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이형권 지음 | 학연문화사
산사
이형권 지음
학연문화사 / 2013년 4월 / 351쪽 / 28,000원
피안의 경계가 어찌 먼 곳에 있으리_ 개심사
우리 민족에게 산은 더없이 중요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산 하나를 송두리째 허물어 내는 일쯤은 다반사지만 옛사람들은 산속의 나무 한 그루라도 조심스러웠다. 산에는 으레 그 터를 지켜 주는 영험한 분이 존재하시고 그 음덕으로 사람들의 마을에 평화가 찾아오리라고 생각했다. 살아서는 산자락에 의지하여 생을 풀어 나갔고 죽은 뒤에는 반드시 그 산속에 묻혀 뼈를 남기고자 했다. 그들에게 있어 산은 지상의 마음이 하늘의 세계로 통하는 길목이었고, 하늘나라의 마음이 머무는 신성한 장소였다. 그러므로 우리 국토의 뼈를 이루고 있는 산줄기에는 역사의 굽잇길을 넘어온 숱한 무용담과 함께 인간세계의 미혹함을 깨우치려는 선지자들의 발자취가 또 다른 크기와 높이로 쌓여 있는 것이다.
비산비야의 목장길 풍경
개심사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상왕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해미읍에서 당진 쪽으로 향하는 지방도로를 타고 5km쯤 달리다 신창마을에서 우회전하여 다시 2km쯤 더 올라가야 한다. 이 길에서는 찻길과 함께 어깨를 마주하고 달리는 비산비야의 전형적인 산등성이를 만끽할 수 있다. 온통 민둥산으로 깎인 산 언덕이 푸른 목초지로 변해 있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 떼의 무리가 펼쳐진다. 초행길이라면 그 낯선 풍경에 모두가 탄성을 지르게 된다. 이른바 유신시대 권력의 핵심이었던 국무총리가 개발한 삼화목장이다.
총 638만 평이라고 하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크기를 상상할 수도 없고, 그저 끝없이 펼쳐져 있다라는 표현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목장은 그의 육군사관학교 후배들이 쿠데타적 사건을 일으키면서 부정축재로 판명되어 국가에 반납되었고, 지금은 ‘축협 한우개량사업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개심사 가는 길은 이 목장의 혜택인지 모르겠으나, 외줄기 신작로 길이 시멘트로 포장되어 예전보다는 길품이 수월해졌다. 목장지대 풍경 탓인지 다소 들뜬 마음으로 개심사 입구에 도착하지만 마중 나온 소나무숲은 어느새 속세의 마음을 씻어 준다. 비탈진 언덕길에서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길손을 맞는 소나무숲은 사시사철 그대로다.
개심사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한쪽은 고향마을 뒷동산처럼 속살이 드러난 황톳길이고, 다른 쪽은 잡초가 알맞게 우거진 돌계단으로 이어진다. 오르내릴 때 번갈아 가면 느끼는 정취가 그만이다. 일주문은 물론 사찰을 알리는 안내판도 매표소도 그 무엇도 없다. 다만 나지막한 돌기둥에 보일 듯 말 듯 개심사 입구(開心寺入口), 세심동(洗心洞)이라고만 씌어 있다.
겨울 산사의 분위기 일품
그곳으로 오르는 길은 산이 호흡에 따라 굽어지고 꺾어지고 휘돌아 가며 온갖 생각들과 마주하게 한다. 결코 가파르거나 뒤처지지 않고 산이 만들어 준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산새들의 울음소리도 청아하고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길섶에서는 가끔씩 다람쥐가 나들이를 간다. 돌계단의 정성도 오래디오랜 옛사람의 솜씨다.여성 산악인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고 돌아온 지현옥 씨는 소감을 묻는 인터뷰에서 “고통스런 등정길에서 두 눈에 삼삼하게 떠올랐던 것은 푸른 숲과 바윗돌이 어우러진 아기자기한 우리나라의 오솔길이었다”고 했다. 개심사로 오르는 길은 바로 그런 분위기의 오솔길이다.
