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늘 허전한 걸까
조영은 지음 | 소울메이트
왜 나는 늘 허전한 걸까
조영은 지음
소울메이트 / 2013년 7월 / 320쪽 / 15,000원
PART 1 사랑하는데도 왜 나는 늘 외로운 걸까? - 사랑에 대해
나는 왜 연인이 곁에 있어도 외로울까? : 회피형 애착과 안정형 애착
“당신은 언젠가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지현은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외롭다며 상담실을 찾았다. 지현은 대학 새내기 시절 선배였던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래서 20대 중반까지 한 번도 여자를 사귀어본 적 없던 복학생 선배에게 먼저 다가갔고, 끈질긴 구애 끝에 둘은 결국 연인이 되었다. 캠퍼스 커플로 수년을 지내다가 대학을 졸업한 두 남녀는 어느덧 오래된 연인 사이가 되어 있었다. 지현은 때로 결혼을 생각했지만, 한결같이 무심하고 냉담한 남자친구의 태도에 의문이 들곤 했다. “이 남자, 나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내가 곁에 있으니까 현상 유지만 하는 걸까?”
연애 초반의 기억은 그렇다. 지현은 남자친구에게 빠져 하루 종일 같이 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 상대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여러 번 전화를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남자친구는 늘 소극적인 태도로 귀찮은 내색을 하기도 했고 자기만의 동굴로 숨기도 했다. 남자친구와 오랜 시간 만났지만, 가까워지지 않는 느낌에 지현의 외로움은 갈수록 깊어져갔다. 지현은 남자친구와 남남이 되어 헤어져야 할지, 아니면 여자의 자존심을 버리고 먼저 청혼해야 할지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게 맞는 걸까?: 심리학이론에서는 이런 관계를 ‘안정애착’이 맺어지지 않은 관계라고 한다. 애착이란 일반적으로 생후 1년이 된 아이와 주 양육자가 맺는 관계의 질을 의미한다. 주 양육자가 아이를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 아이는 세상과 타인, 자신에 대한 상을 형성하게 된다. 주 양육자가 민감하고 사려 깊은 태도로 아이를 대하면 아이는 대상과 안정된 애착관계를 맺게 되고, 이 경험은 이후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 영향을 주게 된다. 안정된 애착관계를 맺으면 세상을 믿을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자신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므로 자신감 있게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 반면 주 양육자가 아이를 학대하거나 방임하면 아이는 대상과 불안정 애착관계를 맺게 되고, 이후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아이는 세상을 믿을 수 없는 곳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착은 생후 1년뿐만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쳐 다양한 사람들과 맺어질 수 있다. 주로 연인이나 배우자와 같은 유의미한 타인과 애착관계를 맺는데, 이때에도 어린 시절 주 양육자와 맺었던 애착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안정된 애착을 맺었던 사람은 배우자와도 안정적인 관계를 맺고, 불안정 애착관계를 맺었던 사람은 배우자와도 불안정한 관계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불안정 애착의 하위 유형인 회피형과 양가형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애착 유형과 연애: 회피형은 주 양육자가 아이를 방임한 경우다. 회피형은 연인관계를 맺을 경우 가장 냉담해 보이는 유형으로 경계를 뚫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회피형은 친밀해지려고 시도하지 않고 따뜻한 관계를 기대하지 않는다. ‘상대가 나를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버린다.’라는 자세이기 때문에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연인이 가까워지려고 하면 두려워하며 한발 물러선다.
양가형은 주 양육자가 기분 내키는 대로 아이를 키운 경우다. 기분이 좋을 때는 마냥 잘해주다가 기분이 나쁘면 학대하거나 방치한다. 일관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아이는 혼란을 느낀다. 양가형은 연인관계가 되면 관계에 집착한다. 상대방의 태도에 매우 예민하고 잠시만 연락이 되지 않아도 불안해한다. 심해질 경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간섭한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과장된 표현과 집착 때문에 연인을 오히려 지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불안정 애착 유형인 사람도 안정 애착 유형인 연인을 만나면 애착 유형이 바뀌기도 하고 안정되고 행복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양가형과 회피형의 만남: 만약 당신이 애인이 있어도 외롭고 그가 당신을 방치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 이상 가까워지기 힘들다면, 당신의 연인은 회피형일 수 있다. 지현과 남자친구의 애착 유형을 검사한 결과 지현은 양가형으로, 남자친구는 회피형으로 판별되었다. 도망가는 남자와 쫓아가는 여자의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음 상담 시간부터는 자신과 남자친구의 성장과정을 이해하고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바꾸기 위한 커플치료를 진행하기로 했다. “선생님, 애착 유형은 바뀌지 않는 것인가요?” “아니요, 안정된 관계가 지속되면 바뀔 수 있습니다.” “그 남자를 정말 사랑해요….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계속 사랑하고 싶어요.” 지현은 오랜 시간 속내를 털어놓고 웃으면서 상담실을 나섰다.
