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
조지 카텝 지음 | 말글빛냄
인간의 존엄
조지 카텝 지음
말글빛냄 / 2012년 9월 / 362쪽 / 15,000원
제1장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
개인과 인류의 존엄성: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의 핵심은 지구상에서 인류가 가장 위대한 존재, 혹은 동물왕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종들 중의 하나이면서 가장 위대한 종이라는 것과 모든 개인은 이 종, 즉 인류의 높은 가치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가 일찍이 그의 저서 『인간 존엄성에 관하여』(1486)에서 그 핵심을 논한 이후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에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차후 인권에 대한 논의에 소개될 때, 그리고 인권이 옹호받을 만하고 인간의 이익에 이바지한다는 점이 받아들여질 때에도, 그것에 대한 회의론이 등장하곤 했다. 즉, 인권을 증진하는 데 있어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든 이론적 논리가 부적절하고 심지어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첫 번째 주장은, 칸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은 인권에 대한 이론에 한 구절을 덧붙였을 뿐, 인권의 기초를 제공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주장은 역사적 기록이 희생자와 가해자들 사이의 도덕적 차이를 중요시하지 않음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논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할 만큼 인간의 인간에 대한 야만적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만 인간 존엄성을 부여해야 하고, 따라서 권리를 침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한 사람은 존엄성을 얻을 기회를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권리에 대한 이론은 존엄성을 가진 자와 잃은 자 사이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주장은 인간 존엄성을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 대 다른 종들 사이의 관계로 확대해서 보면, 그것은 자칫 인간의 과도한 교만을 초래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며, 궁극적으로는 지구를 다른 종들뿐만이 아니라 자신조차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인류의 교만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인류가 특별하거나 모든 종들 가운데 혼자만 존엄성을 갖는다든가, 혹은 인간이 존엄성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종들의 것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위의 네 가지 주장에 대한 사실적인 요소와 최소한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나의 반론은 우리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관념을 옹호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거부해서는 안 되며, 추가적인 개념적 연구가 반드시 헛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덧붙이면 나는 이 책을 통해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이 인권이론에 필요한 그 무엇인가를 제공해 줄 것이며,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살육과 범죄, 그리고 잔혹행위로 얼룩져 있을지라도, 인간의 존엄성, 심지어는 범죄행위를 통해 타인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그래서 스스로의 존엄성까지 손상시키는 사람들의 존엄성조차도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계속되는 논의에서 나는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이 인권에 대한 이론을 옹호해 줄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존엄성도 조망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 그런데 아직도 인류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이론 사이에 갈등이 존재할 수도 있다. 즉,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이 인류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과 상충될 수 있듯이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 자체도 불안정하다. 그러나 인류의 존엄성이 개인의 존엄성과는 다르다는 주장은 회의적인 반응과 반감만 초래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류가 주제넘게 자연, 혹은 스스로를 훼손시키고 착취하는 미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류의 존엄성을 옹호하고 싶다. 나는 그러한 인간의 주제넘은 행동이 사실상 인류의 존엄성을 이루는 한 부분이 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인류는 스스로의 에너지를 자연의 청지기로서의 역할에 쏟고, 자연에 대한 만행을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인류는 다른 종들보다 높은 존엄성을 가지며, 혹은 다른 종들이 지니고 있는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인류의 높은 존엄성은 이론적으로 자연으로부터의 부분적인 결별에 근거한다. 덧붙이면 다른 종들은 오직 자연에만 귀속되어 있는 반면에, 인류는 자연에만 귀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주장은 신학이나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의 존엄성과 인류 전체로서의 존엄성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 이 글을 쓴다. 그리고 그러한 가정에서 나는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은 모두 평등하다는 또 다른 가설을 내세운다. 즉, 개개인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평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존엄성이라는 관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적용되며, 이성적으로 개인 스스로의 자각에서 다른 사람도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주장으로 진전된다.
