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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고전: 동양문학편

반덕진 지음 | 가람기획
세상의 모든 고전: 동양문학편

반덕진 지음

가람기획 / 2013년 1월 / 400쪽 / 18,000원





다산시선(茶山詩選) - 문학으로 꾼 실학의 꿈

정약용 지음: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시집. 그는 한시의 격식에 매이지 않고 조선인의 생활감정을 노래하는 조선시를 써야 하며 시대에 대해 상심하지 않고 풍속에 대해 분개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 주장한 시인이다. 농민의 참상을 그린 농민시, 민요를 한시의 형태로 받아들인 민요시, 날카로운 현실비판을 바탕으로 쓴 풍자시, 우화시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군 마현의 남인 가정에서 태어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4살 때 천자문을 배우고 7살 때 시를 지어 일찌감치 문학적인 재능을 보였다. 16살에 이익의 유고(遺稿)를 보고 이익의 제자들인 권철신과 이가환에게서 성호학을 배웠고 20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세종대왕 못지않게 학문을 좋아했던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중용』을 내리고 이를 강의하게 하곤 했는데 23살 정약용은 임금 앞에서 막힘없이 강의하여 정조를 감탄케 했고, 이후 정조는 그를 항상 곁에 두고 중용(重用)하였다.

한편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의 부정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정조는 정약용을 민란이 가장 빈번했던 곡산부사로 임명했다. 그는 조세와 부역을 공평히 하고 옥사를 너그러이 다스려 유능한 목민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에 대한 중상모략이 계속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어느 여름날 정조가 보낸 사자(使者)가 사립문을 두드리며 한서선(漢書選) 열 권을 내밀었다. "다섯 권은 집 안에 보관하시고 다섯 권은 제목을 써서 올리라는 성상의 당부이옵니다." 그러나 2주 후 정조의 승하 소식을 듣는다.

자신의 버팀목이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물 떠난 물고기 신세가 되었고 왕조개혁의 꿈도 물거품이 된다. 정조가 죽은 다음 해인 1801년 신유박해에서 셋째 형 정약종은 옥사했고 둘째 형 정약진도 흑산도로 유배 당했으며 정약용 자신은 전라도 강진으로 18년간의 기나긴 형극의 길을 떠난다. 유배의 괴로운 심정을 술로 달래던 다산은 초당(草堂)을 짓고 저술에 전념했다.

그는 여기서 관리의 부정, 조정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지방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시로 읊기도 하고 책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시가 우국휼민(憂國恤民)의 경세적인 사회시와 조선인은 조선시를 써야 한다는 자주적인 조선시다. 그리고 책으로 나온 것이 수기지학(修己之學)인 '6경4서'와 치인지학(治人之學)인 '1표2서(一表二書)'이다. '1표2서'란 국가제도의 전반적 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 지방수령의 부정을 막기 위해 쓴 『목민심서』, 형벌을 공정하게 하기 위한 방책을 밝힌 『흠흠신서』이다.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정약용은 74살을 일기로 편안히 눈을 감았다.

다산의 영역은 문학이론, 시, 부(賦), 사(詞), 산곡(散曲), 전(傳) 등 한문학 전 장르에 걸쳐 있으나 이 중 시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1,195편, 2,263수에 이른다. 다산은 시문(詩文)의 목적은 세상을 계도하는 데 있고 허(虛)가 아닌 실(實)에 있다고 생각했다. 문학이 광제일세(匡濟一世, 세상을 바르게 고쳐 구제함)에 이바지하는 학문으로 기능을 다할 때 존립가치를 인정했다.

다음은 1803년 유배지 강진에서 지은 명작 「애절양」이다. 갈밭마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적(軍籍)에 올라 있어, 이정(里正)이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가자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을 잘라 "나는 이 물건(남근) 때문에 이런 곤액을 당하는구나."라고 하였다. 그 아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는 것을 듣고 쓴 시다.

