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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오십 남달리 살피고 사랑하라

윤재근 지음 | 산천재
인생 오십 남달리 살피고 사랑하라

윤재근 지음

산천재 / 2013년 3월 / 280쪽 / 13,500원





1장 살피는 삶 - 안다는 것은 사물을 사랑함이다



덕은 천지에 두루 통한다 - 통어천지자덕야(通於天地者德也)

궁하면 통한다(窮則通) 통하면 변한다(通則變). 이는 만물이 존재하는 모습을 말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목숨이 있는 것도 변하고 목숨이 없는 것도 그렇습니다. 목숨이 있는 것의 변화를 생로병사(生老病死)라 하고 목숨이 없는 것의 변화를 생성소멸(生成消滅)이라 합니다. 생로병사든 생성소멸이든 다 같이 변화를 말함입니다.

변화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있음으로 없어지고 없음으로 있다는 것. 순리(順理)대로 변하게 하는 것이 곧 통(通)이고 이 통을 순조롭게 하면 그것이 곧 덕입니다. 목숨의 통(通)을 삶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살 수 있게 하면 그것이 곧 덕이요, 살 수 없게 하면 그것이 곧 부덕(不德)입니다.

숨구멍을 막는 짓을 하지 마십시오. 숨구멍을 트는 것이 덕(德)이요, 숨구멍을 막는 짓이 부덕(不德)입니다. 사랑하면 통하고 미워하면 막힙니다. 정직하면 통하고 속이면 막힙니다. 베풀면 통하고 빼앗기면 막힙니다. 수수하면 통하고 꾸미면 막힙니다. 이들이 곧 삶을 엮어가는 명암(明暗)들이 아닌지요! 덕이 있는 사람은 넉넉하고 너그러워 마음이 넓고 깊습니다. 부덕한 사람은 옹졸하고 옹색해 마음이 좁고 얕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만을 요구하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심(利己心)이 나를 망하게 하는 줄 모르는 까닭입니다.

두루두루 더불어 어울려 산다는 마음이 곧 덕입니다. 덕은 삶을 통하게 하고 부덕은 막습니다. 그래서 물이 덕이요, 명이 덕이요, 바람이 덕이라고 합니다. 그것들이 없다면 아무것도 살 수 없는 까닭입니다. 삶을 통하게 하십시오. 삶을 막히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곧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요, 살아가는 길입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서로를 잊고 산다 - 어상망호강호(魚相忘乎江湖)

장자(莊子)는 자연을 대동(大同)으로 밝혔습니다. 자연은 차별이나 시비를 떠나 만물을 다 같이 안는다는 것입니다. 노자(老子)는 그 모습을 곡신(谷神)이라고 했습니다. 곡신(谷神), 그것은 텅 빈 산골짜기의 모습이 아닌지요! 산골짜기에서 온갖 것들이 서로 어울려 삽니다. 노자의 곡신(谷神)은 장자의 대동(大同)을 잘 해석해줍니다.

물이 그득한 호수에서는 물고기들이 서로를 잊고 삽니다. 그러나 호수가 메말라 바닥이 드러나면 물고기들은 서로 얽혀 퍼득대며 거품을 품고 서로의 물기를 나누자고 바둥대지만, 물이 많아 서로 잊고 살 때보다 못하다는 것을 장자는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온 세상을 하나의 호수로 생각하고 그 안에 온갖 물고기가 산다고 합시다. 그 온갖 물고기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서로를 차별하고 의식하면서 다투고 시샘도 하고 투기도 하며 살려고 합니다. 장자는 이러한 인간의 심사를 저어했고 멸시했습니다. 물이 넘실대고 고요해 물고기들이 평화롭게 사는 호수 같은 세상을 장자는 그리워했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삶을 스스로 노닐 줄 알라고 했습니다.아무런 걸림 없이 스스로 삶을 즐기고 노니는 것을 자유(自遊)라 합니다. 권리와 의무의 약속을 전제로 허락되는 자유(自遊)와는 달리 장자의 자유(自遊)에는 아무런 조건도 제약도 없습니다. 패랭이꽃은 모란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패랭이꽃은 초라하고 모란은 화사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장난일 뿐, 자연은 서로를 잊고 있는 그대로 삶을 누리다 때가 되면 갑니다.

