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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으로 본 한국인과 한국문화

이병욱 지음 | 소울메이트
정신분석으로 본 한국인과 한국문화

이병욱 지음

소울메이트 / 2013년 4월 / 408쪽 / 17,000원





1부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한국문화 탐방기



「구지가」_ 인간 본연의 성적인 소망과 상징

고대 가락국에서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알려진 「구지가」는 「공무도하가」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가요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런 고대가요가 오랜 세월 잊히지 않고 전래되면서 민초들의 사랑을 받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농경사회 고대인들에게 불가해한 자연현상은 가뭄과 홍수요, 개인적 현상은 성(sex)과 죽음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인들은 여러 다양한 제의를 통해 이러한 의구심과 불안감을 극복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모든 문명의 발단을 성적 욕망의 승화에서 찾았다. 시대적 간격을 뛰어넘어 변함없이 인간 정서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부분은 성이다. 수천 년 세월 동안 명맥을 유지해 온 「구지가」의 밑바탕에 인간 본연의 성적인 소망과 상징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구지가」는 가락 지역의 아홉 수장들이 구지봉에 모여 새로운 왕을 맞이하기 위해 부른 노래로 알려져 있다. 수장들은 백성들을 이끌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추면서 「구지가」를 불렀다. 이때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내려와 열어보니 황금알 6개가 들어 있었는데, 이 알에서 처음 나온 남자아이가 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지가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이때 금빛 상자에서 나온 알은 모태를 상징한다. 그리고 가야의 명칭은 인도어로 물웅덩이를 뜻하는 말과 발음이 동일한데, 만물의 근원이며 생명을 주는 물웅덩이 역시 영원한 모태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 남근과 알이 교합해 새로운 왕을 낳은 것이다.

「구지가」를 분석적 시각에서 보면 일종의 남근숭배 사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거북이의 머리다. 다시 말해 귀두를 원하고 있다. 귀두는 남근을 상징하는 것으로, 속에 감춘 귀두를 내밀지 않으면 통째로 구워 먹겠다고 위협하는 노래다. 이것은 남녀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잠재된 무의식적인 거세불안의 투사심리로 이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여아의 경우 남근선망이 주된 화두로 등장한다고 보았다. 자신에게 없는 남근을 강하게 선망하는 여아들은 모든 남성들과의 경쟁을 통해 이를 적절히 승화시켜 나가는 동시에, 엄마의 여성다움을 동일시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고 본다. 반면 남아들은 거세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길을 밟는다는 것이 프로이트가 제시한 공식이다.

이런 점에서 「구지가」는 남녀 모두에게 오이디푸스 갈등문제를 상징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귀두를 구워먹겠다는 이야기는 위협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 그 내용은 매우 해학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결국 「구지가」는 남근의 상징인 거북이 머리와 여근의 상징인 거북이 집을 통해 집단 구성원의 성적 소망과 갈등의 해소뿐만 아니라 자손만대의 번영을 희구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새로운 왕을 맞이하기 위한 자리에서 구지가를 부른 것은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6개월 남근을 잉태한 황금알이 담긴 상자였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상자 역시 보편적인 자궁의 상징이다. 남근을 완곡하게 상징하는 지팡이나 몽둥이, 빗자루에 비하면 귀두의 상징은 매우 직설적인 묘사에 가깝다 하겠다.

