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1960 지식인을 찾아가다
서재관 지음 | 지상사
1950 1960 지식인을 찾아가다
서재관 지음
지상사 / 2012년 12월 / 248쪽 / 14,000원
1950 ’60년대의 지적 풍속도
한국 지식인의 특성_ 그 좌경화 경향과 관련하여
1945년 겨울 나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왔다. 중학 3학년 때였다. 월남하고 처음 이쪽에서 경험한 일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예상치도 않게 미군 측에 의해서 난민수용소 같은 천막촌에 수용 당했다. 얼마 후 미군은 밀가루처럼 보이는 분말(DDT)을 온몸에 뿌리고 난 후 간단한 식품류(레이션박스)를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신기하기만 했다. 또한 미군 병사들의 단정한 차림새도 퍽 인상적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북쪽 소련군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판이했다. 해방 후 내가 북쪽에서 목격했던 소련군은 남루하기 짝이 없는 군복에 군화마저 제대로 신지 못한 행색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시민들이 차고 있는 시계나 귀한 물건을 보면 “따와이!”라는 한마디 말과 함께 낚아채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뿐이랴, 어디서 정발했는지 모를 시설물과 잡다한 기계류를 우마차로 연신 북송하는 행태도 수시로 볼 수 있었다.
그런 양쪽 진주군의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또한 충격을 받게 된 것은 거리의 풍경에서였다. 전신주 같은 데 부착되어 있는 어지러운 선전물과 그 내용이었다. ‘매국노 이승만 김구를 타도하자’, ‘미제국주의자들을 남조선에서 몰아내자’는 등의 선전벽보가 거리 이곳저곳에 나붙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간에 이북과는 달리 남조선에서는 미군에 의해서 이른바 자유주의적인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즈음의 이북은 소련군의 엄호 하에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력이 전적으로 그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세기의 영웅 스탈린 대원수 만세’와 같은 현수막과 더불어 김일성과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커다란 초상화가 내걸려 있었다. 그래서 남한은 북쪽과는 대조적으로 미국과 이승만, 김구 등 민족진영의 선전물 일색으로 도배질 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남쪽도 그런 류의 거리 선전물에는 좌익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후 나는 다시 평북 다지도에 위치한 종갓집에 가게 됐다. 그곳에 남아 있는 가재도구 등을 챙겨 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게 여의치 않아 46년도의 태반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다. 덕분에 1년여에 걸쳐 꽤 많은 일들을 그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압록강 북단 쪽, 그 섬에도 커다란 정치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곳 빈농 출신의 젊은이 가운데 비교적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몇몇을 차출하여 어딘가에서 일정 기간 세포조직의 리더로 육성한 후, 그들로 하여금 그곳 주민을 사랑방 같은 데 모아 놓고 김일성 찬양과 마르크스ㆍ레닌주의를 주입시키는 식의 행사가 거듭되는 것이었다. 또한 벽지의 그 작은 마을에까지 군복 차림의 여성 군예대가 순회하며 학교 같은 공공시설에 주민들을 몰아 놓고 노래와 춤 그리고 연극 등을 통한 주민선무활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일사불란하게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주민의 의식화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제치하에서 내가 겪어야 했던 ‘천황폐하의 신민화’ 정책과 그 내용은 다르나 동질의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을 위한 의식화’ 운동이었다.
일제 말기의 가혹했던 탄압하에서 잘 먹지도 못하고 무슨 정치적인 의견 같은 것을 가져볼 수도 없었던 일반 대중에겐 그런 모든 선무활동 내용이 모래사장에 파도가 밀려와 스며들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침윤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신들도 잘 모르는 사이에, 얼마 후에는 스스로 능동적으로 그런 끈질기고도 강력한 선무공작에 동조하는 현상이 파급되어 갔다. 그래서 도시 북쪽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1년여를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다 다시 월남하여, 이듬해 1947년 봄 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1년 6개월을 월반한 셈이다. 정상적으로 학업을 계속하고 있는 동창생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무척 고생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학교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국립대학안 반대니 뭐니 해서 동맹휴학이 있게 되거나 학원 내 좌우익 학생 간의 투쟁으로 학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내에서는 좌파의 목소리가 더 컸다. 여순반란사건이 터졌을 때는 학생들 간에 곧 남한에도 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는 식의 견해가 퍼지기도 했다. 이런 학내 분위기 속에서 이른바 우파적인 견해를 개진하기란 도시 불가능한 형세였다.
