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마음대로 고르세요

켄트 그린필드 지음 | 푸른숲
마음대로 고르세요

켄트 그린필드 지음

푸른숲 / 2012년 9월 / 320쪽 / 13,000원





당신을 위한 선택은 없다



선택, 책임지지 않을 권리

사람들은 항상 선택을 한다. 불안감을 일으키는 커피와 허리 살을 찌우는 프라푸치노 중에서 선택을 하고, 기름 잡아먹는 SUV 차량과 고결한 척 뻐기는 하이브리드 차량 중에서 선택을 한다. 대학원에 진학해 사색에 잠길 것인지, 9시부터 5시까지의 쳇바퀴 생존 경쟁 속에서 살 것인지도 다 선택의 문제다. 미국의 여성 사회운동가 엘리너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자기 삶을 구축하고 자기 자신을 만든다…… 우리가 하는 선택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사람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정의되고, 그 선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개념은 미국식 스토리의 핵심이다. 여덟 살 어린아이라도 이해해야 할 내용이다. 그런데 부모들만이 자녀에게 이런 개념을 가르치는 건 아니다. 선택의 개념은 일상의 광고는 물론, 정치 이론과 법 제도의 중심을 차지한다. 우리는 선택을 우상화하고, 이를 이용해 정치적인 대의(낙태할 권리는 그 지지자들에게는 '선택할 권리'다)부터 패스트푸드("마음대로 고르세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그런데 만약 선택이 속임수라면? 생각보다 우리의 선택 능력이 너무 보잘것없다면 어떻게 할까?

상황이 선택한다: 여러분이 수공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작은 공장에서 손도끼에 색을 칠하는 작업인데, 색을 칠한 도끼는 머리 위 건조대에 올려놓고 말린다. 그 공장에서 여러분은 수년간 일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고용주가 도끼 건조대를 새로 설치했는데, 언뜻 보니 새로 매단 선반이 영 불안하다. 만약 선반이 무너지면 건조 중인 도끼가 떨어져 부상을 입을 게 틀림없다. 그래서 고용주에게 새 선반이 위험하니 다시 설치해야 한다고 미리 말을 꺼낸다. 고용주는 주의 깊게 듣지만 선반을 고치지는 않겠다고 한다. 고용주 왈, 그건 일하는 사람의 선택이란다.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하든지, 아니면 나가라는 소리였다. 여러분은 일자리를 놓칠 수는 없어 입을 다물고 위태로운 선반 아래에서 계속 일을 한다. 이렇게 묵묵히 일을 하는 것이 진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선반은 실제로 떨어져, 손도끼 칠장이 헨리 램슨은 부상을 입었고, 실제로 소송도 걸었다. 당시 매사추세츠 법원은 사건을 판결하면서 고용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판결문은 약 백 년 전 올리버 웬델 홈즈 2세가 작성했는데, 홈즈 판사는 램슨이 선반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터에 남기로 결정한 것은 위험을 감수하기로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옛 사건은 한낱 구닥다리 얘기처럼 들린다. 우리는 오늘날 고용주라면 안전한 작업 환경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책임은 법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의무이며, 책임을 소홀히 할 경우 소송에 휘말리고 감사를 받는다. 그렇다면 이런 판결을 바라보는 우리들 현대인의 감성은 달라졌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유는? 이제 머리에 손도끼 맞은 사례는 잠시 접어두고, 얼굴에 야구공 맞은 이야기와 이 사례를 비교해보자. 1998년, 코스타라는 여성은 친구와 함께 '보스턴 레드삭스' 경기를 보러 갔다. 그녀에게 야구 경기 관람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날 늦게 도착한 코스타는 선수 대기석 뒤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레드삭스 팀 타자인 대런 루이스가 파울볼을 쳤는데, 그 공이 코스타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공이 날아간 속도가 시속 144킬로미터 이상이었으니, 공이 야구방망이에 맞는 순간 코스타가 몸을 피할 시간은 단 1초뿐이었다. 코스타는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병원비는 거의 50만 달러에 육박했다. 그래서 코스타는 레드삭스를 상대로 보스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그녀의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무리 한 번도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없다 해도 야구 경기 관전의 위험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에 대한 이해 역시 선택의 개념에 달려 있다. 대다수의 반응은 '야구 경기를 관전하다가 공에 맞을 수도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관람표에도 그 내용이 명시되어 있고.'였다. 코스타는 스스로 선택했고, 그 결과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뭔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램슨의 선택과 비교했을 때 코스타의 선택은 자기 의도가 많이 결여되어 있다.

