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링 법칙 1
허경구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
커플링 법칙 1
허경구 지음
미래를소유한사람들 / 2012년 10월 / 511쪽 / 17,000원
Ⅰ부 뇌형의 이해
뇌형은 곧 인간이다 - 당신은 우뇌형인가, 좌뇌형인가
왜 우뇌형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좌뇌형은 죽음을 거부할까: 높은 경지에 오른 스님들조차 죽음 앞에서는 마음이 흔들린다고 한다. 그런데 고 스티브 잡스 애플 CEO는 췌장암 수술을 받은 2005년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삶의 최상의 발명품이다. 죽음은 변화의 촉매제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말이다. 잡스가 괜한 허풍을 떤 것일까? 그가 이 발언을 한 것은 '죽음 자체가 삶의 축복'이란 뜻이 아니고 '죽음을 예견하고 사는 절박한 삶이야말로 축복'이란 뜻이다. 과연 죽음을 예감하고 사는 사람이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
한편 소설가 최인호 씨는 2008년 침샘암 선고를 받고 나서 "암은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지식과 내가 보는 모든 사물과 내가 듣는 모든 소리와 내가 느끼는 모든 감각과 내가 지금까지 믿어 왔던 하느님과 진리라고 생각해 왔던 모든 학문이 실은 거짓이며, 겉으로 꾸미는 의상이며, 성 바울의 말처럼 환상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헛꽃[幻花(환화)]임을 깨우쳐 주었다"고 말했다.
죽음에 관해 잡스가 한 축에 서 있고, 최인호가 다른 축에 서 있다는 것 같다. 잡스와 최인호의 죽음 인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대극(對極)적인 두 축의 의견을 압축적으로 대변한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때 두 축은 삶과 죽음의 인식에 대한 인간들의 대극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도대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이 서 있는 죽음 인식에 대한 축을 해석하자면 최인호 축은 지극히 좌뇌적이고, 잡스의 축은 지극히 우뇌적이다. 죽음과의 대면이라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날아온 암살자의 표창을 맞고 정신을 잃은 것처럼 놀라고 황망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누구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에 대해서 항변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자기 삶의 좌표를 지탱해 왔던 근본의 정체에 대한 강한 의문의 표시다. 이 세상의 질서를 지배하는 순리에 대한, 이 우주의 진리를 관장하는 논리에 대한 강한 의구심의 표시다.
삶의 좌표의 근본이란 따져 보면 신의 섭리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윤리일 수도 있다. 다른 말로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을 충실히 지키고 따라왔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보상이 겨우 날벼락 치듯 내려진 죽음과의 정면대결밖에 없단 말이냐?' 하는 하늘에 대한, 자기 운명에 대한, 혹은 삶의 좌표를 지켜줘 온 그 무엇인가에 대한 강한 심리적 저항이다. 좌뇌형은 운명이 자기에게 생떼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극히 전형적인 좌뇌적인 저항이다. '그렇다면 나도 인간으로서 그 삶의 좌표의 근원이 무엇인지 한번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는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좌뇌형은 갑작스런 운명의 명령에는 순순히 습복( 伏, 두려워서 굴복함)하기 어렵다는, 나름대로의 순수한 현실인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진리에 대한 믿음과 신뢰체계를 일순간에 다 무너뜨리는 듯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을 집안으로 들이기 어렵다는 태도다. 하늘에 대한 처절한 배신감의 토로다. 최인호가 나타낸 이 모든 분노와 불신과 당혹감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상식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에는 일정한 합리성과 논리의 연속성이 있다고 보인다. 이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성적인 믿음 체계다. 적어도 멀쩡한 정상적 인간이라면 당연히 제기해야 할 의문이라는 것이다.
좌뇌의 축은 인생에 대한, 신에 대한, 순리에 대한, 그리고 운명에 대해 항변의 단계를 넘어 노골적으로 거부의 자세를 취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거부의 논리는 충분히 객관적인 설득력을 띠고 있다. 합리적,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선형적, 융합적, 미시적(단기적)이며 또 그 생각의 전개는 연속적이며 순차적이다. 최인호의 경우 좌뇌적 생각 패턴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반면 잡스의 죽음 인식은 이런 세속적인 상식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오히려 이성으로 볼 때는 불합리한, 비논리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의 죽음 인식은 마치 확철대오(廓撤大惡)한 고승의 법어 같다. 좌뇌가 인간계에 대해 100분의 1 지도를 그리고 있다면, 우뇌는 10,000분의 1 지도를 그리고 있는 듯하다. 근경과 원경을 아우르는, 훨씬 넓은 시야를 가진 지도를 말이다. 뭐랄까, 죽음에 대한 세세한 상식을 한꺼번에 삼태기에 쓸어 담아서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일거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확 트인 통찰력의 경지를 보여 준다고나 할까?