그 행복한 산사의 길이 끝나는 곳에는 수련이 피어나는 예쁜 연못이 있고, 그 연못의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비로 개심사 경내로 들어간다. 이 연못은 풍수지리상 개심사가 위치한 산이 코끼리 형상이므로 코끼리가 마실 물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경지(境地)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연못 속에 비춰 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외나무다리는 모든 번뇌를 벗고 오로지 진리의 세계에 귀의하겠다는 일념으로 건너오란 뜻이다.
연못 위 외나무다리를 건너 만나는 개심사는 봄이면 꽃향기로 가득한 궁전이 되고 만다. 매화꽃ㆍ산수유꽃ㆍ오얏꽃ㆍ모란꽃 등의 온갖 꽃들이 고풍스런 절집과 어울려 피어나는데, 그 중에서도 겹벚꽃이 흐드러지는 날이면 탐스러운 꽃송이에 절집이 무너져 내릴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사한 봄날의 개심사를 으뜸으로 친다. 그렇지만 어디 꽃피는 춘삼월뿐이겠는가. 나그네의 여수를 아는 사람이라면 겨울 개심사도 잊지 못할 것이다. 봄과 여름 동안 무성하게 길러 온 마음자리를 비장하게 떨쳐 버리고, 그 빈터에 새로운 마음을 담고자 하는 것이 겨울 개심사다. 외진 절집에 사람들의 발길마저 끊어지고 오로지 지치도록 푸른 솔바람 소리만 고적할 때, 개심사의 진면목은 얼어붙은 마음의 빗장마저 고삐처럼 풀리게 하고 만다.
불타지 않은 조선 초기 대웅보전
개심사는 전형적인 산지가람으로 백제 의자왕 14년(653)에 혜감스님이 창건했다. 본래 이름은 개원사(開元寺)였으며,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처능대사가 중건하면서 개심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현재의 절집은 1941년 해체수리시 발견된 묵서명으로 184년에 새롭게 중창했으며, 그 뒤 17, 18세기에 한 차례씩 더 손을 본 자취를 알 수 있다.
이리하여 개심사는 우리나라 사찰사에서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의 전화를 입지 않은 가람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웅보전과 심검당ㆍ무량수전ㆍ안양우락 팔을 두르고 에워싸듯 배치되어 있으며, 그 절마당에는 5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보물 143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조선 초기의 단정한 품위가 돋보이는 맞배지붕의 건축이다. 이 건축은 주심포 계통과 다포식으로 변화하던 시기의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개심사의 또 다른 건축적 특징은 입구에서 대웅보전까지의 동선 체계가 다른 절들처럼 직선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부드러운 곡선의 흐름을 따라서 진입하게 되어 있어 한결 친숙한 느낌을 연출한다. 또 지붕의 기와 끝에는 도자기로 구워 낸 하얀 연봉이 매달려 있다. 기능적으로는 수키와가 흘러내리지 못하게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절집에서는 이를 감로수병이라 부른다. 그 생김새와 크기가 제각각인 것은 아무리 좋은 부처의 말씀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달라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올망졸망 붙어 있는 절집을 구경하고 개심사의 진면목을 느끼기 위해서는 명부전을 지나 산신각까지 올라야 한다. 이곳에 오르면 개심사의 자태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서해바다까지 흘러가는 산자락을 바라볼 수도 있다.
선묘낭자의 사랑이 깃든 뜬바위 절_ 부석사
최순우(崔淳雨) 선생은 『한국의 미, 한국의 마음』이라는 책에서 고려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을 해설하면서 이런 글을 남겨 놓으셨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천,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저물어 가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며 사무치는 마음으로 조상님께 감사드린다는 이 글을 읽고, 나는 낯선 길을 물어 부석사로 무작정 떠났다.
뜬바위에 얽힌 사랑 이야기
절집 살림을 맡고 있던 귀일스님의 배려로 부석사 요사채에서 하룻밤 묵으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전설 같은 이야기의 서두는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여래상 불단 밑에 돌로 깎은 용이 묻혀 있고 그것을 확인해 보았다는 데서 시작되었다.
