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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진실과 허구

구청푸, 성쉰창 지음 | 시그마북스
삼국지의 진실과 허구

구청푸, 성쉰창 지음, 하진이 옮김

시그마북스 / 2012년 9월 / 304쪽 / 13,800원





1장 『삼국지』 영웅본색



유비편

유비의 눈물은?: 역사서에 기록된 유비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삼국연의』 속의 유비는 곧잘 눈물을 흘렸다. 이는 혹시 계산된 눈물은 아니었을까? 『삼국지』든 『삼국연의』든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집중해서 읽다 보면 남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유비의 눈물은 좋은 사례다. 진수의 『삼국지. 촉서. 선주전(先主傳)』에서는 유비를 엄숙하고 진지하게 기록하고 있다. 물론 유비가 곧잘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지만 「법정전(法正傳)」과 「유봉전(劉封傳)」에서는 예외였다.

법정은 유비가 익주 지역을 차지하고 세력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익주를 근거지로 삼아 한중(漢中)을 점령한 유비는 한중왕에 오른 뒤 법정을 상서령, 호군장군으로 임명했다. 당시 제갈량은 유비 곁에 없었고 방통 역시 죽고 난 뒤였다. 즉 법정이 유비에게 차지하는 영향력은 조조의 책사로 깊은 신임을 받았던 정욱과 곽가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서기 220년 법정은 마흔다섯의 나이로 죽는데 이때 유비는 환갑의 노인이었다. 「법정전」에 “유비는 사나흘 동안 울며 애도했으며 법정을 익후로 추서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익주의 문무대신 가운데 사후에 유비에게 추서받은 이는 법정 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로 미뤄 봐서 법정과 유비의 관계가 특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죽었을 때 유비가 사나흘 동안 눈물로 애도했다는 사실도 좋은 방증이다.

유봉은 유비가 형주에 있을 당시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입적한 양자였다. 유봉은 유비를 따라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공적을 세웠지만 관우가 위급한 것을 보고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 『삼국지. 촉서. 유봉전』에 따르면 “제갈량은 유봉이 용맹하고 강직한 인물이라서 유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통제하기 힘들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유비에게 그를 제거할 것을 권하여 결국 유봉이 자결하도록 만들었다. 유비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방통은 서른여섯의 나이에 낙봉파(落鳳坡)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때도 유비는 크게 애석해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외에는 유비가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을 『삼국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친형제와 다름없던 관우와 장비는 모두 유비보다 앞서 세상을 떴다. 이치대로 따지자면 그들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하고 침통해할 사람은 유비였지만 「관우전(關羽傳)」과 「장비전(張飛傳)」은 물론이거니와 기타 역사서 어디에도 유비가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없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에는 유비가 “좀체 감정 표현을 드러내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는 유비가 눈물을 흘리는 대목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예컨대 서서가 조조의 수중에 잡혀 있는 모친을 만나려고 떠나려 할 때다. 유비가 눈물로 배웅하자 이에 감동한 서서는 떠나기 직전에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했다. 또한 조조의 수하로 들어가서도 죽을 때까지 그의 책사 노릇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면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할 때다. 유비는 눈물을 흘리며 “선생께서 나와 주시지 않는다면 창생을 어찌 합니까?”라고 호소하는데 눈물이 비 오듯 흘러 도포와 옷깃이 흠뻑 젖었다.

이처럼 유비가 눈물을 흘리는 대목이 많이 나오는 것은 나관중이 유비의 인자한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러 삽입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비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른바 ‘눈물작전’을 펼쳤음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청대 모종강은 “유비가 제업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 중 절반은 눈물 덕분이었다”라고 평가했으니 그야말로 날카로운 비판이 아닐 수 없다.

