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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자식들

이형석 외 지음 | 북오션
독재자의 자식들

이형석 외 지음

북오션 / 2012년 12월 / 284쪽 / 15,000원





1장 비극과 도피의 여정



'아버지'라는 트라우마 - 비극으로 점철된 스탈린 자식들의 삶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은 20세기 역사상 악당 1위 자리를 놓고 아돌프 히틀러와 순위 다툼을 한 사람이었다. 우파에게는 악마였으며, 좌파에게는 비판하고 극복해야 하는 걸림돌이었다. 사망한 지 6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도 그의 이름은 여전히 어둡고 무거운 그림자다. 스탈린은 1953년 사망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편집증적으로 권력에 집착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의 통제 아래 두려 했던 일벌레였던 만큼 그의 주변 인물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레닌이 그에게 물려준 사회주의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정적들을 숙청하는 일을 소명의식에 따라 거행하였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개인사에서도 독선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휘두른 거대한 권력에 의해 고통을 받았고,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의 독선에 일그러진 삶을 살아야 했다. 첫 번째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떴으며, 두 번째 부인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두 아들과 그가 사랑했던 막내딸의 인생도 순탄치 못했다. 첫째 아들 야코프는 1907년 3월 태어났다. 야코프의 어머니는 그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야코프는 14세까지 아버지의 고향인 그루지야에서 친척들 손에 의해 성장했다. 일벌레였던 스탈린은 아들에게 애정을 쏟지 않았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 탱크부대에 소속된 초급장교였던 야코프는 전쟁 초기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전쟁 발발 직후 스탈린의 첫 번째 포고가 '항복은 반역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으니 야코프는 조국 소련에 반역자가 된 것이다. 스탈린은 포로가 된 야코프의 구출 작전을 지시하기는 했지만 아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초지일관 냉정했다. 독일 측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후 항복한 독일의 4성 장군 파울루스와 교환을 제안했을 때 스탈린이 '육군 원수와 일개 병사를 교환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에 의해 반역자가 되었고, 적의 수중에서 아버지가 저지른 대량 학살(소련군이 폴란드 군인과 지식인 2만 명을 학살한 카틴 학살)을 확인했던 야코프는 커다란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여기에 '스탈린을 위해 피를 흘리지 마라. 그의 아들도 항복했다.'라는 나치 독일의 선전 문구는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결국 야코프는 1943년 4월 15일 경비병의 경고를 무시한 채 수용소의 전기 철책으로 접근했다가 그 자리에서 사살된다. 야코프는 다른 독재자의 자식들처럼 아버지의 권력을 향유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그 권력 때문에 괴로워하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혁명가 스탈린에 의해 방치되었고, 권위적인 아버지에 의해 훈육되었고, 절대 권력자 아버지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그는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스탈린의 외동딸 스베틀라나는 1926년 2월 태어났다. 세 개의 다른 이름은 그녀의 일생을 응축해 보여준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후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어머니의 이름을 따른다. 스베틀라나 알리우예바, 그리고 미국인 남편의 이름을 따라 라나 피터스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리고 2011년 이 이름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의 자식이었다. 스탈린은 유일한 딸인 그녀에게 온갖 애정을 쏟았고, 자신의 딸을 '작은 참새'라고 불렀다. 소련에서 그녀의 인기는 미국 유명 배우 이상이었고, 스베틀라나라는 이름을 딴 향수까지 만들어질 정도였다. 어린 소녀는 고통스러운 일상의 삶에서 보호되었으며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권력자의 의심과 변덕으로부터도 안전했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6살 때인 1932년 11월 사망했다. 증언에 따르면 부인을 대하는 스탈린의 태도는 매우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다고 한다. 자살이 아니라 스탈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스탈린은 딸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숨겼다. 단순 복막염으로 사망했다고 말한 것이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아버지와 잦은 마찰을 보이면서도 아버지를 부정하는 결정적인 선을 넘지 않았던 그녀는 우연히 어머니의 자살을 보도한 런던발 해외뉴스를 보고 충격에 빠진다. 복막염으로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가 실은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아버지에게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거대한 권력을 가진 아버지, 그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 어머니의 충격적 자살, 그것을 숨기려 했던 아버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소녀가 아버지에게 저항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연애사건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고 난 후 그녀는 22년이나 연상인 유대인 영화감독과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은 노발대발한 스탈린에 의해 영화감독의 체포와 투옥으로 귀결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모스크바 대학의 동료 학생과의 결혼을 선언했다. 스탈린은 마지못해 용인했지만 이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9년 스탈린은 자신의 측근의 아들이자 촉망받는 관료인 유리 즈다노프를 그녀와 결혼시켰으나 이 또한 파경에 이른다. 그녀는 두 번의 결혼에서 두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후에 서방으로 망명할 때 이 두 자녀를 버려두고 떠났다. 