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흔들리되 부러지지는 않기를
노진서 지음 | 이담북스
마흔, 흔들리되 부러지지는 않기를
노진서 지음
이담북스 / 2013년 2월 / 388쪽 / 16,000원
무지개를 쫓던 어린 날의 풍경 - 「못 찾겠다 꾀꼬리」
놀이를 하는 인간, 호모루덴스: 얼마 전 미국의 유력 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미국 사회의 어린이들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즉, 어린이들이 노는 법을 몰라 놀이마저 새로 배워야 할 정도로 어린이들의 놀이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지요. 이것이 비단 미국에만 국한되는 현상이겠습니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나라의 아이들도 놀이터에서 한가로이 놀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혹 시간이 나더라도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와 게임기 같은 전자기기를 갖고 놉니다. 몸을 움직이는 육체적 활동은 거의 하지 않지요. 그래서 신체 각 부위의 운동 신경은 퇴화되고 운동 능력도 떨어집니다. 어려서부터 마을 앞산과 뒷산을 오르내리고 강을 건너려 개헤엄을 치며 체력을 단련하였던 우리 세대의 시각에서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러고 보니 노는 것, 놀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하위징아(1872~1945)라는 사람인데요. 『중세의 가을』이라는 명저를 남긴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입니다. 그는 인간을 '호모루덴스'라고 불렀습니다. 놀이를 하는 인간이라는 뜻이지요. 그가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인간은 놀면서 그 놀이를 통하여 문화를 만들어 간다고 본 것인데요. 특히나 유년 시절의 놀이가 사람들의 감성, 지능, 그리고 창조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릴 때는 뛰어놀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동산 위에 일곱 색깔의 무지개를 보면서 막 뛰어가는 아이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떠오르는 시구가 있지 않습니까.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바로 이 시구인데요. 다음은 영국의 낭만파 시인인 워즈워스(1770~1850)의 「무지개」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하늘에 무지개를 보면 / 내 가슴은 뛰노라 / 내 인생 시작되었을 때 그랬고 / 지금 어른이 돼서도 그러하며 / (……) /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 내 살아가는 나날이 / 자연에 대한 경외로 이어질 수 있다면.' 워즈워스는 자연에 대하여 늘 깨어 있던 아이 같은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행복의 조건, 동심으로 돌아가기: 우리는 어린 시절 그저 행복했습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했던 하위징아가 잘 설명해 줍니다. 하위징아는 인간의 활동에서 놀이와 노동을 구분하였습니다.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합치된 것이고, 노동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것이라고 하였지요. 어린이는 대체로 놀이를 하는 것이고, 어른은 노동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의 주장이 참 옳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가 블록 쌓기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블록 쌓기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지요. 그래서 현재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블록 쌓기가 다 끝나면 누군가로부터 어떤 보상이 또는 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에 반해 건설현장에서 벽돌을 쌓는 일을 생각해보세요. 벽돌공은 벽돌 쌓기가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일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즐거움은 일을 한 뒤에 돈을 받을 때이지요. 그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현재는 희생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하위징아의 말을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놀이를 하는 어린이는 즐거움으로 가득 찬 긍정적인 현재를 살고 있으니 행복한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노동을 하는 어른은 미래를 위해 희생 당하는 현재를 살고 있으니 불행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점을 잘 생각해보면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릴 때처럼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을 마치 놀이처럼 하면 되지요. 그러면 내면에 잠재된 상상력, 그리고 집중력과 창의력 등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겠지요. 그런데 살면서 좋아하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는 어른이 있습니까.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가급적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우리 어른들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우리 아이들은 진짜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급적 아이처럼 되어야 하는 어른. 아이다워야 하는 아이. 그런 어른과 아이를 잘 표현한 시가 있습니다. '생계로 내일을 생각하여 / 일하는 것은 어른 / 걱정으로 저녁 하늘을 살피고 / 걸을 때 서두르는 것은 어른 / 이웃을 믿지 않고 가면을 쓰며 / 갑옷 입고 행동하며 / 눈물을 감추는 것은 어른. / 미래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 노는 것은 아이 / 기쁨으로 노래하고 / 경이로워하며 울 줄도 알고 / 변명과 허세 없이 솔직하고 / 잘 믿고 가식도 전혀 없이 / 사랑하는 것은 아이' 이 시는 앤 머로 린드버그(1907~2001)의 「어른과 아이」라는 시입니다.
어린 시절과는 달리 나이가 들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은 솔직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남을 속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본의 아니게 남을 배려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다릅니다. 아이들은 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솔직합니다. 해맑습니다. 그러니 행복해지려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어른이 아니라, 주어진 현재를 즐기고 사랑하는 아이가 되어야 하겠지요. 적어도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되겠지요. 그래서 잃어버린 나, 예전의 나, 처음의 나. 바로 어린 날의 동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완전히 되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돌아가려는 노력은 해보면서 조금의 행복이나마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젊음에 대한 향수 - 「서른 즈음에」
생의 분기점, 서른 즈음: 젊음과 나이 듦. 이 상반되는 두 가지를 의식하는 시기. 그 시기가 바로 서른 즈음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 분명치는 않지만 경계선 같고 그래서 불안해지고 그래서 자꾸 생각하게 되고 또 돌아보게 되는 서른 즈음. 젊음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의식하면서 무언가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해야 하는 그런 시기인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는 아니고, 또 그렇다고 젊은이도 아닌 시기.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어 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인 것이지요.