좀 더 잘 살겠다고 차별하고 시비하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아까운 삶이 탕진되고 소모된다는 것을 안타까워하십시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고 시비를 걸면 서로 상대하자고 멱살을 잡습니다. 내가 강하다고 약한 자를 얕보면 약한 자는 힘을 얻고자 합니다. 음해를 하고 험담을 하고 저주하고 음모를 꾸미며 인간은 다툼합니다. 시비하고 차별하며 다투고 싸우는 인간을 장자는 너절하게 보았습니다. 호수에 물이 그득하면 물고기들이 서로를 잊고 살고, 물이 마르면 서로 몸을 부비며 거품을 물어도 살 길이 없습니다. 사회라는 호수에서 물을 퍼내는 짓을 하지 마십시오.



2장 헤아리는 삶 - 온 세상을 보고 나를 살펴라



둥글기를 바라면서 모나기를 바란다 - 지욕원이행욕방(智欲圓而行欲方)

지혜로운 사람은 두루 통하는 길을 찾아 걷습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것을 지혜는 멀리합니다. 문을 닫되 잠그지 않으면 누구나 들고날 수 있습니다. 들고나는 출입문이 지혜라면 붙박이 창문은 외고집입니다. 지혜는 둥글고 지성은 날카롭습니다. 날카로운 지성은 차갑지만 둥근 지혜는 언제나 안온합니다. 창백한 것보다 따뜻한 것이 생명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지혜는 생명을 살지게 하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생각은 둥글게 하되 행동은 방정하게 하십시오. 이것을 곧 삶의 예(禮)라고 합니다. 지혜가 행동을 이끌면 그것이 곧 예(禮)인 셈입니다. 공손한 마음씨는 둥글고 오만한 마음씨는 모를 짓습니다. 친절하면 행동이 앞뒤를 가려 질서를 얻고 거친 행동은 물불을 가리지 못해 앞뒤를 모릅니다. 그러면 어긋난 길을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智)는 사물을 밝혀 알맞게 하는 것이고, 혜(慧)는 지(智)의 부름에 응해 고마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험한 길을 가도 허방에 빠지질 않습니다. 그러면 현명(賢明)함입니다. 현명하다 함은 내가 나를 어질게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살펴 분명히 아는 것이 명(明)이고, 살펴낸 나를 어질게 하면 그것이 현(賢)입니다.

나를 어떻게 살피면 어질까요? 모난 생각을 물리치고 두루 통하게 둥글게 하면 됩니다. 밉다고 미워하지 말 것이며 좋다고 편애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사랑은 지혜로 통하는 길을 터줍니다. 행동이 방정하면 지혜는 저절로 빛나고, 지혜가 빛나면 행동은 갈 길을 알고 방향을 잡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분명치 못함은 비틀거리는 생각 탓입니다. 어긋나는 행동은 방향을 잃고 질주만 하는 꼴입니다. 그러면 반듯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어긋나면 삐뚤어진다는 것입니다.

모나면 정을 맞는다 함은 못된 행동일 때이고, 행동이 방정하면 모가 날수록 헌칠하고 분명해 반듯합니다. 충신의 행동은 모가 나도 옳은 것을 살리지만, 간신의 행동이 모가 나면 옳은 것이 죽습니다. 이처럼 지혜가 있고 없음은 충신과 간신처럼 사이가 달라집니다.

천지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 천지불인(天地不仁)

인간이 범하는 착각 중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천지를 인간의 소유물로 여기는 버릇일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버릇에 물들었고 인간의 문화는 그러한 버릇을 부추겨왔습니다. 노자(老子)는 인간의 이러한 착각을 두려워했고 무서워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復歸於無極). 이렇게 노자는 절규했습니다.

천지 만물은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天地不仁). 인간이 만물을 물질로 여기고부터 세상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물질은 소유욕을 유혹했고 인간은 그 유혹에 빠져 힘을 축적했습니다. 그래서 지구를 마치 보물창고인 것처럼 여기고 약탈했습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인간은 주저 없이 소모하고 탕진했습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사람도 이제는 물질로 보여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꼴입니다.

