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공동체 뚝딱 만들기
시골 한의사 외 지음 | 수선재
생태공동체 뚝딱 만들기
시골 한의사 외 지음
수선재 / 2012년 7월 / 260쪽 / 13,000원
뜰아래 반짝이는 햇살같이_ 지구소풍
나는 동요를 좋아한다. 동요를 아이들의 노래라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닌 것이, 멜로디도 맑고 밝지만 가사 하나하나가 참 순수하면서도 진리에 닿아 있다. 동요처럼만 살면 세상은 참 선하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동요를 부르면 왠지 눈물이 날 때가 많은데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다. 눈물이 나는 이유는, 동요의 내용처럼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내 인생에 대지진: 그날도 아침나절은 동화 같은 날이 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때였지만 도쿄의 날씨는 한국보다 훨씬 따뜻해서 봄기운이 완연했다. 나는 당시 히토츠바시(一橋) 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파견되어 가족과 함께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외출을 했는데 갑자기 가슴이 몹시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달그락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점점 거칠어지는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이었다. 한 달에 몇 번이나 겪는 일이었기에 처음엔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지진은 달랐다. 2011년 3월. 일본 대지진의 시작이었다.
바로 서 있기도 힘들었고 무언가를 잡을 수도 없이 계속 진동이 이어졌다. 순간 건물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조건 아이들을 끌어안고 건물 밖으로 튀어 나갔다. 여기저기서 가족과 연락이 안 된다며 전화하는 사람들로 술렁이고 있었다. 모든 전기와 통신이 두절되었다. 막상 현지에서는 정전으로 방송을 들을 수 없어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는데 이미 전 세계에 속보로 일본의 지진이 생중계되고 있었던 거였다. 전해 들은 지진 지역의 참상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날부터 우리 가족은 옷을 갖춰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도록 필수품을 배낭에 넣어 현관 앞에 둔 채였다. 도쿄 지역에서도 단수와 단전이 시차별로 시행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쿠시마 원전이 터졌다. 그렇게나 침착하던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식료품을 파는 상점마다 줄이 수십 미터씩 이어졌다. 엄청난 자연재해는 지진에 단련되고 질서와 배려 정신이 투철한 일본 사람들마저 뒤흔들어 놓았다. 지진이 일어난 다음 날 오래 줄을 서서 어렵사리 들어간 상점에는 이미 쌀이 동나 있었고 생수도 품절이었다.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식자재들은 빠른 속도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남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는 일본이지만 지진발생 일주일 만에 도둑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주유소에는 수백 미터씩 차들이 줄을 서 있었고 공항은 외국인들로 엑소더스를 방불케 하였다.
자연의 힘은 강했다. 세계 경제대국을 자랑하던 일본이 단번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나 지진 대비가 상대적으로 덜한 나라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더라면 하는 예측을 하는 것조차 끔찍한 일이었다. 아비규환 그 자체가 아닐까. 우리가 누리고 있는 편리한 삶이 얼마나 사상누각 위에 지어진 것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나는 지진발생 일주일 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서울을 떠난 이유: 얼마 후 나는 아내와 세 아들과 함께 공동체 마을로 이주했다. 일본에서 겪은 일로 시기를 조금 앞당겼을 뿐, 실은 한참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유는 사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거창하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좀 지쳐 있었던 것 같다. 일하기도 싫었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당시 나는 모든 것에 회의가 있었다.
내가 직장에서 하던 일은 수능시험을 비롯한 국가시험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었다. 보람 같은 것은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무탈하게 업무가 수행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거의 13년을 근무했다. 그 사이 몸은 둔해졌고 곳곳이 쑤셨다. 마음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국가의 교육을 담당하는 직업이라는 명예, 편안하고 안전한 직장이라는 남들의 부러움은 허울 좋은 것이었다. 마치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여 그 눈물을 먹고사는 직업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 때도 있었다. 교육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가치의 순위에서 첫 번째가 아니었고, 오히려 생계를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것이 싫다고 해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는 늘 정형화된 기준이 있었고, 그 기준을 만족시켜야 정상적인 사회인 취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밥벌이도 가능했다. 현실을 유지하는 일은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하고 싶지 않아도 꾹꾹 참아가며 몸과 마음을 바쳐야 가능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에 따라 사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어려서부터 주변의 시선과 기대에 따라서만 살아왔기에 그것이 바른 삶이라고 암묵적으로 배워왔고, 그렇게 살도록 잘 길들여져 왔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조차 비집고 나올 틈이 없었다.