'어른'이란 말은 중세어의 '얼운' 또는 '어룬'에서 나온 말인데요. 그래서 어른은 어르는 사람, 즉 결혼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독립하는 것이 어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자님도 서른 살에 어른이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논어』의 「위정편」에 이렇게 실려 있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志學), 30세에 홀로서기를 했으며 (而立), 40세에는 판단에 흔들림이 없었고 (不惑), 50세에는 천명을 알았으며 (知命), 60세에는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 (耳順), 70세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從心).'
공자님 말씀을 보니까 서른 살에 스스로 자립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혼하고, 어른이 되면서 사회적 현실에 맞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어리광을 피우는 아이가 아니며 젊음의 자유분방함을 뒤로하고 책임과 의무가 지워지는 서른 즈음. 이러한 변화를 온몸으로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에 막연한 불안감에 빠져드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사라져 가는 젊음을 붙들어 잠시라도 그 안에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마치 황지우 시인의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라는 그런 마음처럼 말이지요.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 공중 가득 흰 꽃밥 튀겨 놓은 날 / 잠시 세상 그만두고 / 그 아래로 휴가 갈 일이다. / (……) / 눈 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밟으며 지나갈 때 /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 내장사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 우리, 여기서 쬐금만 더 머물다 가자'
가버린 젊음에 대한 아쉬움. 그 미련과 회한으로 번민하던 서른 즈음. 젊음이 가 버린 것도 한스러운데 시간까지 우리를 압박합니다. 하루, 또 하루가 갑니다. 그리고 한 해, 또 한 해가 저뭅니다. 어느새 서른 즈음도 지나고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슬금슬금 다가서는 중년. 젊음이 사라졌으니 뜨거워질 수도 없는, 그래서 열정에 휘둘릴 리 없는 그런 나이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젊음은 아름다웠습니다. 그 풋풋한 기운과 순수한 꿈이, 그 격정적인 정열이, 가슴 저린 사랑마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젊음은 가 버렸습니다. 뜨거운 열정은 식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시들해진 삶은 덤이라고 생각했었지요.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젊음을 대신하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중년을 지나고 또 다른 시공간을 지나게 되겠지요. 지천명, 이순, 종심……. 이젠 서른 즈음처럼 집착하며 헤매지는 않겠지요. 앞에서 기다리는 미지의 세계로 두려움 없이 나갈 겁니다. 땅거미가 밀려오는 창가에 서서 잠시 시간에 떠밀리는 풍경들을 바라봅니다.
욕망의 그늘 - 「난 바보처럼 살았군요」
어긋난 인생, 야속한 세상: 얼마 전 '한국 부자 보고서'가 발표되었습니다. 그 통계를 보며 부자들의 재산이 가리키는 숫자에 주눅이 들었습니다. 또한 부자가 점점 늘어간다는 사실에 일말의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부자들이 돈 벌 때 난 뭘 했나. 그렇다면 난 실패한 인생인가, 그러다가 아니야, 난 열심히 살았는데 운이 안 맞아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애써 자기 위안을 삼곤 합니다. 그러면서 한술 더 떠 역사적으로 불우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불리한 상황을 회피하려 합니다. 고려 때 뛰어난 재주를 타고난 이규보(1168~1241)도 자신이 시대를 잘못 만나 불우하다고 그랬으니까요.
그가 쓴 『위심』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인간사 자질구레한 일이 탈도 많아서 / 예상에 빗나가 제대로 되는 게 없어라. / 남들 풍년일 땐 가난해서 마누라에게 무시당하고 / 말년에 봉급 많아지니 기생들만 따르려 하네. / 장마 때엔 돌아다닐 일 많아지고 / 날 갰을 땐 오히려 집 안에 들어앉게 되네. / 배불러서 더 못 먹을 때 맛있는 고기 나오고 / 목에 탈 나 마시길 꺼려하면 좋은 술 나온다. / 있던 보물 싼값에 팔고 나면 시장 가격 올라가고 / 오랜 병 낫고 보면 바로 이웃에 의원 있었었네. / 작은 일도 이렇게 맞지 않으니 / 양주에서 학 타는 신선 노릇 바랄 수나 있을까.'
