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고전에게 인생을 묻다
이경주, 우경임 지음 | 글담출판사
마흔, 고전에게 인생을 묻다
이경주, 우경임 지음
글담출판사 / 2013년 5월 / 256쪽 / 13,800원
1장 마흔, 고독이 필요한 시간
먹고사는 일의 위대함_ 윌리엄 골딩, 『파리 대왕』
요즘 들어 부쩍 먹고사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행위인지에 대해 절실히 느끼게 된다. 잠시만 방심하면 마이너스 잔고가 되고, 자고 나면 물가가 올라 있다. 돈은 비탈에서 굴리는 눈덩이와 같아서 부모로부터 돈뭉치를 물려받은 이는 아래로 슬쩍 굴리기만 해도 불어난다고 한다. 반면 밑천 없이 시작한 이들은 안간힘을 다해 돈을 뭉쳐 보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스러져 버린다. 나이 들수록 “나중에 해 봐라, 먹고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라고 푸념하던 부모님의 심경에 동감하는 나를 발견한다.
더 무서운 것은 ‘열심히 살면 된다’는 오래된 원칙에 대한 믿음이 엷어지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도 계속 가난하게 살 것이며, 그저 ‘열심히 살았다’는 위안만 안고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다. 나이 마흔이 되면 밥벌이를 위해서는 고상한 문명의 힘을 빌리는 것보다 욕구에 충실한 야만의 힘이 더 효율적인 수단임을 시시때때로 목격한다. 이 지점에서 갈등이 생긴다. 밥벌이를 위해 허용되는 야만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사회적 질서와 원칙 속에서 최선을 다할 것인가, 아니면 비열하게 경쟁해 쟁취할 것인가? 이 기로에 서게 되는 나이가 마흔이다.
야만성은 문명을 파괴한다: 이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이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 대왕』이다. 줄거리를 잠시 살펴보자.
세계전쟁이 한창일 때 아이들만 태운 비행기가 어떤 섬에 추락했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살아남았다. 랄프와 피기는 바다에서 큰 소라를 찾았다. 랄프는 피기의 조언대로 소라를 불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이 소라 소리를 듣고 바닷가의 한 장소로 모인다. 투표를 통해 랄프는 대장이 됐다. 성가대 대장이었던 잭이 경쟁자였지만 투표에서 지고 만다. 랄프는 소라를 쥐어야 발언권을 준다든지, 다수결로 중요사안을 정한다든지 하는 문명의 규칙을 만들었다. 랄프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봉화다. 밤에도 불을 때야 하니 힘들고, 당장은 이익이 없어 보이지만, 랄프는 봉화만이 자신들을 그 섬에서 구출해 줄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잭과 성가대원들에게 24시간 봉화의 불을 맡겼다.
반면 잭은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믿었다. 잭도 처음에는 멧돼지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수차례의 시도 끝에 멧돼지의 목을 딴 후 먹을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멧돼지 사냥을 위해 봉화대의 불을 꺼뜨리기 일쑤였다. 결국 이 일로 랄프와 잭은 갈등을 빚는다. 잭은 랄프를 경질하고 자신을 대장으로 해달라고 투표를 청한다. 아이들의 냉담함과 무관심으로 잭은 몇 명의 성가대원과 떠나버린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랄프를 떠나 잭에게로 서서히 옮겨 가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다가 산 위에 떨어져 죽은 군인을 아이들이 무서운 괴물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랄프는 아이들의 공포가 허구임을 밝히려 하지만 익명성에 의존한 아이들의 소문은 커지기만 한다. 잭은 이 허구의 괴물에게 멧돼지 머리를 바치는 의식을 하면서 아이들의 믿음을 얻기 시작한다.