전기에 감전되듯 어느 순간 뇌 속에서 떠오른, 그 활연관통하는 대전환의 진원지는 좌뇌가 아니고 단연 우뇌일 수밖에 없다. 그런 통찰력이 발진되는 메커니즘이 작동될 때마다 우뇌의 신경 세포들은 춤을 추듯 활성화된다. 하나의 통찰력이 탄생할 때마다 우뇌가 활성화되고 그때마다 우뇌 영역에서는 화려한 파티가 열린다고 한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환하게 불야성을 이룬다. 이것은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준비동작이요, 또 그것을 얻은 후에 벌이는 뇌의 자축파티다.
우뇌와 큰 깨달음, 다시 말해 불교에서 얘기하는 '돈(頓)'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망집과 망념의 잡초를 깨끗이 베어낸 정원에서 피어난 한 떨기 아름다운 꽃, 그것이 때로 우뇌가 지어내는 마술과 같은 묘법이기도 하다. 잡스의 경우 우뇌의 축이 인생에 대해, 신과 순리에 대해, 그리고 운명에 대해 보여준 의구심의 항변은 보다 직관적, 통합적, 주관적, 은유적 측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선형적, 확산적, 거시적(장기적)이다. 또 그 생각의 전개는 동시적이며, 평행적이며, 폭발적이다. 이것은 우뇌적 생각 패턴의 전형이다.
어쨌거나 좌뇌는 가장 인간적인 소리를, 우뇌는 인간이 가진 천상의 소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좌우뇌는 하나의 단위(unit)로 작동하지만, 그 기능은 분명히 서로 대극적인 기능을 발휘할 때가 있다. 바로 그 대극적인 극대비의 양면성이 죽음을 대면한 잡스와 최인호의 좌우뇌의 축을 통해 극적으로 대비되어 나타난 것이다. 죽음에 대해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반응과 인식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모든 인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좌뇌형이 보다 의지적이고 저항적이라면, 우뇌형은 보다 수용적이고 초월적이다. 전자가 운명을 거역하려 한다면, 후자는 운명에 순명하려 한다.
좌뇌형과 우뇌형에 대해서 다시 이렇게 얘기해 볼 수도 있다. 좌뇌형은 평시에는 보다 세속적이고, 보다 인간적이고, 이 세상이 제공하는 온갖 음영에 보다 자신을 맞추어 나가는 타협형이다. 그런데 자기에게 어떤 비극적 결말이 닥치면 최후까지 저항한다. 반대로 우뇌형은 평시에는 보다 초연하고 초월적인 비타협형이면서도 비극적 결말에 대해서는 훨씬 유연하고 타협적인 자세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좌뇌의 축은 인간적인 느낌, 인간적인 순리와 질서에 쉽게 순응하고 승복한다. 그만큼 인간관계에 경도돼 있고, 인간적인 삶에 재미를 느끼면서 산다. 따라서 좌뇌는 세상사에 언제나 인간적이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다. 그만큼 삶에 자신이 있고 낙관해왔던 까닭에 그 즐거운 삶이 파괴되는 극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극렬하게 저항하게 된다.
반면 우뇌는 인간관계나 인간 자체에 관련된 사항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일 자체에 관심이 더 많다. 삶의 순리보다 더 큰 우주의 섭리에 더 관심이 많다. 아마 죽음과의 대면에서 좌뇌보다 평소에 덜 낙관적인 우뇌가 좌뇌보다 더 달관적일 수 있는 것은 평소 이런 우뇌적 특성의 발로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도 요약할 수 있다. 좌뇌의 축은 생각 가능한 점을 생각하는 합리성의 축이요, 우뇌의 축은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 묘법(magical ideation)의 축이라고.
