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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고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 베이직북스
행복의 경고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베이직북스 / 2012년 11월 / 360쪽 / 15,000원





육체의 갈망: 지금 당장, 전부를 원하다

욕망은 삶의 근본적인 힘이다. 우리가 행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욕망에서 비롯된다. 음식, 사랑, 돈, 섹스, 권력 등에 대한 욕망은 물론, 더 높은 수준의 더 관념적인 것에 대한 욕망, 즉 진실, 질서, 신 등에 대한 욕망도 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욕망은 우리가 행하는 행위 자체이자,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며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욕망하기 때문에 존재하며 존재하기 때문에 욕망한다.

왜 우리는 과잉 만족해야 하는가?: 욕망의 종착점은 물론 행복이다. 우리는 단순히 욕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서 행복까지 이르는 연결고리를 추측하도록 굳어져버렸다. 이 연결고리는 서양 문화와 경제에 너무도 깊숙이 자리 잡아, 이제는 명확히 구분해 읽어낼 수조차 없다. 만족은 기쁨과, 기쁨은 행복과, 행복은 거의 모든 것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밖에 또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만약 이 연결고리 중 하나가 잘못된 것이라면?

실제로 '욕망=만족=기쁨=행복'이라고 하는 논리의 연결 마디마디가 명백히 거짓이다. 욕망이 늘 만족되어야 할 필요는 없고, 만족은 종종 우리의 기대보다는 덜 기쁜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 짧다. 또 기쁨을 성취했다 해서 행복이 오지는 않으며, 대부분 기쁨의 순간은 우울함과 우울한 증상에서 벗어난 잠시의 기분전환일 뿐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끔찍한 고통을 더욱 강화시키기도 한다. 소비, 기후 변화, 비만 등과 유행처럼 번지는 우울증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연구결과가 잇따라 나오면서 이 연결고리의 거짓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대중문화에서는 만족에 대한 강박증이 여전하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행복의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바로 행복추구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명백하다. 만약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실은 지구에 대재앙을 촉발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그릇된 욕망인 과잉 만족에 그토록 휘둘리는 것일까?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일상적인 욕망이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일종의 의무라고 강요하는 광고가 넘쳐나는 문화 탓도 있을 것이다. 광고는 연금이나 휴가 등을 구매하라고 다그친다. 당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러한 것들을 구매하는 것은 단지 당신이 원하기 때문은 아닐까?

부적절한 욕망에 휘둘리는 것도 부분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 욕망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람들은 때론 좋은 욕망 혹은 이로운 욕망을 품기도 하지만, 나쁜 욕망 혹은 해로운 욕망에 더 많이 의존하며 더욱 강렬하게 품는다. 욕망을 명백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위반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욕망이 열망으로 격렬해지는 유일한 순간은 마약, 섹스 등과 같은 금지된 쾌락을 열망할 때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존재를 인지하면서도 욕망을 거부해야 하는 그 순간뿐이다.

부분적으로는 과잉 만족 역시 현대의 지배적인 젊은 문화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들보다 더욱 욕망에 시달리고 이끌리기 때문이다. 또 다른 부분을 생각해보면 과잉 만족이 일시적인 억제수단일 수도 있다. 비만인 사람이 음식에서 위안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소비가 함축하는 바가 너무도 끔찍해서 소비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더욱 두렵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욕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욕망의 끝은 삶의 끝처럼 보인다. 욕망이 없다는 것은 잠자리에서 일어날 이유가 없다는 의미이며, 잠자리에 들 이유조차 없다는 의미이다. 한편 역사학자이자 사회 비평가인 크리스토퍼 래쉬는 30년 전 그의 저서 『나르시시즘의 문화』에서 '갈망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의 깊숙한 원천이며 현재를 규정하는 개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욕망의 충족뿐 아니라, 이미 충족된 욕망까지도 유지하려는 우리의 집요한 의지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자기애의 강요가 아닐까? 어느 쪽이건 한 종으로서의 인간은 탐욕스러워지고 있다. 이 탐욕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얼마나' 원하는지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최초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들이 집단 이익을 정하도록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뚤어진 욕망: 욕구를 충족해도 기쁨이나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허황된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베리 슈와르츠는 미국의 '행복 지수'가 약 30년 동안 줄곧 하락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옥스퍼드 대학의 경제 역사학자 아브너 오퍼 역시 영국에서 일어난 동일한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계 2차대전 이후 특히 1970년대 이후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고 있으며 심지어 쇠퇴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는 행복의 역설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 빠진 십대처럼 더 애타게 원하도록 만들 뿐이다. 이러한 일련의 역설들을 가리키는 명칭이 있다. 바로 '낙원 증후군'이다.