모든 개인은 평등하다. 그리고 다른 어떠한 종도 인류와 동등하지 않다. 이것이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의 두 가지 기본 전제이다. 개인의 존엄성을 논하는 이유도 인류의 존엄성을 논하는 이유와 같다. 즉, 같은 유일하고 비자연적인 특성, 자질, 성격, 능력 등을 이유로 꼽는다. 따라서 나는 인류가 그 구성원인 개별 인간과는 별개의 존재라거나, 개인들 혹은 그 집단들과는 다른 주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류에 대해 논하고 싶다. 왜냐하면 개인과 집단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넓고 깊게 의존된 상태로 얽혀 있어서 인류를 통합된 존재나 주체로 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수많은 이름 없는 존재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이, 이름이 있거나 이름 지을 수 있는 개인 혹은 집단들을 제쳐 놓고 인류에 대한 생각을 소홀히 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본 인류의 존엄성: 인류가 없어진다면 지구는 훨씬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곧 그러한 주장을 거부하고 인류가 자연에게 유일무이한 공헌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 대한 청지기 역할은 인류만이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인류의 위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책은 평등한 인간의 지위, 인권이론에 있어서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의 의미, 그리고 비자연적 능력에 기초한 인간의 위상에 있어서 인류의 존엄성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존엄성을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잔악한 행위는 잊히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확신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다른 종들에 비해 인류가 갖는 서열이나 자연에 대한 청지기 역할들만이 인류의 위상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지위는 인간이 놀랍고도 기대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해냈다든가, 인류의 성취가 매우 위대하여 인간 잠재력의 끝을 예견할 수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 주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인류의 위상은 필연적으로 실존적인 가치이지 도덕적인 가치가 아니다. 이 책은 세속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다룬 것이다. 나는 종교가 제시하는 전통적인 인류의 존엄성에 관한 의견에 기초해서 인류의 위치를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오직 인류만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든가, 따라서 우리가 우리보다 훨씬 위대한 존재와 유사한 존엄을 가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다. 만약에 우리가 인간보다 위대한 존재를 믿는 일신론자라면, 각 개인과 인류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누가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리고 나는 인류의 위치와 가치를 논의하는 데 있어, 인간이 아니거나 인간보다 위대한 존재를 독자로서 상정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종교적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한 문제는 확실히 해결된다. 즉, 신이 모든 것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어떤 문제가 어렵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오직 인간만이 이 논쟁의 청취자와 사회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이외에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중재자나 후원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스스로를 말하며, 스스로를 판단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해결해 내며, 인간 존엄성에 대해서도 홀로 걱정한다. 따라서 인간은 같은 인간 이외에 자신의 문제를 호소할 곳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문제들은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논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관념이 가장 믿을 만한 해답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더욱 정중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개인의 지위와 인권
나는 미국의 헌법이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혹은 자연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최근의 인권헌장들보다 주요 인권들을 가장 순수하고 간결하게 명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로 미국 제정헌법의 7개 조항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언론, 출판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보장했고 정당한 법의 절차와 권리에 기초한 정부, 즉 국가권력의 제한을 규정했다(수정헌법 제9조, 제10조).
그리고 남북전쟁 개정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정당한 절차에 따른 개인과 그의 권리에 대한 보호를 보장했으며, 인종에 관계없이 선거권을 부여했고(수정헌법 제13조-제15조),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다(수정헌법 제19조). 정부가 이런 권리를 인지하고 고수할 때, 한 사람 혹은 소수에 의한 독재와 전제정치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수 있는 근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권력 분립과 사법권의 독립은 이런 권리를 더욱 강화시킨다. 모든 사람들은 독재와 전제정치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헌법은 특정 종교나 인종, 민족을 지지하는 국가제도는 합법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같은 제도는 정부의 최우선 임무를 동등한 개인의 권리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특정 집단의 우월성과 고귀함을 선포하는 것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제도가 단순히 명목적인 것이 아니고 국가가 다른 집단을 희생하면서 한 집단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려 한다면, 국가의 위법적인 성격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나는 1789년과 1793년에 공표된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세계인권선언(1948)'이나 '유럽인권조약(1950)'의 중요성을 퇴색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이 선언문들의 차후 문서에서 사생활 보호 권리와 복지권이 명시되어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권리장전과 비교하면 이 선언문들은 상당히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 특히 유럽인권조약의 대표적인 단점은 그것들이 국가 통제주의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선언문에는 도덕성, 질서, 복지, 그리고 불명확한 국가적 목표라는 미명하에 개인의 권리를 약화시킬 수 있는 국가의 권한을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예외적인 상황을 명시함으로 인해 개인의 권리는 언제든 침해당할 가능성이 생겨나고, 동시에 국가는 스스로 참을성 없고 이기적인 집단임을 증명하는 꼴이 된다. 이렇게 필요성의 합리화에 너무 쉽게 노출되면, 권리는 권리로서의 본질을 잃게 된다. 미국 헌법에서도 권리의 축소를 경험했으며, 그때마다 정부는 그에 따른 큰 부담을 가졌다. 그러나 권리장전(그리고 제헌헌법의 관련된 선언)을 시작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상황에서 권리의 의미를 탐색하는 법률체계가 축적되었다. 물론 사법적인 판단이 언제나 권리의 증진에 노력했다고 할 수는 없다.