갈밭마을 젊은 아낙 오래도록 통곡하네 / 현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 우러러 호곡하네

전쟁에 나간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하지만 / 예로부터 스스로 남근 잘랐단 말 못 들었노라시아버지 소복 입고 갓난아기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라 있네

관가에 호소하려 해도 범 같은 문지기 지키고 있고 / 이정은 호통치며 외양간 소를 몰고 갔다오칼 갈아 방에 가 남근 자르니 선혈이 가득하네 / '아이 낳은 죄로구나' 하고 스스로 한탄하네잠실에서 궁형(宮刑)한 일 어찌 죄가 있어서며 / 민땅에서 환관시키려 자식 거세한 것 슬픈 일이도다아들 딸 낳고 사는 이치 하늘이 준 것이라서 / 건도(乾道)는 아들이 되고 곤도(坤道)는 딸이 되는 것말, 돼지 거세하는 것도 슬픈 일이거늘 / 하물며 후손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권문세가 한 해 동안 풍악을 울리면서 / 쌀 한 톨 베 한 치 세금 내는 일 없구나

다 같은 백성이건만 이다지도 불공평한고 / 유배지에서 거듭 시구편을 읖노라



다산은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이 없는 사회, 남근 절단이라는 극단적인 저항이 필요 없는 사회, 통치자의 덕을 칭송하며 만세까지 살도록 기원하며 노래 부를 수 있는 사회를 염원하였기에 유배지에서 거듭거듭 『시경』의 「시구편」을 외웠다.

또한 다산은 당시의 조선문학이 중병에 걸려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선조들의 문장을 보지 않으려는 풍조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원, 명의 문체를 모방하여 시구나 읊으면서 뛰어난 문장가인 척하는 자들을 비판했다. 우리 것을 배척하고 중국만을 모방하려는 어리석음과 병통을 깨우쳐주고 치유하고자 조선시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조선인이기에 조선의 것에서 용사(用事)를 하고 조선의 현실을 실사하여 조선시를 쓴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문단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제시한 것이다.

18년 동안의 유배생활 중에도 자아의 아픔과 고뇌보다는 국가와 민중들의 삶을 더 걱정한 그는 우국애민의 뜨거운 마음을 산문인 '1표2서'로 형상화하였고, 이를 운문으로 형상화한 것이 그의 시문이다. 그의 문학사상은 문학을 통해 도를 세운다는 문이재도론(文以載道論)을 근간으로 하여 경세적 실천문학론과 자주적 민족문학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문학으로 실학을 이룬다'는 사상인 것이다.

다산은 실용적, 실천적 문학과 민족문학의 구현론으로 이를 시문에 실천하였고, 당시 문단에 이를 요구하였다. 특히 그의 경세적 사회시 정신은 이규보, 김시습, 김종직 등의 우국애민시를 이으면서 그 영역과 수준을 크게 발전시켰다. 아래로는 구한말의 이건창, 황현 등의 우국시로 이어졌으니 다산의 문학사상은 우리 문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다. 그리고 조선인은 조선인의 삶과 애환을 진솔하게 노래하여야 한다는 자주적 민족문학론을 구현한 악부시는 위로는 이제현의 '소악부정신'을 계승하여 발전시켰고 아래로는 그 정신이 이학규에게 이어져 민족문학의 맥을 잇고 꽃피우게 하였다.

다산의 문학사상에서 아쉬운 것은 조선인으로서 조선시를 쓴다고 선언하면서도 중국의 그릇(한시漢詩)을 빌려서 조선인의 삶을 담는 데만 집착한 점과 당시 민중이 즐겨 읽던 패관잡서(소설)를 불살라버려야 한다는 소설해도론(小說害道論)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다산문학의 한계가 보인다.



삼대(三代) - 일제 강점기 가족 3대의 변천사

염상섭 지음: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을 건설한 최초의 작가로 평가되는 장편소설로, 1930년대 서울의 보수적인 중산층인 조씨 집안의 몰락 과정을 그린 작품.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식민지 시대, 근대사회로 변모하던 당시의 현실과 정신사의 이면을 빼어나게 그린 가족사 소설이다. 사실적 관찰을 통해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과 당대 젊은 지식인의 초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작가는 작품으로 승부한다."라는 말을 즐겨 했던 횡보 염상섭(橫步 廉想涉, 1897~1963)을 두고 "만약 그가 한국소설사의 첫머리에 없었다면 우리 문학이 얼마나 초라했을까."라고 안도했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그의 존재는 우리 문학에서 '장인정신의 표본'으로 깊이 새겨져 있다.