이제는 식인종이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옛날의 식인종은 사람의 살을 먹었지만 현대판 식인종은 사람의 마음을 꼬여 먹습니다. 옛날의 식인종은 그 수가 적었지만 현대판 식인종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래서 한낮에 코 베어가는 세상이라고 하지 않는지요!

인간은 온갖 것을 물질로 보고 모조리 소유하려고 합니다. 없는 것을 갖자면 빼앗을 수밖에 없습니다. 빼앗는 욕심은 한이 없어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빼앗아 소유하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돈을 소유하고 땅을 소유한다고 고집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의 해프닝에 불과할 뿐. 결국 자연으로부터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은 여래(如來)의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생각나게 합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갑니다. 재벌도 저승으로 갈 때는 빈손으로 갑니다. 사는 동안 자연스럽게 살 수 없는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은 이렇게 반문하는 것입니다.



3장 새기는 삶 - 어울리되 휩쓸리지 않는다



새끼 개미는 쉴 새 없이 배운다 - 아자시술지(蛾子時術之)

《예기(禮記)》는 생활 습속을 기록해둔 가장 오래된 책입니다. 중국의 고대 문물제도를 이해하는 데 첩경이 되는 책이지요. 이 책에 ‘학기 편(學記篇)’이 있는데, 사람은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논지를 다룹니다. ‘학기 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새끼 개미는 쉴 새 없이 배운다.” 사람도 어려서부터 쉴 새 없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비유해 말한 셈입니다.

개미가 먹이를 물고 가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큰 개미 사이에 작은 개미가 있고 그 옆에 큰 개미가 있으며 또한 그 옆에 작은 개미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큰 개미보다도 새끼 개미가 온몸으로 더 열심히 밀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새끼 개미의 옆에 있는 큰 개미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배운 그 일을 열심히 가르쳐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개미들은 이렇게 열심히 먹이들을 끌고 가야 하나요.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남을 해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고 속이기 위하여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배움을 열심히 하고 계속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소매치기로부터 소매치기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훔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남을 해롭게 하는 법을 배우면 그것은 악입니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 좀 더 나아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쉴 새 없이 배우는 것이 삶의 선(善)입니다.내 주변에 선생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물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또한 가르쳐줍니다. 가장 좋은 인생의 교실은 현실이란 곳입니다. 사람이 되고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선생은 학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 있습니다. 삶의 선을 보면 부러워하고 삶의 악을 보면 멀리하라. 이것이 인생을 가르쳐주는 선생의 교훈입니다.

게으름을 피우면 몸이 무거워지고 마음이 병을 앓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놀았다면 그날은 먹지 말라고 합니다. 고기를 탐하지 말고 고기 잡는 방법을 배우라는 유태인의 속담도 있습니다. 이처럼 부지런히 배우는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하고 헌신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제 한 몸만 생각하고 자기만을 위하려는 욕심과 다스리는 법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이를 가르쳐주는 것이라면 개똥도 선생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곧은 나무는 제 몸을 베게 만든다 - 산목자구(山木自寇)

《장자(莊子)》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산의 나무는 스스로 제 몸을 베게 만든다.” 스스로 잘나서 해를 본다는 말입니다. 산에서 곧게 자란 나무는 어디엔가 쓸 재목이 되므로 사람들이 탐을 내게 됩니다. 사람들이 탐을 내게 되면 그 나무는 제 목숨대로 다 살지 못하고 중간에 잘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 편에서 보면 재목이 되는 탓으로 잘립니다. 잘린 나무는 집을 짓는 기둥으로 쓰인다든지 농짝을 만드는 널빤지로 쓰이게 된다든지, 아니면 쇠죽을 먹이는 구유를 만드는 데 쓰이게 될 것입니다. 쓸모가 있으면 이렇게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떠들거나 우쭐대지 마십시오. 청개구리는 주변의 색깔에 맞추어 변색하므로 제 생명을 보전합니다. 눈에 띄게 하면 할수록 모난 돌이 되기 쉽고 모난 돌은 정을 맞습니다. 잘났다고 드러내는 것치고 별것이 없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이 소문만 난 잔치를 벌이고 나면 입질에 오르내리는 흉허물만 남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공치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공치사는 잘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가치를 절반으로 줄입니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은 언제나 흠집을 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논공(論功)은 언제나 라이벌을 불러오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려고 하면 오히려 잠자코 있는 것만 못합니다.

