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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홍익희 지음 | 행성:B잎새
유대인 이야기

홍익희 지음

행성:B잎새 / 2013년 1월 / 662쪽 / 28,000원





1부. 고난과 형극의 역사를 이겨낸 유대인



영원한 계약_ 유대인의 역사는 세계 경제사와 궤를 같이한다

유대인의 역사와 경제행위를 살펴보려면 세계 경제사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중심에 항상 유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세계 4대 문명 중 가장 빨리 시작되었다는 수메르 문명기의 인물이다.

1차 경제혁명, 신석기혁명: 현생 인류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살다가 약 6만 년 전 티그리스ㆍ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비옥한 초승달지대에 정착했다. 그리고 약 1만 년 전쯤에 빙하기가 끝나면서 신석기시대가 시작됐으며, 기원전 8000~7000년경에 수렵채취 경제로부터 농경사회로 옮겨갔다. 가장 최초의 농경사회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평원에서 수메르 민족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것을 경제사에서는 '신석기혁명'이라 부른다. 신석기혁명은 식량채집에서 '식량생산'으로의 변화를 뜻한다. 이러한 생산경제로의 전환은 인류문화사상 하나의 전기를 가져온 혁명적 사건이다.

수메르 문명이 발달한 이유: 기원전 5000년경, 수메르인은 티그리스ㆍ유프라테스 강줄기를 따라 농사지으며 여러 개의 마을들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하천 활동에 의해 진흙, 모래 따위가 쌓여 이루어진 충적층 평야라 이집트와 달리 금속은 물론 석재와 목재 등 문명생활에 필요한 기초재료가 귀했고 척박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외부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오거나 재주껏 만들어 써야만 했다. 때문에 일찍부터 교역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무역이 발전했고 불을 다루는 기술과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기원전 4000년경부터는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대량의 물품이 메소포타미아의 수로와 운하를 통해 거래되면서 주변에 큰 도시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수메르 도시국가들은 상업과 무역의 터전 위에 세워졌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수메르 문명의 중심지 우르에서 살았다.

인류 최초의 언어, 수메르어: 유대 민족의 출발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의 수메르 문명을 알 필요가 있다. 수메르 문명이 인류에게 선물한 '최초의 것'들은 바퀴, 계획도시, 고층건물, 상하수도, 교육, 음악, 악기, 야금술, 의학, 조각, 보석, 도시, 왕조, 법률, 사원, 기사도, 수학, 천문학, 달력 등 백 가지가 넘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자다. 기원전 3500년경 우루크에서 수메르인이 썼던 쐐기문자를 우리는 인류 최초의 문자로 본다. 우르 사람 아브라함도 이 문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우르의 사원에서 발견된 공문서를 보면 식량을 정확히 계량해서 주민들에게 분배하는 일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문자가 지배층의 통치수단 중 하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이 없는 시대를 '선사시대'라 부르고 기록이 남겨진 이후의 시대를 '역사시대'라 부른다. 수메르 문명을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보는 것은 바로 이 역사시대를 최초로 열었기 때문이다.

페니키아, 이스라엘, 그리스의 상권 각축_ 이스라엘, 그리스보다 빠른 민주주의 국가 건설

가나안으로 돌아온 히브리인, 곧 이스라엘인들은 역사상 유례없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탄생시킨다. 그들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 12지파 족장이 땅을 분할해 통치하고 종교의식에서만 유대를 같이했다. 이렇듯 초기 이스라엘 지파연맹은 종교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었다. 지파연맹 공동체의 정치 형태의 특징은 오직 신만을 주권자로 모시면서 모든 지파가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나안의 다른 도시국가들과는 달리 왕을 세우지 않고 지파들의 대표에 해당하는 판관(判官)을 민의로 '선출'했다. 그리고 판관이 지파연맹에 관한 전반적인 사안들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러나 판관에게는 왕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전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지파연맹 체제는 대략 2백여 년 동안 유지되었는데, 신 앞에서 모든 지파는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적 통치 이념이 초기 이스라엘 지파연맹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평등이념을 기초로 한 종교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보다 4백 년이나 앞서 민주주의 제도를 실천했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은 위기가 닥치면 신이 모세와 같은 정신적 지도자를 보내 악(惡)으로부터 구해 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구원자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뒷날 구세주 개념의 뿌리가 되었다.

사해의 소금으로 교역을 시작하다: 소규모의 농사와 목축을 주업으로 삼았던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는 주변 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빈곤한 형편이었다. 소규모의 농사 외에 고대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생업은 목축이었다. 지중해 해안에는 페니키아의 전통으로 어업이 발달했고 갈릴리 호수에도 어족이 풍부해서 어촌들이 형성되었다. 2차 산업으로는 직물류와 토기류가 생산되었다.