즉 램슨이 작업 중에 닥칠 위험을 꽤 상세히 파악하고 있던 반면, 코스타는 야구장에 들어선 순간 자기에게 닥칠 위험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했다. 만약 입장권 뒷면에 경고와 책임 면제 문구가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면, 말 한번 바로 해 보자. 이 글을 쓰면서 예전 관람표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뒷면의 경고 문구를 "깨알만 한 글씨"라고 표현한다면 그나마 그것도 엄청 부풀려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코스타가 소송에서 마땅히 이겼어야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서 얼굴에 야구공을 맞을 위험을 미리 간파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법학과 교수인 나는 여러 해 동안 학생들과 이 두 사건을 두고 토론을 벌여왔다. 대다수 학생들이 코스타는 소송에 지는 게 마땅하고, 램슨은 이기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부상당할 위험을 실제로 알고 이해했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기로 선택한 사람은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위험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 희생양이 되기로 선택하지도 않았던 사람은 보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무엇 때문에 이런 직관이 생겨났을까? 수많은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일이 야구보다 더 중요하다는 믿음이 있을 테고, 종업원에 대한 고용주의 책임이 야구 구단이 팬을 상대로 지는 책임보다 크다는 통념도 있겠고, 손도끼 공장의 안전사고 예방에 드는 비용은 야구 구장에서 팬을 보호하는 비용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수준이라는 생각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두 사건 모두 램슨과 코스타가 내린 선택의 본질 탐구에 달린 일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도출하게 되는 결론은 선택과는 거의 무관하다. 또는 우리가 아는 선택이란 것이 상황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바뀐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게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틈만 나면 떠들어대는 선택과 개인의 책임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 틀림없다. 또한 그것은 우리를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어갈 수밖에 없는 미사여구일 뿐이다.

누가 '선택'을 떠벌리고 있을까?: 이 책은 우리가 선택에 집착하고, 선택에 일관성 없는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꼬집고 있다. 즉 선택과 개인 책임이라는 미사여구가 주변에 넘쳐나는데도, 정작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인정받고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단호해지고(코스타가 야구장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더라도, 야구공에 맞으면 자기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때로 우리의 판단은 어느 때보다 관대하다(허리케인이 다가오는 와중에 집에 남아 있었던 뉴올리언스 주민들은 대피했어야 마땅했지만, 그게 다 그들의 잘못은 아닐뿐더러 그들도 당할 만큼 당했다. 좀 쉬게 해주자). 이와 같은 우리의 일관성 없는 반응은 한정된 상황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형법부터 비즈니스까지, 성생활부터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이와 비슷한 난제에 부딪힌다. 그 개념이 별 의미가 없다면 그다지 큰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모든 법의 중심 개념이자 '결정적인' 개념이 될 수 있고, 경제학, 신학, 정치 이론, 마케팅, 문학, 심리학, 철학의 근간을 이룬다.

아무튼 선택이란 개념은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그 단어가 뜻하는 바와 그 영향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 책의 목적 한 가지는 선택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여러 다른 방식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 또 이 책에서는 우리 대부분이 직관적으로 짚어보는 생각, 즉 선택이 강요된 것이며 조작되었고 강제로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파헤쳐보려 한다. 아울러 이 책에서 파헤칠 내용은 더 있다. 선택이 그렇게 변하기 쉽고 불명확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선택에 대해, 또 그 사촌격인 개인 책임에 대해 귀가 닳도록 들어야 하는 걸까?

예로 건강보험 개혁안, 동성애자 권리, 교육 정책, 빈곤, 재난 구조, 낙태와 같이 다양한 문제를 놓고 싸울 때, 왜 그 많은 토론에서 선택과 개인 책임에 대한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것일까? 개인주의 문화에서 선택이라는 미사여구가 주는 위력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즉 우리에게는 선택할 게 차고 넘치며, 또 우리가 한 선택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착각'에 빠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많은 정치 싸움에서 선택을 우선적으로 거론하는 속 깊은 이유가 따로 있다. 대개의 경우, 선택이라는 미사여구를 내세우면 권력을 손에 쥔 사람에게 이득이 돌아간다. 이게 바로 힘 있는 자들이 떠벌리는 미사여구다. 즉 "사람은 자기가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면, 힘 있는 자들에겐 득이 되지만, 힘없는 자들은 대개 상처를 입는다. 왜냐하면 선택은 이미 만들어진 테두리이고, 그 안에서 사회 정의, 시민 자유, 경제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운동은 거부당하고, 또 이런 운동에 반대하는 자들이 사람들의 기존 행동을 가리켜 선택을 대변하는 행위라고 못 박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 상황 안에서 발생하는 불의에 맞서 주장을 펼칠 때는,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택이 아니며, 실제로 선택한 행위에도 그걸 선택한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맞서거나, 그런 선택은 존중해선 안 된다고 반박해야 한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종종 보기보다(어떤 경우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실제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지적해 정당한 주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처럼 선택의 여지가 결여된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보진 않는다. 어떻게 하면 선택을 하는 데 자기 의지를 좀 더 반영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의사 결정의 한계 상황을 어떤 식으로 고려해 법과 공공 정책을 적용해야 할까? 개인과 법은 선택을 구축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지만, 일단 인간 존재로서의 한계를 이해하고 여기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좀 더 현명하고 자신 있게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선택의 자유를 되찾을 것인가?