옛날 옛적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였다. 심한 배멀미에 병이 들어 산둥반도 양주성 어느 신도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집의 과년한 딸 선묘(善妙)라는 낭자가 그만 의상에게 반하여 연정을 품게 되었다. 선묘낭자는 온갖 교태를 부려 의상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구도의 일념에 가득 찬 의상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이에 더욱 감명 받은 선묘낭자는 세세생생에 걸쳐 스님께 귀의하여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의상은 몸이 완쾌된 뒤 종남산 지엄화상의 문하에서 10년 동안 화엄학의 정수를 체득하고 스승으로부터 법통을 인가받아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양주성 선묘낭자의 집에 들러 그동안의 후원에 감사드리는 인사를 하려 했으나, 마침 선묘낭자가 출타 중이어서 만나 보지 못하고 떠나오게 되었다.
뒤늦게 의상대사가 귀국길에 오른다는 것을 안 선묘낭자는 그동안 준비해 두었던 법의(法衣)와 집기를 대바구니함에 담아 가지고 해안으로 달려 나왔다. 그러나 의상대사를 실은 배는 이미 떠나가는 중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선묘낭자가 합장을 하고 “저의 참된 본심은 스님을 지극하게 공양하는 일입니다. 원하옵건대 이 옷함이 저 배에까지 이르기를 바라옵니다” 하고 기도를 하며 함을 바다 위에 띄우니,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 의상대사가 탄 배에 닿았다. 그녀는 또다시 “제 몸이 용으로 변하여 수천 리 뱃길을 보호하겠나이다”라고 맹세하며 바다에 뛰어드니, 바다의 신도 그녀의 원력에 감동하여 용이 되게 하였다. 그 뒤 선묘낭자는 용이 되어 서해바다의 풍랑을 잠재워 의상대사의 귀국길을 보살폈고, 이곳 봉황산 자락에 화엄종지를 펼치기 위해 전법도량을 만들 때도 이적을 보여 도왔다.
의상대사가 왕명에 따라 이곳에 화엄종의 도량을 세우려 하자 종파를 달리하던 무리들이 모여들어 방해를 했는데, 선묘낭자가 집채만 한 바윗돌로 변신하여 그들의 머리 위에서 위협하자 혼비백산 흩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뜬바위가 된 선묘낭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부석사(浮石寺)라 이름 했고, 무량수전 뒤편에는 선묘각이 있으며, 그 당시 이적을 만들었던 바위를 부석이라고 한다. 그 뒤 선묘낭자는 부석사를 영원토록 수호하기 위해 석룡으로 변해 무량수전 밑에서부터 절마당 석등 자리에까지 몸을 묻었고, 지금도 땅을 파 보면 석룡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고적한 절간의 밤늦은 시간에 들은 이 사랑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굉장히 애틋한 심사에 젖어들게 했다.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는 것은 후대에 신비화시킨 이야기겠지만, 이국의 수도승에게 마음을 빼앗긴 한 여인이 부모형제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를 따르기 위해 낯선 타국까지 쫓아와서 보여 준 사랑은 어느 순교자 못지않은 거룩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아래에 묻혀 있다는 설화적 구조, 그리고 그녀의 사당이 만들어져 있는 점, 또 선묘정(善妙井)이라는 우물이 있어 가뭄 때 기도를 드리면 감응이 있다는 기록 등은 모두 이러한 순교적인 사랑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양백지간에 자리 잡은 화엄종찰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해인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며 화엄종의 종풍을 날린 곳이다. 통일신라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던 화엄사상이 서라벌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에서 뿌리를 내리고 퍼져 나갔다는 것은 의문점이지 않을 수 없다.
