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선미
하워드 가드너 지음 | 북스넛
진선미
하워드 가드너 지음
북스넛 / 2013년 2월 / 298쪽 / 16,000원
되살려야 할 인간의 가치
나는 지금 캠브리지의 우리 집 서재에 앉아 있다. 상쾌하고 쌀쌀한 1월 아침, 왼쪽 창문을 통해 햇살이 밀려들어온다. 책상 위에 놓인 상자에는 그림엽서들이 담겨 있고, 거기에는 유명한 인상주의 그림들이 복사되어 있다. 내가 지금 쓰고 있고, 지금쯤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은 두 개의 목적을 갖고 있다. 이 책의 첫 번째 의도는 세 가지 중요한 가치인 진, 선, 미의 현재 상태를 우리 모두 정확히 보고 생각하도록 돕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한 관점에서 우리가 다음 세대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는 부모들과 교사들, 우리 자신들에게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방금 나는 훈련된 철학자를 제외하고, 거의 누구에게도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몇 줄의 문장을 썼다. 사실 그 문장들은 앞으로 내가 고전적 가치라 부를 덕목들을 예시할 수 있다. 우선 위의 진술들은 참이다. 실제로 지금은 1월이고, 나는 서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클로드 모네와 에드가 드가 같은 화가들의 그림들, 즉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간주하는 작품들을 언급했다. 그리고 나는 이 글쓰기의 두 목표를 언급했는데, 일반적으로 그런 목표의 추구는 좋은 일로 간주된다.
이런 진술들과 그 속에 포함된 정서들은 실제로 내가 방금 주장한 것처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이 책은 쉽게 마무리될 것이고, 지금 여기서 끝날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가치들을 당연시하며 산다. 우리는 남에게서 들은 것, 매스미디어에서 골라잡은 것, 자신의 감각으로 지각한 것이 대부분 진실이라고 가정한다. 만일 자신의 감각과 정신에 입력되는 낱낱의 정보를 실시간 의심한다면,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든 하지 않든, 우리가 내리는 선택들에는 우리의 미적 감수성이 반영된다. 우리는 어떤 장면과 소리를 다른 것들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어떤 장면과 경험을 피하려 해도 중력에 끌리듯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우리 자신의 외모뿐 아니라 우리가 책임지고 꾸며줘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더 나아가 애완동물, 정원, 식당, 식사)의 겉모습에도 정성을 들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문제가 되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뿐 아니라 뉴스, 역사, 문학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평가도 문제가 된다. 우리는 거의 주저하지 않고 누구는 좋고 누구는 나쁘다고 평가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양자의 혼합쯤으로 평가한다. 만일 우리가 암묵적으로라도 참인 것들(그리고 참이 아닌 것들), 아름다운 것들(그리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 선한 것들(그리고 선하지 않은 것들) 사이를 헤집고 다녀야 한다면, 살아있기조차 힘이 들 것이다. 한번 시도해보라!
그런데 우리의 고전적 가치들은 시대적 흐름에 시달리고 난타를 당해왔다. 서양에서 최근 몇십 년 동안 진, 선, 미의 개념은 예상치 못한 두 방향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압력을 받아왔다. 그 방향들은 둘 다 아주 새로운데, 하나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르는 개념이고, 또 하나는 갈수록 팽창하고 강력해지고 있는 디지털 미디어가 그것이다.
한 방향, 즉 철학의 방향에서 인문학에 기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비평들은 이 트리오 개념(이후로 트리오)의 적합성을 의문시해왔다. 이 회의론에 따르면 진, 선, 미에 대한 평가는 주어진 시점에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의 기호 외에는 아무것도 반영하지 않는다고 본다. 다문화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세계에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종종 화해할 수 없는 경계선 너머에서 대화를 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가령 온건한 포스트모더니스트는 내가 단지 우연한 상황들을 통해 미술 교과서를 지배하게 된 평가 기준에 굴복했다고 주장하면서 인상주의 그림을 아름답다고 보는 내 견해에 도전할 것이다. 보다 공격적인 모더니스트들은 아름답다는 용어 자체를 거부하고, 그런 개념은 무의미하거나 돈으로 매수될 수 있으며, 내가 어떤 객체의 장점을 독단적으로 결정했다는 것을 간단히 줄여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또한 진과 선에 대한 나의 진술들도 오만하거나 주관적이거나 무의미하다고 간주할 것이다.
아주 다른 방향, 즉 과학기술의 방향에서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는 일종의 혼돈 상태를 불러들였다. 디지털 미디어가 우위를 점한 탓에 온갖 주장들과 반대 주장들이 뒤섞여 우리 앞에 펼쳐진다. 온갖 창조물들이 한 덩어리로 뒤엉켜 끊임없이 교정되고, 규제와 검토를 벗어난 도덕은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진술이 누구에 의해서든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시대에 무엇이 ‘진’인지 어떻게 확정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에 등장할 수 있는 시대에, 또는 블로커들이 증거나 결과를 무시하고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케냐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할 수 있는 시대에 무엇이 ‘미’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한때 인정받았던 거장의 사진을 포토샵으로 끊임없이 편집하거나, 전문가들이 내린 작품에 대한 평가보다 다수의 대중이 내린 평가가 더 중요시되는 시대에 어떻게 선, 즉 올바른 행동 방침에 도달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과 디지털 미디어는 기원과 역사가 서로 다르지만 끈끈하고 강력한 친분을 맺고 있다. 각각의 세력은 한쪽만으로도 진, 선, 미를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불안을 안겨주고, 둘이 합세하면 진, 선, 미를 강하게 확신하는 사람들조차 멈칫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런 추세에 굴하지 않고 세 가치의 중요성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그 본질적 생명력을 옹호할 것이다.
