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상처, 영화로 힐링하기
이병욱 지음 | 소울메이트
마음의 상처, 영화로 힐링하기
이병욱 지음
소울메이트 / 2012년 9월 / 360쪽 / 15,000원
1부_ 성격적 결함의 벽을 넘어서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의존성 인격
의존성(dependent) 인격은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고목나무에 붙어사는 매미처럼 자신은 아무런 노력도, 판단도 하지 않고 의지하고 있는 상대에게만 전적으로 매달려 사는 그런 인물이다. 이들에게 독립이나 홀로서기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들의 사전에 이별이나 독립이란 단어는 있을 수 없다. 누군가 항상 곁에서 자신을 보살펴주고 모든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주기 바란다. 헤어진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니 필사적으로 의존하는 상대에게 매달리고 그에게 절대 복종한다. 의존하는 상대가 그 어떤 구박이나 수모를 줘도 참고 견딘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으니 무조건 상대에게 복종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밤낮으로 매를 맞고 살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여성들에게서 이런 성격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경우를 사도마조히즘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고, 대부분의 의존성 인격은 별다른 무리 없이 살아가기 마련이다. 온갖 학대를 감수하며 살아가는 여성에게 주위에서 "왜 그러고 사느냐, 헤어지면 그만인데"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본인도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아내의 모습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남편들도 많으니, 그런 경우는 좋게 말해서 찰떡궁합으로 볼 수도 있다. 본인들이 만족하고 살면 그만이니까.
인간은 누구나 적절한 의존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픈 욕구 때문에 평생의 반려자를 찾는 게 아니겠는가? 남성들도 상대에게 의지하기는 여성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사회적인 위신이나 체면 때문에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의존성 인격의 소유자는 그 정도가 심해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전적으로 상대에게 의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버림받지나 않을까 항상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한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상호 의존과는 분명 다르다.
가련한 운명의 여인들: 의존성 인격을 지닌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은 시드니 프랭클린 감독의 1937년도 영화 <대지>에 나오는 여주인공 오란(루이즈 라이너 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대지주 집의 종으로 살던 오란은 가난한 소작인 왕룽(폴 무니 분)에게 시집간다. 비록 배운 것도 없는 일자무식인 그녀지만 그래도 종살이에서 벗어나 어엿한 아내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에 들떠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쳐온다. 무서운 가뭄이 들이닥친 것이다. 식량이 떨어져 진흙을 끓여 먹는 지경에 이르자 왕룽 일가는 드디어 피난열차를 타고 중국 남부로 떠난다. 그곳에서 구걸로 연명하던 오란은 엉겁결에 대부호의 집을 약탈하는 군중들 틈에 끼었다가 바닥에 떨어진 값비싼 보석들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주워 담는다. 오란 덕분에 졸지에 대지주 갑부가 된 왕룽은 첩까지 들이며 방탕한 생활을 하지만 오란은 아무 탓도 하지 않고 오로지 남편에게 순종한다.
의존적인 여성의 비참한 말로는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56년도 프랑스 영화 <목로주점>에서 더욱 실감 나게 그려진다. 영화의 배경은 19세기 파리의 빈민가 뒷골목이다. 다리를 저는 가난한 세탁부 제르베즈(마리아 셀 분)는 무위도식하며 지내는 실업자 란체와 동거 중으로, 그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딴짓을 해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란체가 집을 나가버리자 사람 좋고 성실한 지붕 수리공 구포와 결혼해 세탁소까지 차린다.
그러나 구포가 지붕에서 떨어져 다치자 그녀는 그동안 저축한 돈까지 병원비로 날리고 무일푼이 된다. 사고를 당한 후로 구포는 매일 술에 절어 살고 설상가상으로 란체까지 나타나 그녀를 더욱 힘겹게 한다. 결국 제르베즈는 한 지붕 밑에 한심한 두 남자를 부양하게 된다. 삶에 지친 그녀는 결국 목로주점에 틀어박혀 술독에 빠져 지낸다. 그리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어린 딸 나나는 거리를 홀로 돌아다닌다.
사회적인 억압 때문에 의존성을 담보로 착취당하며 가부장적 남성들의 횡포에 얽매여 살던 여성들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작품들은 우리 방화(邦畵)들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신세는 임권택 감독의 1987년도 영화 <아다다>에 나오는 벙어리 여성이다. 계용묵의 소설 『백치 아다다』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녔지만 단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논 몇 마지기에 팔려, 몰락한 양반 집에 시집을 간 아다다의 비극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아다다의 남편은 술만 마시는 데다가 그녀를 구박하기 일쑤고, 결국에는 어느 날 갑자기 만주로 떠나더니 아편장사로 큰돈을 벌어 다른 여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온다. 아다다는 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친정으로 가지만 친정부모는 출가외인이라며 받아주지도 않는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자립적인 삶이 불가능했던 시대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비극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현실은 오래전의 일만도 아니었다. 이장호 감독의 1974년도 영화 <별들의 고향>에 나오는 경아(안인숙 분)는 현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스스로 삶을 지탱해나가지 못한다. 여러 남자들을 거치면서 계속 버림을 받은 그녀는 결국 알코올 중독에 빠져 추운 겨울날 눈 위에서 최후를 맞는다.
