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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라는 데는 다 철학이 있다

이창후 지음 | 좋은날들
그렇게 살라는 데는 다 철학이 있다

이창후 지음

좋은날들 / 2013년 4월 / 240쪽 / 12,000원





한 번뿐인 삶,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갖가지 모습들이 이제 갓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참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청소년들이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깊이 고민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각자 나름대로 답을 찾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중 한 가지 방식은 삶의 역할 모델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처럼 이렇게 살고 싶어’라고 말이지요. 부모님이나 선생님들께서 이 방법을 많이들 권하십니다.

눈물의 대통령, 룰라 다 시우바 / 결코 패하지 않는 전쟁의 신: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 청소년들은 룰라 대통령 같은 사람을 자신의 역할 모델로 정하곤 하지요. 이렇듯 역할 모델을 정하는 것은 중요하고 좋은 방식이기는 한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룰라 대통령 같은 사람이 되겠다, 이것은 정확히 어떻게 살겠다는 말일까요? 이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역할 모델로 삼을 만한 다른 분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발라드라는 영국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영국 사람으로서 넬슨과 견줄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동양의 위대한 해군 사령관 이순신 장군뿐이다.”

이순신 장군은 36번의 크고 작은 해전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으니까요. 이와 같은 승전 기록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계 전쟁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때요? 여러분도 이순신 장군처럼 되고 싶지 않나요? 그런데 청소년들이 룰라 대통령을 역할 모델로 정할 때와 똑같은 문제가 여기에서도 나타납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살겠다는 것은 정확히 어떻게 살겠다는 것일까요?

이순신 장군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결정할 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다음 중 어느 것일까요? ① 이순신 장군의 능력 -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대파한 ‘전쟁의 신(神)’이라 불릴 만하다. ② 이순신 장군의 충성심 -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지켰지만 모함을 받아 죄인으로 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저는 단연코 ①번이 정답이라고 믿습니다. 요컨대, 청소년들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이순신 장군처럼 살겠다고 결정한다면, 그것은 이순신 장군의 능력과 변치 않는 충성심 중에서 ‘능력’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또한 룰라 대통령을 역할 모델로 선택한다면 거기에도 룰라 대통령이 브라질 대통령으로서 성공한 대통령이었다는 점, 즉 그 뛰어난 능력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동감하신다면 여기에서 어려운 수수께끼,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결코 그냥 덮어둘 수 없는 삶의 수수께끼가 하나 시작됩니다. 그 수수께끼를 설명하기 위해 제 어린 시절 얘기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바람직한 삶을 위한 또 하나의 조건

저는 어릴 때 아주 연약한 아이였습니다. 겁이 많고 소심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깡패 같은 친구들이 괴롭혀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불량스러운 깡패뿐만 아니라, 어둠과 귀신, 사실상 낯선 모든 것들이 무서운 아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어둠과 귀신이 두렵지 않게 되었어요. 저는 그때 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죽는 게 두려운가?” 어둠과 귀신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답은 분명했습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날 괴롭히는 아이들이 더 두렵다.)” 그러자 어둠과 귀신에 대한 두려움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었다면, 그것은 어둠 속에서 불량배가 나타날까 하는 두려움이었지요. 싸움 잘하는 깡패들에 대한 두려움은 그 후에 극복이 되었는데, 그러기까지는 대략 20년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그동안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왔는데, 군대에서는 특전사에서 훈련을 받고 교관으로서 태권도를 가르쳤지요. 대학원에서는 학업을 하면서 해외에 태권도를 지도하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저를 위협하는 깡패가 두 명이든 세 명이든, 칼을 들었든지 간에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순식간에 상대의 팔을 부러뜨리고 기절시키거나,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을 얻은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릴 때 저를 괴롭혔던 깡패들을 찾아서 흠씬 두들겨 패주는 것입니다. 복수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힘이 생겼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도덕적 삶이 중요한 이유: 힘이 세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힘을 휘둘러서는 안 되는 것,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을 도덕성의 문제라고 하지요. 또한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능력을 갖고 있어도 나쁜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역할 모델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능력은 좋지만 도덕성이 좋지 않은 사람의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은 마이크 타이슨 같은 삶을 살고 싶은가요? 물론 그의 권투 능력은 뛰어납니다. 그럼에도 그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자를 성폭행한 범죄자이고,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껴 쓰지 못해 가난뱅이가 된 방탕한 사람이지요.

