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에게 권력을 주지 마라
미하엘 슈미트-살로몬 지음 | 고즈윈
어리석은 자에게 권력을 주지 마라
미하엘 슈미트-살로몬 지음
고즈윈 / 2012년 8월 / 224쪽 / 12,000원
호모 데멘스 - 인간임이 부끄러운 이유
우리는 인간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화려한 별칭을 부여했던가. 호모 압스콘디투스(Homo absconditus, 신비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 미학적 인간), 호모 크레아토르(Homo creator, 창조적 인간), 호모 이노바토르(Homo innovator, 독창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적 인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화자찬의 절정이자 고상한 우리 인류를 공식적으로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현명한 인간)가 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말은 아마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재미있는 농담일 것이다. 현명한 인간, 이 말은 초식 사자나 탭댄스를 추는 지렁이, 관료주의적 쥐처럼 아주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우리 인간이 어느 정도 정신적 명민함을 갖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연 현명하다고 볼 수 있는가? 현명함은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허영심 가득한 원숭이에 불과한 우리 인간에게 결핍된 요소다. 드높이 칭송되는 인간의 지성, 우리는 이 지성을 더 나은 세상,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우선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서로를 속이고 빼앗고 착취하고 학살하는 데 사용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런 일을 했나? 결국 모두 헛된 짓일 뿐이었다. 이 같은 비참한 게임에서 권력과 부를 거머쥔 승자는 근심 없는 편안한 삶을 결코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이룬 성공의 결실을 불안한 마음으로 꽉 움켜쥔 채 자신도 속아 넘어가고 빼앗기고 착취당하고 학살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끊임없이 떨며 살아야 했다. 이보다 어리석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게임이 세대를 걸쳐 지속되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아주 오랫동안 비인간성의 역사였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서로를 학살해 왔을 뿐이다. 고문당하거나 교수형당하고, 돌팔매질로 죽임을 당하거나 칼에 찔려 죽고, 교살당하거나 맞아 죽고, 총살당하거나 화형당하고, 독살당하거나 독가스로 죽임을 당한 수많은 사람의 수를 누가 세어보겠는가? 인간에 의한 비인간적인 피의 흐름이 수세기에 걸쳐 이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역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무의미한 살인과 살육, 착취, 폭력 속에 흐르는 본질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에게 훨씬 적절한 명칭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호모 데멘스, 즉 광기의 인간이다. 바로 이 호칭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뚜렷하게 구분해 준다. 오로지 인간만이 '신'과 '조국', '명예', '명성'과 같은 순전한 가공물을 위해 삶을 희생할 만큼 충분히 미쳐 있다. 그리고 인간들은 이 모든 이데올로기를 자신들이 처참한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싸워 지켜야 할 만큼 충분히 합리적인 것이라 여긴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서 있다는 오만은 호모 데멘스가 만들어 낸 가장 어리석고, 정치적으로 끔찍한 망상이며, 온갖 멍청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오만으로부터 어리석은 종교 행위뿐 아니라 호모 데멘스가 오래전부터 무자비하게 행사해 온 지구에 대한 세속적 통치권 또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 아주 특별한 아둔함의 근본을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는 오명: 호모 데멘스가 단지 몸에 수북했던 털을 벗어던지고 디지털 손목시계를 찼다는 이유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 착각한다는 점은 참으로 놀랍다.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를 보면 이러한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동물과 비교했을 때 당연히 자신이 더 나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한다. 호모 데멘스는 자신을 동물과 구분 짓기 위해 강박적으로 노력하며 그 어떤 어리석은 짓도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많은 동물과 유전적으로 매우 흡사하며 기본적인 감정 역시 비슷하다. 인간과 가장 유사한 침팬지와 보노보, 고릴라와 오랑우탄이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동족이 죽으면 슬퍼하고, 미래를 예측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이다. 실제로 지구의 많은 동물이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즐거움과 고통,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느낀다.