어머니로서의 의무보다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그녀는 바로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 성을 따른다. 스탈린의 딸이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이었다. 1967년 그녀는 인도 여행 중에 미국 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서방 세계로 간 그녀는 아버지를 부정하며 두 권의 저서 『한 친구에게 보내는 20통의 편지』와 『바로 그해』를 출간했다. 냉전이라는 조건은 스탈린의 딸이라는 좋은 먹잇감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망명했던 서방 세계에서 소련을 비난하는 선전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녀는 유명세를 타고 돈도 벌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망명이었지만 스탈린의 딸이라는 굴레는 그녀를 더욱 옥죄었다. 평안을 찾지 못한 그녀는 그리스 정교, 가톨릭, 힌두교 등의 종교에 의지하다가 결국 편집증에 시달리게 된다. 또한 그녀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대륙과 대륙을 옮겨 다니며 방랑했다. 미국인 건축가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영국으로 이주하였다가, 1984년에는 서방 생활을 청산하고 소련으로 되돌아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미 서방을 경험한 그녀에게 소련은 견디기 어려웠고 1987년 또다시 미국행을 감행한다. 결국 1990년부터 요양시설에 거주하면서 외롭게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냉전이 끝나자 세상은 더 이상 그녀의 삶을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왕국을 떠나 미국의 확성기가 되다' - 알리나 페르난데즈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는 혁명을 일으키기 전부터 친구의 부인인 나탈리아와 연인관계를 맺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알리나라는 딸을 두었다. 나탈리아의 남편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고 미국으로 망명을 해버렸다. 알리나가 자신의 아버지가 쿠바의 영웅적 지도자임을 알게 된 것은 열 살 무렵이었다. TV에서 매일 보는 혁명군의 우두머리인 카스트로가 가끔씩 밤에 자신의 집을 방문했던 바로 그 군인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의 놀라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쿠바 정권의 권력자라는 사실에 혼란과 자랑스러움이 뒤섞인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간헐적으로 모녀를 보러 왔던 그의 발길이 점차 뜸해졌다. 청소년기에 그녀는 여러 번 아버지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는 결코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녀는 아버지가 완벽한 혁명가가 아님을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다. 정권에 의해 숙청당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편지를 그녀를 통해 카스트로에게 전달하고자 했고, 이들의 고통을 전해 들은 알리나는 아버지의 정권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어린 소녀는 자신이 보낸 숱한 편지에 답변이 없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주변 쿠바인들의 고통이 함께 뒤섞여 아버지를 증오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카스트로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므로 좋은 지도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방황을 거듭하던 그녀는 1993년 가발을 착용한 채 위조여권을 들고 스페인을 거쳐 미국 마이애미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아버지를 비판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현재까지 반카스트로 운동의 활동가로 활약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아버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쿠바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무관심에 상처받아 떠난 딸이기보다는 독재정권의 억압을 견디지 못한 쿠바인으로서 조국을 떠난 것이라고 말한다. 카스트로의 억압으로 인해 지금까지 300만의 쿠바인이 조국을 떠났음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에 반카스트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고, 이는 쿠바에서 독재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알리나의 삶에서 카스트로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 그녀의 유년기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고, 자신의 아버지가 조국의 최고 권력자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자신을 방치한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녀는 아버지 혹은 독재자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미국에서도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 혹은 독재자의 폭압에 맞서 싸우는 데 그녀의 모든 인생을 걸었다. 그녀의 전기는 『카스트로의 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영화로도 개봉 예정이다. 그녀는 현재 미국 전역을 도는 강연을 통해 1970년~1980년대 쿠바 상황을 알리고 있다. 그녀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미국의 대쿠바 선전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러한 비판이 실제 사료와 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근거로 독재자를 객관적으로 비판하고 쿠바의 진정한 변화와 해결을 추구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카스트로는 좋은 아버지도 자상한 남편도 아니었다. 그는 세 번의 결혼과 수차례의 혼외정사를 통해 낳은 8명의 자녀와 8명의 손자가 있다.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은 정치와 가정의 문제를 뒤섞는 것을 반대하고, 정치를 행할 때 가정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정으로부터의 자유를 바탕으로 혁명의 완수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피델 카스트로, 그 이면에는 자유로운 아버지와 남편에게 상처받은 수십 명의 가족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아버지의 무관심을 견디지 못한 딸 알리나는 결국 가정과 정치의 문제를 한꺼번에 엮어, 그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가장 혹독한 비판자로 남아 그의 곁을 맴돌 것이다