다행히 이스라엘은 교역을 위한 소금이 있었다. 가나안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요르단 강은 주변의 여러 작은 개천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로 모아진다. 그리고 굽이굽이 지나 마침내 사해로 흘러 들어간다. 사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바다로 염분이 25퍼센트로 바다보다 아홉 배 정도 더 높다. 이스라엘인들의 땅에는 이렇게 '소금 바다'가 있었고 그 주변에 '소금 성읍'과 '소금 골짜기'가 있었기에 교역이 가능했다. 고대의 소금은 금값에 버금갔다.

팔레스타인인과의 악연: 이삭이 살던 시기에 남부해안에는 바다의 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이 사람들이 현 팔레스타인인(필리스티아인)들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청동무기를 쓰고 있을 때 이들은 이미 철제무기를 썼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인들과 비슷한 시기에 가나안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두 민족 간에 충돌과 영토 분쟁이 시작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전투를 치렀고, 3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성경》에선 '블레셋 사람들'이라 불렀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갈등을 벌이는 가자지구도 고대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건설한 곳이다.

어쨌든 이스라엘인 입장에서는 가나안 땅의 지배권을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호락호락 내줄 수 없었다. 문제는 필리스티아가 지금까지 가나안 정복전쟁을 통해 만났던 상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고 강한 적수였다는 점이다. 그러자 이스라엘인들은 새로운 정치체제를 생각해냈다. 좀 더 강력한 지도체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 12지파는 외부에서 적이 침략해 왔을 때만 일시적으로 판관이라는 지도자 밑에서 동맹을 맺고 싸웠다. 이렇게 느슨한 동맹체제로는 강한 왕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전쟁을 치르는 필리스티아를 대적하기 어려웠다. 이에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을 항구적으로 통치하고 전쟁을 지휘해 줄 왕을 요구하게 된다.

세계 최초 입헌군주제 도입: 이 왕들이 바로 사울, 다윗, 솔로몬 왕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개념이 달랐다. 이스라엘인들의 왕은 그들의 율법 아래 선임된 왕들로 곧 입헌군주제하의 왕들이었다. 절대 권력을 쥔 왕이 아니라 왕도 일반 시민처럼 사법적, 도덕적, 종교적 행위의 대상이었다. 왕도 법의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 왕은 다만 신의 대리자일 뿐 신이 친히 당신 백성을 다스리신다는 사상은 변함이 없었다. 당시 다른 나라들은 혈통에 의해 왕이 세습되었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율법에 합당한 능력자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최초로 왕이 된 사울의 주요 임무는 중앙 산악지대에서 필리스티아인들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를 이어 거인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필리스티아인인 다윗이 왕이 되었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유대인 방랑시대의 시작, 바빌론 유수기_ 유다 왕국의 멸망과 1, 2차 바빌론 유수

기원전 721년 북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할 때에도 남유다 왕국은 이집트의 보호로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집트는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신바빌로니아로부터 유다 왕국을 보호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마침내 기원전 601년 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의 속국이 되었다.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 지배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기원전 600년에 유대인들의 첫 반란이 있었다. 이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된 군대가 오히려 전멸했다. 느부갓네살 왕은 연합군을 진두지휘해 다시 공격해 왔다. 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기원전 597년의 일이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시 항거할 만한 8천 명을 추방시켰다. 그리고 왕과 상류층 계급의 유대인과 함께 은장이, 대장장이들을 바빌론에 포로로 데려갔다. 이것이 '1차 바빌론 유수(幽囚)'다. 그래도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 왕국을 완전히 병합하지 않고 허수아비 왕을 앉혀 놓고 속국으로 남겨두었다. 그런데 새롭게 즉위한 유다 왕이 이집트와 동맹해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에 격분한 느부갓네살 왕은 다시 군대를 동원해 결국 기원전 587년에 2차 침공을 감행했다. 세 번에 걸친 대제국과의 전쟁으로 유다 왕국은 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2차 바빌론 유수다.

바빌로니아에 잡혀가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제각기 흩어져 성 밖으로 도망쳤다. 많은 사람들이 그간 왕래가 잦았던 이집트로 주로 피신했다. 이때 지중해 권역의 페니키아 식민지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유대인들의 '1차 이산(離散)'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1948년 이스라엘 건국까지 약 2500년간을 '유대인 방랑시대'라 부른다.

로마의 득세와 유대인_ 소금의 경제사

인류 문명 탄생 이후로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로 식량과 불 이외에도 세 개가 더 있었다. 물, 땔감, 소금이 그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류는 땔감과 소금을 구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강가에 모여 살게 되었다. 페니키아가 해상무역을 석권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소금이었다. 경제사를 추적해 보면 문명의 탄생은 물론 도시와 국가의 탄생이 소금과 관계가 깊다.

