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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지음 | 아포리아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지음

아포리아 / 2013년 3월 / 344쪽 / 15,000원





제1장 어떻게 살 것인가



마음 가는 대로 살자: 나는 노는 게 좋다. 일도 좋지만 노는 건 더 좋다. 그렇다고 해서 맘껏 놀며 산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일보다 노는 걸 더 좋아하는 건 분명하다. 도통 놀 줄 모르고 오로지 일만 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 같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일중독증(workaholism)이라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런데 도무지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전임자들이 황당한 토목건설사업을 벌여 빚더미에 올려놓은 서울시 재정을 바로잡고, 쪽방 거주자와 독거노인, 청소 노동자, 서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오늘도 쉼 없이 일하고 있다. 서울시민에게는 딱 좋은 시장이다. 존경할 만한 '박원순의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지는 않다. 일하는 보람이야 틀림없이 있겠지만, 도통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다.

모든 사람이 박원순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일은 누구나 한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돈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먹고살고, 아이들을 키우고, 부모님을 잘 모시고, 노후 대비를 하고,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재미있게 노는 게 목적이다. 만약 돈벌이가 되는 그 일이 즐겁기까지 하다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프로'라고 한다. 무슨 직업이든 좋아서 그 일을 하면 그 사람이 바로 프로다. '진정한 프로'가 되는 것, 이것이 삶의 행복과 인생의 성공을 절반 결정한다. 그런 점에서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일이 아니라 놀이를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

무엇이든 놀이로 삼을 수 있다. 그중에서 으뜸은 음악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음악을 즐기며 산다. 나도 음악을 즐긴다. 그런데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연주할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 노래와 연주를 하지 못하니 즐기는 능력이라고 신통할 리 없다. 내게 음악은 들어서 아주 좋은 것과 그냥 좋은 것, 오직 두 종류뿐이다. 작곡가, 가수, 연주자, 밴드, 걸그룹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매우 적다. 그런데 이런 내가 좀 아는 밴드가 하나 있다. 크라잉넛(Crying Nut)이다. 개인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그냥 대중음악 소비자로서 안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라 자기네가 하고 싶은 음악을 했다. 그렇게 하면 돈이 잘 벌리지 않는다. 어느 날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버스비를 털어 호두과자로 끼니를 때우며 집으로 가던 중 크라잉넛이라는 밴드 이름을 생각했다고 한다. 크라잉넛은 '진정한 프로'라고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제멋대로 하면서 돈도 번다. 그래서 자기네가 행복하다고 침을 튀기며 자랑한다. 내가 이 밴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 노래가 아니라 그들이 쓴 책 때문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에 '좋아한다면 부딪쳐, 까짓 거 부딪쳐!'라는 부제가 딸려 있다. 나는 이 책을 낸 크라잉넛이 어떤 밴드인지 살펴보다가 '말 달리자'가 그들이 부른 노래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돌이켜보면 1998년 대한민국의 여름은 여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IMF 외환 위기가 몰고 온 기업 파산과 대량 실업의 공포에 얼어붙어 있었다. 눈앞에 닥친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숨도 마음 놓고 쉬지 못했다. 바로 그때 크라잉넛이 소리를 질렀다. '닥쳐, 닥쳐! 닥치고 내 말 들어!' 그렇게 외치면서 신나게 '말 달렸다'. 호두과자로 배를 채우고 울면서 집에 갔던 이 청년들은 왜 주눅 들지 않았을까? 아마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일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크라잉넛은 자기네 생각을 이야기했다. '좋아한다면 부딪쳐, 까짓 거 부딪쳐!' 훌륭한 대답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좋아하는 펑크록 음악을 들고 세상과 부딪쳐 나름 성공했다. 인생에서 성공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소신껏 인생을 사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산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성공이라고 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포기하고 산다면, 그 인생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없다.

크라잉넛 멤버 가운데 키보드를 치는 김인수 씨가 1974년생이다. 나머지 넷은 두세 살 젊은, 초등학생 때부터 얽혀 살아온 동네 친구들이다. 스무 살 무렵에 밴드를 결성했던 그들은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펑크록을 들고 세상과 부딪치고 있다. 그들이 처음 밴드를 만들었던 그 나이에 나는 무엇을 했던가? 돌아보니 나도 그때 세상과 나름 격렬하게 부딪쳤다. 바람이 불면 사물이 각자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사람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과 부딪쳐 제각기 색깔이 다른 삶을 산다.