짚신도 짝이 있다: 의존적 성격의 사람은 여성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소위 마마보이로 불리는 남성들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들을 배우자로 선택해, 엄마의 상징적인 대리인으로 여기며 영원한 응석받이로 살아가기도 한다. 물론 궁합이 맞으면 별 탈 없이 살아가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부부갈등으로 집안에 분란이 생길 여지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부모의 지나친 과잉보호 속에 자랐거나, 아니면 어린 시절에 너무 일찍 부모와 떨어져 지냄으로써 심한 분리불안을 겪었을 가능성이 많다. 결국 아동기 시절에 안정적인 부모자식 사이에 관계 형성의 경험이 그 사람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식농사는 배불리 먹이고 공부를 잘 시키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다. 인간의 삶은 머리로만 사는 게 아니라 심리적 관계의 틀 안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홀로 서지 못하는 사람은 곧 관계 형성에 실패를 거듭하기 마련이어서 사회생활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기 쉽다. 그런 점에서 부모자식 간에 이루어지는 심리적 유대관계의 중요성은 백 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래서 결혼도 하는 것이고 부부끼리 상호 의존해 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관계가 아니라 전적으로 상대에게 매달려 사는 것은 이미 균형이 깨진 삶이요, 떳떳하지 못한 비굴한 삶일 뿐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상대의 그런 태도를 원하고 즐기는 사람도 많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참으로 요지경이다.
2부_ 욕망과 충동의 늪을 헤치고
누구도 못 말리는 관음증
타인의 사적인 모습을 은밀히 엿보는 일에서 쾌감을 얻는 관음증(voyeurism), 또는 절시증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사실 한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매우 보편적인 관음증적 욕구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초의 관음증적 호기심은 당연히 부모의 침실을 엿보고 싶은 유혹에서 비롯된다. 그런 행위는 일찍부터 금기사항에 속하는 일이었다. 우리의 오랜 풍습에도 신혼부부의 첫날밤 장면은 문풍지에 침을 발라 몰래 엿보는 일이 예사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차라리 묵시적인 합의에 의한 장난기 어린 애교에 가깝다.
오늘날에 와서 사생활 침해는 명백한 범법행위에 속한다. 그래서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수단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는데, 성능 좋은 망원경의 발명으로 그런 욕구의 충족이 더욱 수월해졌으니 인간의 욕망은 그야말로 말릴 도리가 없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영화 보기도 일종의 엿보기 행위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 각자의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볼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리기 어려운 관음증적 욕구는 포르노 또는 야동을 통한 타인의 침실 엿보기가 될 것이다.
몰래 엿보기의 유혹: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유작인 1994년도 프랑스 영화 <레드>에 나오는 은퇴한 전직 판사 조셉(장 루이 트렝티냥 분)은 남의 집 전화를 도청하는 버릇이 있는 노인이다. 어느 날 그는 운전 중에 자신의 개를 치었다고 찾아온 여대생 발렌틴(이렌느 야곱 분)을 처음에는 냉담하게 대하지만, 차츰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화되어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러나 발렌틴은 조셉이 이웃에 사는 법대생 오귀스트와 그의 여자 친구 카린의 대화를 엿듣는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한 나머지 혐오감마저 느낀다. 물론 그녀는 나중에 노인이 왜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하기에 이르렀는지 그 속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배창호 감독의 1983년도 영화 <적도의 꽃>에 나오는 주인공 M(안성기 분)의 정신 상태는 매우 편집광적으로 묘사된다. 그는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미모의 여성 선영(장미희 분)을 망원경으로 훔쳐보다가 매료되고 마는데, 선영에 대한 집착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어 급기야는 광기로 변질된다. 백수건달인 그는 부유한 사업가의 정부인 선영 때문에 단지 홀로 애만 태우는 게 아니라,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을 하나둘씩 파멸시키는 집요함을 보인다. 어렵게 그녀의 환심을 사 마침내 선영의 사랑을 얻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광적인 사랑에 낙심한 그녀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타인의 삶을 엿보고 감시하는 행위로 인한 참담한 결말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1974년도 영화 <컨버세이션>에서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도청 전문가 해리(진 해크만 분)는 타인의 비밀을 염탐하는 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 결국에는 오히려 그 자신이 도청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피해망상에 빠져 자신의 온 집 안을 뒤지며 벽을 뜯고 엉망으로 만들어놓는다.
이와는 반대로 플로리안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 나오는 비밀경찰 비슬러는 전혀 상반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해리는 자신의 직업적인 도청 업무를 통해 그 자신이 스스로 무너지고 말지만, 비슬러는 반대로 자신이 감시하는 대상의 삶에 오히려 감동받아 새롭게 거듭난다.
