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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이인자

송은명 지음 | 시아출판사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이인자

송은명 지음

시아출판사 / 2012년 12월 / 375쪽 / 14,000원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_ 을파소



을파소(?~203, 고구려)는 고구려의 명재상으로, 고국천왕을 도와 왕권 강화에 이바지하고 백성들을 위한 구휼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라고 할 수 있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했다. 고국천왕과 을파소는 성공한 일인자와 이인자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고국천왕은 고대국가의 기틀을 닦은 임금으로, 을파소는 백성들을 사랑한 명재상으로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었다.

평범한 농부의 화려한 정계 데뷔: 『삼국사기』열전에 의하면 을파소는 고구려 유리왕 때 대신을 지낸 을소의 자손으로, 처음에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한낱 평범한 농부였던 을파소가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국상(國相)’의 자리에 올라 고국천왕을 보필할 수 있었을까? 처음 고구려는 다섯 개의 부족, 즉 왕족인 계루부와 왕비족인 연나부를 비롯하여 절노부ㆍ관노부ㆍ순노부를 중심으로 건국된 부족연맹체 국가였다. 그 후 5부는 고구려의 지배 계급을 형성하는 귀족이 되었는데, 이들은 왕을 감시하고 사사건건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 5부의 견제로 인해 왕권은 미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 틈을 타서 귀족들은 마음대로 백성들을 약탈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 가운데 연나부의 어비류와 좌기려의 부정이 특히 심했다. 이에 190년, 고국천왕이 그들을 잡아들여 죄를 물으려 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어비류와 좌기려는 군사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2년여에 걸쳐 계속되었던 반란을 무사히 진압한 고국천왕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현재 나라의 중요한 직책 대부분을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어 능력 있고 어진 사람들의 벼슬길이 막혀 있소. 그뿐 아니라 귀족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를 내세워 백성들을 괴롭히고 나아가 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소. 이것은 모두 임금인 내가 현명하지 못한 탓이오. 그러니 나를 도와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를 추천해 주시오.” 고국천왕의 지시를 받은 신하들은 서로 의논한 끝에 동부에 사는 안류를 추천했다. 고국천왕이 안류를 불러 나랏일을 맡기려 하자, 그는 사양하며 대신 을파소를 추천했다. “대왕마마, 저는 지혜가 부족하여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없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서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가 매우 지혜롭고 현명하다 하니 그를 불러 나랏일을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는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왕마마께서 을파소를 불러 나랏일을 맡기신다면 이 나라는 안정되고 백성들의 생활 또한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마마께서는 어진 성군으로 역사에 영원히 남으실 것입니다.” 고국천왕은 즉시 을파소를 맞아들였다.

최고의 관직을 요구하다: 을파소를 만난 고국천왕은 지혜롭고 현명한 그의 인물됨에 반하여 곧 중외대부에 더하여 우태라는 벼슬을 내렸다. 을파소는 고국천왕의 그러한 예우에 감복하긴 하였으나 내려진 직위가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왕의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대왕마마, 신은 늙고 능력이 부족하여 도저히 대왕마마의 뜻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대왕마마는 젊고 현명한 인재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 뜻을 이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귀족들에 대한 왕실의 통제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고국천왕은 귀족들과 연계되어 있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을 강력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확실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러한 고국천왕의 뜻을 읽은 을파소는 자신의 세력 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왕의 뜻에 따르고 자신의 뜻을 펼치려면 최고직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을파소는 고구려 지배세력의 회의체 의장인 국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일로 기존 지배세력은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한낱 농사꾼에 불과했던 을파소가 어느 날 갑자기 국상의 자리에 오르자 귀족들은 크게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을파소가 자신들을 미워하여 임금과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모함했다. 그 소문은 고국천왕의 귀에도 들어갔는데, 고국천왕은 오히려 을파소를 모함하는 귀족들을 크게 꾸짖었다. “오늘 이후로 국상의 말에 따르지 않고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직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그 가족들까지 엄하게 다스리겠다.”

이와 같은 고국천왕의 전폭적인 지원 덕택에 을파소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하고 사회 안정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다. 을파소는 형제가 상속했던 기존의 왕위계승제도를 부자상속제로 바꾸고, 5부의 명칭도 방위를 나타내는 내부ㆍ동부ㆍ서부ㆍ남부ㆍ북부로 바꿈으로써 귀족들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고국천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고대국가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고국천왕과 을파소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났다. 고국천왕은 귀족들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뒷받침해 줄 조력자가 필요했고, 을파소는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을파소가 국상에 오른 뒤 남긴 말에서 애초에 그가 큰 뜻을 품고 시골에 은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옛 말에 자신의 뜻을 펼 수 없으면 숨어서 살고,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때를 만나면 나가서 벼슬을 하는 것이 선비의 당연한 도리라고 했다. 지금 대왕께서 나를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 주시는데, 내 어찌 계속해서 숨어 살 수 있겠는가?”

