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산책
쑨톄 지음 | 일빛
세계사 산책
쑨톄 지음
일빛 / 2012년 07월 / 680쪽 / 27,000원
중세 : 유럽과 아시아
무함마드, 이슬람교를 창시하다이슬람교는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생겨났다. 창시자는 무함마드인데, 창시 후 동서양 모두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해방을 갈망한 아랍인: 아라비아반도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이 만나는 곳에 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의 피부색은 세 인종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또 아라비아반도의 자연 조건은 거의 사막 초원으로 덮여 있어서 농사보다는 유목에 더 적합했다. 따라서 농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이런 독특한 자연환경으로 경제적 발달을 할 수 있었지만, 세계 각지에서 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그 지위는 쇠락하게 된다.
5~6세기, 세계적으로 문명이 발달했을 때도 이 지역만은 여전히 원시의 낙후된 수준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목장과 초원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홍해와 인접한 히자즈 지역의 상황은 비교적 특수했다. 비록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의 땅이기는 하지만 남쪽의 유라시아를 잇는 상업로가 있다는 점이 큰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동양의 상품이 인도양에서 예맨으로 운반되었다가, 다시 아랍 상인들에 의하여 낙타에 실려 히자즈 지역을 거쳐 지중해로 옮겨졌고, 여기에서 다시 유럽 각지로 운반되었다. 히자즈는 이런 우수한 교통 조건 덕분에 경제적으로 활발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메카와 메디나가 가장 번성했다.
메카는 전체 아랍 지역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장거리를 이동하는 상인들이 반드시 쉬어가는 곳이었다. 이곳에 맑은 오아시스가 있었는데, 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랍인들은 축복받은 땅으로 여겼다. 또한 여기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거대한 검은 운석이 있었다. 아랍인들은 이 운석을 신성한 돌로 여겨 사원을 지었는데, 바로 카바 신전이다. 먼 곳에서 사는 아랍인들까지 이 사원에 참배하기 위하여 메카를 찾았고, 그럴 때마다 물건을 가져와 물물교환을 했던 탓에 시간이 지나면서 메카에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었다.
6세기에는 페르시아와 에티오피아가 예맨을 점령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여 히자즈를 지나는 상업로가 끊어지는 바람에 메카가 곤경에 처하게 된다. 572년, 페르시아인들이 예맨을 점령한 후, 상업로를 복구하는 대신 예맨으로 운반되던 상품들을 페르시아 만을 거쳐,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 보냈다가 다시 지중해로 운반되도록 했다. 상업로가 끊어지자 수입원도 막히는 바람에 메카인들의 수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생계가 막막해지자 아랍의 각 부락들 간에 서로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히자즈 지역 사람들 모두 고통에 시달렸지만 누구 하나 그들에게 돌파구를 마련해 주지 못하였다. 이런 절망의 늪 속에서 그들은 모든 희망을 신에게 걸었고, 신이 자신들을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슬람교가 탄생하게 된다.
알라의 사자: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과거 강성했던 쿠라이시족의 명망 높은 가문인 하심 가문 출신으로 무함마드도 귀족 방계의 후예였다. 무함마드가 출생하기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도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자 무함마드는 할아버지(카바 신전 관리인)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그리고 여덟 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되어 숙부와 함께 살게 된다.
무함마드는 힘든 유년기를 보낸다. 어려서부터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글도 거의 배우지 못한 채 양치기 생활을 했지만 성실하고 용모가 준수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그는 상인인 숙부를 따라 아랍인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이해하게 된다. 무함마드는 또 기독교와 유대교의 교리를 공부하고 여러 가지 신화와 전설을 연구하는 한편, 아랍인들의 풍속과 민심을 이해한다. 이 밖에도 천문과 기상을 관측하고 의술도 배웠는데, 이 모든 것들이 훗날 그가 이슬람교를 창시하는 데 밑바탕이 된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자신의 포부를 달성할 수 있는 돈도, 지위도 없었다. 그러던 중,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메카 거상의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을 하는데, 그 덕분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것은 물론 상류 사회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다.