나는 스물두 살 대학 3학년생이었던 1980년 5월 17일 자정 가까운 시각, 학교에서 붙잡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갔다. 맡은 직책이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 검거 대상자 명단에 일찌감치 올라 있던 터였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산하 경찰청 특수수사대로 끌려가 그곳에서 두 달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 관악경찰서, 수도군단 계엄보통군법회의, 안양교도소를 거쳐 논산훈련소와 강원도 화천의 백암산 소총중대, 철책선 소초, 서울 서빙고 보안사령부 대공분실까지 두 번은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들을 전전했다. 크게 다치거나 죽지 않은 것은 때로 비겁하게 처신한 덕분이었다. 그때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용감하게 행동했던 사람들은 광주의 전라남도청에서 목숨을 잃었다.

나는 크라잉넛 멤버들이 나보다 훨씬 훌륭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펑크록 밴드 멤버가 대학 총학생회 간부보다 더 훌륭하다는 게 아니다. 펑크록 공연이 민주화투쟁보다 아름답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문제는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했고, 그 삶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시민운동을 한 청년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지도 않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전까지 많은 서러움을 겪었다. 시끄러운 록 음악을 듣고 불확실한 미래에 도전하는 자녀들을 마음 놓고 지켜보는 부모는 드물다. 좋은 대학, '사(士)'가 딸린 전문직 자격증, 연봉이 높은 대기업, 이런 것을 성공이라 믿으면서 열심히 스펙을 쌓던 이들은 크라잉넛 멤버들을 베짱이로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크라잉넛 멤버들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을 물질이나 지위, 사회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 어떤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두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행복한 삶을 스스로 설계했다. 그리고 그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밀고 나갔다. 주눅 들지 않고 세상과 부딪쳤다. 인생이 성공했으며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계속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고 한다. 그들은 좋아하는 놀이를 직업으로 삼았다. 이것만으로도 '절반'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인생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일과 놀이가 인생의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사랑과 연대(solidarity)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크라잉넛 멤버들이 이 나머지 '절반'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절반' 성공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크라잉넛의 책을 읽으면서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 크게 빚졌다고 생각한다. 그 빚을 갚고 싶다. 그래서 그들도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인생의 나머지 절반도 소신대로 하기를 기대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 청년의 고민과 숙제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청년기의 핵심 과제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열아홉 살의 나는 도전하지도 않고 좌절한 현실주의자였다. 대입 본고사 국어시험 작문 주제가 '내가 사랑하는 생활'이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썼다. 점수는 잘 받았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문이었다. 평범한 삶이 아름답고 행복할 수 없다는 게 아니다. 평범해도 평범하지 않아도, 인생은 훌륭하거나 비천할 수 있다. 인생의 품격은 평범함이나 비범함과 상관없는 것이다. 내 문제는 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무엇인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었다. 인생을 어떤 색조로 꾸미고 싶다는 소망도 없었다. 그저 현실에 잘 적응했을 뿐이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목표도 방향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았다. 마구잡이로 살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때그때 눈앞에 닥쳐온 일을 나름 성실하게 열심히 하면서 살았다. 대학생 때는 정부와 언론이 '지하대학'이라고 불렀던 학회에 가입해 독재정권이 금서(禁書)로 지정한 책을 읽었다. 구로동 야학 교사가 되어 또래 여성 노동자들의 학습을 도왔다. 반정부 시위를 하다가 잡혀가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불법 유인물'과 화염병을 만들었다. 징역을 살았다. '범죄 조직'을 만든 증거로 악용된다고 해서 사진을 찍지도 않았고 일기를 쓰지도 않았다. 설렘과 환희로 빛나야 마땅한 청춘을 그렇게 아무 흔적 남기지 않고 보냈다. 최선을 다해 '닥치는 대로'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 그러나 훌륭한 삶은 아니었다. 내 자신이 설계한 인생, 내가 원한 삶의 방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나이에 아직도 이런 질문을 껴안고 있는 내가 한심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여태껏 살아온 내 삶의 결과임을 인정한다. 만약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계속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훌륭한 인생이다. 그대로 가면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들고 능동적으로 세상과 부딪치지 못했다. 번민하면서 주저하는 내게, 세상이 먼저 부딪쳐 왔다. 세상은 나더러 체념하거나 굴복하라고 했고, 나는 거절하고 저항했을 뿐이다. 부당한 강요에 굴복하면 삶이 너무나 비천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과 품격을 지키려고 발버둥 쳤다. 성년이 된 이후 오랫동안 내 삶을 지배한 감정은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었다. 수치심과 분노, 슬픔, 연민, 죄책감,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닥치는 대로' 산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원망할 수 없다. 세상은 제 갈 길을 가고, 사람들은 또 저마다 자기 삶을 살 뿐이다. 세상이, 다른 사람이 내 생각과 소망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세상을 비난하고 남을 원망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죄악과 비천함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악당이나 괴물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훌륭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되든, 무엇을 이루든, '자기 결정권'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내 삶에 대해 더 큰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싶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의미와 기쁨을 느끼고 싶다.