백성들을 구휼하다: 을파소가 고국천왕을 도와 왕권을 강화하고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그가 명재상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백성들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바로 진대법이다. 진대법이란 춘궁기인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수확기인 가을에 갚도록 하는 것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한 제도이다. 진대법의 실시는 을파소가 몸소 농사를 지은 경험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어느 날 을파소와 함께 사냥을 하고 돌아오던 고국천왕은 길가에서 울고 있는 한 백성을 만났다. 고국천왕이 그를 불러 우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소인은 집이 가난하여 지금까지 품팔이로 겨우겨우 어머니를 모셔 왔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그나마 품팔이를 할 곳도 없어졌습니다. 이제 식량은 점점 떨어져만 가는데 일자리는 전혀 생기지 않으니 제 어머니는 영락없이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울고 있는 것입니다.” 곁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을파소는 가슴이 몹시 아팠다. ‘아, 내가 이 나라의 국상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굶주리게 하다니……. 이것은 내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을파소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도울 방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을파소는 궁궐로 돌아오자마자 고국천왕에게 한 가지 건의를 했다. “대왕마마,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하여 진대법을 실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대법이란 먹을 것이 떨어져 굶주리는 춘궁기에 나라에서 식량을 빌려 주었다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가을에 갚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진대법의 실시로 고구려 백성들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백성들의 행복은 곧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다. 백성들의 입세서는 고국천왕과 을파소를 칭찬하는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을파소는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백성들을 사랑하여 결국 진대법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는 고국천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산상왕을 돕다가 산상왕 7년(203)에 세상을 떠났다. 을파소가 세상을 떠나자 산상왕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슬픔에 잠겼다.



실패한 개혁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_ 왕안석



‘왕안석(1021~1086, 중국 송나라)’ 하면 먼저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으로 뛰어난 문장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혁신적인 개혁정책으로 북송의 개혁을 이끌었던 뛰어난 정치가였다. 하지만 왕안석의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것으로 보수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시대적 상황 또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했기에 개혁 추진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드러냈다. 결국 그의 후원자였던 신종의 죽음과 함께 그의 개혁정책은 실패로 끝났고 당대 최고의 이인자였던 왕안석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신종에게 발탁되다: 중국 송나라는 1126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수도 개봉(開封, 카이펑)이 함락되자 임안(臨安, 지금의 항저우)으로 수도를 옮기는데, 건국 후부터 1126년까지 ‘북송’, 1127년부터 원나라에 의해 멸망한 1279년까지를 ‘남송’이라고 부른다.

왕안석은 1021년 무주(撫州, 푸저우) 임천(臨川, 린촨)땅에서 태어난 북송 대의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 왔으나 할아버지 때부터 비로소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지방관을 지내기도 했다. 왕안석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녕부(江寧府, 지금의 난징)에 정착했다. 스물두 살 되던 해인 1042년,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의 견습관리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딘 왕안석은 그때부터 40세가 될 때까지 몇몇 지역의 지방관을 지냈을 뿐 중앙 정계에는 전혀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나 왕안석의 높은 학문과 뛰어난 행정 관리 능력이 알려지면서 그의 명성은 온 나라에 널리 퍼져 나갔다. 특히 그는 관개사업과 재정 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058년에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서술한 「만언서(萬言書)」를 작성하여 조정에 제출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후 그의 개혁사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만언서」는 중국 역사상 명문으로 손꼽히는 글이기도 하다. 「만언서」를 계기로 왕안석은 일부 조정 관리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들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왕안석은 아직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가족 부양의 책임을 들어 여러 차례에 걸쳐 중앙 진출을 사양했다.

왕안석이 지강녕부로 취임한 바로 신종이 등극했는데, 황태자 시절부터 영특했으며 뛰어난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던 신종은 북송 제6대 황제에 오르자마자 자신을 도와 국정을 이끌어 갈 인재를 찾았다. 이때 신종의 스승이었던 한유가 왕안석을 적극 추천하고 나섰다. 그동안 왕안석의 뛰어난 행정 능력과 자질을 눈여겨본 한유는 신임 황제 신종을 도와 각종 제도의 폐해를 바로잡고 개혁을 주도할 인물로 그를 손꼽았던 것이다. 한유의 추천에 따라 신종은 왕안석을 조정으로 불러올렸다. 그동안 수차례 중앙 진출을 사양해 왔던 왕안석은 생각을 바꾸어 황성으로 나아가 신종을 만났는데, 이로써 마침내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때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금세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다. 신종은 왕안석의 인물됨에 큰 감명을 받았고, 왕안석 또한 명민하고 탁월한 신종에게 감명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왕안석은 자신의 개혁정책을 펼칠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이자 환상적인 파트너인 신종과 만나게 되었다.