좌·우뇌는 하나로 연결된 작동체계지만, 좌뇌와 우뇌는 확실히 각자만의 영역과 정체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예컨대 하버드 대학 뇌과학연구소의 뇌신경해부학자인 질 테일러의 경험이야말로 좌뇌, 우뇌의 독자적 기능이 어떠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뇌출혈로 좌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에서 8년여의 세월을 우뇌만의 기능으로 살았다. 우뇌만으로 살아남았던 그때의 상태를 그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 좌뇌의 분석적 판단이 없어진 상태에서 나는 완전히 고요함, 안락함, 축복감, 편안함, 그리고 전능함의 느낌에 휩싸였다.' 그녀는 무엇 하나 바랄 것이 없는 이런 뇌의 상태를 너바나(nirvana), 즉 열반의 상태였다고 묘사했다. 좌뇌적인 모든 자질구레한 세속적 걱정과, 욕망과, 번민이 훌훌 다 날아가 버린 그 상태에서 느끼는 아늑함, 그리고 잠자리라도 와서 누워 낮잠을 즐길 만한 대낮 오후의 고요한 적정(寂靜) 속의 완벽하게 고요한 느낌, 그것이 바로 그녀가 얘기하는 열반의 느낌이었다. 바로 우뇌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완벽한 천국이다.
우뇌는 시간관념이 전혀 없다. 오직 현재만을 느낀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한 줄로 꿰어서 생각하는 능력은 오직 좌뇌만의 기능이다. 따라서 우뇌 혼자만이 느끼는 한없이 충만한 평화와 안락함이란, 좌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있다. 영원한 한순간이요, 한순간이 영원한 것은 바로 이 우뇌만이 느끼는 한순간의 감정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이다. 따라서 가장 행복한 한순간을 영원한 '한순간'으로 붙들어 매둠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주 간단한 한 가지 조건만 요구될 뿐이다. 그건 좌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채 우뇌만의 기능을 살아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오직 고승들만이 느끼는 높은 경지의 선(禪)적 영감일 수 있다. 선승들은 선상(禪想)의 적요함 속에서 좌뇌의 모든 자잘한 기능을 정지시키고 우뇌만의 기능을 살려놓은 상태를 유지시킬 수 있다. 끊임없는 기도와 명상을 통해 우뇌 기능을 최고조로 높임으로써 선승들은 한순간의 행복감을 영원처럼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질 테일러는 이 순간을 '영원하고 풍요롭다(timeless and abundant)'고 표현했다.
여기서 독자들이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다. 뇌과학자들조차도 정작 자신들이 좌뇌형인지, 우뇌형인지 알 수 없다. 좌뇌형이니, 우뇌형이니 하는 뇌형의 분류는 인간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몸의 움직임이나 표현형적 발현을 통해서만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몸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통해 인간 뇌형의 패턴을 살펴보고 있다.
좌우뇌의 미학성 - 몸잡이가 곧 좌·우뇌형을 결정한다
오바마 연설의 폭발력은 그의 우뇌에 있다: 오바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뭐라고 형용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다. 우선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바리톤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의 어조는 지극히 운율적이고 리드미컬하게, 마치 높지 않은 파도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며 장단과 고조를 잘 타고 넘는 음조를 지니고 있다. 그는 침묵하는 동안 두 눈을 뜨고 청중들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시시각각 청중들의 분위기를 예의주시했다. 이런 감성적인 순간의 판단이야말로 우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즉물적이고, 직설적이고, 순간적인 포착력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자기가 느끼고 있는 미국인들에 대한 감정적 갈등의 내용을 미국인들이 동시에 느끼게 함으로써 오바마는 미국의 고질적 병독을 고쳐낼 수도 있는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연설의 효과를 가능하게 했던 표현형적 특성은 오바마의 몸의 왼쪽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따라 작동되는 우뇌적 특성의 대측적 교류가 가장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침묵의 순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1초의 침묵'의 신화는 그렇게 해서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신화는 우뇌형만이 가능한 우뇌의 신화다. 침묵이란 어느 순간에나 긴장을 유발하는 코드이고 언짢음과 갈등과 항의를 상징하는 신호다. 엄격히 말해 침묵은 언어도 물론 아니지만 비언어도 아니다. 표정이니, 제스처니 하는 소위 비언어와도 다른 제3의 영역이다. 오바마가 침묵을 교감의 수단으로 삼아보겠다고 연단에 섰을 리가 없다. 일인과 다중 사이의 침묵이 교감의 강력한 동시적 전이의 접착점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오바마형의 우뇌가 연출한 전무후무한 가장 짧은 순간의 '무언극'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바마의 전임자인 조지 W. 부시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부시는 오른손잡이의 오른쪽몸잡이다. 부시는 51초는커녕 10초의 침묵도 못 참았을 것이다. 설사 참았더라도 무슨 효과가 나타났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욱이 침묵으로 청중과 교감하려는 시도는커녕 그런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부시가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부시는 좌뇌형이라 오바마의 감각적 통찰력을 못 따라올 뿐이다. 그 대신 부시는 순발력과 순간적인 유연성과 기동성에 있어서는 누구 못지않다. 그것은 좌뇌형 중 한 체질의 특성이다. 어떻든 부시에게 침묵으로 교감을 시도해 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뇌와 좌뇌는 태초의 우주탄생의 시초처럼 비대칭이 대전제다. 서로의 기능과 역할이 다를 뿐만 아니라 또 서로 간의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다르지만 화합해야 하고, 화합해야 하지만 같지 않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관계다. 조화 속에서 다름을 창출해야 하는 숙명적 기능 그것이 곧 좌뇌와 우뇌의 존재 이유다.