영국 소설가 마틴 에이미스의 소설 『밤기차』(1998)는 아름답고 눈부시고 사랑받는 제니퍼 록웰을 통해 낙원 증후군을 그리는데, 주인공 록웰이 완벽한 자신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한다는 내용이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 교수인 대니얼 길버트와 버지니아 대학 심리학 교수인 티모시 윌슨은 이를 '잘못된 욕망'이라고 부른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거짓 이론에 근거한 잘못된 욕망이 발생하는 이유는, 원하는 것을 얻는 데 감정적 반응의 정도와 기간 모두를 잘못 기대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욕구는 특정 기쁨이나 특정 수준의 기쁨에 쉽게 적응하려는 우리의 원초적 습성이나 적응력과 결합해 늘 불만인 상태를 유지하게 만든다. 이는 결국 우리를 끊임없이 욕구와 소유의 바퀴를 맴돌며, 불만과 실망의 연료로 가동하는 '쾌락의 쳇바퀴'(심리학 용어로 개인의 경제적 기대와 욕구는 소득수준에 따라 증가하지만 만족 수준이나 행복의 정도와는 비례하지 않는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다. 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쾌락의 쳇바퀴에서 한 걸음 나아가 '만족의 쳇바퀴'를 생각해냈다. 만족의 쳇바퀴는 특정 기쁨에만 습관화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수준의 기쁨에 습관화되는 것까지 포함된다. 이는 모두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잘못 연결시킨 탓이다.

현대의 쾌락론도 비슷한 개념을 제시한다. 쾌락론은 욕망을 '수단으로서의 욕망'(새로운 BMW 자동차)과 '최종적인 욕망'(새 BMW 자동차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으로 나누는데, 최종적인 욕망은 광범위하고도 무의식적으로 이미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반면, 수단으로서의 욕망은 뇌의 앞쪽에 위치한다. BMW 자동차와 멋진 섬에서 보내는 휴가는 우리를 달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다. 잘못된 욕망은 우리의 의식이 무의식적으로 만족할 것들을 정확히 예측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잘못된 욕망은 희망을 준다. 의식은 학습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원하는 것이 모두 잘못되었다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도록 학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올바른 것을 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더욱 현명하게 원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배울 수 있다는 징후도 배울 수 없다는 징후도 모두 있다. 배울 수 없다는 징후는 우리의 기쁨이 진화론적으로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다는 입장이고, 배울 수 있다는 징후는 진화론적으로 결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녹차나 샐러리처럼 우리 몸에 이롭다고 알려진 것들을 단순히 참고 먹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열망하게까지 우리의 입맛을 '교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릇된 욕망을 품게 만드는 BIS(Biological Incentive System, 생물학적 자극 체계): 우리가 원하는 것 전부가 잘못된 것들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원하는가? 부분적으로는 단순한 모방 때문이다. 모방은 다양한 학습의 기본이자 대부분 쇼핑과 광고의 원천이다. 우리는 대상을 보고 가지고 싶어 하거나 그 대상처럼 되고 싶어 한다. 이처럼 광고는 설득력이 있지만 교묘하게 설득 당하도록 하는 장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윌리엄 어바인은 생물학적 자극 체제 즉, BIS가 성적인 감정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상처를 주어 나쁜 감정을 느끼게도 한다고 전제한다.