그런 경향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매한가지였다. 당시 한국의 저널리즘이란 월간지와 신문 몇몇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지면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 잔재의 일소, 봉건 잔재의 소탕, 노동자농민계급의 해방 등 이른바 인민대중에의 봉사를 주제로 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고 난 후에도 그런 사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지식계층의 지배적인 사고 경향은 정부 지지세력을 반통일 세력, 친일 자본가계급, 미제국주의 추종자 등으로 매도하는 것이 예사였다. 따라서 6ㆍ25만 없었더라면 지식인의 그런 성향과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던 일반 대중의 소망으로 남한은 적화통일에 필요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여하간 극심한 혼란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북쪽은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코뮤니즘의 일당독재 체제가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김일성 장군이나 인민위원회의 권력 행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북쪽 지식인은 결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대의명분상 그쪽 좌파 지식인의 주장은 남한 지식인들 간에서도 대다수가 지지하고 있는 형세였다. 일종의 열병과 같은 현상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생각했다. 남쪽에서도 왜 이렇게 많은 지식인들이 좌경화하고 있는가 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다.
첫째로, 마르크시즘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소련의 스탈린 체제가 자유, 평화, 평등 그리고 번영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믿어지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논리가 아닌 신앙’으로서 말이다. 그 좋은 예증으로서는 김동석(문학평론가)의 ‘북조선의 인상’(잡지 문학 1948년 7월호)이라는 글을 들 수 있겠다. 그 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꼭 눈으로 보아야만 진실을 알 수 있다면 지구가 둥글다는 진실을 어찌 알 수 있으랴. 북조선을 보기 전에 그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도 지구를 보지 않고도 그 둥긂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이 가리키는 바다.”라고 기술하고, 38선을 경계로 북쪽 산은 푸른데 남쪽은 붉은 민둥산, 북쪽 사람은 쌀밥 위주로 잘 먹고 잘살고 있기 때문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퍽도 건강한 모습인데 남쪽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모두가 왜소한 체격을 하고 있다는 등 그쪽의 갖가지 건설상을 일방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그즈음 나는 북쪽 시골마을에서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강냉이밥을 하루 두 끼밖에 먹지 못하고 있었는데…….
둘째로, 그런 좌경화 경향은 한참 나이의 소장 문인이나 학자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어서, 그즈음 일본에서 한참 득세하고 있었던 이른바 진보진영 지식인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좌파 지식인들의 글(잡지나 단행본)을 보면서 이건 일본의 누구누구의 글을 닮아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또한 일본과 관련해서 얘기하자면, 일제 때 우리네 지식인들의 태반이 반일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없었던 데서 비롯된 일종의 속죄의식과 같은 정서적 반응 현상도 들 수 있을 것이다. 채만식이나 지하련 등의 소설 속에서 그런 예를 볼 수 있으리라.