천재는 좌뇌와 우뇌가 대칭적이다
아인슈타인은 좌뇌적 우뇌형이다: 인간은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있다. 그런데 손잡이는 오른쪽이지만 몸의 균형은 왼쪽으로 기우는 경우가 있다. 몸의 한쪽이 몸을 지탱하려는 몸의 하중을 조금이라도 더 받는다든지, 서서 쉬게 될 때도 몸의 하중이 한쪽으로만 쏠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몸이 한쪽으로의 지탱력을 선호하는 것이다. 바로 그쪽이 당신의 몸잡이 쪽일 가능성이 높다. 오른손잡이라도 오른쪽으로 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고 왼쪽으로 쉬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손잡이와 몸잡이는 다르다는 얘기다. 이는 왼손잡이라도 몸의 축은 오른쪽을 쓰는 사람이 있고 또 오른손잡이라도 몸의 축은 왼쪽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오른손을 쓸 때 당연히 좌뇌의 영향을 받지만 몸을 움직일 때는 좌뇌보다 우뇌의 명령에 더 쉽게 순응하고, 왼손을 쓸 때는 당연히 우뇌의 명령을 받지만, 몸을 움직일 때는 우뇌보다는 좌뇌의 명령에 쉽게 순응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손잡이와 몸잡이의 조합에 따라 다음 4가지의 뇌 유형이 생기게 된다.
(1) 오른손잡이-오른쪽몸잡이로 손잡이와 몸잡이가 똑같이 좌뇌의 지배를 받는 순수한 좌뇌형
(2) 왼손잡이-왼쪽몸잡이로 손잡이와 몸잡이가 똑같이 우뇌의 지배를 받는 순수한 우뇌형
(3) 오른손잡이-왼쪽몸잡이로 좌뇌적 우뇌형
(4) 왼손잡이-오른쪽몸잡이로 우뇌적 좌뇌형
미국의 핵물리학자인 존 월터 교수는 사람들이 머리를 왼쪽으로 빗어 넘기느냐, 오른쪽으로 빗어 넘기느냐에 따라 인간의 좌우 뇌형을 판별하고 있다. 그는 이 문제에만 30여 년을 매달려 왔다. 어떻든 체형 판단의 합리적인 여러 기준을 발견하고 그 기준에 따라 몸의 편향성과 뇌의 편향성을 알아내서 설명하려는 것이 이 책의 목표 중의 하나다.
결국 인간의 뇌는 네 가지 유형 - 순수한 좌뇌, 순수한 우뇌, 좌뇌적 우뇌, 우뇌적 좌뇌 - 이 있다. 순수한 좌뇌, 순수한 우뇌는 좌우 뇌의 비대칭성의 표본이다. 그런데 오른손잡이-왼쪽몸잡이의 좌뇌적 우뇌형이나 왼손잡이-오른쪽몸잡이의 우뇌적 좌뇌형은 순수 좌우 뇌형과는 달리 뇌의 좌우 반구의 대칭성을 보여주고 있다.
손잡이-몸잡이가 일치해 있는 경우 비대칭성이 심화되고, 손잡이-몸잡이가 어긋나서 좌우로 배분되어 있는 경우 뇌의 대칭성은 증가된다. 몸의 움직임의 비율, 즉 좌우의 팔, 다리 또는 척추의 양쪽 몸이 힘을 받는 하중의 비율, 또 좌우의 운동신경이나 근육이 작동되는 그 빈도의 심도가 비교적 균형을 이룰 수밖에 없는 좌뇌적 우뇌형이나 우뇌적 좌뇌형의 기능적인 대칭성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좌우 뇌의 활동량은 비슷하고 따라서 좌우 뇌의 기능적 편차가 줄어들게 됨으로써 좌우 반구의 모양도 그 활동량에 따라 비슷한 모습, 즉 대칭성의 모양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