인간의 진화 연속성이 다른 모든 생명체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그저 "살아가는 여러 생명 중의 하나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이러한 인식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급격히 변화시킬 것이다. 또한 이는 인류 역사의 가장 위대한 혁명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연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지구를 자신에게 복종시킨다. 매년 인간의 미식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학대당하는 돼지와 암소, 양, 닭, 거위, 오리 수백만 마리뿐 아니라 연구 목적으로 고문당하거나 부당한 조건으로 동물원에 갇히는 동물 수백만 마리도 이런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동물도 호모 데멘스의 미치광이 같은 억압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인간은 동물의 생존 공간을 점점 파괴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토대를 다져 온 장본인이다. 호모 데멘스는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으로 자신과 다른 생명체를 파멸로 몰아넣지만, 자신이 삶의 무대에서 퇴장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은 땅과 공기를 오염시키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지나치게 많이 포획하고, 숲의 나무를 과도하게 베어냄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은 수백만 년에 걸쳐 생성된 자원을 100년 만에 고갈시켰고, 자원 고갈에 대한 대응책으로 과학기술을 발명했다. 그러나 이 과학기술이 오히려 지구 전역을 향후 수천 년 동안 살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
시설이 엉망인 헬스클럽이나 바보 같은 사람들이 이끄는 정당,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탈퇴하듯이, 호모 사피엔스 데멘스라는 클럽에서 탈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데멘스에서 탈퇴하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이 클럽의 회원이 되며, 인간이라는 오명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경제인의 집단적 어리석음 - 우둔한 경제인이 어떻게 세상을 파멸시키는가
여러분이 이런 농담을 들어 봤는지 모르겠다. 두 행성이 우주에서 만난다. 한 행성이 헐떡거리며 말한다. "내 상태가 아주 안 좋아! 아무래도 호모 사피엔스가 생긴 것 같아!" 다른 행성이 말한다. "그것 참 안됐군! 나도 예전에 호모 사피엔스를 앓았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금방 사라질 거야!" 이 농담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다. 다만 병명이 틀렸을 뿐이다. 병에 걸린 행성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데멘스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엄청나다. 지구와 같은 행성이 70억 명의 현명한 인간을 아무 문제 없이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70억 명의 바보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세계 인구가 얼마나 급속도로 증가했는지 숫자로 설명해보면, 지금부터 2000년 전에는 약 3억 명의 인간이 지구상에 살았고, 1500년경에는 5억 명이, 1800년경에는 약 10억 명이 살았다. 그 후 20세기에 들어 (세계대전이 벌어졌음에도) 증가세는 더욱 빨라졌다. 1927년에는 이미 20억 명에 달했고, 1960년에는 30억 명, 1974년에는 40억 명, 1987년에는 50억 명, 1999년에는 60억 명이 되었다. 이제는 70억 명의 한계선을 뚫었으며, 2025년에는 80억 명이 될 것이다.
인구가 늘어날수록 더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진부한 사실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 문제를 야기하는 근본 원인은 인간의 생물량이 증가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뇌가 너무 적게 사용된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개체 수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너무 어리석다. 개미와 인간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똑똑한 생명체일까? 당연히 우리 인간은 개미보다 덜 똑똑하다! 개체로서는 인간이 개미를 압도적으로 능가할지 모르겠지만 집단 차원에서는 개미가 훨씬 더 뛰어나다. 개미의 특성은 집단 지성에, 인간의 특성은 집단 어리석음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함께 뭉치면 본질적으로 어리석어진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특수성이다. 인간은 뛰어난 영민함으로 개체의 합리성을 집단 광기의 토대로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같은 집단 광기는 실제로 숨 막힐 정도로 어리석은 결정도 시스템 내에서 '지혜롭고' 심지어 '이성적'이라 간주되도록 만든다.
쓰고 버리는 일회용 소비사회는 이를 보여 주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예다. 일회용 사회는 완전히 비상식적인 결과를 가져옴에도 불구하고 소위 합리적인 경제 전략, 이른바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 구품종을 계획적으로 진부화시키기 위한 기업행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와 결부된 현상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휴대전화나 토스트기, 인쇄기, 냉장고 등의 품질보증기간이 끝나자마자 망할 놈의 기계가 명을 다한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의 배후에는 모든 것을 갉아먹는 '시간의 경과에 의한 손괴'뿐만 아니라 '계획적 진부화'가 감춰져 있다. 많은 제품이 매우 의도적으로 적시에 '쇠약해지도록' 만들어진다. 그 결과 구매 행위에 쾌감을 느끼는 소비자는 새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다. 제품이 고장 나지 않고 오래도록 작동된다면 어떤 상태로 이어질까? 판매 시장이 무너지고 우리의 수익과 노동시장, 연금제도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25년 동안이나 고장 나지 않고 작동하는 냉장고처럼 기이한 물건을 만들 수 있었던 나라는 구동독뿐이었다. 그러니 구동독이 붕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기전자 대기업이 이미 수십 년 전에 전구의 수명을 2,500시간에서 1,000시간으로 단계적으로 낮춘 것을 보면 인간이 제품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작업을 얼마나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글로벌 시장의 모토는 '짧은 수명 만세!'다. 이 점에서 볼 때, 1950년대에 뒤퐁사의 디자이너가 '올이 나가지 않는 질긴' 나일론 스타킹을 발명했을 때 그 즉시 원점으로 돌아가 덜 질긴 제품을 개발하도록 회사 차원에서 지시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사업에서 너무 질긴 제품은 비극이다.