앞에서 우리는 룰라 대통령이나 이순신 장군이 왜 청소년들의 훌륭한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때에 ‘능력’을 중요한 이유로 꼽았습니다. 하지만 능력이 있다고 반드시 훌륭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권투선수 타이슨의 사례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전승의 신화로 나라를 구하기는 했지만, 만약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백성을 괴롭혔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역할 모델로 정하는 데에 주저할 것입니다. 룰라 대통령도 마찬가지이지요. 훌륭하게 브라질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다음에 그의 재임 시절 비리들이 많이 있었다고 드러난다면, 사람들은 룰라를 지금처럼 존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그와 비슷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입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필리핀 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국민들도 열렬하게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권력을 휘둘렀고, 부정부패를 엄청나게 일삼았습니다. 마이크 타이슨은 자신의 능력인 가공할 주먹을 사용해 폭력을 휘둘렀고, 마르코스는 자신의 능력인 대통령의 권력을 사용해 부정비리와 인권탄압을 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두 사람은 ‘도덕적으로 나쁘다’라고 평가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에 능력과 더불어서 도덕성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합니다. 즉 유능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복수를 하면 안 될까?: 금방 생각할 수 있는 대답에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 복수를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② 복수를 하는 것은 법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대답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운 게 항상 옳고 정확한 것은 아니고, 법을 근거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생각에는 사실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까요?



왜 그렇게 행위하면 안 되는가, 라는 수수께끼

어떤 행위는 해도 괜찮고, 어떤 행위는 하면 왜 안 될까? 지금 우리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리켜서 ‘규범의 정당화 문제’라고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쉬울 것 같은데, 사실상 굉장히 어려운 문제랍니다.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그 답이 객관성(수수께끼의 답은 누가 보더라도 옳아야 한다)과 관념성(도덕성의 수수께끼는 실제 사실과는 상관이 없다)을 만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이 굉장히 어렵지요. 관념성이란 무엇인가요?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생각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한편 ‘객관성’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누가 봐도 옳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순수한 생각일 뿐이면서도 누가 봐도 옳은 생각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정말로 어려운 문제의 답을 찾으려면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지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어린 시절 제 경우에는 태권도를 배우는 문제가 이와 같았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무협 영화의 주인공처럼 무술의 고수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저는 무술 책부터 사보곤 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태권도 실력 성장의 1단계입니다. 그때 저는 무술 책에 나오는 동작을 따라 하면서 ‘이것을 열심히 하면 나도 고수가 될 수 있겠지’라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면서 집 주변의 태권도장에서 수련하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 원칙과 방법에 따라 무술 고수가 되기 위해 책을 보면서 동작을 해보았지만, 저는 여전히 겁쟁이였고, 집 근처 태권도장에 다니는 아이들보다 강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태권도 고수가 된 나의 비결: 2단계는 태권도장에 다니게 된 다음부터입니다. 제 자신의 환상에 빠져 있다가 결국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태권도장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경험한 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들이 경험한 것과 비슷합니다. 3단계는 대학에 들어와서 태권도부 생활을 할 때입니다. 이때부터 태권도 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전통적인 태권도 기법을 정확하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힘든 수련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울대 태권도부에는 선수 수준의 실력을 갖춘 형들도 있었지만, 더 중요했던 점은, 선배님들이 매주 한 번씩 오셔서 후배들을 지도하셨는데, 그 실력이 한국 최고의 고수 수준이었습니다. 그 당시 고수 선배님들께서 지도하신 태권도 기법들은 경기에서 쓰는 기법이 아니라, 실제로 상대와 싸울 때 쓰는 무술적 기법들이었습니다. 그런 고수들의 지도를 저는 열심히 따랐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분들이 지도할 때 열심히 하지를 않았어요. 그 이유는 동작이 화려하지 않고, 또 당장 수련하려면 힘들었기 때문이지요. 연약했던 제가 태권도를 배워서 지금 수준에 이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정확한 지식과 힘든 수련, 이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오랫동안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철학으로 생각하는 방법 깨치기 / 내가 생각하는 나의 답을 찾는다: 철학은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는 활동이자 학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권도와 이순신 장군 등의 여러 이야기들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얻어야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답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노력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규범의 정당화라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객관성과 관념성의 문제를 이야기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당연한 것에서부터 생각하기, 행위의 목적

