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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김정미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김정미 지음

아름다운사람들 / 2012년 11월 / 296쪽 / 16,000원





진짜 양심은 세계를 움직인다_ 빌리 브란트

"나 자신이 저지른 범죄는 아니었지만, 위령비 앞에 서는 순간 우리 독일인들에 의해 죄 없이 생명을 잃은 수많은 영혼들의 무게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서독의 제4대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는 20세기 중후반 동서 냉전시대에 동구권 등 공산국가들을 상대로 긴장 완화를 모색하는 동방 정책(Ospolitik)을 펼친 정치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양분된 뒤, 빌리 브란트의 조국 독일은 패전 후 전쟁에 대한 책임 때문에 동서로 분단되었다. 동서로 분단된 독일은 근 25년간 반목하고 적대시했으며 서로 등을 돌리고 대화를 단절했다.

빌리 브란트는 이런 경색된 시기에 서독의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동서로 나뉜 독일을 통일시키고 나아가 유럽 전체의 화해와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는 조국 독일의 1차적 분단 책임은 이데올로기 갈등 때문이 아니라, 지난 시절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독일의 뼈아픈 과오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정 어린 사죄와 반성이 있어야만 통일을 향한 한 걸음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통해 국가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그 새로운 이미지 위에 새로운 독일의 통일 역사를 시작하려 한 것이다.

결핍의 성장 환경: 빌리 브란트는 1913년 독일의 북부 도시 뤼벡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의 존재를 몰랐으며 생계에 바쁜 어머니 대신 외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빌리 브란트는 훗날 자서전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자기 뿌리에 대한 박탈감과 애정 결핍 등으로 인해 많은 심리적 방황을 했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학창 시절 역사 과목을 좋아하는 제법 우수한 학생이었고, 노동자 출신이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 Sozial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에 가입했다. 빌리 브란트는 조선소에 취업하여 노동자로 일하면서 SAP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 독재가 시작되자 여타 정치 활동은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빌리 브란트가 소속되어 있던 SAP는 탄압 대상이 되었고, 스무 살의 그는 노르웨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이때부터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노르웨이에 SAP 지부를 개설했다.

귀국 후 정치 활동: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노르웨이를 거쳐 스웨덴으로 망명했던 빌리 브란트는 독일의 패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로 돌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전범의 대가로 분단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망명 생활 동안 목격한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스탈린이 보여준 행보 등에 실망한 빌리 브란트는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평등과 평화가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서독에서 새로운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동서의 분단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이후 그는 사민당에 재입당하여 정치인으로서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 1957년에 서베를린의 시장이 되었다.서베를린의 정치인으로서 빌리 브란트가 가장 관심을 가진 문제는 분단과 그것의 극복이었다. 그는 나치즘의 태동이 민족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파시즘에 있었다고 보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더불어 초국가주의 유럽 통합의 실현을 통해 독일의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당시 서독에서는 총리 아데나워를 중심으로 한 기민당(기독민주당)이 집권하면서 이른바 '서방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서방 정책은 동독을 국가로 보지 않고 동독과 국교를 맺은 나라와도 통교하지 않는 철저한 봉쇄정책이었다. 빌리 브란트는 서유럽에 국한된 유럽 통합이 목표인 아데나워의 외교정책이 분단을 고착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럽 통합의 범위를 더욱 확장해 서유럽뿐만 아니라 동유럽까지 아우르는 하나의 유럽을 목표로 할 때, 분단된 독일도 통일될 수 있다고 보았다. 빌리 브란트는 그 첫 번째 걸음이 반목이나 적대가 아니라 먼저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동방 정책: 빌리 브란트는 1969년 10월 서독 연방 총리에 취임했다. 총리가 되기까지는 몇 차례의 좌절과 정적들의 인신공격 등이 있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고 세 번의 도전 끝에 기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총리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는 정치 인생을 살아오면서 생각해왔던 외교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빌리 브란트가 시작한 동유럽을 향한 화해의 외교정책을 '동방 정책'이라고 부른다. 빌리 브란트는 아데나워 총리 시기의 외교 원칙이던 '할슈타인 원칙(소련 이외의 동독 승인국과는 외교 관계를 가지지 않겠다는 원칙)'을 정식으로 포기하고 동유럽 여러 나라에 대한 접근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70년 8월에 체결된 서독-소련 조약에서 빌리 브란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동독의 국경선을 인정하는 것으로 대(對)동유럽 화해 정책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간섭하에 들어간 동독은 그 영토가 전보다 축소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국경선 인정은 서독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의 정책에 의구심을 갖고 불안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서방, 특히 미국은 빌리 브란트의 이러한 동방 정책에 표 나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는 역사적으로 독일과 국경 분쟁이 가장 많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국가인 폴란드를 방문했다. 당시 폴란드는 공산국가였기에 서독 총리의 방문은 그다지 환영거리가 아니었고, 심지어 전쟁 가해국의 총리였기 때문에 빌리 브란트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싸늘하기만 했다. 서방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적대적이며 이념적으로 다른 동유럽을 배제하고 서유럽끼리 잘 살아보자는 분위기가 무르익는 마당에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다소 어긋나 보이고 위험하며 뒤에 다른 계획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자 세계인들의 그런 의구심은 불식되었다. 빌리 브란트 자신은 나치 집권 시기 동안 망명 저항가였기에 나치가 행한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독일 국민을 대표하여 희생자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 나라의 총리로서는 매우 과감하고 파격적인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한 개인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사죄였고 이는 세계를 감동시켰다.