뭐 먹고살려고 하는가?: 그러다가 접한 것이 '공동체'였다. 생태적이고 대안교육적인 삶을 지향한다는 말에 눈길이 끌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 자체가 나에게는 놀라움이었다. 속된 말로 '필이 꽂혔다'고 할까. 혼자서는 도저히 실행할 엄두가 안 나던 일을 여럿이 모여서 이미 추진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라는 점과 교육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나의 내면의 욕구와 맞아떨어졌다. 같은 직장에 다니던 아내의 뜻도 그러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총 14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과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뭘 먹고살려고 하는가?" 직장을 벗어나는 내게 동료들이 가장 많이 물었던 질문이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질문에 근심만 있었던 것은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삶을 그들도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에 그 질문에는 부러움과 궁금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다. "사실 나도 두렵다. 어떻게 먹고살지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늙어서 땅을 칠지도 모른다. '왜 그때 다른 길로 한 발짝 내딛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후회할 것이 새로운 길을 가는 것보다 훨씬 두렵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기회를 선택했다."
이상한 세상: 이곳에 오기 전의 삶은 한마디로 내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입었을 뿐 편안한 옷도 원하는 옷도 아니었다. 남들의 선망을 받으며 박사과정까지 마쳤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화려한 껍질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아도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을 오랫동안 갈망해 왔지만 쉽지 않았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나 자신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인정받고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에 누구보다 나 자신이 길들여져 있었다. 그래야만 더 많은 혜택과 보상을 받기 때문이었다. 늘 싸워서 이겨야 하는 삶과 매번 이기지 못해 좌절하는 절망의 삶을 나도 모르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이길 수 없고 모두가 패자인 참 이상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된 것이다. 그때가 이미 30대 후반이었으니……. 이미 인생의 절반을 살았지만 아직 살아갈 날도 많이 남은 적당한 나이. 지나간 것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앞으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뒤늦게 자신의 매트릭스를 인식한 네오는 그 사슬을 끊기 위해 발버둥 치다 마침내 기존 사회와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탈출에 성공하게 되었다.
공동체 마을을 만들고 가꾸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나와 처지가 비슷했다. 저마다 잘나가던 직업인이었고 유능한 사회인이었지만, 그런 삶에서 기쁨보다는 의문을 발견한 분들이었다. 그리고 과감히 그 대열에서 이탈하여 행복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미래를 이어갈 아이들에게 지금과 같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회적 성공이라는 답답한 기대의 굴레를 벗어내니 헐렁해진 빈 곳으로 자유의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을을 통해 숨을 쉬기 시작했다.
생태공동체 예찬: 도시에서 태어나 생활해온 사람이 도시를 떠난다는 건 무인도로 가는 것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당장 생계를 어떻게 하고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지 대책이 없으며, 알게 모르게 누려왔던 도시의 혜택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행히 나처럼 가족들이 뜻을 같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오히려 더 막막함을 느끼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기대만큼이나 걱정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결국 많은 사람들은 막연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평생을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존에 받던 연봉을 받을 수는 없지만 생활의 질은 한층 올라갈 수 있다. 같은 돈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아진다. 도시에서는 한 끼 외식으로 나가는 돈으로 마을 주민 전체가 배부르고 즐겁게 식사를 할 수 있다. 또 집집마다 세탁기와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이 필요하지 않다. 웬만한 일은 공동 시설을 이용하면 되니 구입비용이 들지 않고 생활이 단순해진다. 공동의 일을 통해 업무를 분담하므로 자신을 위한 시간도 확보된다. 직장 일에 온통 매달려 나의 삶이 없던 때와는 천지 차이다. 게다가 시골에 오니 산천에 나는 풀은 대부분 먹을 수 있는 양식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온갖 양식이 제 계절에 맞추어 어김없이 자라난다. 돌아보면 먹을 것 천지이고 모두 자연이 대가 없이 베풀어 주는 것들이다. 뭘 먹고살 것인가? 일단 와 보면 해결이 난다.
