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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

김유진 지음 | 생각나눔
서정

김유진 지음

생각나눔 / 2012년 6월 / 144쪽 / 10,000원





1장 서정





달맞이꽃




무심코 지나쳤다

꽃도 없고 줄기만 무성

강변에 자라는 잡초라 하여

그래서 거들떠보지 않았다



냇가에 어둠이 내리면

오늘은 달님이 찾아오려는지

잎술에 숨겼던 얼굴 내밀고

연노랑 보조개 입가에 띄운다



뚝방에 선 여린 달바라기

수면에 뜬 달빛은 흔들리고

지나던 바람도 슬렁 찾아와

노랑 잎술 하나 둘 살랑 어루네



달빛 내리는 고요한 밤

연노랑 군무는 바람에 흔들리고



구름 위 달은 물 따라 흐르네

먼 길 오시는 님 맞아 밤에 꽃 피누나





어떤 사진가




숨조차 멈춘 뒷골목

가녀린 한줄기 빛이

광고창에 길게 뿌리면

렌즈경통 꽉 잡은 손에

어깨 그림자 검게 드리운다



기다란 얼굴에 눈빛만 번득

빛바랜 가방 속 렌즈 몇 개

헤집고 다닌 시공간 속에

주름진 얼굴에 고뇌만 가득

生의 의미가 사진이고 길이었다



노백발은 필름에 젓고

테안의 老眼은 암실에 가두고

모든 의미는 빛종이에 그려

자연의 섭리를 노래하며

빛을 사랑하였던 사람



그의 가슴에는 흑백만 가득

인화지에 이야기를 옮기고

앵글 속에 세상의 詩를 품어

자연을 신의 섭리라 하였거늘

그는 나의 흑백이고 그림이었다





정동진에서




정동진 바다에 가면

말없이 서 있는 나무 하나

새벽 파도소리 잠 깨우면

海霧는 잎새를 살랑 어룬다



늦어 쉬어가는 완행열차

목멘 기적소리 모래에 묻고

기차는 바다에 잠시 머물다

다음 약속을 싣고 떠나간다



한줌 바람이 가고 오면

파도는 잠시 숨을 멈춘다

쪽빛 하늘바다 정동진

나는 님의 바다에 빠진다



보고파 다시 찾아온 여기

하얗게 부서진 파도 위에

님 기다리는 굽은 소나무

여기에 정동진이 서 있다





여기에 나는




어제와 같은 자리

늘 멍한 생각으로

저녁놀 보고 있다



처절히 숨 내뿜고

온통 붉은 하늘엔

구름마저 붉게 숨 쉰다



심장 소리 거칠 때

저 노을은 나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다



오늘이 가면 또 내일

오고 가는 시간 속에

시린 가슴 떨쳐다오



저녁놀은 아름답게

서편으로 넘어지고

철새도 집을 찾는다



여기서 바라본다

넘어지는 노을 속

타는 마음 모두 가져가라





여량역




두메산골 굽이굽이

골 깊은 산자락 여량

돌고 돌아가는 철길에

힘겨워 쉬어가는 기차



장날 객차에 몸 실은 아낙네

나물 광주리에 봄빛만 가득

알록달록 저고리에 꽃 피면

나비 날갯짓 창밖은 춤춘다



철로에 늘어선 할배 소나무

오가는 세상이야기 듣고파

굽은 허리 눕히고 귀 기울이면

아낙네 속삭임에 마음 설레인다



꽃피는 봄이 와도

눈 내리고 옷깃 여미는

여량은 계절에 뒤척인다



모두 떠난 시골역사에

지쳐 잠든 기차만이

고른 숨소리에 적막을 깨운다





겨울 나무




빈 들녘 홀로 선 나무

세찬 바람 가슴에 받고

시린 몸 땅에 기대어

긴 겨울을 떠간다



다시 올 봄 생각에

홑가지 겉옷 여미고

가슴 하나 허공에 매단 채

떨리는 몸 곧추세운다



푸르름 가득한 숲 그늘

향기로운 님의 노래가

지난 시간의 단상들이

하나 둘 이슬 되어 맺힌다



가는 세월 어찌 못하고

오는 시간 의미 없지만

빈 가지 허한 마음 하나

걸쳐 놓은 곳 하나 없다



다시 올 봄오름 너머

새움 틀 싹 하나 있어

빈 숨 가득 폐부에 넣고

이제 어미 땅에 몸 내린다





함박눈




잿빛 하늘 구름 가득

알싸한 공간 가르고

하나 둘 내려앉는