정치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다: 왕안석은 곧 국정의 전반을 관장하는 참지정사의 자리에 올랐다. 신종은 왕안석을 각별히 존경하고 우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로써 왕안석은 평소 자신이 품고 있던 정치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왕안석은 다방면에 걸친 개혁작업에 착수했는데, 특히 그는 국방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나라의 재정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재정에 관한 개혁법안인 ‘신법(新法)’을 제정하여 점차적으로 이를 시행해 나갔다.

먼저,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의 운송ㆍ교환ㆍ구입ㆍ판매 등을 나라에서 일괄 통제하도록 하는 ‘균수법(均輸法)’을 시행했다. 그리고 중소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나라에서 직접 중소 상인들로부터 물품을 구입하고 그들에게 자금을 대여하는 ‘시역법(市易法)’을 실시하였다. 이 외에 농민들에 대한 저리 금융정책의 일환으로 ‘청묘법(靑苗法)’을 실시하였고, 나라에 대한 부역의 의무를 돈을 내고 면제받게 한 후, 그 돈으로 실업자를 고용하는 ‘모역법(募役法)’을 실시하였다. 또한 세금 포탈 및 세금 징수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토지 상태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매기는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을 실시하기도 했다. 왕안석은 이에 그치지 않고 10가구를 기본 단위로 하여 민병(民兵)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보갑법(保甲法)’과 북쪽 변방의 서북변 지역의 토호들에게 말을 할당하게 하여 사육하게 하는 ‘보마법(保馬法)’을 실시하였다. 또한 그는 교육 및 관제를 개혁하기 위해 기존의 문장 위주의 과거시험을 경서와 실제 정치에 관한 것으로 대체하였으며, ‘창법(倉法)’을 실시하여 서리에게 봉록을 지급하고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하게 다스리는 한편, 유능한 자에게는 시험을 거쳐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관료들과 특권 계층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이었던 왕안석의 개혁정책에 가장 심하게 반발한 사람은 북방 출신 보수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사마광과 문인으로서 명성을 날리던 소식과 소철 형제였다. 그들뿐 아니라 지난날 인종 대에 개혁을 주도했던 한기와 부필을 비롯하여 한유와 함께 왕안석이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적극 추천했던 구양수, 그의 지지자 여공저와 정협까지도 그의 개혁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관료들의 반대에도 왕안석은 자신의 개혁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밀고 나갔고, 신종 또한 끝까지 그를 후원해 주었다. 신종은 오히려 왕안석을 재상에 임명하여 그의 개혁정책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이러한 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왕안석은 계속해서 개혁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074년, 중국 일대를 휩쓴 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가중되자 이를 계기로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개혁 반대파들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이때 정협은 기근 지역의 참상을 나타낸 「유민도(流民圖)」를 그려 조정에 바치기도 했는데, 이것을 본 신종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이때 실시한 시역법은 대상인들로부터 많은 반발을 사고 말았다. 이들은 보수 관료들과 결탁하여 왕안석의 실각을 요구하고 나섰다. 때를 같이하여 신종의 어머니 선인태후와 환관들은 신종에게 왕안석을 퇴출시키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사태로 인해 자존심이 크게 상한 왕안석은 결국 사임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왕안석에 대한 신종의 신뢰는 여전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왕안석을 다시 지강녕부에 임명하고 관문전 학사직을 아울러 제수했다. 하지만 이미 개혁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신종은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일부 정책들을 중단시켜 버렸다.

왕안석이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시간은 1년도 채 안 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전에 비해 크게 약화되었다. 자신이 추천한 인물들에 대해 예전처럼 신종의 즉각적인 승인을 받아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던 핵심 인물인 증포와 여혜경마저 그의 개혁을 비판하고 나섰다. 두 사람은 한때 그의 문하생이었으나, 증포는 시역법의 잘못을 지적하여 왕안석이 사임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여혜경은 왕안석이 잠시 조정에서 떠나 있는 사이에 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또한 복직된 왕안석을 따르는 무리들은 하나같이 경험이 부족하고 신뢰할 수 없었으며, 반대파들의 반대 운동은 계속되었다. 게다가 이 무렵에 들이닥친 아들 왕방의 죽음은 왕안석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마침내 1076년 겨울, 왕안석은 사직을 청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그는 1069년, 중앙에 진출하여 개혁의 실세로 활약한 지 8년여 만에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왕안석이 추진했던 개혁정책은 그의 사임 후에도 큰 변화 없이 계속되었으나, 신종이 죽고 나서 나이 어린 철종이 즉위하자 선인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개혁을 반대하는 ‘구법당(舊法黨)’이 집권하게 되면서 하나둘씩 폐지되기 시작했고, 일부는 완전히 수정되기까지 했다. 왕안석은 자신의 개혁정책들이 차례로 폐지되거나 전면 수정되는 것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한 채 눈을 감았다. 그때가 1086년으로 그의 나이 6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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