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우리 인문학
김경윤 지음 | 아포리아
처음 만나는 우리 인문학
김경윤 지음
아포리아 / 2012년 12월 / 304쪽 / 15,000원
01. 철학 : 사유와 실천의 사회적 근거
‘일심’ 패러다임_ 원효
서정인의 소설집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에 「잠적」이라는 단편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다음은 거기 나오는 대화 한 꼭지입니다.
“모르고 먹으면 약입니다. 옛날 어떤 중이 어디로 공부하러 가다가 밤에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깨쳤다고 하지 않습니까?”“얼마나 속이 뒤집혔으면 그 이야기가 천년을 전해 내려왔겠습니까?”
“토사곽란을 해서 그랬겠습니까? 견성성불을 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해골물 마신다고 아무나 해탈합니까?”“그 스님은 썩은 물 마실 때 이미 득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까? 길을 떠나기 전에 동네 공동묘지에서 마셨더라면 교통 불편한 그 시절에 먼 길 가는 수고를 덜었을 걸 그랬습니다.”“수고 없이 수도가 됩니까? 목숨 걸고 수륙만리 험한 길을 가는 것이 수도였습니다. 고향에 머물면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공주하고 연애나 하면서 편히 지냈더라면 해골물이 아니라 진송장 육탈물을 바가지로 마셨더라도 눈이 뜨였을까 모르겠습니다.”“이 물 마시고 누구는 배탈 나고 누구는 신선 되는 것 아닙니까? 똑같은 물인데, 어떻게 생각하면 불공평하고, 마시는 사람이 다르니 공평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신선 하실랍니까? 나는 배탈 할랍니다.”
_『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
술집에서 이 정도 대화가 오고간다면 그 수준을 짐작할 만하지요. 저도 그 자리에 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사설은 그만두고, 위 대화에서 나오는 ‘어떤 중’이 바로 원효(元曉, 617∼686)입니다. 650년에 원효는 의상과 더불어 당나라로 불교 유학을 떠났지만, 1차 시도는 고구려 국경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갇힘으로 실패합니다. 간신히 탈출하여 다시 그로부터 11년 뒤 그러니까 원효가 마흔넷, 의상이 서른일곱이 되던 661년. 이번에는 바닷길을 택하여 2차 유학을 시도합니다. 지금의 충남 당진인 당주항(唐州港)에 도착하여 거친 비바람을 만나니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땅막 속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해안가로 향합니다. 하지만 계속 비는 죽죽! 이번에는 어느 묘막(墓幕, 무덤 가까이에 지은 묘지기가 사는 집)에서 다시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여기서 의상과 헤어지게 되는 해골물 사건이 벌어져야겠지만, 문헌상으로는 그렇게 극적인 사건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후대 이야기꾼의 각색인 듯합니다. 하지만 원효가 깨달음을 얻어 유학길을 포기하고 다시 신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때 원효의 심정을 『송고승전(宋高僧傳)』은 이렇게 전합니다.
어젯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편안했는데, 오늘 잠자리는 귀신의 집에 의탁하니 매우 뒤숭숭하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_『송고승전(宋高僧傳)』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안 것은, 부처(중)와 민중이 둘이 아님을, 깨달음의 과정과 삶의 과정이 둘이 아님을, 더 나아가 신분의 차이 즉 귀족과 백성이 둘이 아님을 일각에 깨닫는, 아니 모든 이분법적 도식이 원래는 하나였다는 것을 깨닫는 찬란한 해탈의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이는 이후 신라로 돌아온 원효의 행각에서 잘 드러납니다. 요석공주와의 사랑, 그리고 사랑의 결실로 얻게 된 설총.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모든 지위와 명예를 다시 한번 떨쳐버리고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일컬으며 무애행(無碍行)을 떠났던 원효의 삶을 감히 누가 좇을 수 있겠습니까? 박을 치며,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그의 광인 같은 모습은 멀리만 있었던 부처의 모습을 저잣거리로 끌어내림으로써 민중들을 불국정토로 인도하려는 역설적 행위가 아니었을까요? 삼국통일기의 혼란과 고통 속에서 큰마음으로 민중과 함께한 원효의 모습, 그 모습이 참으로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원효의 패러다임은 대립적 주장들을 ‘부정-긍정’의 방식을 넘어서서 하나로 아우르는 ‘일심(一心) 패러다임’입니다. 그러니까 원효는 ‘하나이면서 둘이며(一而二)’, ‘둘이면서 하나인(二而一)’, 그래서 하나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둘로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 싸우면서(爭) 하나 되는(和) 화쟁의 논리를 정립시켰던 것이지요. 내 안에서 남을 보고 남을 통해 나를 보는 세상, 그리고 그 실천 방법으로서의 무애행(無碍行)! 이를 위해 그는 기존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무너뜨려야 했고, 있는 그대로의 벌거숭이로 다시 서야만 했습니다.