둘째는 고기 때문이다. 랄프는 고기를 먹여 줄 수 없지만 잭은 멧돼지를 잡아 늘 성대한 파티를 연다. 파티는 원시적인 형태로 진행되는데, 색깔 열매로 페인트를 만들어 바르고 원시적인 노래와 춤을 함께 추면서 동질감을 키워 간다. 아이들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봉화에 매달리는 것보다 고기를 택한다. 잭과 아이들의 야만스러운 축제가 이어지던 중 급기야 죽은 군인의 실체에 대해 얘기하려는 한 아이를 죽이게 된다. 그나마 랄프와 피기에게는 불을 피우는 데 필요한 돋보기안경이 있었다. 불은 봉화를 피우기 위해서도 고기를 굽기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잭은 무력으로 이 돋보기안경을 빼앗고, 랄프와 피기는 돋보기안경을 찾기 위해 잭의 동굴에 찾아간다. 하지만 피기는 잭의 아이 중 하나가 굴린 바위에 부딪혀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랄프는 나무창에 찔린 채 살기 위해 도망친다.
배고픔 앞에서 인간의 품위는 쉽게 무너진다: 랄프는 문명이다. 랄프가 매달리는 봉화는 문명의 불꽃이다. 반면 잭은 야만이다. 잭이 잡는 멧돼지는 매일매일의 양식이다. 봉화를 피워 섬에서 빠져나가면 아이들은 다시 어른들의 보호 속에서 양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섬에서는 그날의 양식이 더 절실하다. 확률이 희박한 봉화에 매달리기보다는 멧돼지 고기 한 점에 더 끌리는 것이다. 게다가 잭이 이끄는 야만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위치인 것처럼 보인다. 함께 야만적인 축제를 열고, 괴기스러운 괴물을 달래기 위한 의식을 치르며, 고기를 나누어 먹는다. 한편 랄프가 이끄는 문명의 세계는 계급이 분명히 존재한다. 대장인 랄프, 관리격인 피기와 몇 명의 아이들, 봉화를 책임지는 일꾼과 과일을 따오는 일꾼 등 책임과 의무의 한계가 분명하다. 책임을 다하지 않을 경우 처벌도 행해진다.
우리가 사는 문명 역시 마찬가지다. 법과 도덕, 관습 등이 끊임없이 우리의 행동을 규정한다. 처벌 역시 다양하다. 비루한 밥벌이 대신 고귀한 가치가 있다고 알려 준다. 그러나 배고픔 앞에서 인간의 품위는 쉽게 무너진다. 웃돈을 얹어 파는 암표상, 미터기를 조작하는 택시 기사, 뇌물을 받고 허가를 내주는 공무원, 연비를 속여서 차를 판매하는 대기업 등 본질은 밥벌이를 위해 반칙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만스러운 세상에는 ‘먹고살려고 그랬다’는 핑계 아래 담합이 판을 친다. 공범들은 이익을 나누어 가진다. 공범일 뿐이니, 이 세계에는 계급이 없다. 책임과 의무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야만스러운 세상으로 고개를 돌린다.
반면 문명의 힘을 믿는 것은 놀이공원에서 인기 있는 놀이기구를 타려고 기나긴 줄을 서는 것과 같다. 아픈 다리와 배고픔을 참아야 하고, 지루함과 짜증을 억눌러야 한다. 2시간 만에 간신히 탄 놀이기구가 별로 재미없었다고 해도, 줄을 서는 과정은 꼭 필요하다고 가족을 설득해야 한다. 그저 봉화는 꺼뜨리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지금 당장은 조금 더 배고프고 피곤하지만, 나중에는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고 믿어야 하니까.
그 결과, 마흔의 나는 랄프와 같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지금까지 믿었던 법과 윤리가 어쩌면 공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봉화를 피우는 데 참여하는 것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 미루어 두고, 오늘 내 배를 채울 멧돼지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고민한다. 그러나 정직하게 먹고사는 것이야말로 문명을 지탱하는 위대한 힘이다. 이쯤에서 분량으로 따지면 1%에 불과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99%에 해당하는 『파리 대왕』의 결말에 대해 말해야겠다.
정직하게 먹고사는 것이야말로 문명을 지탱하는 위대한 힘: 야만스럽게 돌변한 아이들은 이미 상처를 입은 랄프를 찾아내기 위해 수색을 시작한다. 랄프는 잭의 동굴 근처에서 숲으로 간신히 도망쳤지만 잭과 아이들은 섬 전체에 불을 지른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진 랄프는 죽을 힘을 다해 해변으로 도망친다. 아이들의 죽창이 주위에 꽂히고, 함성이 진동할 때 랄프는 결국 힘이 다하여 쓰러진다. 바로 그때 아이들을 구하러 온 해군이 그들 앞에 서 있다. 그 순간 아이들은 다시 예전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모든 야만적인 행위는 해군을 만남과 동시에 끝난다.