메카 교외에 히라산이라고 불리는 한적한 작은 산이 있었다. 무함마드는 혼자 그 산에 있는 작은 동굴에서 명상을 즐기곤 했다. 당시 그가 고민한 것은 어떻게 하면 아랍인들 대부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를 창시하여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였다. 그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경전을 참고하여, 아랍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와 아랍의 원시종교 가운데 일부 교리를 한데 아우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너무나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며칠씩 산속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610년 어느 날, 가장 중요한 도리를 깨우친 그는 산을 내려와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이슬람교다.
'이슬람'이란 아랍어로 '순종'을 의미한다.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무함마드는 이슬람교를 창시한 사람이 아니라 부흥시킨 사람이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이슬람교가 선지자인 예수(서기 원년~33년경) 시대 이후에 5백여 년 동안 중단되었다가 무함마드에 이르러 다시 이슬람교로 회복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이 세상에는 알라신밖에 없으며, 알라신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서 알라에게 복종해야만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하였다. 또 알라의 사자를 자처하면서 자신이 알라의 첫 번째 신도이기 때문에 선지자이자, 알라가 자신의 뜻을 인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내려보낸 자라고 하였다. 알라신을 믿는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알라를 믿고 선지자에게 복종하는 자'라는 의미다.
이슬람교의 교리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슬람교도들에게 선을 행할 것, 공평하게 매매할 것, 가난한 자를 구제할 것, 외로운 노인을 돌볼 것 등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 준칙을 제시하고, 절도와 사기 등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 엄격하게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들은 이슬람교의 교리를 법률로 신봉해왔다. 이슬람교의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일부다처제로, 무함마드는 아내인 카디자가 사망한 뒤 여덟 명의 처를 얻었다.
무함마드의 이슬람교 포교활동이 처음부터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처음 3년 동안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고작 30여 명이었고, 메카의 상인과 노예주인 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유일신교인 이슬람교가 귀족계급인 쿠라이시족의 전통적인 다신교와 융화되지 못하였고, 가난한 이들에게 많이 베풀도록 하는 교리가 귀족과 상인들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였기 때문이다. 일부 귀족과 상인들은 무함마드를 살해하려고도 하였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622년 7월 16일 깊은 밤 무함마드는 자신의 신도들을 데리고 메카를 떠나 야스리브로 이주한다. 이슬람교에서는 이것을 헤지라라고 부르며, 이 해를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는다. 야스리브는 메카와 달랐다. 완고한 쿠라이시족 귀족의 통치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고,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였지만 빈민도 많았다. 이곳에서 이슬람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고, 무함마드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규범을 세운다. '이슬람교는 종교적 권위이자 세속의 권위이며, 인간의 일을 관리하는 통일적인 힘은 부족이 아니라 신앙이어야 한다.' 이 규범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얼마 뒤, 메카 귀족들이 무함마드 세력을 토벌하기 위하여 야스리브를 공격하였다. 무함마드는 야스리브의 신도들로 군대를 조직하여 메카 귀족들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인 끝에 메카 귀족 군대를 물리쳤다. 전쟁이 끝난 628년, 무함마드와 메카의 귀족들은 휴전 협정을 맺었고 전쟁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하지만 630년 1월, 무함마드는 메카 사람이 무슬림을 죽인 사건을 빌미로 1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종교의 중심인 메카를 공격한다. 메카에 입성한 무함마드는 카바 신전에 있는 모든 부족신의 신상을 없애고 신전 안에 있는 '메카의 검은 돌'만을 남겨둔 뒤, 무슬림 전체의 경배의 대상인 신성한 돌로 삼는다. 그리고 카바 신전을 이슬람 사원으로 바꾼 뒤 무슬림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순례해야 하는 장소로 삼는다. 그는 또 많은 적들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각 부락을 수복하였으며, 무슬림이 아닌 자들은 성지에서 쫓아내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하였다(죽이거나 추방하진 않았다). 이때부터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교의 통치 지위를 확립한다.