목적이 규범을 정당화한다: 그렇다면 이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어디서부터 출발할까요? 당연한 원칙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자, 미로의 갈림길에 도착했습니다. 길은 A, B, C 세 개이며,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C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 있는 당연한 원칙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곧 목적이 규범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로에서 길 찾기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복수와 같은 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어떤 행위 규범이 정당화되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먼저 관념성의 측면을 살펴봅시다. 다른 사람들이 A나 B 방향으로 가는지와 상관없이 C 방향으로 가야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C 방향으로 가든 안 가든, 그것과 상관없이 C 방향으로 가는 게 옳다는 것이 확인되죠. 즉 ‘C 방향으로 가야 한다’라는 규범이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둘째, 객관성의 측면에서 어떤 행위를 하면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판단이 상당히 객관적인 것이 됩니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결국 사실에 대한 판단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미로 찾기 그림을 봅시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라는 규범의 문제는 미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미로가 아무리 복잡해도 결국에는 그 미로의 길만 알면 끝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표에서 ‘목적’과 ‘규범’ 사이에 ‘사실’을 넣어 놓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철학자들은 ‘목적론적 정당화’라고 합니다.



어떤 목적을 추구해야 할까요?

우리는 규범, 즉 ‘어떤 행위는 해야 한다’ 혹은 ‘어떤 행위는 하면 안 된다’라는 것의 옳고 그름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규범이 왜 객관적으로 옳고 그른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야만 했지요. 그리고 ‘목적론적 정당화’라는 좋은 답을 찾았습니다. 목적론적 정당화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봅시다. 목적에 의해 규범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것은 객관적인데, 문제는 그 목적이 달라지면 규범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각자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규범이 옳게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볼까요? 힘이 강해진 제가 원하는 게 깡패들이 고통 받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그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는 행위, 곧 복수하는 것은 옳은 일이 됩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이제 우리의 문제는 바뀌었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어떤 문제로 출발했나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옳은가?”, “복수와 같은 행위는 왜 옳지 않은가?”라는 문제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핵심이 규범의 정당화라는 것을 이해하고는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한 방법으로 ‘목적론적 정당화’의 생각 방식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혹은 “복수를 하면 왜 안 되는가?”라는 문제가 목적론적 정당화의 방법을 통해 “어떤 목적을 추구해야 하는가?” 혹은 “왜 복수라는 목적을 가지면 안 되는가?”가 되었을 뿐입니다. 말만 바뀌었을 뿐 실질적인 내용은 그대로라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목적이 서로 달라서 행위 규범이 충돌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할 만한 목적, 그런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 많은 사람들, 특히 똑똑한 학자들을 설득시킨 한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모든 사람들의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공리주의’라고 합니다.



너희가 공리주의를 아느냐?

진리는 평범함 속에 있다: 공리주의, 쉽게 말하면 “다 같이 잘 살자.”라는 말이지요. 괜찮지 않나요? 자기 이익만 챙기는 게 아니라 남의 이익도 같이 챙겨야 한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입장입니다. 또한 반대로, 남을 위하기만 한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고, 자신의 이익도 같이 챙겨야 한다고 공리주의는 요구하지요. 왜냐하면 공리주의가 강조하는 ‘최대 다수’의 사람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되거든요. 그렇다고 자신과 남을 무조건 같이 위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 남의 이익을 같이 챙길 수 없는 경우에는 답이 없게 되거든요.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야 옳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남의 이익을 포기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요. 공리주의는 그런 경우에 대해서도 단순하고 일관성 있는 논리로 답을 제시합니다. 각각의 경우에 이익의 총량을 계산해보고 그 값이 더 큰 쪽을 택하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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