도 내 짝과 내 새끼, 내 둥지와 내 영역이 정해져 있다. 이것은 신이 지상의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정해준 생존법칙 중 하나다.
만약에 이런 법칙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는 나의 가족, 나의 집, 나의 직장, 나의 소유는 사라지고 힘센 자의 필요에 따라 모든 것의 소속이 정해질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노력해서 취득한 것은 내 것이 아니다. 군침을 흘리거나 빼앗을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필요 이상의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욕심은 고기를 물고 가던 개가 강물에 비친 자기를 보고 뛰어내렸듯이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한다. 욕심이 있는 마음은 아무리 채워도 포만감이 들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 주머니를 채우려 안간힘을 쓸 뿐이다.
욕심이 가득하면 자족의 마음이 자리할 곳이 없다. 오직 부족한 마음뿐이다. 산처럼 쌓아두고도 어딘가 부족함을 느낀다. “아흔아홉 개를 가진 사람이 한 개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는다.”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능력 이상의 것을 얻으려는 탐욕을 용기라고 부르며 불가능에 도전하는 무모함을 배짱이라고 우긴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에 최선을 다한다. 또한 현재의 능력으로 내 앞에 놓인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잠시 멈추어서 능력 쌓기에 주력한다. 그럼에도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깨끗이 포기하고 다른 것에 도전한다.
욕심이란 도에 지나치게 탐을 내는 마음이다. 욕심은 만족이 들어갈 수 없도록 빗장을 채운 문이다. 행복이 차지할 공간을 갉아먹는 해충이나 다름없다. 행복을 원한다면 욕심이라는 해충을 박멸하라. 걸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이웃의 성공을 축하하라.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기적이라 생각하라. 욕심의 주머니는 비울수록 편안해진다. 또한 욕심을 비운 자리가 행복으로 채워지는 기적을 맛보게 된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자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다면 있는 곳에서 잘하자
▲ 게와 여우: 게 한 마리가 바다에서 떨어져 해변으로 올라와 혼자만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굶주린 여우가 게를 발견하고선 달려가서 게를 덥석 물었다. 잡아먹히기 전에 게가 한탄했다. “나는 이래도 싸. 바다에서 살아야 하는데 땅에서 살기를 바랐으니….
상인은 시장, 정치인은 국회, 판사는 법정, 경영자는 기업, 배우는 촬영장, 운동선수는 그라운드, 사원은 회사에 있을 때 자신의 역할을 100% 수행할 수 있다. 운동선수가 정치가가 부러워 국회 주변을 맴돈다면 다음 시합에서 과연 어떤 성적을 내겠는가? 게가 자신이 있을 곳에 있지 않고 해변을 서성이다 여우에게 목숨을 잃은 것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까? 선각자들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며 “현실에 파묻혀 있지 말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라고 한다. 그러고는 아이러니하게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말고 한 우물을 파라.”라고 말하기도 한다. 언뜻 들으면 서로 상반되는 말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성공과 실패를 겪은 사람들이 체득한 지혜이기에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국가대표선수로 세계대회에 참가하려면 먼저 지방대회에서 선발되고,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해 소정의 성적을 거두어야 한다. 현재 위치에서의 성공경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실력을 가장 쉽게 발휘할 수 있는 자기 동네에서도 성공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동네로 가서 우물을 파겠다며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명성을 떨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현재의 위치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찾고 있고, 세상은 이런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이런 사람을 발굴한 세상은 이들에게 더 넓은 곳으로 나가라고 등을 떠민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넓은 세상으로 나가려 애쓰지 않아도 떠밀려 나가게 된다.
현재 내가 활동하고 있는 곳은 좁고 시시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좁고 시시한 곳에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더 넓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다른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있는 곳에서 당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라. 지금 당신이 있는 곳에서 결판을 내라. 지금 당신의 분야에서 아마추어라면 그중에서 최고가 되어라. 지금 당신이 마이너리그에 있다면 그곳에서 최고가 되어라. 지금 당신이 메이저리그에 있다면 그곳에서 최고가 되어라. 지금 당신이 있는 곳에서 잘하라.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더 넓은 세상에 가게 될 것이다.