이 가치들이 단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동인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디지털 미디어가 야기하는 위협들을 진지하게 숙고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기초한 분석은 이 가치들의 ‘본질적 핵심’을 추출해내고, 우리 시대에 그 핵심을 보존하고 어떻게 해야 그 가치들을 다음 세대들에게 가장 잘 전달할지를 제안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어떤 의도나 목적에서든 진, 선, 미가 이끄는 삶 또는 적어도 그 가치들을 꾸준히 탐구하는 삶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무가치하고 무엇이나 통용될 수 있는 세계에 굴복하게 된다. 그렇게 우울하고 변덕스럽고 무의미한 존재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트리오 가치의 개념을 명백한 관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먼저 진리부터 시작하자.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을 존중하여, 진리는 명백하고 합의 가능하다고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고 가정해보자. 어쩌면 우리는 폭스 뉴스나 미국 공영라디오방송, 또는 BBC나 알자지라에서 얻은 각자의 편견을 통해 세계를 보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진리는 권력과 너무 깊이 뒤얽혀 있는 탓에 타당성이 전무할지 모른다. 오웰 풍의 스탈린주의 러시아나 마오쩌둥주의 중국에서, 또는 부시-체니-럼스펠드가 이끈 워싱턴의 ‘사이비 진실(truthiness)’에서 정말 무엇이 진실이었는가? 그리고 우리가 아무 검색 엔진에서나 접할 수 있는 정보와 오보의 뒤범벅을 고려할 때, 무엇이 진실인지 또는 과연 진실의 추구가 헛수고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다음으로 미를 생각해보자. 어쩌면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화병이나 페르시아 세밀화나 내 책상 위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바다 그림이 아름답다는 보편적인 동의, 또는 압도적 다수의 전문가들과 예술애호가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서양미술사 개론에서 배운 것처럼, 140년 전 식견이 있는 비평가들은 대부분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 규모를 갖춘 어느 미술관에 가더라도 가치 있고 또 가치를 인정받으면서도 보통 아름답다는 형용사를 붙일 수 없는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예를 들어 두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과 루시안 프로이트의 그림들이 그렇다). 오늘날 많은 미술 비평가들이 미에 관한 주장을 완전히 회피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학계에서나 잡담을 좋아하는 계층에서는 대체로 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세련되지 못한 행위로 간주한다. 오늘날 ‘계몽된 견해’가 주장하듯이 예술의 목적은 아찔할 만큼 근사한 객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건 한물갔거나[passe] 저속하다[kitsch]),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거나 새로운 생각으로 인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또는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가 제공하는 선택사양들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림을 무한정 만들거나 개작할 수 있고, 멜로디를 무수히 짜 맞출 수 있고, 유명하거나 유명하지 않은 시인들의 구절들을 뒤섞어, 원하는 시 혹은 원하지 않은 시를 줄줄이 지어낼 수 있다. 그때 ‘아름다움’에 대한 권위 있는 평가는 변덕스러운 개인적 취향으로 대체되거나, 한 번도 작품을 만들거나 완성해보지 않은 이름 없는 다수 군중의 집단적 노력으로 대체된다. 어떤 이미지나 소리 패턴이 덧없이 사라질 때, 그리고 마우스를 쥔 사람이 미술을 창작할 때, ‘미’란 용어는 기초가 빈약해지거나 사이버 공간을 정처 없이 표류한다.
마지막으로 선을 보자. 특정한 역사적 시대나 지리적 영역 안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약한지를 웬만큼은 자신 있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우여곡절을 파헤치고 다양한 문화들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선과 악에 관한 주장들 앞에서 머뭇거리고 소심해지게 된다. 한 집단의 테러범은 다른 집단의 자유 투사다. 누가 선한 편이고 누가 악한 편인가?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사생활의 범위나 저작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의 가상현실에서는 무엇이 ‘선’인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는 결국 현실이 아니니 그런 다수 이용자 게임에서는 남을 속이고 협박해도 괜찮을까? 다차원적이고 파편화된 디지털 시대에 공통의 도덕적 기준이라는 이상은 그 어느 때보다 도달하기 어려워진 듯하다.