이후 동유럽도 서유럽도 빌리 브란트의 화해 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1972년 6월, 미국ㆍ소련ㆍ영국ㆍ프랑스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네 나라에 의해 베를린 협정이 체결되면서 동서 진영의 화해 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2월 동독-서독 기본 조약 체결, 1973년 12월의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교 정상화 조약 체결, 그리고 헝가리ㆍ불가리아와의 국교 회복 등을 통해 서독은 동유럽 각국과 통교하게 되었고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1970년 빌리 브란트가 시작한 화해의 정책들은 20여 년간 꾸준히 지속되어 동서 간의 냉기를 녹여갔고, 1990년에 독일이 통일되면서 마침내 그 결실을 맺었다. 빌리 브란트는 그의 동방 정책으로 인해 1971년 10월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치욕도 성공의 밑거름_ 누르하치

"예전에 우리 만주는 한인, 몽골과 나라도 다르고 풍속도 달랐다. 이제 한 성에서 같이 살아가니 같은 집이나 다름없다. 화합을 위하여 각각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한다."

17세기 새로운 중국의 역사를 연 청나라를 세운 것은 그때까지 중국 한족(漢族)으로부터 오랑캐라고 경시되던 변방의 여진족이었다. 오랜 세월 중국의 분열 정책 때문에 하나로 단결되지 못한 채 하등 민족으로 취급 받던 여진족은 16세기 말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으로 장차 만주와 중국 본토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자신들을 지배하던 중국의 한족을 극복하고 중국 본토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 국가로 300년간 존재했던 여진족의 나라, 청의 기틀을 닦은 이는 누르하치(努爾哈赤, Nurhachi, 1559~1626)다.

누르하치는 치욕의 순간을 미래를 위한 밑거름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중국 본토 공략은 이전의 다른 중국 변방 민족들과는 다르게 주도면밀하고 끈질겼다. 그의 주도면밀함은 후손들에게도 이어졌다. 근 6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갔기에 이후 청나라는 이민족 통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타격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강하고 안정된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때를 기다리며 칼을 갈다: 명나라 시절 여진족은 거주 지역에 따라 크게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여진으로 구분되었다. 건주여진은 랴오둥(遼東)에 가까운 조선의 압록강 너머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 지역, 즉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지역에 살고 있었고 일찍부터 농경에 종사했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출신이다. 건주여진은 다섯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누르하치의 부족은 건주여진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약한 부족이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교창가(覺昌安)와 아버지 타쿠시(塔克世)는 명나라의 장수인 이성량(李成梁)에게 충성을 바쳐 부족의 명맥을 이어갔다. 이성량은 그 조상이 조선인으로 랴오둥 총병 자리에 있으면서 사실상 명나라를 대표하여 여진족들에게 경제적,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거대한 명나라 군사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성량의 명령으로 같은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 명나라로부터 관직을 받기도 하였다.

누르하치의 집안과 친인척이던 왕고가 이성량에게 항거하다가 죽임을 당한 후, 1582년 그 아들인 아타이가 다시 군사를 일으키자 이성량은 아타이가 주둔하던 고륵채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때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명나라 측에 서서 아타이를 설득하기 위해 고륵채에 들어갔다가 뒤이어 따라 들어온 명나라 군대가 앞뒤 가리지 않고 학살을 감행하는 와중에 살해되고 말았다.

당시 이성량의 집에 볼모로 잡혀 있던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하고서도 제대로 된 항의 한 번 하지 못했다. 20대였던 그에게는 아직 명나라에 맞설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원한을 품고서 언젠가 힘을 키워 복수할 날만을 기다렸다. 누르하치는 훗날 명나라에 선전포고하면서 일곱 가지 큰 원한(七大恨)을 공표하였는데, 그 가운데 명나라 군사에 의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살을 가장 큰 원한으로 삼았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 교창가가 지어준 이름이다. 멧돼지 가죽만큼 질기고, 그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잘 이겨내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누르하치는 그 이름처럼 오랫동안 질기게 한을 숨기고 온갖 뜨겁고 차가운 고난을 이겨내면서 명나라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노리며 칼을 갈았다.