민담_ 사회적 압력에서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탈출구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내려온 민담은 단순한 흥미 위주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런 민담을 통해 우리 조상들은 자신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등에 관련된 교훈적 내용을 아이들에게 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이야기들은 오늘날의 분석적 관점에서 재음미하면, 그 시대 조상들의 심리적 상태에 관한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전래민담 <용꿈 꾸고 얻은 두 공주>를 중심으로 우리 조상들이 지녔을 심리적 갈등 문제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황해도 재령 원님 집에서 애를 보는 아이가 있었다. 하루는 낮잠을 자다가 청룡,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자 원님이 꿈 내용을 물었다. 아이가 꿈 이야기를 하지 않자 원님은 이를 괘씸히 여겨 감옥에 가두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아이가 감옥에 갇혀 있는데 쥐새끼 몇 마리가 들어왔다. 아이는 쥐들이 들어오는 대로 때려 죽였는데, 나중에 커다란 쥐가 검은 자를 들고 들어와서 죽은 새끼들을 살려냈다. 그러자 아이는 큰 쥐를 죽이고 자를 빼앗았다. 그리고 “이제 꿈 이야기를 하겠다.”라고 말했다. 아이는 감옥에서 풀려났고, 아이가 죽은 사람도 살리는 보화를 가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때 공주가 병에 걸려서 앓다가 죽었다. 왕에게 불려간 아이는 자를 가지고 공주를 살려내고 왕의 사위가 되었다. 얼마 후에는 대국 천자의 딸이 병들어 죽었다. 그는 대국에 가서 공주를 살리고 이번에는 대국의 사위가 되었다. 시집올 때 우리나라 공주는 은 대야를 해 가지고 오고 대국 천자의 딸은 금 대야를 해 가지고 왔다. 아이는 꿈에서 청룡, 황룡을 타고 올라갔는데, 금은 황룡이고, 은은 청룡을 의미한다. 그는 무릎을 탁 치면서 “이제야 꿈이 맞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민담은 한 소년의 환상을 주제로 한 내용이다. 여기서 용꿈은 남아선호사항 및 남근숭배사상을 동시에 반영한다. 더구나 이 민담에서는 두 마리의 용을 타고 오른다고 했으니 금상첨화인 셈이다. 그것은 곧 두 개의 거대한 남근이 두 여인의 젖가슴을 휘감고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일 뿐 아니라 모자 합일은 물론 남녀 합일의 상징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꿈은 다중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원님은 고을의 통치자이지만 소년의 아버지를 상징한다. 소년이 꿈 내용을 밝히지 않자 원님이 감옥에 가두고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것은 결국 두렵고 권위적인 존재인 아버지가 아들의 은밀한 근친상간적 욕망을 스스로 자백하라고 요구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거세위협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감옥에 갇힌 소년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조그만 쥐새끼들을 보는 족족 죽이는데, 이는 일종의 자기부정을 의미한다. 조그만 쥐들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신의 남근이며, 쥐들을 죽인 것은 미성숙한 자기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크고 늙은 쥐가 자를 가지고 나타나 새끼들을 살려내는 것은 아버지의 크고 새까만 남근에 대한 아들의 선망과 질투를 의미한다. 소년은 늙은 쥐를 죽이고 쥐가 가지고 있던 자를 빼앗음으로써 아버지를 살해하고 전지전능한 도구를 탈취하게 된다. 여기서 자는 성기의 크기를 재는 도구라는 점에서 권력의 상징이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를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아이가 공주를 살리고 혼인을 하는 것은 혼인한 어머니에 대한 소년 자신의 상사병을 투사 혹은 전치시킨 것이다. 결국 공주와의 인연은 소년의 환상 속에서 근친상간적 관계를 암시한다. 이 부분은 민담 내용 가운데 가장 외설적이고 비윤리적인 측면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지만, 무의식적 환상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풍수지리설_ 어디에서 살고, 어디에 묻힐 것인가