자만심에 빠지지 말자
자신에 대해 과대망상에 빠지지 마라
▲ 자기 그림자를 뽐내는 늑대와 사자: 늑대가 사막을 떠돌고 있는데 날이 뉘엿뉘엿 저물었다. 늑대가 길게 쭉 뻗은 자기 그림자를 보고 말했다. “내 그림자 크기 좀 봐! 사자도 두려워하겠는걸! 이 정도 크기면 동물의 왕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을까?” 늑대가 자만심에 빠져 있을 때 힘센 사자가 나타나 늑대를 쫓기 시작했다. 금세 생각이 바뀐 늑대가 외쳤다. “거만함은 불행을 초래하는구나!”
사람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남을 이겨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경쟁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지나치면 이성을 마비시키고 종국에는 파멸의 길로 인도한다. 이성이 마비된 사람에게는 상식이 작동되지 않는다. 상생은 뒷전으로 사라지고 자신의 이익만이 최고라는 생각에 상대방은 안중에도 없다. 상대방의 노력은 당연한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자신의 노력만이 인정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욕심을 잉태한다. 욕심은 현실을 왜곡하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로 스스로를 파탄의 장으로 몰아간다.
과대망상증에 휩싸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합리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능력을 현실보다 높게 평가하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자신은 현명한 사람이며, 올바른 판단을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는 참고 사항일 뿐 오직 자신의 것만이 최고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기를 원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분노하거나 절망한다. 물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역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능력 이상의 것에 도전해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 있으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매력을 믿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또한 역량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이처럼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역기능과 순기능이 공존한다.
그러나 확대된 자신의 그림자를 자신의 실체라고 착각하는 과대망상증은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사자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먼 장님으로 만들 뿐이다. 자신을 멋지게 포장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청년들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직장인들은 인사고과를 잘 받기 위해 업적을 부풀려 포장한다. 기업을 책임지고 있는 CEO들은 주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실적을 기대 이상으로 포장한다. 장사꾼들은 고객의 눈을 끌기 위해서 상품을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이렇게 포장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에 나쁜 행태라고 비난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대망상증은 다르다. 현실을 현실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이 최고라는 착각을 하게 한다. 과대망상은 겸손과는 원수지간이며, 성공의 사닥다리를 넘어뜨리는 방해자이고, 정상적인 인생을 왜곡시키는 원흉이다. 하늘은 과대망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하늘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성공의 사닥다리를 확실하게 내려다 줄 뿐이다.
사람들의 원망을 사지 말자
배은망덕하지 마라
▲ 암사슴과 포도밭: 사냥꾼에게 쫓기던 암사슴 한 마리가 포도나무 아래에 숨었다. 사냥꾼이 지나쳐 가자 암사슴은 완전히 몸을 숨긴 줄 알고 포도나무 잎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잎이 움직이는 것을 본 사냥꾼이 되돌아왔고, 총을 쏴 암사슴을 죽였다. 암사슴은 죽어가면서 말했다. “나를 구해준 포도 잎에 해를 끼친 나는 이런 일을 당해도 싸지.”
사람이 하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가 은혜를 갚는 보은이다. 그리고 가장 추악한 것이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주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몸을 던져 주인을 구하기도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배은망덕한 일을 한다면 이것은 짐승보다 못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행위일 뿐이다. 심청은 공양미 300석에 자신의 몸을 팔아 낳아주고 길러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다. 그녀의 보은에 하늘이 감동해 한 나라의 왕비가 되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고 부모를 원망하며 가출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녀들이 있다. 심지어는 부모를 때려 숨지게 하는 패륜아도 있다.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고 자신마저도 구렁텅이에 빠지는 가장 배은망덕한 행위다.
이 우화에서 위기를 벗어난 암사슴은 자기가 지금 있는 곳이 자신을 살려준 피난처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을 구해준 넝쿨 잎을 먹었다. 암사슴은 자신의 행위가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게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또한 자신의 행위가 배은망덕한 일인지도 몰랐다. 잘 모르고 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은혜를 저버리는 파렴치한 행위가 되어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다.