여진족 전체를 통합하고 후금을 세우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누르하치에게 이성량은 배상금과 아버지 타쿠시가 받았던 명나라 관직 '도독'의 직함을 주었다. 누르하치는 조부의 피 값으로 받은 지위와 자산을 바탕으로 하여 군대를 일으켰다. 그는 먼저 상대하기 버거운 명나라보다 주변 부족을 통합하는 데 힘썼다. 1589년, 누르하치는 마침내 건주여진 부족 전체를 통일하였고 랴오둥 변방의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누르하치의 성장에 놀란 이성량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명나라 정부에 건의하여 용호 장군이라는 직함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에게 높은 관직을 내림으로써 명나라에 순응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당근과 같은 임시방편이었다.

그 즈음 누르하치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가 다가왔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에 원병을 보내느라 다급해진 명나라 정부는 이 시기 여진족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명나라의 여진족 분열 정책이 느슨해진 틈을 타 누르하치는 주변의 여진족들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1616년 때가 왔다고 판단한 누르하치는 마침내 나라를 개창하였다. 스스로 칸(汗, Khan)의 지위에 올라 금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대금이라는 국호를 지었다(12세기 해서여진의 아구다가 세운 금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금이라고 부른다). 여진의 이름도 만주(滿州)라고 개칭하고, 만주 문자를 만들어 팔기군 제도를 제정하였으며, 도성을 허투알라(赫圖阿拉, 혁도아랍)로 옮겼다.

팔기군 제도는 군대를 여덟 가지 색으로 구분한 것인데, 평상시에는 조세, 행정 등의 업무를 관장하다가 전시에는 군대로 편성되는 유목민 특유의 조직이었다. 모든 백성이 병사가 되는, 일상생활과 전투를 동시에 진행할 능력을 기르는 팔기제의 효용은 컸다. 이 팔기군은 중국 본토를 차지할 때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하였으며, 훗날 중국 본토 입성 이후에도 청나라 통치 제도의 중심이 되었다.

명나라와의 일대 결전: 1618년, 마침내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누르하치는 여진족 중 최대 강적이었던 예허여진과 맞서고 있었다. 명나라는 누르하치를 견제하게 위해 예허 부족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르하치로서는 명나라와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누르하치는 7대한(七大恨)을 하늘에 고하고 공개적으로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중요 내용은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의 살해와, 명나라가 예허여진을 일부러 키워 후금을 견제하는 사실에 대한 분노였다.

1618년 4월 13일에 누르하치는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명나라의 변경지에 있는 푸순을 급습하였다. 당시 푸순의 성주는 이영방이었는데 그는 누르하치가 이성량의 볼모로 있던 시절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이어 누르하치는 칭허를 공략하여 승리하였고, 1621년에는 랴오둥을 공략하여 랴오허 강 동쪽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는 이미 여진족 중에서도 가장 약한 부족의 힘없는 추장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그 옛날의 누르하치가 아니었다. 그는 대국 명나라를 침공해 들어가 중국 본토를 차지할 것을 계획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누르하치는 자신이 계획하고 시작한 중국 본토를 향한 대업을 완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기반 위에서 그 아들과 손자가 누르하치의 뜻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644년 베이징에 여진족, 즉 만주족의 나라 청나라가 세워졌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순간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뒤를 분별하지 못하는 분노로 큰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보았고 냉혹할 만큼 침착하게 치욕을 감내했다. 그렇다고 그가 이 치욕을 그냥 세월에 흘러내려 보낸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마음 한쪽에 칼을 품고 치욕을 되갚을 날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자손들에게도 내려줘 끝내는 받은 치욕을 백 배, 천 배로 되갚아준 '중원 정복'이라는 위업을 이루어냈다.

때로 국가 간에 일어나는 분쟁에서 순간의 어긋남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짓기도 한다. 사리 판단이 현명한 리더라면 순간의 치욕을 참아내지 못하기보다는 먼 훗날을 위해 하나하나 디딤돌을 놓는 슬기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그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개인들의 삶을 어떻게 이끌고 성장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관건이다.



준비된 시대에 준비된 통치자_ 건륭제

"짐은 엄격함과 온유함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세심하게 행동함으로써, 태평하고 정직한 정부를 이룩할 것이다."

만주족은 소수 민족이지만,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막강한 군사력을 통해 250년 동안 거대한 중국의 통치 민족으로 군림하며 중국 본토를 다스렸다. 17세기 중반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가 제위에 오르면서 시작된 중국 청나라의 전성기는 그 아들 옹정제(雍正帝)를 거쳐 18세기인 손자 건륭제(乾隆帝, 1711~1799) 대에 이르면서 최고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청나라 제6대 황제인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의 뜻을 이어 청나라를 60여 년간 이끌면서 모든 영화와 영광을 누렸다. 이 시기를 흔히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 청나라는 한족(漢族)과 비(非)한족, 북방 이민족 왕조를 망라하여 중국 역사상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했고, 안으로는 최고의 경제적ㆍ문화적 번영을 가져왔다. 서양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이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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