당시는 무신정권 시기여서 타도와 축출의 대상이었던 문신들은 살아가기가 무척 힘들었던 시기였지요. 이규보 자신도 뛰어난 재주로 과거급제는 했지만 벼슬자리를 얻지 못해 고생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최우(?~1249)에게 인정을 받아 벼슬길에 나서면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이 시는 이규보가 형편이 여의치 못해 매사 불만스럽고 야속했던 당시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사가 이렇게 어긋나니 언감생심 학을 타는 신선을 어떻게 바라겠느냐는 것이지요. 이거야말로 고려판 머피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이치대로라면 어차피 약자들은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피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시쳇말로 '안 될 놈은 안 돼' 이겁니다. 결혼하고 집 사느라 빚져서 하우스 푸어, 자식 가르치느라 빚져서 에듀 푸어, 자식 결혼시키고 은퇴 후 수입 줄어 실버 푸어로 이어지는 인생. 어물어물하다 보면 빚의 먹이사슬에 옭아매인 인생이 되고 맙니다.
안분지족 아니면 필사탈출: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온 우리가 어리석은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이 잘못된 것인지, 가치관에 혼란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살다 보니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조차도 두 갈래로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겁니다. 바로 전만종의 「자탄」이라는 시가 대변하고 있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에잇! 더러운 세상. 안 보면 그만이지!' 하고 한 발짝 물러나 사는 겁니다.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고 들어왔건만 / 요즘 보니 의롭게 살아도 비웃음 당하네. / 부귀영화 누리면 탐욕 더욱 드러내고 / 빈천하게 살아가면 옳은 것도 그르게 되네. / 하늘의 뜻을 우리가 어찌 헤아리랴마는 / 사람의 마음도 쉽게 알기 어려워라. / 심심산천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네.' '내가 그렇지 뭐! 그래도 험한 세상 이만큼 산 것도 다행이야' 하면서 내 분수에 만족하는 안분지족. 그것으로 평정심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습니까.
두 번째 유형은 '이렇게 쭈그러지느니 아예 치고 올라가보자'라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행동가들입니다. '하면 된다. 노력하면 너도 성공할 수 있다'라는 긍정주의 신념을 실천해보려는 것이죠. 그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죽도록 일한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러다 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짓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됩니다. 여기 그런 타입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스탕달(1783~1842)의 작품, 『적과 흑』에 나오는 주인공 쥘리엥 소렐이 그런 인물입니다.
파멸을 부르는 과욕: 쥘리엥 소렐과 같은 인물이 과연 19세기 스탕달 시대에만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판 쥘리엥 소렐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너무나 많이 눈에 뜨입니다. 그 정도 위치까지 올라갔으면 그만 만족하고 내려올 만도 한데요. 실제로 권력의 맛을 보면 그게 안 되는 모양입니다. 글쎄요, 그것도 자연의 섭리인가요.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심이든 재물에 대한 욕심이든 지나친 욕심은 결국 화를 부르지요. 과유불급(過猶不及). 그래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하잖습니까.
아무리 높은 직위에 올라 권력을 누릴 만큼 누렸어도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끊임없이 권력을 위해 달려들고 움켜쥐려고 하지요. 또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늘어나는 욕심을 충족시킬 수는 없나 봅니다. 그러나 욕심을 좇다가 파멸의 길을 가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고 존재의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 이달(1539~1618)의 「대추 따는 아이」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도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 아이들에게 봉변을 당합니다. '옆집 어린아이 대추 따는 것을 보고 / 할아버지 문을 나서며 아이를 쫓네요. / 어린아이 오히려 노인에게 말하길 /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지 사시지도 못할 텐데.'
우리는 이렇게 과도한 물욕 때문에 쓸데없는 짓에 집착하다가 욕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욕심을 버려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는다 싶으니 마음이 급해지고 본 것은 많아서 점점 욕심을 냅니다. 그런데 욕심을 다 이룰 수는 없으니 거짓으로 포장을 합니다. 바쁜 척, 능력 있는 척, 많이 가진 척, 예쁜 척, 뭉뚱그려 말하면 잘난 척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 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과시하려고 허장성세를 보이는 걸까요. 윌리엄 제임스라는 심리학자에 따르면 인간은 고문보다도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무관심을 더 두려워합니다. 다시 말하면 왕따 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답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어서 그 사람이 나를 주시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때문에 만나더라도 아주 짧은 시간만이 허용될 뿐입니다. 그러니 만나면서 바로 맞교환하게 되는 첫인상이 매우 중요합니다. 첫 대면에서 허풍을 떨더라도 상대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남겨야 상대가 나에게 관심을 갖게 되겠지요. 그러다 보니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이미지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연출하는 나의 이미지에 대하여 주위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관심을 갖고 주목할까요.
페르소나를 쓴 가면극 배우: 알고 보면 사람들은 제 일에 바쁘기 때문에 남에게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은 자가당착으로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조명효과에 빠집니다. 주변 사람들을 관객으로 의식하면서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에 무척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자기 본연의 모습이 아닌 연출된 모습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셰익스피어(1564~1616)가 말했듯이,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기가 맡은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말이지요. 다시 말하면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리는 가면을 쓰고 가면극을 하고 있는 배우와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