수천 년의 오랜 역사를 통해 그 맥이 끊어지지도 않은 채 연연히 이어져온 풍수지리설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농경문화를 가졌던 동양인들은 가뭄과 홍수를 일으키는 변덕스런 하늘보다 먹을 것을 제공하는 땅을 더 의미 있고 소중하게 여겼다. 그들은 땅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만큼 땅이 소중했기에 신토불이라는 말이 생겼다. 거의 종교적인 믿음이었던 것이다. 풍수지리의 기본 구성 요소는 산과 물, 방위와 사람이다. 말하자면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풍수지리의 참된 의미가 있다. 풍수지리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삶의 조건과 관련된 양택풍수와 죽음과 관련된 음택풍수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길흉화복을 미리 점치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팔자소관 탓으로 돌렸다. 그런 소극적인 성향 때문에 세속적인 출세와 몰락도 오로지 운세와 집터, 그리고 묏자리 등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불안과 모호성을 달래고 합리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인류역사상 우리나라처럼 외세에 시달린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나라에 난리가 나면 백성들은 어디서도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백성들이 안전을 구할 곳은 깊은 심산유곡밖에 없었다. 예부터 십승지가 거론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리면 심리적인 퇴행의 길로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이 심리적인 퇴행 현상을 보이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안전하고 행복했던 시기로 돌아간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방어적 현상을 퇴행이라고 부르고, 가장 심한 퇴행의 고착점은 엄마 젖을 빠는 구순기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시점에 계속 머무르는 현상을 고착(fixation)이라 불렀다. 퇴행의 극단은 결국 모태이다. 인간은 모태에 대한 향수를 가슴속에 늘 품고 산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 민족은 삶 속에서 희망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으며, 살아생전 좋은 묏자리를 택해 놓은 것에서 위안을 찾고자 했다.

어머니란 존재는 원초적인 그리움의 대상이다. 풍수가들이 다양하게 설명하는 명당들의 공통점은 완벽한 모성의 아늑함을 전제로 한다. 또한 풍수가들이 산수를 훑어보는 안목의 틀은 여체를 살펴보는 것과 같다. 지관들은 모든 땅에서 모성의 모습들을 찾았으며, 구체적으로 모친의 자궁을 본뜬 무덤을 고안했다. 결국 우리가 죽어서 묻혀야 할 무덤은 태어나기 전 머물렀던 모친의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고, 또한 그러려면 산 전체의 지형도 그와 닮아야 했던 것이다. 영원한 안식처로서 이보다 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양지바른 곳을 찾아 추운 바람을 막아주고 스며드는 물줄기를 피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풍수지리설에서 무덤과 자궁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벌거벗은 상태로 나와서 벌거벗은 상태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출생과 죽음은 상호 관련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조상 묘를 참배하고 벌초를 하면서 봉분을 쓰다듬는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간절한 원초적 환상과 욕망을 재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자궁회귀의 염원은 가장 근원적인 인간 심리이다. 그러나 살아 숨 쉬는 동안에는 절대 불가능한 노릇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어서라도 그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다.

금기어_ 원초적 욕망을 억제하는 사회적 안정 장치

세계 각국 어느 사회든 그 사회에서 오래전부터 금기시하는 어휘나 담론들이 있다. 한 사회의 존립과 안정을 위해 고안된 이런 금기들은 좁게는 가족, 넓게는 나라 전체의 질서 유지에 유용한 제동장치로 작용해 왔다.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말, 행동, 사상 등에 대한 감시와 억압은 주로 법을 통한 정치적 제약과 종교적 교리의 행태로 적절하게 행해져 왔다. 특히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사회에서 주된 금기의 대상은 단연 성과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제된 억압은 항상 다른 경로를 통해 분출되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런 억압이 노골적일수록 한 번에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은밀하고 교묘한 형태로 노출되기 마련이다.