2장 부패와 폭력의 승계자들



괴물이 낳은 괴물 -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

이라크의 잔학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는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충성 경쟁을 하면서 길지 않은 생을 피와 살육의 축제로 보냈다. 두 살 차이인 형제는 외양과 성격은 달랐지만 피와 섹스에 굶주린 괴물의 몸뚱이를 공유한 샴쌍둥이였다. 1968년 이라크 대통령궁으로 진격한 바트당 혁명군을 이끌었던 사담 후세인은 1970년대 초반부터 사실상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후세인은 군사 및 경찰 비밀 조직을 창설하여 시아파 교도와 쿠르드족 등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억압과 숙청을 계속했다. 사담 후세인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고문실을 자주 방문했다. 정적에 대한 테러와 린치, 암살이 일상적이었던 이라크에서 후세인은 살육과 전쟁의 이미지를 어린 자식들의 눈에 노출시키는 데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두 형제는 총검과 탄약을 장난감 삼았고, 고문과 살인을 놀이로 즐기며 괴물로 커 갔다. 아버지는 고문의 신봉자였고, 죄수의 신체를 학대하다 죽인 후 시신을 유족들에게 보내곤 했다. 후세인 정권 붕괴 후 공개된 우다이의 개인 고문실에는 '아이언 메이든(안에 못과 송곳이 박힌 여성 모형의 형틀)'이나 못이 박히고 철공이 매달린 채찍 등이 발견되었다. 우다이는 이라크 올림픽조직위원장이자 축구협회장으로서 중요 대회에서 골을 못 넣은 축구선수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올림픽 출전자들을 그곳에서 고문했다. 고문을 애용한다는 점에서는 부자가 똑같았지만, 아버지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아들은 취미로 즐겼다는 점에서 달랐다.

2미터 가까운 장신이었던 우다이는 앞니가 돌출되어 있었고, 총기 습격 사건으로 부상과 장애를 갖고 있었다. 다섯 명의 여자와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었다.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던 우다이는 고가의 명품 의상으로 치장하고 유럽산 최고급 스포츠카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남성으로서의 콤플렉스는 섹스 중독과 변태적인 성욕을 낳았다. 불임은 동생에 대한 열등감을 부채질했다. 반면 동생 쿠사이는 사담 후세인을 꼭 빼닮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보여 주었고, 결정적으로 네 명의 자식이 있었다. 동생에 대한 성적 열등감은 기이한 행태로 나타났다. 쿠사이가 관계를 맺었던 여성과 동침하는가 하면, 그중 일부의 몸엔 말편자로 자신의 이니셜인 U자 모양의 낙인을 찍기도 했다.