색깔이 있는 진흙으로 온몸을 칠한 소년들이 모래사장에서 각자 손에 창을 들고 반원 모양을 하고 조용히 서 있었다. “재미있게 놀았군.”(해군이 말했다.)
불길은 모래사장에 있는 야자수에 전염되어 요란스럽게 그것을 태웠다. 불길은 마치 곡예사처럼 빨리 옮겨 가서 그 화강암 고대에 있는 야자수 꼭대기를 휘어잡았던 것이다. 하늘이 검게 보였다.
아이들은 섬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소설 속에서 인간의 본성은 문명을 지탱하기에 충분히 선하지 않았다. 굶주림 앞에서 아이들은 쉽게 야만의 본성을 드러냈다. 문명도 쉽게 무너졌다. 그리고 문명은 해군의 등장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소설에서 해군의 등장으로 아이들의 야만적 세계가 끝나도록 한 것은 어색하지는 않지만, 현실에서는 또 다른 고민을 낳는다. 엄격한 처벌로 사회적 규칙을 지탱하는 것은 힘의 논리다. 또 다른 야만의 세계다. 게다가 법관, 경찰, 군인, 공무원 등 사회적 규칙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해군’이 공정한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힘이 없는 자만 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과 같이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면 문명의 이름을 한 야만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사회적 규칙에 순응하며 살겠다고 결심하는 이유는, 그 규칙이 다소 부당하고 미흡할지라도 부단히 지키려고 애쓰는 나와 같은 평범한 이들 때문이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만으로 삶이 버거워도, 문명의 세계에서 야만의 세계로 옮아가기보다 바늘구멍만 한 희망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이들이 아직은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루 먹이를 찾아 나서자’고 부르짖는 선동가보다, 당장 변화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시간 나는 대로 봉화를 피우는 데 힘을 할애하는 조용한 혁명가들이 더욱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소설의 실험은 문명의 종말이었지만, 세상의 실험은 문명의 번성임을 믿기 때문이다.
문명의 규칙을 지키면서 정직하게 먹고사는 것만으로 우리는 세상의 문명을 지탱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야만의 세계로부터 끊임없는 유혹을 뿌리쳐야 할 힘이 되고 단지 정직하게 먹고산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해야 할 까닭이다.
2장 젊은 날의 화두에게 말 걸기
무모할 정도로 집요한, 그래서 몹시 부러운 개츠비_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이 소설은 시작부터가 눈길을 끌었다.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 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 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책을 펼쳤을 때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아버지의 충고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첫인상 덕분에 나는 비교적 쉽게 개츠비에 몰입할 수 있었고, 책을 읽는 동안 개츠비라는 인물에 점점 빠져들었다.
내겐 너무나 위대한 개츠비: 반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는 매우 엇갈린다. 작품을 읽고 별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는 목소리도 크다. 또 개츠비 앞에 붙은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 대해서도 논란이 오간다.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작가가 개츠비라는 인물을 희화화하기 위해 선택한 제목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꽤 많다. 소설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에 대해 ‘내가 드러내 놓고 경멸해 마지않는 모든 것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평한다. 그의 말대로 개츠비는 속물이다. 자신을 과시하는 몸짓이 우스꽝스럽다.
난 중서부의 어느 부잣집에서 태어났어요……. 가족들은 모두 죽고 없습니다. 미국에서 자랐지만 교육은 옥스퍼드에서 받았어요. 선조 대대로 그곳에서 교육을 받아 왔거든요. 집안 전통이죠.