셋째로는, 북한의 존재와 북한에서 남한을 향해 이뤄지고 있었던 선무공작이 또한 크게 작용한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간첩이나 세포조직 지도요원의 남파 등 직접적인 공작활동은 물론, 북한 지도자들(지식인 포함)은 끊임없이 그쪽이 평화통일 세력이며 인민을 위한 인민의 편임을 강조하면서 남쪽 지식인들의 동조와 실제 행동을 강조하고 있었다(이런 사례는 박갑동 씨의 여러 저술이나 재일교포 작가 려라(麗羅) 씨의 실록 《체험적 조선전쟁》 등에 잘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친일반동분자의 재산몰수, 토지개혁 등 인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시책을 재빠르게 실행해나가고 있었으니 북한의 존재가 대중의 지지는 물론 지식인의 호응을 얻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에 반해 남쪽 미군정은 북쪽 소련군정의 사전계획에 따른 일관된 시책과는 달리 당초부터 어떤 뚜렷한 장단기 정책플랜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좌우합작, 소련군정과의 통일방안 수립을 모색하는 등 정책적인 일관성이 없었던 게 아니었던가. 그런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지식인의 좌경화는 대세를 이루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끝으로 또한 한국사회에서는 목소리가 크고 이른바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쪽이 득세하기 쉬운 그런 지적 상황도 거론할 수 있겠다. 온건한 견해, 다의적인 주장은 언제나 세를 얻기가 힘들었다. 같은 맥락으로 경험보다 이념을, 실질보다 외형을 존중하는 전통적인 사고 경향 또한 좌경 지식인을 양산케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런 지식인들의 풍조도 북한의 남침, 6ㆍ25를 계기로 많이 시정된 것 같다. 결국 북한의 공산정권 스스로가 남한의 적화를 망가뜨리게 된 셈이다. 그 점 나는 앞으로도 남한의 공산화는 북쪽의 행동, 그 비정상적인 행태로 이뤄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일제하의 천황을 닮은 그 비현실적인 행태로 인한 사건 등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960년 10월>
지식인의 사회적 발언
추종형과 도피형의 논리_ 지식인 발언의 무력화에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점차로 저널리즘을 통한 지식인들의 사회적인 발언이 활발해지고 있다. 환영할 만한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네 지식인들도 구체적인 현실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증좌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 편 이러한 현상이 성행해감에 따라 이와 비례해서 우리들이 느끼게 되는 공허함도 증대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 노릇이겠는가. 생각건대, 그것은 결국 지식인들의 그러한 사회적인 발언이 무력하게 공전하고 있는 결과라고 본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이렇듯 무력하게 공전하고 있는 그들 발언의 실상, 그 논리발상법에 대한 성찰이 필요해진다. 보다 더 현실에 유효할 수 있는 발언의 논리를 확립하기 위해서, 이하 본론은 그러한 의도하에 쓰인 나의 미숙한 시론이다.
그러면 현재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지식인들의 발언 논리는 과연 어떤 형태의 것들인가,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형으로 추상,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극단적인 현실추종형과 현실도피형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한 전자의 논리를 대별해서 절대주의적인 현실추종형과 현실주의적인 현실추종형으로 양분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이른바 절대주의적인 현실추종형의 논리라는 것은 어떤 기성의 일면적인 질서를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하고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초월적인 논리로 만사를 연역하려 드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반공이니 민의니 하는 지극히 추상적인(그러므로 그 내용이 애매모호한) 대의명분적 이념을 내걸고 기성 질서 위주로 온갖 논리를 왜곡해 동원하는 게 그것이다.