나무가 재목감으로 사람의 입질에 오르내리다 보면 결국 잘리고 말듯이, 사람도 남의 입질에 오르다 보면 욕을 먹게 되고 마음을 상하게 되고 처신을 옹색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값이 떨어지는 법입니다. 스스로 잘못하여 제 자신의 값을 깎아내리거나 업신여김을 당하는 꼴을 왜 자초하는지요. 세상을 살면서 모날 필요가 어디 있을까요. 모나지 않은 돌은 정을 맞지 않고 모난 돌은 한자리에 박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둥근 돌은 굴러갈 수 있으므로 이끼가 끼지 못합니다. 인생은 모질지 않고 둥글어야 합니다. 둥글다고 기회주의자가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겸허하고 겸손하라 함입니다.

자신을 너무 뽐내거나 잘난 체하다가 흉을 잡히고 탈을 내고 망신을 당하는 것은 세상 물정(物情)을 몰라서입니다. 어디 세상이 나 하나를 위해서만 있는지요. 아닙니다. 만물이 더불어 함께 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몰라 세상을 얕보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곧다고 뽐내는 나무는 재목으로 잘리고, 굽어서 쓸모없는 나무는 명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굽은 소나무가 조상을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뽐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겸허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밝고 맑아집니다.



4장 가늠하는 삶 - 섣불리 적을 대하지 마라



걱정을 사서 하면 병이다 - 광객사영(廣客蛇影)

모르면 약이고 알아서 탈입니다. 진(晋) 나라에 악광(樂廣)이란 소심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한 친구 집에 가서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런 뒤로 어인 일인지 악광이 그 친구 집에 발을 끊었습니다. 친구는 웬일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악광은 친구 집에서 잔 속에 든 뱀을 마셔 병이 났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어이없었지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악광이 앉았던 자리를 살펴본 친구는 그 연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악광의 뒤쪽에 문이 있었고 그 문지방에 활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활의 굽은 모양이 뱀 같았고 그 그림자가 잔에 어렸던 것입니다. 이를 친구가 악광에게 잘 설명해주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광객사영(廣客蛇影)이란 고사가 생겼습니다.

술잔 속에 어린 활 그림자를 두고 뱀을 마셨다고 다짐한 악광은 참으로 못났습니다. 어떤 일을 제 마음대로 결정해놓고 그 결정을 고집하면 덫에 걸려든 멧돼지 꼴이 되기 쉽습니다. 올가미에 걸린 멧돼지가 한두 발만 뒤로 물러설 줄 알면 조여드는 올가미에서 풀려나 목숨을 건질 수 있건만 걸린 올가미를 끊자고 한사코 앞으로만 나아가다 목이 조여 고집스럽고 우직한 멧돼지는 죽고 맙니다.

소심한 자가 외고집을 부리면 병이 되어 생죽음을 당합니다. 병은 숨기지 말고 자랑하라지 않던가요! 결함을 숨기면 마음은 저절로 병신이 되고, 마음이 병신이 되면 몸은 병을 앓게 마련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건강해야 몸이 건강해지는 법입니다.

오해(誤解)를 샀다면 그것을 풀려고 하십시오. 오해를 옳다고 버티면 목구멍에 걸린 솜뭉치처럼 됩니다.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것이 솜뭉치가 아닌가요! 오해는 마음의 숨통을 틀어막는 솜뭉치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해를 품고 노여움을 짓지 말고 풀어야 합니다.

사소한 일을 부풀려 크게 벌이는 짓은 족집게로 바위 덩어리를 들어 올리려는 오기와 같습니다. 못된 마음질을 오기(傲氣)라고 합니다. 오기를 부리면 마음은 비뚤어져 갈 곳을 버리고, 종로에서 뺨 맞고 남대문에 가서 분풀이하는 꼴입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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