염상섭은 서울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선조로부터 『동몽선습』을 배웠다. 1911년 보성 중학교에 들어가지만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아자부(麻浦) 중학에 입학한다.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유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집안이 일찌감치 문명개화의 세례를 받았다는 점과 부친이 고위층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 등의 이유가 있었다. 1917년에 게이오 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몇몇 일본 정치가들에게 「조선독립론」을 써서 보낼 정도로 그의 식견이 성숙했다.

감정을 배제하고 식민시대를 관찰하다: 염상섭의 작가로서의 활동은 1921년부터 시작되는데 그해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 문단에 등단한다. 1922년에 단편 「제야」, 장편 『만세전』은 식민지 치하의 암담한 시대적 현실을 묘사한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창작 외에 「개성과 예술」, 「지상선(地上善)을 위하여」 등의 평론을 발표,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문학론을 소개한다. 1931년에는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여 그의 문학의 원류를 형성하는 한편, 장편 『삼대』와 그 속편인 『무화과』, 『백구』를 차례로 발표한다. 『삼대』는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3대에 걸친 가족의 세대변천 과정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사회상을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염상섭의 대표작이다.

염상섭은 자연주의에서 출발했으나 후에 사실주의로 발전하여 끝까지 시종일관했다. 그는 김동인, 현진건과 함께 한국 근대소설 초창기의 선구자이자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 근대소설사 초기에 사실주의 문학을 건설한 선구적 작가 중의 한 사람이며 최초로 자연주의 문학론을 제기한 중심인물이었다. 염상섭의 문학사적 공적으로는 3ㆍ1운동 이후 신문학운동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과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을 건설한 최초의 작가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염상섭의 많은 작품 중에서 초기작에 해당하는 『삼대』는 식민지 체제하의 당대적(當代的) 현상의 충실한 묘사를 통해 작가의 현실인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식민지 현실의 묘사와 작자의 현실인식은 『삼대』에서 한 가정 속에서의 세대 간 대립과 갈등이라는 양상을 통해 정연하게 드러난다. 『삼대』는 식민지 시대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평가되는 작품으로, 한 가족을 중심으로 부정적 또는 긍정적인 인물들을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근원적인 결핍과 역사적 당위 문제를 시사하고 있다.

줄거리: 덕기의 조부 조의관은 고루한 봉건의식의 소유자다. 어렵사리 모은 거액의 재산으로 집안의 크고 작은 제사를 받들고 가문의 명예를 키워나가는 것을 가장 큰일로 삼는다. 칠순 노인이면서 부인과 사별 후 서른을 갓 넘긴 수원댁을 후취로 들여 네 살배기 딸까지 두고 있다. 그런 조의관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아들 조상훈이다. 맏아들이면서도 집안일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교회사업에 골몰해 집안의 돈을 바깥으로 빼돌리는 데만 혈안이 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더구나 조의관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봉제사를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고 반대하고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아들보다도 손자인 덕기에게 더 큰 믿음을 가진다. 덕기의 부친인 조상훈은 희대의 위선자다. 미국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에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요 교회 장로인 그는 교회를 통한 사회운동과 교육사업에 큰 뜻을 품고, 집안의 재산으로 그런 사업에 직접 투자하기도 하고 민족운동가의 가족을 돌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사생활은 구린내 나는 축첩과 노름 그리고 술로 얼룩진 만신창이 난봉꾼이다.

덕기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다른 신세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도 친구 김병화처럼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병화가 하는 일에 심정적으로 동조를 하기는 해도 그 자신은 법대를 졸업하고 판사나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품고 있다. 자신의 그런 꿈이 가끔 운동가인 병화의 조소를 받아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병화는 목사인 아버지와 사상대립으로 가출해서 이곳저곳 떠돌면서 기식하는 형편이지만 자신의 뜻을 절대 굽히지 않는 반면, 덕기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정면충돌하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상황에 따서는 세대를 달리하는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이해하고 동정하기도 한다.