로마의 소금길, 모든 길은 로마로: 로마가 발전한 이유 중 하나도 소금이었다. 기원전 640년에 로마인들은 로마 인근 바닷가에 대규모 제염소를 건설했다. 해안염전에서 만들어져 하천을 통해 배로 운반된 소금은 품질도 좋았고 가격도 훨씬 저렴했다. 이로써 로마는 중요한 소금 유통의 중심지가 되어 소금을 대륙으로 수출했다. 이 길이 로마 발전의 원동력이 된 그 유명한 '소금길(비아 살라리아, via salaria)'이다. 소금은 사용가치가 높은 귀중한 교역품이었던 만큼 적에게 소금을 판매할 경우에는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국가의 전매사업인 소금 수출이 늘어나면서 로마는 자연스럽게 부강해졌다. 나라가 잘살게 되자 인구가 로마로 몰려들었다. 결국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티베르 강 하구에서 만들어진 소금에서 유래한 셈이다.

로마 초기에는 소금이 귀해 화폐의 역할을 했다. 관리나 군인에게 주는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했다. 이를 '살라리움(salarium, 라틴어로 소금이라는 뜻)'이라 했다. 그 후 로마 제정시대 때부터 급료를 돈으로 지급했지만, 이를 여전히 살라리움이라 불렀다. 봉급생활자를 일컫는 샐러리맨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이렇게 로마제국의 부흥은 소금과 관계가 깊다. 하지만 1세기경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염전을 상실한 로마는 흑해에서 소금을 수입하게 되었다. 이후 중요한 부의 근원을 상실한 로마의 경제력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네덜란드, 염장 청어로 부를 쌓아: 16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나 지금의 벨기에와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온 유대인들은 맨 먼저 피난 당시 갖고 온 보석으로 보석 사업을 시작했다. 그 뒤 두 번째로 손댄 것이 자신들이 살던 이베리아 반도의 소금을 사들여 대규모의 청어절임을 기업화해 수출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소금 중계무역 기지가 된다. 네덜란드는 막강한 경제력을 축적할 수 있는 소금의 채취에 열을 올려 멀리 서인도 제도에서까지 소금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강력한 해상 무역국으로 부상했다. 16세기 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신교도 전쟁은 소금과 식민지 노예 등의 문제가 원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소금세를 올렸다. 만인이 소비하는 것이었기에 소금에는 세금을 매기기가 편했다. 이러한 간접세는 점차 담배 등의 다른 생필품에도 번져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옥죄어 갔다.

2차 이산 이후 후기 로마시대와 유대인_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다

로마제국의 황금기였던 오현제 시대에는 능력 있는 사람을 황제로 추대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를 깨고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아들 콤모두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때부터 로마는 쇠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85년 왕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붕괴되어 가고 있는 국가를 혁명적으로 새로 건설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광대한 로마제국에 황제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다툼이 계속된다고 보았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다스리기로 했다. 이로써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각각의 제국에 부황제를 두어 다시 통치 구역을 사등분했다. 293년 이후 로마제국에는 네 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등장과 밀라노 칙령: 로마제국 내에 기독교가 널리 퍼지자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도들이 로마인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치적 내분을 일으켜 황제들이 서로 다투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를 믿었던 콘스탄티누스는 국력을 통일시키기 위해 다른 황제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로마제국 권력다툼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제국 내의 종교의 자유를 선포'함으로써 기독교 탄압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박해 때 몰수 당한 재산을 되돌려주고 종교 재산과 성직자에 대한 세금과 병역면제 등을 시행했다. 교회에 대한 세금면제는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이로써 그동안 박해하고 금지해 왔던 기독교를 누구나 믿을 수 있는 종교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그간 숨어 지냈던 기독교도들한테는 무한한 기쁨이요, 예수를 박해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기독교, 반유대인 정책 선동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은 뒤, 세 아들이 로마제국을 삼분했다. 35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셋째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가 단독 황제가 된다. 그는 유대인의 기독교 노예 소유 금지령을 이교도 노예로까지 확장했고, 유대인과 기독교도 사이의 혼인도 금했다. 이런 혼인은 사형에 처해졌다. 기독교 고위 성직자들은 대중이 모이는 광장에서 공공연히 반유대인 설교를 하면서 무리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예배장소를 파괴하도록 선동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 이후 20여 년 뒤 여러 황제의 난립을 제압하고 등극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더욱 신실한 기독교도가 되어 392년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채택했다.

이제 유대인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으며 전쟁에 군인으로 참가할 수도 없게 되었다.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없어진 것이다. 로마제국의 반유대정책으로 유대교 개종자와 기독교도의 결혼이 금지되었고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3개월 이상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어 경제적인 제약이 가해지자, 유대인은 노예제에 의존하는 농업 대신 가족 구성원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소영농이나 자영업을 찾아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유대인들은 어쩔 수 없이 상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로마제국 내의 유대인 숫자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해 10세기에 이르러서는 100~150만 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경제가 피폐해져 로마제국의 인구 자체가 줄어든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유대인들이 박해가 심해지는 로마제국을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 외지로 떠났기 때문이다. 상업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떠난다는 이야기는 그 지역 상권이 죽고 경제가 피폐해짐을 의미했다. 이는 로마 경제 몰락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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