화엄사상의 요체인즉, 우주의 본질은 서로 상대적 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상대적 관계를 바로 보고 거기서 하나와 전체의 원리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다시 하나가 된다는 원융사상으로, 그 당시 국가경영에서 가장 절실했던 사상이자 철학이었다. 삼국이라는 이질적인 국가체제가 하나로 통일되기 위해서는 국가적 통치체제 구축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삼국의 백성들이 하나로 융합될 수 있는 정신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첫 출발점을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나뉘는 봉황산 중턱으로 삼은 것은 이곳이 그만큼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와 신라가 일찍부터 힘을 겨루었던 군사적 요충지로, 신라는 이곳을 장악해야만 백제와 고구려 지역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통일 초기 이곳에 삼국 경영의 새로운 사상적 웅지를 펼친 데에는 국토의 외진 곳에 위치한 수도 경주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정치적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의상대사 이후 화엄종의 중심도량으로 자리 잡은 부석사는 고려 초에 병화를 입었다가 11세기 중반 원융국사에 의해 중수되었고, 고려 말에는 진각국사가 대규모 중창불사를 일으켜 면모를 일신했다. 부석사가 자랑하는 무량수전과 조사당 건축도 이때 지어진 건축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자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이름이 높다.
경제력의 성장과 함께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산간벽지의 절집에서는 대규모 중창불사가 유행하고 있는데, 크기와 규모만 자랑할 뿐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엄정하면서도 너그러운 자태는 찾아보기 힘들다. 위압적이거나 거드름을 피우기가 일쑤이지, 절집을 찾는 사람을 끌어안고 넉넉한 마음으로 융화되는 옛사람들의 솜씨는 흉내 내지 못하고 있다.
무량수전에는 그 건축적 아름다움만큼이나 손색이 없는 국내 최고의 소조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그 불상이 여느 법당에서처럼 남쪽 정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 벽면을 향해 앉아 있다. 서방 극락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로 화엄종 사찰에서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지 않고 아미타불을 모신 점이 이색적이다. 원융국사 비문을 보면 창건 당시부터 이와 같은 양식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을 대중화시키려 할 때 서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아미타 신앙을 곁들여, 보다 실천적인 화엄교단을 건설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셔야 할 화엄종의 근본도량임에도 파격적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것이며, 그만큼 의상대사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가치를 우선에 두었던 것이다.
무량수전 앞에는 천왕문 밖의 당간지주와 함께 창건 당시를 대표하는 유물인 석등이 있는데, 세련되고 깔끔한 조형미가 당대의 최고 가는 걸작품이다. 화사석 각 면에는 아름다운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고개를 살짝 돌리고 수줍은 듯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일품이다. 무량수전 편액은 홍건족의 침입으로 안동까지 피난을 왔던 공민왕이 쓴 글씨라고 한다.
무량수전을 둘러보았으면 3층석탑이 있는 뒤편 오솔길을 따라 조사당으로 올라가야 한다. 법당의 위치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여 가람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곳은 의상대사의 흉상과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느낌을 주는 맞배지붕으로 무량수전과는 또 다른 건축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조사당 벽면에는 고려시대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지금은 벽면 전체를 떼어 내어 보호각에 보존하고 있고 모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부석사 주변은 온통 사과밭이기 때문에 사계절을 두고 저마다 색다른 풍광을 보여 준다. 봄이면 사과꽃이 눈발처럼 휘날리고, 겨울이면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중 부석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가을날 빨간 능금이 주렁주렁 매달릴 때다. 일주문으로 오르는 길이 노란 은행잎으로 카펫을 깔아 놓은 듯하고 무성했던 잎새들이 오색 낙엽으로 드러누울 때, 안양루에 올라 소백산맥을 바라보면 그 느낌이 한층 선연하게 다가온다.
신라인이 꿈꾸던 불국정토의 세계_ 경주 남산
우리나라 사람치고 경주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생 시절의 수학여행을 비롯하여 신혼여행과 효도관광 등을 통해 누구나 한 번쯤은 경주를 구경하고 눈을 감는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시가지 한복판에 즐비하게 늘어선 왕릉이며 석굴암 본존불의 거룩함과 석가탑의 빼어남, 에밀레종의 전설과 문무대왕의 해중릉, 화려한 금관, 안압지의 조원, 첨성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볼거리가 있고 천년 세월의 영화를 누린 도읍지답게 역사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선정했으며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그러나 경주에는 이러한 명성 때문에 오히려 빛을 보지 못하는 문화유산도 적지 않다. 그중 하나가 경주 남산을 장엄하고 있는 수많은 불상들이다. 불교 신자나 전문가들에게는 알려졌겠지만,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미지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