유비의 동쪽 정벌은 관우의 복수를 위해서였을까?: 유비는 십여 년 동안 군수물자와 병력을 강화한 뒤 직접 동으로 쳐들어갔다. 그의 정벌은 성공적이었을까? 손권의 공격으로 관우가 전사하고 형주 땅마저 빼앗긴 유비는 복수를 결심했다. 잃어버린 땅을 탈환하고 나아가 오나라를 멸망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삼국연의』에서는 유비가 촉한의 황제로 즉위한 뒤 동오를 침공하라는 조서를 내린다. “짐이 도원에서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했다. 불행히 큰 아우 관우가 동오의 손권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이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도원결의(桃園結義)의 맹세를 어기는 셈이리라. 짐은 대군을 일으켜 동오를 치고 역적을 사로잡아 가슴에 맺힌 한을 풀려고 하노라.”

제갈량과 조운 등의 만류를 뿌리치고 유비는 동쪽 정벌을 감행하여 마침내 삼국 역사상 가장 긴 이릉(夷陵)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실 이는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를 부각시키기 위한 나관중의 각색이었다. 『삼국지』에서는 유비의 동쪽 정벌이 손권의 습격으로 관우가 전사한 데 대한 보복적인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빼앗긴 형주를 탈환하여 구겨진 체면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고 기술한다. 동쪽 정벌이 오로지 관우의 복수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유비는 관우가 전사한 지 1년 6개월이 지나서야 동쪽 정벌을 단행했다. 이는 유비가 황제로 즉위한 뒤 4개월이 지난 시점으로 『삼국연의』에서처럼 황급히 동쪽 정벌을 감행한 것이 아니었다. 둘째, 유비가 형주를 탈환하기 위해 동쪽 정벌을 단행하자 손권은 화친을 제의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휴전을 위한 명목일 뿐 형주를 내주려는 뜻은 없었다. 물론 유비가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유비는 이릉 전투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으로 후퇴하고 나서야 형주 탈환이 그림의 떡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손권이 재차 화친을 제의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만일 관우의 복수를 위한 전쟁이었다면 결코 화친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쪽 정벌의 주된 목적은 형주 탈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유비와 관우, 장비는 친형제 못지않은 사이였지만 국가대사를 소홀히 할 만큼 절친하지는 않았다. 유비는 자신의 제업을 이루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법정을 꼽았으며, 생전에 유일하게 추서를 내린 이도 법정뿐이었다. 법정과 방통이 죽었을 때 유비는 사나흘 내내 울며 애도했지만 관우가 죽었을 때 울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릉에서 참패하고 백제성으로 후퇴한 뒤 유비는 애당초 관우의 자만심으로 형주를 잃었다고 원망하지 않았을까? 백제성에서 임종할 당시 유비는 수많은 군신들의 이름을 호명했지만 유독 관우의 이름만은 들먹인 기록이 없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관우가 죽었을 때 시호조차 내리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조편

조조는 왜 여백사 일가를 살해했을까?: 조조가 여백사(呂伯奢) 일가를 죽인 것은 의심병으로 말미암은 잔인한 처단이었을까, 아니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부득이한 결단이었을까? “내가 천하를 저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겠다!” 이 말은 난세의 간웅이었던 조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언이다. 『삼국연의』에서 여백사 일가 아홉 명을 살해한 조조를 진궁이 책망했을 때 조조가 항변하며 내뱉은 말이다.