관음증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장면은 빔 벤더스 감독의 1984년도 영화 <파리, 텍사스>에도 나온다. 가출한 아내 제인(나스타샤 킨스키 분)을 찾아 나선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튼 분)는 오랜만에 재회한 아들 헌터를 데리고 그녀가 있는 휴스턴으로 간다. 그러나 제인이 하는 일은 놀랍게도 밀실에서 스트립쇼를 보여주는 다소 변태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반투명 거울을 사이에 두고 손님과 전화로만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여자는 손님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트래비스는 밀실에 들어가 제인과 전화통화를 하며 그동안의 사연을 마치 제3자의 이야기처럼 털어놓게 되고, 그 이야기를 들은 제인은 그 손님이 자신의 남편임을 알게 된다. 마침내 트래비스는 모자의 상봉을 지켜본 후 홀로 그 도시를 떠난다. 교류가 단절된 현대인의 소외 문제가 물씬 묻어나는 씁쓸한 이야기다.
인간의 끈질긴 성적 호기심: 인간의 욕망은 꼬리가 잡히지 않는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다. 그것은 가위로 자를 수도 없고 불태워버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 모든 욕망을 다 허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간의 자아란 결국 욕망과 그것을 감시하는 초자아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을 모색해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 가운데 가장 물리치기 어려운 것이 성적 욕망이요, 호기심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욕망을 해소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보다 소극적인 형태의 관음증적 방법으로 부분적인 해소를 시도하기 마련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포르노를 감상하는 것이다.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고 정사를 나누는 타인의 밀실을 직접 엿보고 싶은 유혹은 분명 도착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하기야 부모의 침실을 엿보고자 하는 보다 근원적인 욕망도 존재하는데, 아들과 며느리의 침실을 엿보기 위해 밤잠을 설치는 나이 든 어머니의 질투심도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의 관음증적 욕구는 실로 매우 다양하고도 광범위한 형태로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가 매일처럼 소파에 앉아 몰입하며 즐기는 TV 드라마 역시 영화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3부_ 갈등의 고리를 풀어라
피할 수 없는 부부갈등
남녀가 만나 혼인서약을 맺는 순간, 이제부터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 굳게 믿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갈등의 고리는 엮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심리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서로의 매력에 이끌려 부부로 맺어지지만, 함께 살을 맞대고 살기 시작하면서 서로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상대의 결함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어떤 부부들은 신혼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서로 부딪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동안 각자가 지닌 해묵은 갈등들이 본격적인 부부생활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시댁과의 갈등, 고부간 갈등, 처가와의 갈등, 성적인 갈등, 성격적인 차이, 출산문제, 양육문제 등 온갖 갈등들이 새삼스레 풀어야 할 과제로 주어진다. 그래서 결혼은 인격적 성숙도를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은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부부는 흔들리지 않는 애정과 신뢰로 그런 갈등들을 헤쳐 나가기 마련이지만, 그렇지 못한 남녀들은 이미 결혼 초부터 위기를 맞는다.
위기를 맞이한 부부의 자화상: 부부의 위기를 묘사한 영화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1966년도 영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가 있다. 역사학 교수 조지(리처드 버튼 분)와 그의 아내 마사(엘리자베스 테일러 분)는 허구와 위선으로 가득 찬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부부로, 서로에 대한 경멸과 환멸을 가졌지만 오로지 아들에 대한 환상을 통해 그 관계를 가까스로 유지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부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닉과 하니 부부가 초대를 받아 방문한다. 그러나 손님을 초대해놓고도 조지와 마사는 그들 앞에서 치열하게 말다툼을 벌이며 자신들의 치부를 다 드러낸다. 손님들이 돌아간 후 단둘이 남게 된 조지와 마사는 그들에게 아들이라는 존재는 애당초 있지도 않았던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고, 결국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피에트로 제르미 감독의 1961년도 코미디 영화 <이혼-이탈리언 스타일>에서 시실리의 귀족 페르디난도(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분)는 권태에 빠져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 남성으로, 수다스런 아내 로살리아(다니엘라 로카 분)를 너무도 지겨워한 나머지 그녀를 죽여서 없애는 공상에 빠져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페르디난도는 함께 여름을 보낸 아름다운 사촌 안젤라(스테파니아 산드렐리 분)와 사랑에 빠진다.
페르디난도는 법으로 이혼이 금지된 상황에서 안젤라와 결혼하기 위해 가장 명예로운 살인 방법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든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아내를 살해한 페르디난도는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와 안젤라와 결혼한다. 인생은 40부터라며 꿀맛 같은 행복에 취해 요트 여행을 즐기는 페르디난도지만, 안젤라는 요트를 모는 젊은 총각의 몸을 발끝으로 은밀하게 건드리며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