그러려면 무엇인가 바꿔야 한다.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 자신도 더 훌륭해져야 한다.

여태껏 오로지 남을 위해서 산 건 결코 아니었다. 세상을 위해 살았다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나를 위해,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인생은 훌륭할 수 없다는 관념에 눌려서 산 것만은 사실이다. 무엇에선가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때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히곤 했다. 행복을 느끼는 순간마다 누구에겐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꼭 그래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하지도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떳떳하게 그 권리를 행사하고 싶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기쁘게 살고 싶다. 스무 살의 크라잉넛 멤버들처럼.



제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이라는 운명: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철학자 밀의 주장이다. 그냥 이 구절을 읽으면 그저 옳은 말로 보인다. 하지만 인생은 너무 짧은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그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그렇다. 내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누가 시키는 대로 또는 무엇인가에 얽매여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이라는 운명과 대비할 때 제대로 의미를 드러낸다. 사람은 다 죽는다는 것,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한 때가 언제였는지는,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죽음에 대해서 처음으로 긴 시간 진지하게 생각했던 상황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외할머니 장례식이다. 외할머니 장례식은 사람으로 붐볐다. 빨갛고 하얀 종이꽃으로 장식한 애기 가마가 앞서 나갔고, 장정들이 맨 상여가 뒤따라 집을 나섰다. 대나무 지팡이를 든 이모들과 삼베옷을 입은 외삼촌들이 곡을 하며 뒤따랐다. 외할머니는 들판 건너 야산 중턱에 묻히셨다.

대청마루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냥 다 살고 가셨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오래 살면 돌아가시겠지. 나도 어른이 될 텐데 결국은 죽을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태어난 것일까? 내가 세상에 온 데에는 무슨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가 있는 걸까?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을 하면서 살게 될까?' 두서없이 생각을 이어가는데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정체 모를 두려움과 슬픔이 밀려왔다. 요즘 내 휴대전화에는 부고(訃告) 메시지가 자주 뜬다. 지인들의 부친상, 모친상 조문이 잦아진다. 더 시간이 흐르면 선배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고, 그다음은 동년배 친구의 사망 소식이 들릴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 차례가 올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죽음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죽음을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로 취급한다. 아직은 자기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임박한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내팽개쳐두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훌륭한 삶, 품격 있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나름의 견해를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삶과 함께 죽음도 알아야 한다. 죽음을 모르거나 오해하면 삶을 망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본능적 공포감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만 잠깐씩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온다. 그런 때가 아니면 죽음은 잠재의식 깊은 곳에 보이지 않게 웅크리고 지낸다.

나는 요즘 죽음에 대해서 예전보다 자주 생각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자꾸 죽음이 생각나서 더 깊게 삶을 고민하게 된 것인지 선후를 알 수는 없다.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을까.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고민이다. 여기서 죽음이란 일반적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다. 개별적ㆍ주체적 사건으로서의 죽음, 즉 내 자신의 죽음이다. 사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열정적으로 일하고, 즐겁게 놀고, 깊게 사랑하고, 뜨겁게 연대하는 모든 순간마다 조금씩 죽는다.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삶과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맞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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