우다이는 앞뒤 가리지 않고 폭행과 살인, 강간을 공공연히 일삼는 망나니였다. 반면 쿠사이는 용의주도하게 악행을 행하는 유형이었다. 우다이는 즉흥적이고 가학적인 살인을 즐겼으나, 쿠사이는 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하지만 두 형제는 똑같은 악마였다. 공공연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쿠사이 역시 여자를 좋아했고, 형 버금가는 사치를 누렸으며, 사람을 밥 먹듯이 죽였다. 쿠사이는 걸프전 직후 시아파에 대한 대규모 처형과 숙청 작업을 이끈 것을 비롯해 이라크에서 자행된 수많은 암살과 학살의 원흉으로 꼽힌다. 그는 사실상 사담 후세인의 후계자로서 1990년을 전후로 주요 군사 및 치안 조직을 장악했다. 이에 비해 우다이가 맡은 체육 단체 조직과 언론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우다이와 쿠사이는 권력을 서로 다투었고, 후세인은 이슬람의 전통을 거스르고 차남을 후계자로 선택하려 했다. 후세인과 쿠사이는 국제사회에서 이라크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인 장남을 제거할 의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동을 후세인의 천하로 만든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존재는 사실 미국이다. 1970년대 말 이란혁명으로 친미정권이 붕괴되자 미국은 중동에서의 영향력 감퇴를 우려하여 후세인을 후원하게 된다. 1984년 미국과 이라크는 국교를 회복하고 대규모 무기 지원을 실시했다. 미국은 후세인에 의해 자행된 공공연한 민간인 학살도 묵인했다. 하지만 1991년 걸프전을 계기로 미국과 이라크는 다시 적으로 대치하게 된다.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과 잇따른 걸프전을 치르는 동안 이라크 내에선 시아파 및 쿠르드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 및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져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후세인 일가가 섹스 파티와 고문 놀이, 살육의 축제, 전쟁 놀이를 즐기는 동안 이라크 민중은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냉전 해체로 주적을 잃어버린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는 후세인 정권을 악마의 이미지로 그리기 시작했다. 2002년 9월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라크가 핵미사일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나서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1년 후인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었다. 서로에 대한 애증 속에 평생 악행을 일삼아온 우다이와 쿠사이는 샴쌍둥이처럼 한날한시, 한 장소에서 죽었다. 2003년 7월 22일 이라크 북부 모슬의 한 호화 빌라에 피신 중 미국의 대규모 공습으로 사살된 것이다.

철권통치가 만든 독재와 부패의 결정판 - 수하르토의 아들 토미

1968년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당선된 수하르토는 이후 32년에 걸친 철권통치를 통해 악명을 떨치게 된다. 수하르토는 철권통치를 위해 반공을 핵심으로 하는 신질서를 내세웠는데, 냉전 시대 반공주의는 미국 등 서방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고리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하르토는 산업화를 추구할 수 있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수하르토는 개인 축재를 통해 직계가족과 친척들과 함께 거대한 사업 왕국을 세우게 된다. 수하르토 가족의 재산은 16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에도 그의 가문은 금융, 숙박, 교통, 미디어 관련 수백 개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경제성장 과정에서 이익을 얻는 자가 있다면 고통을 당하는 자도 있는 법이다. 자신의 철권통치에 대한 반대자들이 생겨나자 수하르토는 100만 명에 달하는 공산주의자를 학살하는 등 반대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는 무력화되었고, 사회 전체가 수하르토가 이끄는 골카르당과 군대를 중심으로 관료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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