경영적 측면에서 볼 때 계획적 진부화는 틀림없이 영리한 전략이다. 제품의 다량 판매를 통해 기업의 성공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아주 뛰어나다. 경제적 면에서도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 우리 모두가 미친 듯이 소비해야만 그 보답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경제성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독실한 가톨릭교도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열렬히 기도하듯 정치가들은 얼마나 열렬히 경제성장을 갈망했던가! 하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계획적 진부화는 기존 생산 조건 중 가장 아둔한 전략이며, 인간의 집단 지성 결핍과 뛰어난 집단적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다. 혼자서는 누구도 목숨 바쳐 얻어 낸 소중한 자원을 단시간 내에 쓸모없는 쓰레기 더미로 바꾸어 놓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무리를 이루어야만 그러한 이상행동을 과감하게 일으킬 정도로 충분히 어리석어진다.
경제적 집단 어리석음: 이론대로라면 지속적으로 재성장하는 자연 재산과 막대하게 증가한 인간의 생산력 덕분에 지구상의 모든 개체가 사실상 걱정 없는 삶을 누리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 물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과거의 황제와 왕, 교황도 시기할 정도의 호사를 누리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매일 5세 이하 아동 30만 명이 영양실조와 비위생적 환경, 의료 시설 부족으로 죽어 가고 있다. 한편에선 샴페인을 터뜨리는 동안 한편에서는 10억 명의 사람들이 깨끗한 식수조차 공급받지 못한 채 살고 있다. 한편에서 과잉 섭취한 칼로리를 줄이려고 헬스클럽에 다니는 동안, 한편에서는 7억 명이 기아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 시대의 거대한 모순이다. 과거에는 이처럼 엄청난 풍요로움과 끔찍한 빈곤이 동시에 존재했던 적이 결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윤리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들은 부유한 산업국가 사람들이 지나치게 탐욕스러우며, 가난한 자의 접시에 남은 마지막 빵 부스러기를 의도적으로 앗아 가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까? 우리는 실제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만큼 냉정한가? 우리는 정말로 빈자의 불행을 발판 삼아 자신의 행복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가?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러면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으며 모든 개인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세상, 더욱 정의로운 세상을 원한다. 그런데도 현 상황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글로벌 윤리가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지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에 너무 못된 것이 아니라 너무 어리석다! 이것은 냉정한 사실이다. 지금처럼 빈부 간의 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현실은 인간의 본질적 비운이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모두가 한탄하지만 실제로 빈부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부유한 국가에서도 말이다.
고전적인 경제학 이론대로라면 이런 사태는 절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사람의 풍요를 보장할 수 있도록 개인의 이기주의를 조종했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의 이기주의를 어루만져 주었던 반면, 모든 사람의 풍요는 무시해 버렸다. 오늘날 우리의 경제 행태에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고도의 지적 능력이 발현된 예를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경제 영역에서처럼 인간의 집단 어리석음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4막으로 구성된 어리석은 경제 익살극: 현 상황의 문제점이 이제 분명해졌다. 자산이 점점 소수 인구에만 집중되면 전체적으로 국내 수요가 줄어들고, 이로 인해 재화와 용역의 실제 판매고도 감소한다. 그 결과 모든 퇴행 과정이 발생한다. 오늘날 국제금융 무대에서 펼쳐지는 끔찍한 익살극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국제 금융 못난이들이 제공하는 '4막짜리 어리석은 경제 익살극'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제1막: 국내 경기가 침체되면서 많은 기업이 노동자 해고를 통해 이윤을 추구한다. 기업이 경영합리화 대책을 발표할 때 주가가 오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같은 전략이 매우 뛰어난 것처럼 보이겠지만, 장기적 측면에서 볼 때는 아주 바보 같은 짓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자를 해고하면 시장 구매력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나아가 경기 불황으로 이어진다.
제2막: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이 강화되면서 시장 아웃사이더의 생계를 보장하는 경기회복 프로그램이 대대적으로 진행된다. 그렇지만 이는 국가 예산을 점점 더 깊은 부채의 소용돌이로 몰아갈 뿐이다. 국가가 엄청난 부채의 상환과 이자 지급에 허덕이는 동안 교육 및 사회보장 등에 쓸 돈은 자꾸만 줄어든다. 결국 돈은 국가에 엄청난 금액을 빌려 줄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소수의 계좌로 흘러들어 가고 국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빈곤층은 살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제3막: 막대한 자산 수익으로 풍요를 누리는 부자들은 결국 호사스러운 문제에 봉착한다. ① 돈이 다 소비될 수 없을 경우, ② 실질 경제에의 투자가 가치를 상실할 경우(일반 구매력이 약해지면서 수익이 떨어지기 때문에), ③ 자발적인 모든 자금 공급자를 만족시킬 정도로 국가가 더 이상 부채를 지지 않을 경우, 이 모든 돈을 어떻게 할까? 이는 최근 몇 년 동안 금융계를 완전한 '투자 위기'에 빠뜨린 어려운 문제다. 부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허구 자본 투자를 '금융상품'의 형태로 고안해 냈다. 즉 불량 채권에 아주 독특하고 불투명한 포장을 입혔다. 이러한 해결책은 실제로 한동안 효과가 있었지만, 결국 종말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