하늘나라 하얀 꽃

함박눈이 옵니다



세상을 온통 하얗게

뿌려 내리고 쌓여

창밖 세상은 순백색

빈 가지 눈꽃 피우며

함박눈이 계속 옵니다



창 넘어 골목 모퉁이

눈사람 만드는 아이들

웃음소리 활기찬 날

사람들 얼굴에 포근함이

지금도 함박눈이 옵니다



마음에 쓴 하얀 이야기

눈꽃송이에 띄워 보내

아름다운 님의 가슴에

흰 꽃 되어 쌓여 질거나

아직도 함박눈이 계속 옵니다





2장 사랑





그대 진정




아침에 눈 뜨면

맑은 얼굴 하나

내 앞에 닿는다

그대 진정 누구신가



잠들지 못한 나날

이제 오지 않음은

내 앞에 오신 님

그대 진정 누구신가



지금의 평화로움

그대로 허락하심을

간절 간구하는 마음

그대 진정 누구신가



산더미 같은 사랑

내게 모두 담다주는

정겹고 따사로운 이

그대 진정 누구신가

넉넉한 마음 안에

곱게 펼치는 봄 노래

숲 속 산새도 들어주네

그대 진정 누구신가





세월에게




이렇게 빨리 가는 너였다면

예전에 더 아끼고 담아 두었을 것을

흰머리가 듬성듬성 보일 때 알았다



어머니께서 지금 함께 하신다면

이제 그때의 부모님 마음을 안다고

주름 가득한 손을 가슴에 어루만지고



너희와 처음으로 만난 영월에는

아직 맑고 깨끗한 강이 흐르고

봄이면 종달새 노래가 가득 찬다



돌아가고자 하면 갈 수 없지만

그 예전의 흔적만 여기저기에

흐르는 시간은 저 강물 같아서

기다림을 못하고 마냥 달렸다





내 마음의 여울




고운 빛 물든 언덕

곱디고운 소리 한자락

강여울 따라 춤추며 오네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

분홍 꽃 향 날리우면

어느새 다가온 사랑님



빈 바다 갈매기 은빛 나래

파도 닿은 그곳에 실어

살 되어 뿌려 봅니다



달맞이 언덕 가지마다

마음의 향기 가득 피는 날

내 사랑 되어 날아가렵니다

겨울에 찾아오는 그림



함박눈 덮은 지붕

추녀 끝에 매달린

크고 작은 수정과자

내 어린 시절 그림이어라



잎 내린 나뭇가지

하늘 솜꽃 몸에 두르고

어여쁜 미소 눈빛 한자락

아름다운 시절 그림이어라



겨울 시냇가

썰매판에 핀 무늬 꽃

피카소가 여기 있었네

정겨운 내 어린 시절 그림이어라



골바람 스미는 아침

냇가에 애기 버들

머리에 고깔 흰나래

내 어린 시절 그림이어라



세월 가고 빛깔도 여려

모습은 예전과 다르지만

하얀 계절 오는 이맘때면

늘 보고 싶은 그림이어라





책갈피 속에 피는




책갈피 속

빛바랜 종이에 몇 글자

눈길 건네고 손길 닿으면

어느새 그리움 되어 온 너



가슴 속에 잠든 글

이제는 열지 않으리

다시는 보지 않으리

다짐한 것이 까마득



밤이 하얗도록

쓰고 또 써 내려간

마음의 글 가슴의 빛깔

책장 속에 가득 남아서



먼 기다림 뒤편으로

아련히 다가온 속삭임

님의 손길에 눈길 내리고

애써 미소로 얼굴화장 하는 나



다시는

정녕 다시는

열지 않으리라

쇠 빗장 굳게 걸어도

어느새 다가온 너



그리움 가득

추억만이 새롭다

한 조각 사랑의 시

아직 책갈피 속에 피어 있네





사모




하얀 눈 오는 밤

그리운 이 생각에

잠 못 이룬 시간

그 모습 고이 새겨보네



빈 가지에 핀 꽃송이

하얀 님의 얼굴 포개면

또다시 가슴에 스미는 그리움

마당에 등불은 아는지 모르는지



비록 멀리 있다 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가깝게 있다오

고운 모습 가슴에 새겨

이 밤 내리는 눈 위에

그 고운 모습 그려 보네요

당신을 사모한다 말하여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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