632년,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병사한다. 그는 누구를 칼리프(계승자)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 유언을 남기지 않았고, 어떤 방식으로 칼리프를 추대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당부하지 않았다. 우두머리는 부락 상위 계층의 명망 있는 사람 중에 뽑는 것이 아랍인들의 전통이었지만, 당시 무함마드가 건립한 이슬람 공동체에는 수많은 부락이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어떤 부락에게 우선권을 줄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불거졌다. 이때부터 이슬람교 안에 두 개의 중요한 파벌이 형성되는데, 바로 '수니파'와 '시아파'다.
수니파는 '아플 알 순나와 자마아'의 약칭으로, 아랍어로 '순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이슬람교 가운데 신도가 가장 많은 교파로 전 세계 무슬림의 약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 교파의 신도들은 주로 아랍 국가와 터키, 인도, 말레이시아 등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들은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보지는 않고 다른 종교의 차이점을 인정하면서도 공통점을 아우르고 다른 견해를 융합시키려고 노력한다. 시아파는 이슬람교 중 수니파에 이어 신도가 두 번째로 많은 교파로서, '시아'란 아랍어로 '추종자' 또는 '분파'라는 의미이다. 이 교파에서는 하심 가문 출신의 칼리프인 알리와 그 직계 후예들만을 무함마드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인정하고, 이전의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와 오마르, 우스만은 합법적인 후계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현재 시아파는 주로 이란, 이라크, 인도, 팔레스타인, 예맨, 시리아,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터키, 바레인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 역사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16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슬람교는 이미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이슬람교의 탄생은 아랍 지역을 발전시켰고, 또한 아랍 지역을 통일하고 외부 세력의 침입을 막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슬람교는 신도들에게 '성전' 수행을 요구하는 교리가 있기 때문에 선교가 침략적이고 폭력적인 특징을 가진다. 이슬람교도들은 '성전'의 이름을 빌어, 초승달이 그려진 깃발 아래에서 칼을 휘두르며 맹렬한 기세로 종교를 전파하고 아라비아, 오스만투르크 등 대제국을 세웠다.
페스트의 창궐, 전 유럽을 삼켜버리다페스트는 쥐와 벼룩을 매개체로 하여 전파되고, 또한 전파 속도가 매우 빠른 전염병이다. 중세 유럽은 페스트와의 전쟁, 그리고 굶주림으로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목숨을 잃었다. 이 재앙의 결과로 나타난 사망자와 혼란, 공포 등은 20세기에 일어난 두 차례 세계대전보다 더 심각했다.
재앙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 1300년을 전후로 하여 15세기 중후반까지 유럽 각지에서 재난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 재난은 끔찍하도록 심각하였고 장기간 계속되어 사람들을 절망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 기간에는 유럽의 땅이 황무지로 변하고 기온이 점점 내려가면서 폭우가 자주 내려 농업이 쇠퇴하였는데, 이는 심각한 기근을 불러왔다. '천벌'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이런 재난의 정점에서 바로 페스트가 나타났고, 유럽 전체를 순식간에 삼켜버린다. 페스트가 들쥐에게서 집쥐에게로 전염되고, 집쥐의 몸에 있는 벼룩에게 전염되었다가, 이 벼룩이 사람을 물어 사람에게 전염된 것이다. 페스트는 전염성이 강하고 치사율이 높은 질병이다.