다음으로 좀 더 표면상 합리적인 외양을 띠고 있는 게 이른바 현실주의적인 현실추종형의 논리다. 현실을 주어진 대상으로 그대로 수용하고 그 현실을 뒤쫓아 가며 합리화시키는 논리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의 논리는 얼핏 보아서는 퍽 현실적인 인상을 주나, 논리가 항상 현실을 뒤에서 시인해 가며 현실과의 저항, 대립, 그 지양의 과정을 결하고 있는 점에서 현실에 추종하고 있다. 이 형의 발언에 속하는 좋은 예로는 얼마 전 저널리즘 상에서 문제가 되었던 모모한 정객의 민도론에 입각한 독재주의적 민주주의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하간 이 두 형이 모두 기성 질서 위주로 그 변호 강화를 지향하고 있는 점에선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비록 한 편이 소박한 슬로건적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데 대해 다른 편이 좀 더 합리적인 외양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다음 후자의 논리, 즉 현실도피형의 논리도 이를 개념주의적 현실도피형과 심정주의적 현실도피형으로 유별할 수 있다고 본다. 개념주의적 현실도피형의 특징은 그 논리가 우리의 현실과는 무관한 차원에서 형성되고, 그것도 주로 공식적인 서구의 원칙론에서 시종하고 있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민주주의적 제 개념이 한갓 응화(凝化)된 공식으로 이해되고, 구체적인 우리의 현실 상황과는 단절된 채 설교되고 있는 데서 그 실례를 보게 된다. 다음 심정주의적 현실도피형의 특징은 그저 막연하게 논자의 현실에 대한 반응이 영탄적(詠嘆的)으로 논리의 형식을 빌려 남발되고 있는 데서 발견된다. 이러한 형의 발언을 우리는 특히 일부 문학비평가들의 언설 가운데서 보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이 양자의 논리도 대국적으로 볼 땐 우리의 현실 상황에 밀착하여 그 속에서 논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지 않는 점에선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결국 우리네 지식인들의 발언이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논리가 이상에서 추상정리(抽象整理)해본 바와 같이 무내용하게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논리가 그렇듯 양극화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우리네 환경이 역리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대중의 일상생활이 논리보다는 의리니 체면이니 하는 전근대적인 인간관계나 관습에 의해서 지배되어 온 점, 또한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정신 영역에 속하는 사상, 논리의 문제라는 것도 국가(위정자)에 의해서 외부적으로 결정, 강요되어 온 사실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네 지식인들의 비논리적인 정신구조와 그 심리적 기반의 취약성(脆弱性)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의 정신, 그 논리가 그들 자신의 육체적인 조건과 괴리하고 있던 점, 환언해서 그들에 의해 표방되고 있는 관념이 그들 자신의 생활감정이나 행동양식과 단절되어 있었던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필경 그들의 논리는 한갓 편법적인 추상적 관념으로서 그들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간사스러운 관인형(官人型)의 처세주의적 경향(현실추종형)이 아니면, 고루한 선비형의 외화형식주의적 경향이나 심정주의적 경향(현실도피형)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식인들의 사회적인 발언의 실체가 좀 더 철저하게 우리네의 객관적인 현실조건의 분석과 정신구조의 해명을 통하여 추구되기를 제의하고 싶다.<한국일보, 1959년 11월 25일>
시대와 문학
상황, 저항, 현실참여_ 유행어의 사이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황’이니 ‘저항’이니 ‘현실참여’니 하는 말들이 있다. 일부 문학비평가들에 의해서 마구 남용되고 있는 언어들이다. 그 모두가 비교적 신판(新版)의 유행어들이라 속된 말로 독자들에게 충분히 ‘하이칼라’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한 말로 나는 이러한 투의 언어가 마구 남용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구역질을 느끼고 있다.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러한 식의 언어들로 충만하고 있는 공식적인 비평문에 대해서라고 해야 옳다. 이를테면 작가들은 모름지기 오늘의 이 시대의 상황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저항해야 한다거나 혹은 우리들의 이 시대를 고발하고 증언하는 것이 오늘의 작가들에게 부여되고 있는 성실한 의무라고 하면서 비분강개조의 도식론을 전개하고 있는 비평가들에 대해서다.
우선 나는 이러한 투의 비평문을 대하게 될 때면 저 일부 정치가들에 의해 ‘자유’니 ‘양심’이니 ‘책임’이니 하는 허울 좋은 언어들로 장식된 연설문이나 성명서 류를 연상한다. 그 비리얼리즘적 성격에서 양자가 한 가지로 인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시 그와 같은 비리얼리즘적 성격이란 어디서 연유케 된 것일까. 생각건데 그것은 결국 그들의 비평 행위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차원에서 저쪽(서구)의 문학 용어나 그 이론의 결론 부분만을 기계적으로 연역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 나는 일찍이 그들의 비평문 속에서 오늘날 이 땅의 상황이 제대로 분석ㆍ파악되어 있거나 구체적으로 저항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 있었다면 단지 오늘의 ‘현실 상황’이나 ‘역사적 현실’을 그려야 한다는 식의 동어 반복이 아니면 방사능비나 전쟁의 의미를 그려야 한다는 식의 추상적인 언어의 나열이었거나, 또는 그저 막연하게 저항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성의 전시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