외부에 나갔다가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아이들이 반겨준다. 마을 곳곳을 누비며 노느라 바쁜 아이들은 삼촌이 왔다고 손을 흔들며 달려온다. 마땅한 놀이 시설도 없는데 참 즐거워 보인다. 마을 전체가 놀이터이다.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공동체의 귀한 가치 중 하나이다. 교육 문제 또한 공동체 내의 학교에서 모두 해결이 되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자연과 교감하며 친환경적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다양한 예술 활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향유할 수 있으며, 내가 디자인한 멋진 집을 손수 지어서 살아볼 수도 있는 곳. 장차 공동체 마을끼리 연결이 되면 큰돈 들이지 않고 여행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인생에서 좋은 공부의 교재이다. 옛 선비들이 봇짐 하나 들고 지방에서 서울까지 유유히 도착했듯이, 우리 아이들은 만나는 마을이 숙소가 되고 만나는 사람을 스승으로 하여 배움의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여쁜 삶을 준비하며: 이미 국내외에서 공동체 마을에 대한 시도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40여 개 국에서 온 2,000여 명이 다양한 영적 실험을 하면서 어울려 사는 인도의 오로빌 공동체가 있고, 튜닝이란 방법을 통해 자연과 직접 대화하며 농사를 지으면서 갖가지 인성 계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스코틀랜드의 핀드혼 공동체도 있다. 철저한 집단소유를 실현하면서 어울려 사는 야마기시 공동체가 있고, 무교회 정신에 입각해 설립되어 국내 최초로 오리농법을 보급하여 퍼트리면서 지역민과 결합해 독특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풀무농고가 있다. 물론 이 밖에도 훌륭한 공동체들이 많으며 내가 살고 있는 선애빌도 그중 하나이다. 모두 새로운 대안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흐름 위에서 열심히 노를 젓는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막연히 생태적인 삶을 동경하고 교육 문제를 개탄하다가 선택한 공동체 생활은 더 큰 희망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일본에서의 짧은 재해 체험은 그러한 필요성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었다. 쓰레기 줄이기와 에너지 절약, 생태화장실 사용을 통한 자원의 순환과 빗물의 재활용, 텃밭과 산야초 효소 등을 통한 건강한 먹을거리 생산 등을 공동체 생활에서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삶이 도시인들에게는 그저 불편하게만 여겨질 수 있으나 만일 일본 대지진 같은 재해라도 겪는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자연재해를 막을 수는 없어도 생태적 삶은 그 강도를 낮추고 잘 극복하게 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 집을 짓듯이 우리가 살 마을을, 세상을 하나씩 함께 만들어 가면 좋겠다. 경제가 튼튼한 일본이 자연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는 사실은 물질에 바탕을 둔 삶의 한계를 보여준다. 우리 마을도 아직은 시작 단계라 장차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삶에 대한 염려는 다양한 가족이 모여 큰 가족을 이루면서 희망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저 주민들끼리 모이면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 자연과 교감하며 친환경적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다양한 예술 활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향유할 수 있으며, 내가 디자인한 멋진 집을 손수 지어서 살아볼 수도 있는 곳. 그 위에 맑은 우주기운으로 하는 명상을 통해 영성 계발까지 도모하는 완벽한 전인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자꾸만 생각하고 함께 노력하면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뜰아래 반짝이는 햇살같이,
창가에 속삭이는 별빛같이……
그렇게 반짝반짝, 오순도순 살고 싶다.
현대의 삶에 지친 사람들이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도록.
나와 내 가족도 도시를 떠나 살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내가 꿈꾸는 선인류의 삶은, 그렇게 어여쁜 동요와 같은 삶이다.
이런 대가족을 보셨나요?_ 편백향기
청천벽력 같은 암 선고: 지난 봄. 가벼운 감기로 방문했던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은 갑자기 나의 목을 유심히 보시더니 감기가 호전되면 꼭 갑상선 검사를 받아 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일주일 후 다시 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실감이 나지 않은 채 얼떨결에 갑상선 암 선고를 받았다. 수술을 위해 좀 더 큰 병원으로 입원하여 다시 처음부터 검사를 받았다. 그곳의 선생님은 너무 늦게 왔다고 하시며 몸의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었다고 하셨다. 정신이 없었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수술을 위해 입원을 하고 다시 초음파 검사를 하던 중 검사를 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번에는 임파선까지 전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급히 수술이 잡히고, 여러 가지 검사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나는 환자용 얇은 옷을 입고 바들바들 떨며 지친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의 몸이지만 병 앞에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고 대책도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밖에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병은 나에게 찾아왔고, 수술은 어느 사이에 현실이 되어 있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가족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모든 감정을 포기하고 그저 따르며 묵묵히 수술실로 들어갔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수술실은 시원하고 아늑했고 나는 편하게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길지 않은 나의 삶이 영화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내가 아닌 타인을 보듯이.
내 인생은 내 뜻대로: 결혼 전 난 꽤 부지런하고 호기심 많은 아가씨였던 것 같다. 서울의 한 대학본부에서 일하면서도 새벽부터 어학원에서 영어와 일어를 공부하곤 했다. 그곳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은 일본인이었다. 나는 남편을 따라 일본 치바현에서 살게 되었고, 아들이 태어나면서 서서히 외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마을은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은 조용한 곳이었다. 모든 것은 소리 없이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예의가 발랐다. 일본어를 전공했던 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어 능력시험 1급을 따게 되었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나름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친구와 일본인 남편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항상 나의 마음속에 있었다. 내가 느낀 일본인은 친절하고 예의 있지만 한편으론 몹시 개인주의적이었다. 절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사람들, 그것은 나 또한 그들에게 이유 없이 신세를 질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런 것 같다……. 처음엔 몰랐다. 괜히 마음이 시리고 외로운 것을 산후우울증 탓으로 돌렸으니.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의 정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마을 전체가 커다란 가족이나 다름없는 한국의 경계 없는 문화, 정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떠나오니 피부에서부터 차가움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도 요즘은 옛날 같지 않다고 하지만, 적어도 내가 살던 문화는 그렇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