내가 보기에 세 가치는 개념상 서로 독립되어 있다. 각각의 가치는 자체적인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것이 아름답거나 선하지 않아도 진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5만 3천 명 이상의 미국인이 베트남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처럼). 마찬가지로 어떤 것은 아름답지 않고도 선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사망한 뒤의 어떤 자연 경치는 역사적으로 참이거나 선하지 않아도, 최소한 멸종된 그 종, 즉 우리 인간에겐 영화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을 갖춘 현대 성인들에게 자명하게 여겨지는 것이 과거에도 항상 그렇진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역사의 거의 전 기간 동안 많은 사회들은 세 가치를 서로 동일하진 않아도 마치 하나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런 연결의 한 예로 고대 이집트의 ‘마-아트’ 개념을 언급했다. “마-아트는 진리, 정의, 균형, 자연과 우주의 지배 원리들, 시간의 장중한 진행, …… 진실하고 공정하고 도덕적인 행동 기준들, 사물들의 적절한 존재 방식을 의미했다. 이 모든 개념이 그 짧은 한 단어에 둘둘 말려 있었다. 그 반대는 물리적 혼돈, 이기심, 거짓말, 악한 행동, 즉 종류를 막론하고 신이 규정한 만물의 경향에서 어긋나는 모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해야 한다. 이제부터 나는 세 가치를 독립적으로 다룰 것이다. 나는 각 가치의 결정적 특징들, 변화하는 자질들뿐 아니라 항상적 자질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디지털 미디어에서 비롯하는 위협들을 지적할 것이다. 사실 내가 보기에, 우리 시대에 세 가치는 각기 다른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각기 다른 운명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시대의 연령대를 뛰어넘어 세 가치를 융합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염두에 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둘 이상의 가치를 다루고 있을 때에는 그 사실을 지적할 것이고,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에는 어떻게 충돌하고 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진
포스트모더니즘과 디지털 미디어가 지배하는 시대에 진리의 지위를 확립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감각적 지식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줘야 한다. 수학, 과학, 역사 같은 몇몇 학과들이 세계에 대한 설명에 도달하고 각자의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들을 설명해야 한다. 학문적 증거 또는 다수 학문들의 증거를 평가하여 진리 가치를 결정하는 방법을 시범 보여야 한다. 기자, 의사, 변호사처럼 각자의 기술을 추구하는 전문인들의 일상적 업무 속에서 대략적인 눈대중이 어떤 한계에 부딪히고, 축적된 경험과 전문성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사람들이 설령 비합리성, 편견, 선전에 물들더라도 그런 성향들이 승리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방법들을 알아내야 한다. 대중이 어리석어지는 경우(예를 들어 일시적 광기 또는 광란의 파시즘에 복종하는 경우)뿐 아니라, 현명해질 수 있는 방법들(예를 들어 개인들이 어림잡아 내놓는 예측보다 더 정확하게 산정하는 방법)을 밝혀내야 한다. 그리고 예술에서 진리 탐구는 기본적으로 범주 오류에 해당하지만, 진정성 또는 ‘옳다’는 느낌을 리트머스지로 시험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음을 보여야 한다.
필자의 분야인 심리학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진리 탐구는 갈수록 더 ‘메타인지적(metacognitive)’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눈, 저녁 뉴스의 말들, 또는 《타임》지가 제공하는 요약문에만 의존할 수가 없다. 우리의 감각들이 충실히 기능하는 방식들과 우리를 속이는 방식들을 이해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뉴스 기자나 논평가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이야기를 바로잡거나, 반대로 자신의 편향을 전달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방식들, 그리고 가장 능숙한 전문인들과 장인들이 알든 모르든 사용하는 절차들뿐 아니라, 몇몇 학과의 학자들이 사용하는 절차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안타까운 순환 논리에 빠질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는 진리에 관한 진리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더 이상 단일한 진리가 아니라, 개별 영역에 적합한 각각의 진리, 틀릴 수도 있지만 저마다 반드시 지속적인 다듬기와 개선을 거치는 각각의 진리가 모인 복수의 진리에 의존해야 한다. 약속의 땅과도 같은 순수한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진 못해도, 수백 년의 기간을 두고 올바른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이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앞선 사람들보다 이 세계에 관한 더 진실한 그림들을 얻을 수 있지만, 결코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가정할 순 없다. 다만 우리의 후손들은 당연히 더 진실한 그림을 손에 넣을 것이라 믿을 수 있다.
미
미 “이야기”는 진리 “이야기”와 상당히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디지털 미디어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만, 더 확고한 기정 진리들을 추구하는 경향은 견고히 지속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적 대상과 경험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은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다. 미적 경험은 만들어진 출처에 상관없이 흥미를 자아내고, 기억할 만하고, 추가적인 탐구를 유발하는 객체 및 경험의 창조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아름답다고 판단할지를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역사, 문화, 우연의 요인이 뇌나 경제학에 기초한 어떤 고찰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사람들의 진화론적 선호 성향들 또는 냉혹하게 작동한다고 하는 수요 공급의 법칙을 신중히 고려하는 대신, 우리는 우연이나 설계를 통해 출현하는 변주 형태들에 주목하고, 어떤 형태들이 예술 세계에 심취한 각 개인을 매혹시키거나 사로잡는지를 지켜봐야 한다.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겠지만, 우리 자신의 미적 경험은 점점 더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서 멀어질 것이다.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