개인 책임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라

내 마음인데, 내가 책임지면 되는데, 뭐 어때?: 1980년대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나는 괜찮은 직업은 가졌지만 친구는 몇 명 없었다. 생전 처음 나 스스로 삶을 꾸려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교통수단이 필요한데 차를 살 돈은 없었기 때문에, 항상 헬멧을 썼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는 헬멧 의무 착용 규정이 없었고, 오토바이와 운전 기술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나는 맨머리로 타는 일이 잦아졌다. 당연히 바보 같은 짓이었다. 두 번이나 사고가 날 뻔했지만, 헬멧 없이 즐기는 모험의 기쁨에만 매달렸다. 위험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혜택은 즉각적이고 구체적으로 맛볼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 책임에 대해 물어보겠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답하기 매우 쉬워 보인다. 헬멧을 쓰지 않고 오토바이를 타는 행위는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바보짓으로, 순식간에 날아갈 기쁨을 위해 중상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게다가 나 자신 이외에 신체적인 부상을 입은 사람이 없더라도, 위험의 불똥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튄다. 따라서 개인 책임이 진실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의 행위로 인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이 떠안게 될 비용을 엄격히 따져서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책임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분명 헬멧을 써야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견해로 문제를 바라볼 수도 있다. 어쩌면 개인 책임은 헬멧 착용 여부를 개개인이 알아서 선택한다는 취지로 이해하는 게 가장 타당할지 모른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개인 책임은 반드시 심사숙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결정하느냐의 문제로 돌아선다. 사람들은 다들 스스로 선택하며, 자기 운명의 주인이다. 어리석거나, 사려 깊거나, 한 치 앞을 못 내다보거나, 신중하거나, 모두가 자기 선택이다. 위험에 신경을 쓸 수도 있지만 멋있어 보이는 게 우선일 수도 있다. 다 자기한테 달렸고, 자기 책임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면 이 논리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개인 책임이 내가 원하는 대로 저지르는 행위라면, 그야말로 '책임'이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즉 개인 책임을 선택의 관점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견해는 실질적인 결정을 하는 데 안내자 구실을 전혀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선택의 관점에서 보는 개인 책임은 개개의 결정을 위한 지침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고, 개인의 행동에 대한 길잡이도 결코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헬멧을 써야 할지, 또는 비슷한 문제로 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할지, 허리케인이 곧 닥쳐오는데 그냥 집에 남아 있어야 할지, 이런 문제를 판단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라고 말해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개인 책임은 공공 정책의 앞잡이 구실만 할 뿐이다. 국민에게 족쇄를 채워놓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라고 허용해준 다음 그 결과를 다 감당하라는 식이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개인 책임을 운운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건강보험 개혁안을 반대할 때, 손해배상 청구 소송 개혁안을 지지할 때, 노숙자 문제나 허리케인 대피 지연에 따른 문제를 설명할 때 버젓이 사용된다. 이런 식의 개인 책임은 개인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미사여구를 토대로 만들어져, 정부는 작아야 하고 관여하지 말아야 하며 개인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정치 쟁점을 부각시킨다. 다시 말하면 개인 책임을 선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정부 및 법적 태만과 허울 좋게 아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개념으로 봤을 때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어, 이리저리 조금만 찔러봐도 그 관계는 허물어지고 만다.

건강보험과 개인 책임의 칼날: 다시 헬멧 선택의 문제로 돌아가, 이번에는 헬멧을 쓰는 게 현명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물어보자. 만약 개인 책임의 논리를 믿는다면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에 찬성표를 던져야 할까? 대답은 물론 어떠한 개인 책임관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심사숙고해서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라면 오토바이 운전자의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는 법규가 그 자신의 개인 책임관에 위배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선택은 각자가 해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라면, 정부는 헬멧 착용에 관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선택의 관점에서 보는 개인 책임관의 핵심은 각자의 결정에 대해서는 스스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논리다. 사람들은 그 결과를 감내해야 하고 정부는 이들을 보호해선 안 된다. 어떻게 이런 논리가 나오는 것일까? 어느 날 밤, 내가 시내에서 놀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만 균형을 잃고 나무에 부딪혔다고 가정해보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데 구급차가 도착한다. 구급 대원이 엉망이 된 내 몸을 보고, 헬멧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고 처리 차원에서 볼 때, 선택의 관점에서 개인 책임을 존중하는 입장이라면 구급 대원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구급 대원은 나를 도와줘야 한다. 응급실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우연히 사고 현장에 있던 구경꾼 역시 마찬가지다. 내 자신의 잘못이 전혀 아닌 사고는 물론이고, 내 선택으로 인한 부상까지 모두 돌봐줘야 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부상당한 사람을 도로에 그냥 방치해두는 사회가 아니다. 부상의 원인이 당사자 자신에게 있느냐 아니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