잠재되어 있던 조씨 가문의 불화와 암투가 전면에 드러난 것은 조부의 임종을 앞두고 생긴 재산분배 과정에서였다. 조의관의 후취인 수원댁은 재산을 가로챌 욕심으로 유서변조를 계획하고 조의관을 독살한다. 재산관리권은 덕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고 상훈은 법적 상속자인 자신을 건너뛰어 아들인 덕기에게 그 권리가 넘어가자 유서와 토지문서가 든 금고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힌다. 덕기는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공백을 느끼면서 이제 자신의 어깨 위에 얹힌 조씨 가문의 유업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지 망연해한다.

살아 숨 쉬는 현실감, 리얼리즘의 승리: 1932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한국 신문학사를 통해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삼대』는 1930년대 서울의 이름난 만석꾼 조씨 일가를 무대로 조부와 아버지, 아들에 이르는 3대가 일제 식민지하에서 어떻게 몰락하고 어떤 의식을 지니며, 당시 청년들의 고뇌가 어떠했는가를 사실적인 수법으로 파헤쳐 인간 심리를 미묘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봉건제도를 좇는 구세대의 전형인 조부(祖父) 조의관, 이중생활에 빠진 과도기적 인간형 부친 조상훈, 조부와 부친의 부조리함 속에서 재산을 지켜나가는 일에 한정되어 적극성을 잃은 우유부단한 조덕기. 이 3대의 이야기는 조부의 죽음과 함께 재산상속 문제에 불이 붙으면서 주변 인물들의 추악상을 그려보임으로써 절정을 이룬다. 대조적으로 새로운 삶을 전개하려는 주변 인물들의 의도와 새로운 세대, 즉 덕기와 병화들이 명확한 새 세계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변모해가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세대교체를 분명하게 보였다. 장편인 만큼 여러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나 주로 삼대에 걸친 3ㆍ1운동 당시를 전후한 시대상을 그린 작품이다.

횡보는 『삼대』의 집필의도에 대해 "새로운 뜻을 뼈로 삼고 조선 현실사회의 움직이는 모양을 피(血)로 하고 중산계급의 사람과 그들의 생각을 살로 붙여서 그리고자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당대 삶의 광활한 세계를 펼쳐보이는 소설 『삼대』는 이런 목표를 훌륭하게 성취하고 있으며 우리 문학에 있어서 하나의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동시대 다른 작가들이 추상적인 지식이나 책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구체적인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그려나갔다면 염상섭은 진짜 사람들이 숨을 쉬고 사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삼대』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Q정전(阿Q正傳) - 중국인의 우매성을 신랄하게 풍자한 신소설

루쉰 지음: 중국 현대소설의 아버지인 루쉰의 중편소설로 구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완전히 탈피하고 있다. 아Q라는 중국의 전형인물을 주인공으로 봉건사회의 몰락과정에서 보여준 중국인의 나약함과 비겁함, 비굴함 등 중국인의 약점을 고발하여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주인공의 '정신승리법'은 중국인들의 정신적 자학을 뜻하는 말로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중국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루쉰(魯迅, 1881~1936)은 예로부터 절경으로 소문난 중국 절강성 소흥부 태생이다. 루쉰의 고향 소흥은 실패로 끝난 두 혁명인 태평천국의 난(1861)과 신해혁명의 중심 영향권에 들었고 당시 중국 대륙을 유린한 외세 진출의 통로 앞에 늘 놓여 있었다. 급진적 혁명사상에 눈뜬 루쉰이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일본 유학길을 오른 것은 스무 살인 1900년. 당시 루쉰은 서양의학을 공부하여 의학구국(醫學救國)을 생각했다.

그러나 우연히 본 러일전쟁 시사영화에서 한 중국인이 러시아를 위한 스파이 혐의로 일본군에 의해 총살되는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는 중국 군중을 본 뒤 민중의 육체적 질병을 고치는 일보다 민족적 자각을 시키는 일, 즉 정신적 질병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라 여기고 의학을 중단하고 문학으로 전향했다.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베이징에 가서 차이위안페이(蔡元培)에 초청 받아 교육부 직원으로 일하면서 처녀작 「광인일기(狂人日記)」(1918)를 썼다. 이는 낡은 봉건 왕조를 청산하려는 중국 젊은이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으며, 중국 신문예를 탄생시키는 출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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