인간은 철저히 나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내가 잘못한 행위는 실수라며 묻어두려 하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실수로 인정하지 않고 그에 상응한 벌을 가하려 한다. 나의 행위는 정의에 바탕을 둔 행위이고, 나와 상반된 생각으로 저지른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불의라고 단정해버린다. 내가 가는 길은 바르고 정당한 길이며, 나의 갈 길을 막는 행위는 부당한 행위라고 질책한다. 나의 의견과 일치되는 사람에게는 합리적인 사람이라 하고, 나의 견해와 다른 사람은 불합리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의 인생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모든 일은 결국 바른 이치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것은 잠시 효과를 보는 것 같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올바른 것에 무릎을 꿇게 된다. 만일 지금 배은망덕한 행동을 해서라도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잠시 생각을 멈추자. 그리고 사필귀정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타인과 더불어 공존하자
서로 배려하는 훈련을 하라
▲ 말과 당나귀: 어떤 사람이 말 한 마리와 당나귀 한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루는 그들이 길을 가는데 지친 당나귀가 말에게 애원했다. “내 목숨을 아낀다면 내 짐을 조금만 들어줘.” 말은 못 들은 체했고 결국 당나귀는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주인은 말에게 모든 짐과 당나귀 가죽까지 올렸다. 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나는 지지리 운도 없지. 가벼운 짐을 나눠지기 싫어하다가 모든 짐을 지고 가게 되었네. 게다가 당나귀 가죽까지 말이야.”
사려 깊은 경영자는 체력이 좋은 사원과 아이디어가 풍부한 사원, 혼자서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원과 함께 일할 때 능력을 발휘하는 사원, 일이 밀려 있는 사원과 한가한 사원이 누군지를 파악하며 각자의 형편에 따라 업무를 조정해 최적의 환경을 만든다. 그러나 실적만을 중시하는 경영자는 직원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거의 쓰지 않는다. 직원은 머슴이고 시키는 일이나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동료들보다 우수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주어진 업무를 제때 처리해 경영자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눈치가 빨리 상사의 마음도 재빨리 간파하여 생색나는 일은 도맡아 한다. 윗사람에게 인정받으며 조직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요령은 없지만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일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몸이 아파도 출근하고 어려움이 있어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 운이 좋으면 무던한 사람으로 인정받지만 결국에는 견디지 못해 도태되고 만다.
이 우화에서 말은 당나귀가 힘겨워하는 것을 몰랐을까? 곁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는 당나귀의 거친 숨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알고 있었다면 왜 도와주지 않았을까? 왜 당나귀는 처음부터 무리한 짐을 진 것일까? 한번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도 괴롭고 힘들었어. 내 짐도 무거워서 짊어지고 가는 것이 고역이었어. 내 입장에서 당나귀 부탁이 귀에 들어오겠니? 당나귀는 이전에도 자주 쓰러졌어. 그때마다 주인이 회초리로 때리며 당나귀를 일으켜 세웠지. 이런 일이 다반사였기에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어. 설마 쓰러져 죽을 줄은 몰랐어. 당나귀, 넌 짐을 질 때 쓰러질 것을 몰랐니? 힘들어 주저앉으면 내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니? 처음에 짐을 질 때 왜 쓰러지지 않고 버텼니?” 질문을 받고 당나귀는 이렇게 말한다.
“짐이 무거워 주저앉을 때마다 주인이 회초리를 휘둘렀어. 나는 그게 두려웠지. 그래서 힘에 겨운 짐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졌어. 저항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회초리밖에 없기 때문이었지. 그래도 같은 일을 하는 말에게 부탁하면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들은 체도 안 했어. 설마 나도 쓰러져 죽을 줄은 몰랐어.”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다. 빈부 격차는 점점 심화되고 한 번 추락하면 회복은커녕 더욱더 추락한다. 경영자는 직원의 상태를 평소에 파악해야 생산성이 좋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들의 몫까지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선뜻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짐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힘겨운 사람은 평소에 힘겹다고 말하고 싶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다. 그러나 큰마음을 먹고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인생은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둥 열심히 일하라는 설교만 듣는다. 도움을 청한 것이 오히려 마음에 부담을 가져온다. 이러다 보니 죽을 정도가 아니라면 도움을 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남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도 말고 아쉬운 소리를 해서도 안 된다며 자존심을 지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라면 체면 불구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울기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배려는 훈련이 필요하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다른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배려는 자연스럽게 실현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에는 즉각적인 반응을 한다. 그러나 남에게 상처를 줄 때는 그것이 상처인 줄도 모른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만큼 우리의 삶이 윤택해지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무조건 외면하지 마라.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손을 내밀어보라. 이웃들과 함께 어우러질 때 삶이 윤택하게 되는 것이다. 혼자만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은 나 몰라라 하겠는가? 죽어버린 당나귀의 짐마저 져야 하는 말의 신세는 되지 말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