여백사 일가의 죽음에 관한 나관중의 묘사는 참으로 성공적이었다. 인물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줄거리 구성 역시 여백사 일가족이 멸살되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치밀하게 전개시켰다. 또한 섬세한 심리 묘사로 마치 눈앞에 조조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 주었다. 조조가 여백사 일가를 죽인 일화는 진궁의 출현이 거짓인 것만을 제외하면 사료적 근거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진수의 『삼국지』는 아니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武帝紀)』에는 조조의 살인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다만 “태조는 성과 이름을 바꾼 채 야간을 틈타 동쪽으로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수는 여백사 일가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여러 곳에 관련 기록을 남겼다. 배송지는 이러한 사료를 인용하여 「무제기」에 주석을 달았는데 다음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 왕침(王沈)의 『위서(魏書)』. “태조는 동탁이 패망할 것이라 여겨 끝내 동탁을 찾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도망쳤다.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성고(成皐) 지방에 이르러 옛 친구인 여백사의 집에 들렀다. 공교롭게도 여백사는 없고 그의 아들과 빈객들이 합세하여 태조를 위협하고 말과 재물을 빼앗았다. 이에 태조는 칼을 빼들어 그들을 죽였다.”둘째, 곽반(郭頒)의 『세어(世語)』. “태조는 여백사의 집에 들렀다. 마침 여백사는 외출 중이었고 그의 다섯 아들이 예를 갖춰 태조를 맞이했다. 그러나 태조는 자신이 동탁의 명을 배신한 것을 빌미로 그들이 자기를 해칠까 봐 의심한 나머지 한밤중에 가솔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셋째, 손성(孫盛)의 『잡기(雜記)』.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기를 해치려는 소리라 생각하여 밤을 틈타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얼마 후 사태를 깨달은 태조는 ‘내가 천하를 저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겠다!’라고 울분을 터뜨리며 길을 나섰다.”

위의 기록들은 각자 관점이 다르다. 첫 번째는 말과 재물을 강탈당한 조조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혹은 보복 차원에서 살인을 했기 때문에 그의 잘못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의심 끝에 저지른 살인으로 조조의 잔인한 면모가 드러난다. 사학자 궈모뤄는 ‘체조조번안(替曹操飜案)’이라는 토론에서 첫 번째 기록이 비교적 신뢰할 만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좀 더 탐구해 볼 필요가 있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나관중은 왜 조조가 신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살인을 했다는 첫 번째 기록을 차용하지 않았을까?

『삼국연의』에서는 조조가 지나친 의심으로 여백사 일가를 모조리 살인한다. 또한 허구의 인물인 진궁까지 등장해서 조조의 잔혹한 살인 장면을 목격하게 만든다. 사실 여기에는 나관중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었다. 즉 의심이 많고 잔혹한 조조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특히 조조의 처세 원칙을 요약해 주는 ‘내가 천하를 저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겠다!’라는 말을 삽입하여 조조의 비정한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축했다.

조조는 왜 호위병으로 변장했을까?: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조조가 흉노의 사신을 죽인 뜻밖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아주 흥미진진한 한 편의 단막극으로 『삼국연의』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흉노(匈奴)의 사신이 찾아왔을 때였다. 조조는 일부러 최염을 왕으로 꾸며 사신을 접견하게 하고 자신은 호위병으로 변장한 채 그 옆에 시립했다. 접견이 끝난 뒤에 조조는 사람을 시켜 ‘위나라 왕의 인상이 어땠느냐’며 사신의 속내를 떠보았다. 이에 사신은 ‘위나라 왕은 매우 아량이 넓어 보이고 풍채가 훌륭하더이다. 허나 옥좌 옆에 시립하고 있던 호위병이야말로 진정한 영웅호걸 같았소’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조조는 당장에 부하를 시켜 사신을 죽여 버렸다.”