어바인에 의하면 BIS에 의한 행동은 의식을 지배하기 위한 개방성 사이에 즉, 본능의 블랙박스보다는 덜 무의식적이고, 의식보다는 의지가 약한 상태 중간에 위치한다. 그런데 우리의 감정은 대부분 이 중간지대에서 작용한다. 즉, 행위들이 완전히 무의식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이성적이지도 않은, 무의식과 의지의 중간 영역에서 우리는 이 행위들을 행할지 무시할지 선택할 수 있다. BIS가 우리에게 이롭게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의 결정에 편견을 심어주는 역할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BIS는 어떤 결과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욕망을 자극하는 데 이용된다.

다시 말하면, BIS는 도덕이 욕망의 체계로 들어가는 지점에 위치한다. 그래서 BIS는 초콜릿 케이크를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 혹은 케이크의 유혹에 넘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면서, 배고픔의 고통, 죄의식, 성적 욕구불만 등의 형벌을 부과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예견된 기쁨 같은 보상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죄의식과 기쁨, 양쪽 모두를 끌어당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명백하게 한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해서 다른 방법은 선택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강요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BIS는 여전히 최종 결정은 의식과 이성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하도록 남겨둔다. 이 중간지대는 욕망의 고향과도 같은 영역이다. 우리는 기쁨을 원하고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한다. 즉, 욕망은 생물학적인 자극 체제를 작동하게 만든다. 그리고 욕망이 행동을 자극하듯 기쁨도 욕망을 자극한다.

생물학적 자극 체계에 발생하는 문제들과 우리가 광고와 경쟁에 그토록 민감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현저성(어떤 자극이 특출하면 그 특출한 자극을 어떤 현상의 원인으로 삼는 것, 예를 들어 한 집단이 처음 모였을 때 말이 많고 튀는 사람을 그 집단의 대표로 삼는 현상)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부동산 업자들은 집 밖의 잔디보다는 집 안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또 이 현저성 때문에 TV광고에서 파리약을 뿌려대는 사람이 흰 가운을 입고 있으면 그 사람은 자질이 훌륭한 약사일 것이라고 믿는다.

이 현저성 때문에 우리는 늘 미래의 기쁨보다는 현재의 기쁨을 우선순위에 두며, 현재의 고통보다는 미래의 고통을 선호한다. 결국 현저성은 도덕성을 고취한다. 욕망의 중간지대는 도덕의 지대이다. 의지가 없으면 도덕도 없을 것이고, 유혹이 없다면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은 다르다는 인식이 없으면) 도덕도 필요 없을 것이다. 인간이 끝없이 의지하는 욕망을 행하고, 원하고, 추구하는 것을 중화하기 위해 도덕이 존재하며, 이것이 어느 정도 인간의 장기적인 이익을 거스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이 도덕을 만든 이유는 잘못된 욕망에 맞서 우리 자신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도덕은 지혜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비만과 가정