이제 저는 원효가 도끼가 되어 쓰러뜨리려 했던 나무를 생각해봅니다. 하늘을 떠받칠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또 그런 나무 하나가 자라기까지 그 나무의 그늘 속에서 햇볕 한번 보지 못하고 시들어가야 했던 난쟁이나무들을 생각해봅니다. 거대함만이 미덕인 우리 사회에서 ‘작은 것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토건공화국’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공사들, 파헤쳐지고 메꿔지는 산하들, 어머니 가슴처럼 휘돌아들던 아름다운 강물은 직선의 경직됨으로 변하고, 그 속에서 평화롭게 살던 물고기들은 인재지변으로 떼죽음 당하는 비극을 맞고, 오순도순 장사하던 공간에는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사람들….
내몰리고 쫓겨나고 죽임 당하는 삶의 현장들. 전 세계 경제 순위 10위에 들었다는 거대공화국 우리나라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말입니다. 이 거대함에 맞서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원효의 도끼’가 다시 필요한 시대가 온 걸까요? 외부의 거대함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거대함을 추구하고 욕망하는 우리 안에 탐욕스런 나무들도 도끼가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도 거대하게 뻗어 있는 위계적이고 계층적이며 세상을 분할하고 지배하려는 ‘수목(樹木) 모델들’이 있습니다. 그 나무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나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이 거대하게 자랄수록 우리 속에 소중한 것들은 점점 시들어갑니다.
마음을 닦아라_ 지눌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역시 종교의 타락상에 대하여 누구보다 걱정하고 근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수심결(修心訣)』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지눌의 그런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슬프다. 지금 사람들은 미혹되어온 지 이미 오래이므로 제 마음이 바로 참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제 성(性)이 바로 참다운 법임을 알지 못하며, 법을 구하려 하면서도 멀리 성인들에게서 찾으려 하고, 부처를 구하려 하면서도 제 마음을 관(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 하고, 성 밖에 법이 있다 하여 이 소견을 고집하면서도 불도를 구하려 한다면, 티끌처럼 많은 겁(劫)을 지내도록 몸을 태우고 팔을 태우며 뼈를 깨뜨려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쓰며, 언제나 앉아 눕지 않으며, 하루 묘시(卯時)에 밥을 한 번만 먹으며, 나아가서는 『대장경(大藏經)』 전부를 다 읽고 갖가지 고행을 닦더라도 그것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다만 스스로 헛수고만을 더할 뿐이다._『수심결』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종교가 권력을 지향하면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당대의 불교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며 교종을 업신여기는 선종(禪宗)과 불교 경전에 입각하여 중생을 제도(濟度)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종(敎宗)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주장하는 바는 교리와 방법론의 문제였지만, 핵심은 진리의 독점권을 획득하려는 권력욕과 그에 따라 얻어지는 물질욕이었습니다. 이러한 당대 현실을 목격한 지눌은 승과에 합격하였으나 출세에는 관심이 없었고, 불교 개혁을 위하여 뜻있는 불자들과 정혜결사 운동을 벌입니다. 불교의 자기비판 운동이라 할 만한 이 정혜결사 운동은 권력에서 벗어나 오직 진리만을 탐구하고, 직접 노동으로 생활하며 수행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20대 중반의 젊은 지눌이 내린 이 결단은 그의 나머지 생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풍부하지만 타락한 삶을 버리고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삶을 선택할 줄 알았던 지눌로 인하여 고려 불교사의 찬란한 한 획이 그어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 창건된 조계종은 이후 태고화상 보우(太古和尙 普愚)와 무학대사 자초(無學大師 自超), 서산대사, 사명대사로 이어지며 불교의 중심 세력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아갑니다. 그렇게 볼 때 “수도자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자가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자”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이 적용되는 인물이 바로 지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눌의 정혜결사 운동은 명리를 벗어나 진리를 탐구하려는 탈세속적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이후 세력을 확장하여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였고, 그 흐름은 고려 왕조의 비호를 받는 국가 공인 운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이 종교의 경계처(警戒處)라 생각합니다.
세속으로부터 멀어지는 종교가 세속의 비호를 받기 시작하면서 타락할 수 있는 것, 소수의 운동이 다수의 운동으로 전환될 때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시점입니다. 권력에 길들여진 저항 운동은 더 이상 저항 운동이 아니게 됩니다. 따라서 모든 저항은 권력 밖에서 권력 밖으로 자신의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또 다른 권력이 되지 못하도록 늘 경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지눌은 살아생전 경계에 경계를 계속했을 것이며, 지눌 이후의 위대한 스승들 역시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종교 운동 역시 지눌의 정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수심결』의 다른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제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가, 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얻어질 것이다.(…) 과거의 모든 여래도 다만 마음을 밝힌 그 사람이요,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마음을 닦는 그 사람이며, 미래에 수학(修學)할 사람도 마땅히 이런 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하는 사람들은 부디 밖에서 찾지 말기를 바란다. 심성(心性)은 물들지 않아서 본래 스스로 원만히 성취된 것이니, 다만 망령된 인연만 떠나면 곧 여여(如如)한 부처일 것이다._『수심결』
마음을 닦아야 할 종교가 법당을 증축하고 물질을 쌓고 있다면 더 이상 종교가 아닙니다. 권력에서 벗어나야 할 종교가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 한다면 그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닙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 저는 이 불교적 명제를 만남과 이별의 무한적 순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교적 삶의 방식, 진리를 만나려면 세속과 이별해야 하고 권력에서 벗어난 종교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엄혹한 계율로 이해합니다. 가진 것을 버리고, 가질 것을 경계하며, 진리를 향해 달려가는 자, 그가 바로 수도자(修道者)입니다.