과거에도 페스트가 북아프리카 각지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고 6세기 중엽에도 유럽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후에는 거의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던 1347년, 쥐의 몸에서 기생하는 벼룩의 여시니아 페스티스라는 세균이 지중해의 각 항구를 거쳐 시칠리아 섬에 상륙한다. 그리고 1348년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잉글랜드까지, 1349년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각지까지 퍼졌으며, 1350년에는 발트 해 연안 국가와 북유럽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후로도 페스트는 1361~1363년, 1369~1371년, 1374~1375년, 1380~1390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재발하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 창궐한 페스트는 선페스트와 페페스트로 나뉘었다. 벼룩이 물어서 전염되는 것은 임파선 페스트로 환자의 사타구니나 겨드랑이가 커다랗게 부어올라 이것이 악성궤양으로 변한다. 동시에 환자의 사지에 검은색 반점이 생기고 얼마 뒤 설사가 시작되는데, 설사가 시작되고 3~5일 이내 곧 사망에 이른다. 페페스트는 호흡기를 통하여 전염되는 질병으로 환자가 약 3일 안에 부종이나 각혈 등으로 사망하는데, 사망한 후 피부가 검게 변해서 이 병을 '흑사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전날 밤 건강하게 잠이 들고는 밤새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날이 밝아올 때쯤 영원히 숨이 멎어버리는 사람이 생겨났다. 또 바다 위에서는 선원들이 잇따라 사망해, 배를 조종할 사람마저 남지 않아 배만 덩그러니 망망대해를 떠도는 일도 있었다.
쥐와 시체로 가득 찬 유럽: 14세기에는 흑사병이 유럽 각지를 휩쓸었는데 도시의 사망률이 농촌보다 높았다.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에서는 사망률이 50%를 넘기도 했다. 그에 따라 시체가 쓰레기처럼 수레 위에 쌓여 옮겨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335년에 프랑스 툴루즈의 인구가 3만 명이었지만, 1340년에는 8천 명밖에 남지 않았다. 1347~1357년 사이, 동노르망디의 인구는 10년 전에 비해 30% 줄었고, 1380년에 또 30%가 줄었다. 이탈리아 피스토이아 교외의 농촌 인구는 1340~1380년에 60%나 줄어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14세기 100년 동안 당시 유럽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천5백만 명이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현대과학에 따르면, 중세에는 유럽 사회 전체가 혼란스럽고 사람들의 생활조건이 열악하였기 때문에 도시의 인프라가 낙후되고 생활환경도 무척 지저분했다. 실내 위생과 개인 위생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여 도시 안에서 사람과 가축이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쥐 때문에 재난과 각종 질병이 나타났고, 특히 전염병이 유럽 대륙으로 전파되어 1346~1351년에는 흑사병이 유럽 전체를 휩쓴 것이다.
흑사병이 유럽에서 창궐한 또 다른 이유는 쥐의 천적인 고양이가 중세에 천대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에서는 이유 없이 고양이를 싫어했다. 고양이가 부엉이와 비슷하게 생긴 데다가 밤에 소름 끼치는 소리로 울고 눈에서 섬뜩한 빛이 난다며, 고양이를 마귀의 화신이자 동조자로 낙인찍었다. 이 영향으로 사람들은 고양이가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탓에 고양이는 흑사병을 정복하는 신성한 동물에서 사악함과 불길함을 상징하는 동물로 지위가 추락한다. 사람들은 고양이를 경멸하고, 막무가내로 도살하기에 이른다. 교회의 부추김으로 사람들은 고양이를 마치 철천지원수인 양 생각했고, 이 때문에 중세에 고양이의 개체 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고양이의 재난은 쥐의 범람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4세기 무시무시한 흑사병을 촉발하게 된다.
절망 속의 생활: 이 재앙의 부작용은 엄청난 수의 사망자로 인한 경기 부진에 그치지 않았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대부분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미쳐갔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국가는 산처럼 쌓인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감옥에 수감되었던 죄인들을 석방해야 했다. 유럽의 경제도 파탄 지경에 이르고, 노동력이 감소해 임금은 예전의 두세 배로 급등하였다. 농노들이 노동으로 돈이랑 일용품을 얻고 자급자족의 봉건경제는 점차 자유무역 체제로 전환되었다. 1664년 런던에서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영국 왕실은 런던을 떠나 옥스퍼드로 피난하였고, 부자들도 짐을 꾸려 런던을 떠났다. 법조계 인사들이 모두 교외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이 시기에 런던에서는 단 한 건의 재판도 열리지 않았다. 1만 채가 넘는 집들이 버려지고, 어떤 사람들은 나무판으로 문과 창문을 막고 집 안에서만 생활하였으며, 환자가 있는 방에 붉은 색으로 십자가를 그려놓는 사람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