권리는 절대적이다: 인권의 본질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로널드 드워킨의 저서 『자유의 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국가가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물론 만족감이나 부의 측면에서 모든 인간이 실질적으로 평등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평등은 입헌적 국가의 목표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개인 한 사람이 중요한 것처럼 동등하게 대우를 받아야 한다. 즉, 국가는 어떠한 개인도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며, 어떤 개인을 이류시민으로 취급하거나, 어떤 집단을 법적으로 차별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권리는 다른 사람의 권리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국가가 인권을 인식하고 존중하고자 할 때는 두 가지의 평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는 도덕적 평등이고, 둘째는 모든 개인의 평등한 지위이다.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부정하거나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도덕적 평등과 실존적 평등은 실질적으로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동등한 대우는 두 가지의 평등에 도움을 준다. 즉, 어떤 사람의 권리가 축소되거나 부정됨으로써 도덕적으로 인식할 만한 고통을 받게 될 때 도덕적 평등의 원칙이 도움을 준다. 그리고 실존적 평등의 원칙(혹은 모든 개인의 동등한 지위)은 국가가 평등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인간 존엄성과 정체성을 훼손시키지 않을 때 지켜진다. 아무튼 이 두 가지의 평등은 모든 인간이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는 절대적이라는 근본적인 확신을 받아들인다.
권리가 절대적이라는 말은, 모든 개인이 비용-효과 분석에 따라 타협이나 제한될 수 없는 권리를 가질 권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브레넌, 존 롤스, 토머스 네이걸은 모두 인간의 '불가침'을 주창했다. 나는 이 개념을 모든 사람은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하기 때문에, 인간의 권리 또한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따라서 개인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거나 바꿀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아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불가침성을 희생시켜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특정 소수, 혹은 다수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 개인의 두 가지 권리가 충돌하거나, 충돌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바로 안전(생명권)과 자유의 충돌이다. 혹은 한 개인의 권리가 또 다른 개인의 권리와 대립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두 가지 경우의 충돌은 그렇게 자주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국익을 옹호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바나 감상적인 상상력의 산물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만약 언론매체나 정부관리가 특정 개인이나 단체,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국민의 권리 제한이 안전(생명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 주장에 의혹을 제기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 안보나 국가의 변명을 핑계거리로 삼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만큼 현실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인권 옹호의 핵심은 개인을 보호하려는 의지이다. 그리고 도덕적, 실존적 요소가 모두 이 목표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둘 중 권리의 절대성을 지지하는 데 있어 더욱 중요한 요소는 실존적 요소이다. 왜냐하면 고통과 관련된 도덕적 요소는 권리들을 축소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조장될 수 있고, 따라서 권리들을 총체적이고 수단적인 도덕적 입장뿐 아니라, 수단적인 계산의 지배를 받도록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리가 절대적인 것이라면, 그러한 계산은 도덕성이 그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용납될 수 없다.
더 나아가, 개인을 보호하려는 의지는 권리 체계의 유지가 사회에 가져다 줄 전반적인 이득을 기대하는 인권의 옹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독자들로부터 언론, 출판, 행동의 자유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진실과 진보의 가치에 호소함으로써 이러한 자유의 사회적 유용성을 주장했다. 확실히 이러한 수단적인 주장은 옳을 수도 있지만, 자유에 대한 더 큰 제약도 더 많은 진실과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유로 반박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떠한 권리에 대한 수단적인 옹호도 상황에 따른 반박에 취약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