02. 문학 :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 시대의 언어
괴물의 탄생_ 허균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인데 당당한 국가가 어찌 이 일개 도깨비 같은 자를 용납하여 제멋대로 야유하며 변환하게 내버려두기를 이렇게까지 한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허균이 일생 동안 해온 일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_『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는 허균(許筠, 1569∼1618)에 대한 인물평이 위와 같이 실려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평은 광해군이 직접 한 것이 아니라 광해군 10년에 있었던 허균의 모반 획책 음모에 대한 수사를 요청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상소에 따른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위와 같이 극렬하게 악평을 받은 사람은 허균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시대의 풍운아로, 『홍길동전』의 저자로, 역사의 모반자로 바람과 같이 살다간 허균은 참으로 시대의 문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 가운데 허균만큼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도 드물 겁니다. 허균은 후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아비의 죽음을 맞이하고, 스무살에는 둘째 형 봉의 죽음을, 스물한 살에는 누이 난설헌의 죽음을 경험했으며, 스물넷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난통에 아내와 첫 아들을 모두 잃는 불행을 겪습니다. 허균은 벼슬살이에서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겪어야 했을 만큼 정치적으로도 힘겨운 삶을 살았습니다.
허균의 저술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는 세상을 뒤집는 『홍길동전』 같은 급진적 한글 소설도 썼지만, 세상을 등지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자는 『한정록(閑情錄)』 같은 탈속적 저술도 남겼습니다. 무엇이 허균의 진심일까요? 질문이 너무 어리석었나요? 분명 둘은 하나요, 하나에서 나온 둘일 텐데 말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자신의 ‘그림자’와 정직하게 대면할 때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모든 사람들은 자신 속에 또 다른 자신을 안고 살아가는가 봅니다.
허균은 참다운 ‘자유인’이었습니다. 그의 자유는 세상과 맞닿을 때 저항정신으로 나타나고, 세상에서 물러설 때 자연과 닮아 있습니다. 그는 유수한 집안의 전통적 선비였으나, 친분 관계에 있어서는 서자나 중인, 상놈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화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문장과 총명은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살만한 경지였지만 그의 학풍은 의고적인 성리학에 머물지 않고 양명학과 불교, 도교, 천주교를 넘나드는 자유로움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 때문에 그는 세도가들에게 무수히 많은 박해를 받지만, 그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허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런 막돼먹은 것을 좋아한다.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내 몸은 늘 중한 허물에 빠져 있다. 사귐을 끊기보다 몸이 곤궁해지는 것이 낫지.”
허균의 자유롭고도 반항적인 모습은 「호민론(豪民論)」이란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이화 선생은 이를 ‘몽둥이와 쇠스랑을 들고 일어서는 백성들’이라고 다시 제목을 붙여 소개하였으니, 이 글을 번역할 때 선생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이나 불 또는 호랑이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제 마음대로 이들 백성을 업신여기고 모질게 부린다. 도대체 어찌하여 그러는가?_「호민론(豪民論)」
이어 허균은 당대의 민중을 세 부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눈앞에 이익에만 얽매이고 시키는 대로 따라서 법을 받들고 부림을 받는 ‘항민(恒民)’과 세상을 근심하고 걱정하며 불평하는 ‘원민(怨民)’, 마지막으로 평소에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기회를 보다가 저항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높은 곳에 올라 소리 지르는 자로 그가 곧 ‘호민(豪民)’입니다. 호민이야말로 시대의 영웅적 유형이며,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민중의 영웅으로 등장시킨 홍길동이 바로 그러한 인물입니다. 오늘날 영웅사관(英雄史觀)이 다시 부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기에, 저는 호민을 ‘각성한 민중’ 혹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재해석합니다. 그리고 호민이 많은 곳이야말로 희망이 있는 사회라고 믿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한정록』에 나오는 한 대목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곽덕성(郭德成)을 불러 도독(都督)을 삼으려니 그가 관(冠)을 벗고 울면서 말하였다.
“신은 술을 즐기고 눕기를 좋아하며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급한 일이 생기면 지위는 높고 녹봉은 많으나 일은 구차하게 되고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니, 임금께서 반드시 저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정이란 돈을 많이 얻고 좋은 술을 마시며 마음대로 즐기고, 인생을 마치는 데 있을 뿐입니다.”_『한정록(閑情錄)』
예언은 아니었으나, 풍운아 허균은 위 글에 나오는 곽덕성이 염려하던 바와 같이 죽임을 당합니다. 시대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어떠했을까, 이 세상도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저는 이런 회한에 젖어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