나관중은 사료에 기초하여 위의 일화를 『삼국연의』에 담았다. 그러나 그 사료적 근거는 『삼국지』도 「조만전(曹瞞傳)」도 아니었다. 진수는 조조의 처세술을 기피했기 때문에 위의 일화가 사실이었다고 해도 일부러 삭제했을 것이다. 또한 「조만전」은 한 세대를 풍미한 간웅 조조의 면모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기술했지만 위의 일화를 기록하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볼 때, 위의 일화는 「조만전」이 나온 이후부터 세간에 널리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남송(南宋)의 유의경이 『세설신어』의 「용지편(容止篇)」에 이 이야기를 실었는데 그 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나라 무왕 조조는 흉노의 사신이 접견을 청하자 혹시나 자신의 추한 외모가 왕의 위엄을 드높이지 못할까 봐 일부러 최염을 왕으로 꾸미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호위병으로 변장하고 그 옆에 시립했다. 접견이 끝나자 첩자를 보내 사신의 의중을 떠보도록 시켰다. 관원으로 위장한 첩자가 ‘보시기에 위나라 왕이 어떤 것 같습니까?’라고 묻자 흉노의 사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위나라 왕은 아주 아량이 넓고 풍채가 훌륭하더이다. 허나 옥좌 옆에 시립하고 있던 호위병이야말로 진정한 영웅호걸 같았소.’ 이 말을 전해 들은 조조는 부하를 시켜 사신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렇다면 위의 일화에 등장하는 최염의 실제 이미지는 과연 어떠했을까? 『삼국지. 위서. 최염전(崔琰傳)』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최염은 목소리가 우렁차고 수려한 용모를 자랑했다. 게다가 수염의 길이가 4척이나 되는 탓에 그 위엄이 대단했다. 조정 대신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니 조조 역시 그를 두려워했다.” 조조가 최염을 왕으로 꾸며 자신을 대신하도록 한 것은 흉노의 사신에게 위풍당당한 왕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서인 듯 보인다. 하지만 단지 그 목적뿐이었을까? 그렇다면 조조는 왜 구태여 직접 호위병으로 변장하고 접견 장소에 함께 있었을까? 사실은 흉노 사신의 접견 자리에 참석해 직접 그를 관찰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로 미뤄 보건대, 조조가 호위병으로 변장한 데는 두 가지 숨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조조는 자신을 대신해 최염을 내세움으로써 흉노족에 위풍당당한 위나라 왕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했다. 둘째, 조조는 본시 의심이 많아 흉노의 사신이 자객으로 돌변할 변수를 염두에 두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그럴 경우 최염을 가짜 왕으로 내세우면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 평소 마땅찮아 하던 최염을 일순간에 제거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결국 최염은 훗날 조조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조가 예상치 못한 점이 있었다. 사신의 안목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신은 각각 왕과 호위병으로 변장한 최염과 조조의 실체를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호위병으로 변장한 조조의 모습에서 범상치 않은 영웅의 기개를 파악했다. 조조는 이렇게 자신을 알아주는 사신의 날카로운 안목에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쾌하게 여기고 바로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평소 의심과 시기심이 많고 도통 속내를 종잡을 수 없이 음흉한 조조의 사람 됨됨이를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2장 『삼국지』 장수열전



관우편

관우는 정말 다섯 관문을 통과하며 여섯 장수의 목을 베었을까?: 소설 속의 관우는 조조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에서 혼자서 다섯 관문을 통과하고 여섯 장수의 목을 베었으며, 화살 독을 없애기 위해 화타에게 뼈를 긁어내는 치료를 받는 등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관우는 초인적인 용맹성을 떨친 영웅이다. 관우가 사후에도 중국의 전통적인 충의 관념에 따라 끊임없이 뭇 사람들 사이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관우의 활약상이 담긴 수많은 일화 가운데 진수의 역사서에 기록되거나 후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거나 혹은 나관중의 창의적인 필치로 새롭게 재탄생한 것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삼국연의』에 보면 관우가 화웅의 목을 베는 일화가 나오는데, 실제로 화웅을 죽인 것은 관우가 아니라 손견이었다. 즉 나관중이 화웅을 죽인 공로를 관우의 몫으로 바꿔치기한 것은 관우의 영웅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였다. 또한 관우가 단기필마로 천릿길을 헤쳐 나가면서 다섯 관문을 통과하고 여섯 장수의 목을 베는 대목이 나온다. 무릇 『삼국연의』를 읽은 사람이라면 두고두고 기억하며 이야깃거리로 삼는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이 일화는 역사서에 기록된 바가 없을뿐더러 진수는 물론이거니와 배송지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관중은 『삼국연의』에서 이 일화를 대대적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실상 위 일화는 『삼국지』는 물론이거니와 『삼국지평화』나 원대 잡극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관우가 다섯 관문을 통과하고 여섯 장수의 목을 벤 일화는 순전히 나관중이 창조해 낸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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