누가 봐도 대번에 거짓임을 알 수 있는 말을 내뱉는다. 어설픈 거짓말은 위태롭다. 매일 화려한 파티를 열 정도로 재력을 갖췄지만 존경이 아닌 멸시를 받을 뿐이다. 작가는 이를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개츠비를 조롱하는 세상을 오히려 조롱한다. 그러나 그런 개츠비에게 나는 반했다. 평생 동안 하나의 목표를 향해 무모할 정도로 질주하는 그의 열정이 부러웠다. 설사 꿈을 이루려는 방법이 부도덕하다 해도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물질은 풍요롭고 마음은 가난한 시대: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경제의 황금기였던 1920년대가 배경이다. 젊은이들이 모여든 도시는 쾌락으로 가득했다. 밤마다 재즈가 흐르는 파티가 열렸다. 이를 빗대 ‘재즈의 시대’라고 한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벼락부자가 된 개츠비를 통해 당대 미국의 물신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물질은 풍요로웠지만 사람도, 세상도 꿈을 잃어 가고 있던 때였다. 미국으로 이주했던 청교도들이 금욕과 절약을 통해 증명하려 했던 신앙은 사라졌고, 대신 ‘돈’이 목적이 된 세상에서 정신은 피폐해졌다.
주인공 개츠비는 이런 시대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소설의 화자 닉은 증권사 직원으로 개츠비와 이웃 사이이며, 개츠비의 첫사랑인 데이지의 친척 오빠이기도 하다. 옥스퍼드 대학 출신 재력가로 알려진 개츠비는 사실 가난 때문에 데이지와 헤어졌다. 그래서 그는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고 마침내 뉴욕에 입성했다. 그러나 뉴욕 상류사회는 개츠비를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데이지의 남편 톰은 슬금슬금 바람을 피우는 부도덕한 인간이지만, 개츠비의 비루한 출신 배경을 알고는 멸시를 보낸다. 남편의 외도에 화가 난 데이지 역시 개츠비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자동차 사고를 내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개츠비가 대신 죄를 뒤집어쓴 채 죽임을 당한다.
개츠비는 가난했고 배우지도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밴 우아한 제스처 따위도 없었다. 게다가 모자라 보일 만큼 그의 사랑은 맹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신흥 부호가 된 뒤에도 뉴욕 상류사회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독자 역시 개츠비를 비웃는다. 그러다가 순간 뜨끔해진다. 개츠비를 속물이라 비웃는 주변인들이야말로 속물이기 때문이다. 개츠비가 부도덕하게 부를 축적했다고 비난하는 톰 역시 도덕적으로 타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아함으로 개츠비를 반하게 했던 데이지를 보라. 데이지가 개츠비에게 잠시 마음이 빼앗긴 것은 부를 상징하는 개츠비의 저택을 보았을 때였다.
우리는 꿈을 좇는 동안 가장 빛나는 순간을 살게 된다: 나 역시 처음에는 개츠비를 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평생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개츠비가 가엾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개츠비에게 반해 버렸다. 그는 모두가 꿈을 잃고 헤매던 시기에 평생 단 하나의 꿈을 좇은 인물이다. 남들처럼 돈을 좇은 것도 아니고 권력을 쥐려 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첫사랑 데이지와 함께 살고 싶었을 뿐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개츠비는 자신의 꿈을 좇았다. 어느 누가 그를 쉽게 속물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개츠비를 경멸하던 닉이 결국에는 개츠비를 이해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그에게는 뭔가 멋진 구석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1만 5,000킬로미터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지진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그런 진부한 감수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한테서도 일찍이 발견한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속절없는 슬픔과 숨 가쁜 환희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삼은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먼지들 때문이었다.
꿈은 인생을 나아가게 하는 좌표다: 젊음은 무모하다. 멀리 있는 꿈일지라도, 길을 돌고 돌아야 한다 해도 간절하게 꿈을 좇는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나이가 됐다. 지금 내 모습은 바다 한가운데서 좌표인 북극성을 잃어버린 선장과도 같다. 북극성만 바라보며 먼 길을 떠난 선장은 북극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북극성은 가까워졌다고 느끼면 다시 멀어진다. 급기야 선장은 영원히 북극성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예상에 사로잡힌다. 그렇다고 선장이 북극성을 향해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바로 눈앞의 파도와만 맞선다면 어떨까. 아마 아무리 좋은 장비가 있고, 뛰어난 선원이 있다 해도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선장은 북극성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파도를 만났다고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바다는 원래 파도가 친다는 것을 잊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