늘 주인공이어야 하는 여자, 항상 세상의 중심인 남자 : 연극성 성격장애
지나치게 매력적인 여자 / 연극성 성격장애, 나는 늘 주인공이어야 한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유혹적이면서 민감한 여자. 남자의 말에 과장스러울 정도로 반응해주고, 자주 웃어주는 여자. 사랑과 관심에 세상 다 얻은 듯 기뻐하며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여자, 아주 잠깐 스치는 눈빛에도 떨림을 만들어내는 여자, 끌어당기지만 다가오면 다시 밀쳐내는 사람, 밀고 당기기의 고수, 히스테리.
정신의학적 용어로 ‘연극성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자신이 제일 주목받으려는 성향이 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유혹적인 것이 특징인데, 정작 안정적인 관계를 맺지는 못한다. 세상 모든 사람을 유혹할 듯 행동하지만,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동성친구와 관계 맺는 데 서툴기 때문에 주로 이성들과 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관계를 이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어장관리’로 이어져서, 주변에 많은 이성을 두고도 어느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맴돈다. 한 사람과 연인관계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이성에게 유혹적으로 행동하며 연인의 질투를 유발한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과 행동에 대한 통찰이 없기 때문에 본인이 유혹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깜짝 놀란다. 실컷 상대방을 유혹해놓고서는 오리발을 내민다. 결국 어장관리 당한 사람만 황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연극성 성격을 가진 이들이 모두 여성인 것은 아니다. 남성 또한 연극성 성향을 나타낼 수 있고,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애정을 갈구한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겠다는 욕심을 버리자: 연극성 성격이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연극성 성격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연예인이 되거나 주목받는 위치에 올라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이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심’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히려 결핍감만 가중되고 있다면, 한걸음 멈추어 서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오히려 당신을 소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패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인의 반응에 주목하기보다, 자신의 내면에 주의를 집중하고 관찰해보자.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자신의 관점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며, “당신이 나를 좋아하니까 기쁘다.”가 아니라 “나는 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라고 되뇌어보자.
PART 2 빠져들어도 왜 나는 늘 허전한 걸까? - 집착과 중독에 대해
명품에 집착하는 여자, 소비에 몰두하는 남자 : 물질에 대한 집착의 심리
남들과 비교하는 심리가 문제다: 우리나라의 명품 열풍은 거세다.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에서 세일이라도 하는 날이면, 경제불황이 무색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모두들 똑같은 로고가 새겨진 값비싼 가방을 들고 다녀, 어떤 브랜드의 핸드백은 ‘국민백’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혹은 길거리에서 그 핸드백을 맨 여자를 3초 만에 한 번씩 볼 수 있다고 해서 ‘3초백’이라고도 불린다니, 저 국민백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는 심리가 있다. 한 달치 월급 혹은 몇 달치 월급을 빠듯하게 아끼며 모아서, 단지 가죽을 재단해놓았을 뿐인 핸드백에 투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비쌀수록 열광하고, 쉽게 살 수 없기에 더 갖고 싶어 하는 걸까?
현실적인 상황이나 경제력과는 상관없이 명품에 유난히 집착하는 심리는 낮은 자존감과 연관된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거나 결함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예민하다. 자기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정에 목마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자존감이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비치는 자신을 중시한다. 타인이 나를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겉모습이기에 자신을 그럴듯하게 내보일 수 있는 수단이 명품인 것이다. 따라서 명품에 집착하는 심리는 물질과는 분리되지 않는 빈약한 정체성과 관련된다.
상담실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회상한다. 부모가 가하는 폭력 때문에 하루하루가 힘겨웠던 시간, 가난 때문에 사회적 약자가 되어 쉽게 무시당했던 기억들. 지금은 어두운 터널 같던 과거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과거의 트라우마는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열등감이 클수록 그것을 보상하고자 하는 심리도 강하다. 과거에 대한 상처가 깊을수록 끔직한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친다. 하지만 뿌리 깊은 열등감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부터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잘난 사람으로 비치는 게 중요하다. 그럴듯한 사람으로 보이려면 무엇으로든 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질적 소유에 집착한다고 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채 남들과 비교하다 보면 갈증은 끝이 없다. 끝없이 물건을 구입하지만 결국 내적인 충만감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남들과 비교하는 심리, 그 미묘한 경쟁에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명품을 소유하는 것이 뭐가 그리 나쁘겠느냐마는, 내 스스로 명품이 없다고 해서, 혹은 누군가가 명품 하나 없느냐며 핀잔을 준다고 해서 주눅들 필요는 없다. 당신의 진정한 가치는 물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로해주는 유일한 친구는 술이다 : 알코올중독
“술은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하는 유일한 친구다.”: 거친 피부에 깊은 주름, 듬성한 머리숱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40대 중반인 이 남성은 생전 처음 방문한 상담실이 편하다고 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지 않으면 이혼하겠다는 아내의 으름장에 끌려오듯 억지로 상담실을 찾았지만,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마음을 무장해제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형의 죽음, 삶으로부터의 도피: 5남매 중 내성적인 막내아들이었다는 그는 장남인 큰형을 무척 따랐다. 열다섯 살도 넘게 차이 나는 큰형은 어린 시절의 그가 보기에는 슈퍼맨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큰형 덕분에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낀 적은 없었다. 큰형은 공부를 잘했지만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곧바로 일자리를 구했다. 일찍이 가장 역할을 맡은 큰형은 막내 동생을 유독 예뻐했다. 큰형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던 삶이 무너진 것은 그가 스무살이 되어서였다. 큰형은 그해 봄 막내 동생까지 대학에 입학시켰다며 기뻐했지만, 사업체를 운영하다 큰 빚을 지게 되었고 아내에게 이혼마저 당하게 되었다. 딸들의 양육권까지 빼앗긴 큰형은 미안하다는 말이 담긴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큰형의 자살은 그가 겪었던 어떤 충격적인 소식보다 더 큰 비극이었다. 우울감 때문에 학교 성적은 엉망이 되었고, 친구 관계도 소원해졌다. 삶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는 심각하게 자살을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이 힘내라며 따라주는 한두 잔의 술을 접하게 되고, 고통을 잊는 법을 발견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일주일에 한 번 마시던 술은 두세 번으로 늘었고, 소주 반병이던 주량은 두세 병으로 늘었다.