한국인의 금기어 중 가장 일반적인 금기의 대상은 주로 성과 폭력, 동물과 여성에 관한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성적인 금기는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배꼽을 드러내면 부정 탄다.”는 금기는 주로 여성들을 단속하기 위한 내용이다. 옷차림을 바로 하지 않고 풀어 헤치면 맨살이 드러나고 더 나아가 배꼽까지 보일 수 있다. 이렇게 속살이 보이면 자연히 성적인 자극을 유발한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남성들 자신의 음란한 욕구를 여성들에게 투사하는 것이기도 한다. 물론 이런 금기는 오늘날 배꼽티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에게는 헛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투사란 정신분석에서 일컫는 가장 원초적인 자아방어기제의 하나로, 자신의 의식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도덕적인 내용을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방어수단을 뜻한다. 아직까지 젊은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매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 바로 그 예다. 어쩌면 그것은 여성이 담배를 물고 빠는 행위를 단순한 사회적 욕구불만의 충족차원에서 보는 게 아니라, 음란한 성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밤에 맷돌을 돌리지 않는다.”는 금기도 마찬가지다. 맷돌을 돌리는 일은 주로 여성들 몫이었다. 이 행위는 매우 자극적인 성적 상징이 된다. 밤에 여자가 맷돌을 돌리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다른 엉큼한 생각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금기어는 편집증적 의심에 가득 찬 남성들이 만들어 낸 경고장과 같은 것이다.

남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것은 철저한 금기의 대상이었는데, 이것은 주술적 힘에 대한 신앙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이 그래서 생겼다. 반면에 “욕을 먹고 살아야 오래 산다.”는 속담은 매우 역설적이다. 이 속담은 욕을 많이 먹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꿋꿋하게 살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 같다. 이 배경에는 폭력을 금지하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은 폭력의 이율배반성을 빗댄 매우 시니컬한 말이다. 말리는 척하면서 실은 폭력을 조장하는 시누이의 미묘한 행동이 며느리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폭력이라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리는 척하는 시누이의 심리현상을 정신분석에서는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고 부른다. 내면에 감춰진 감정과는 전혀 상반된 태도가 겉으로 드러날 때를 지칭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도 일종의 반동형성의 기제를 설명한다.



2부 정신분석의 렌즈로 다시 보는 한국인의 초상



연산군_ 폭군으로 변모되어 가는 심리적 과정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폭군인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를 구하려 하는 아들의 근친상간적 욕망과 구원환상이다. 이런 테마는 가부장적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뿌리 깊은 갈등의 고리가 집요하기 때문이다. 조선 10대 임금인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폐비 윤씨다. 연산군은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성종이 승하하면서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왜구를 격퇴하고, 빈민구제를 하는 등 치적을 쌓는 듯했으나 그동안 자신의 생모인 윤씨가 후궁들의 모함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실을 알고 나서 점차 타락하기 시작했다. 폭군의 뒤에는 여성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연산군을 휘어잡고 마음대로 농락한 후궁 장녹수다. 그녀는 연산군의 취약한 심리구조를 정확하게 꿰뚫어본 여성이었다. 정숙하기만 한 왕비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연산군은 남자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던 장녹수에게서 남다른 희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풍만한 장녹수의 몸에서 모정에 굶주린 욕구불만을 모두 해소했는데, 장녹수는 마치 아기를 데리고 노는 어머니처럼 연산군을 아기 다루듯 했다고 한다. 정신분석적으로 보자면 모정에 굶주린 연산군의 퇴행적인 감정이 장녹수에게 전이된 것이며, 그녀는 연산군의 심리적 약점을 활용해 착취하고 이용한 셈이 된다.

연산군은 보기 어려울 정도로 광적이어서 참혹한 일들을 수없이 벌였다. 그의 무분별한 성적인 방종은 무의식적 근친상간 욕구의 행동화로 보인다. 장녹수 역시 근친상간적 욕구를 충족시켜준 장본인이었다. 그녀의 놀라운 심리적 통찰은 연산군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간파하고 있었다. 연산군은 장녹수 앞에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퇴행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장녹수는 왕을 전하라고 부르지 않고 연산군의 아명인 백돌이로 불렀다고 한다. 엄마가 아들 이름을 부르듯이 왕의 퇴행을 조장한 것이다. 평소 여성에게 관대했던 연산군은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는 여성에게만 무자비한 태도를 보이며 극형에 처했다. 이것은 어려서 어머니가 자기를 돌보지 않고 버렸다는 유아적인 분노와 좌절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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