시드니 항구에서 두어 시간쯤 가다 보면 시드니의 마지막 남은 녹지대를 침탈한 켈리빌이 있는데, 이곳에 모델하우스 단지인 홈월드가 있다. 홈월드는 빌드 어 베어(각 부위를 취향대로 골라 조립할 수 있도록 한 인형 판매점)처럼 집을 이리저리 합치고 나누고, 채울 수 있는 거대한 주택 대형마트이다. 이곳에서 천국에 온 것 같은 경험을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건축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반나절만 보내도 깊은 실존적 절망에 빠질 수 있다. 절망, 내가 없어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는 절망 말이다. 이는 단지 일률적인 거대한 성 같은 주택들 때문만은 아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죽고 싶도록 절망적으로 명백한 사실은 이것을, 이 주택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맙소사, 정말 추하군." 하고 말한다면 속물로, 엘리트주의자로 혹은 그중 최악인 지성인으로 매도당할 것이다. '추하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부정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판단적인 언어이다. 계층 간의 차별이 없다고 생각되는 호주사회에서조차 계층 구분에 대한 모든 비판을 계층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맥맨션랜드: 사실은 켈리빌의 추함은 계층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문화나 부, 윤리와도 거의 관련이 없다. 호주 건축가 로빈 보이드는 1960년 글을 통해 피처리즘(featurism, 최초의 디자인에 새로운 것을 덧붙여 더욱 복잡해진다는 의미의 신조어)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이렇게 표현했다. "농부건 왕자건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은 전시적인 것을 경멸하며 피처리즘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반면 정서적으로 안정되지도 않고, 시각적인 것에 기민하지도 않으며, 외로움으로 생긴 약간의 신경과민을 겪고 있는 호주인은 피처리즘의 정도와 빈도도 거의 정하지 않는다."

사실 대충 훑어만 봐도 교외의 부유한 주택단지들은 출세 지향적 성향만큼이나 추한 모습을 충분히 드러낸다. 이따금 나치처럼 획일화된 모습에 아직 물들지 않은 나무들로 그 추함을 우아하게 숨길 뿐이다. 모스크바에서 리옹, 덴버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도시들 역시 맥맨션주의의 확산으로 밤색 실내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충분히 드러난다. 1990~2003년 평균 가족 구성원이 40%가량 줄고 농지의 면적은 대략 절반가량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사우스웨일스 지역의 주택 평균 크기는 놀랍게도 60%가량 증가했다. 덕분에 270㎡라는 넓은 면적이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적정 주택 용지 크기가 되었다. 이들 주택은 단순히 몸집만 커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리석 욕조, 금으로 도금한 욕조 수도꼭지, 홈시어터, 드레스 룸, 게임방, 욕실에 딸린 방, 4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차고 등 더욱 현란하고 더욱 화려한 군더더기들을 기대한다. 비대하게, 더 비대하게, 가장 비대하게.

골드코스트의 미셸은 방송 <60분>에서 말했다. "우리 첫 집은 12㎡ 정도이었지요. 지금 이 집은 260㎡랍니다." 공사가 끝나면 그녀는 남편 크리스와 7개의 침실과 9개의 욕실, 제습기가 달린 옷장들을 갖게 될 것이다. 비용은 약 1,650만 달러가 소요될 것이다. 관대하다고? 물론이다. 정부와 주택시장은 이러한 형태에 미소 짓는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돈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결핍이 있다. 10만여 명의 호주인들이 거리에서 살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택 구입능력 위기'로 젊은 사람들이 주택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도 아니다. 이 속에는 '왜?'라는 질문이 들어 있다. 왜 거대한 부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여전히 더 거대한 기대를 품게 만드는가? 왜 교외에 가득 들어선 집들은 그토록 추한 것일까? 이것은 미적인 혐오인가, 아니면 도덕적 혐오인가?

뚱뚱한 도시: 2006년 9월, 모나쉬 대학의 국제당뇨연구소 소장인 폴 짐맷 교수는 국제비만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은밀하고 서서히 퍼지던 비만이 이제 전 세계를 뒤덮었다. 서양 선진국의 생활습관과 식습관이 불행히도 개발도상국에 정착되고 있다. 특히 우리 정부들은 자전거 전용 도로나 운동장, 혹은 운동경기를 할 수 있는 공간 등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아무 곳에나 맥맨션을 허용해서 비만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물론 도시의 확산과 비만과의 상호관계를 여전히 부인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이 상관관계에 수긍하는 공중 보건 전문가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인 앤서니 캐폰(호주 보건정책 연구소)은 이렇게 말한다. "교외지역 개발에 따른 건강과 사회의 잠재적 결과를 보면, 현재 우리가 도시를 개발하는 방식을 재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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