고통의 연속인 삶 속에서: 술에 의존하던 습관은 군대를 다녀오면서 잠깐 멈추었다. 대학에 복학한 후로는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회사에 취직해 열심히 일했고,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다. 토끼 같은 두 아이도 낳았다. 그의 소소한 행복이 깨진 것은 큰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버스 운전기사의 실수로 아들이 유치원 버스에 치어 숨졌다. 가정은 풍비박산되었고 우울증은 다시 그의 삶을 덮쳤다.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알코올 중독에 이르러 직장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동료들 사이에서의 평판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으며, 그의 불성실한 태도는 인사고과에 반영되었다.
죽음에 직면하기, 삶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고통: 준비되지 않은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추억을 회상하는 방법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방법도, 고통이 떠오를 새 없이 인터넷이나 술, 게임, 운동 등에 중독되는 방법도 있다. 무언가에 중독되면 중독 물질을 탐하는 그 순간에는 결핍을 잊을 수 있지만, 결국은 삶을 망가뜨리면서 더 큰 결핍을 불러온다. 그는 상처받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술에 중독되는 방법을 택했지만, 삶에서 더 소중한 것을 잃었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면서 고통이 살아 숨 쉬는 현실에 직면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오랜 시간 치료자와 상담하며 차츰 마음의 문을 열었고, 자신의 감정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말로 표현하며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큰형의 죽음과 아들의 죽음이 고통이었음을 인정하며, 자신의 아픔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을 온전히 만나면서 타인과 교감하기 위해선 우선 내 감정을 알고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방어하지 않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아내의 고통에도 공감하기 시작했다. “아내를 너무 오랫동안 내버려둔 것 같아요. 나보다 더 힘들었을 텐데 알아주지도 못하고 내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네요.” 그는 아내와 하루에 한 시간씩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술에 의존하는 대신 사랑하는 아내에게 의존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자신의 고통을 솔직하게 터놓으며 상대의 감정을 세심하게 묻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아내는 결혼생활의 희망을 발견했다. 그는 이제 술 대신 가정에 의지하기로 했다며 상담실 문을 나섰다.
PART 3 노력해도 왜 나는 늘 만족스럽지 못한 걸까? - 불만족과 완벽함에 대해
완벽을 꿈꾸는 남자, 실수를 못 참는 여자 : 강박적 성격
“나는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 “나무를 그리라고요? 무슨 나무를 그려요? 나무 종류가 정말 많잖아요. 잎사귀를 몇 개나 그려요?” 지훈은 그림검사를 하며 불안한지 계속 질문했다. 그리고 붉어진 얼굴로 연필을 꼭 쥔 채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누구도 그림을 잘 그려야 된다거나 열심히 하라는 압박을 주지 않았지만, 지훈은 가장 힘든 시험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계속 투덜거리며 부담감을 표현했다. “아, 시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그릴 수가 없잖아요.”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지우개로 다 지워야겠어요. 너무 못 그렸어요.” 지훈은 그림을 지우개로 전부 지웠다가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 결국 다른 내담자들보다 두세 배 이상 시간이 걸려 한 가지 심리검사를 겨우 마쳤다.
“그림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날 평가하겠구나. 그림을 못 그리면 날 바보라고 생각하겠구나.’ 하는 생각이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잘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림검사 때 느꼈던 기분을 평소에도 경험하나요?” 지훈은 항상 마감일에 쫓기는 회사생활의 고통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맡은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려고 늘 노력하지만 사람들은 그 노력을 몰라준다고 했다. 모두들 잘하려고 애쓰는 자신을 마땅한 이유도 없이 질책하고 소외시킨다고 했다. 지훈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노력하는데도 회사 사람들은 저를 인정하기는커녕 괴롭히기만 해요. 흐흑… 선생님, 저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걸까요? 저는 잘하려고 했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