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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했는가?

베빈 알렉산더 지음 | 홍익출판사
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했는가?

베빈 알렉산더 지음

홍익출판사 / 2012년 3월 / 451쪽 / 20,000원



스키피오 : 영웅 한니발을 격퇴한 로마의 청년 장군

로마는 제2차 포에니전쟁 때 북아프리카에 있는 상업국가인 카르타고의 엄청난 위협을 견뎌냈다. 카르타고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장군 중 한 사람인 한니발이 있었다. BC 218년 한니발은 5만 보병과 9천 기병을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는 군대를 파견했으나 한니발의 매복 작전에 말려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 3만 명의 군대가 대량학살을 당했다. 한니발의 장점은 기동성과 탁월한 지도력이었다. 그는 로마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과의 유대를 깨뜨려 로마에 대항하는 도시연합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 로마는 전열을 정비하고 한니발을 상대했으나 칸나에 전투에서 대패하여 7만 명의 병력을 잃고 말았다.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 로마의 스키피오 형제는 스페인에서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면서 한니발에 대한 스페인의 원조를 단절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카르타고군은 BC 211년 배티스 강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멸했고, 이 전투에서 스키피오 형제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스키피오 형제가 전사하자 로마 원로원은 스키피오의 아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스페인 총독으로 임명했다. 총독이 된 스키피오는 스페인에서 해군 함대에 적합한 유일한 항구인 뉴카르타고를 공격하였다. 그 도시는 강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바다에 돌출된 반도에 위치했고, 북쪽으로는 갯벌이 있고, 항구는 남쪽 방향에 위치하여 방어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BC 209년 스피키오는 2만 7천5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육로로 뉴카르타고 성벽에 도착하였다. 그는 어부들을 통해 뉴카르타고 북쪽 갯벌이 겉으로는 위험하게 보이지만, 간조일 때는 걸어서 쉽게 건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동쪽 벽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로마군의 정면 공격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 승리에 환호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재공격에 대비하여 동쪽 벽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이 시간 스키피오는 갯벌 맞은편 해안가에 사다리를 가진 병사들을 집결시켰다. 썰물 때가 되자 병사들은 얕은 갯벌을 통과하여, 갯벌 위에 있는 무방비 상태의 성벽을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그들은 동쪽 벽을 방어하는 카르타고군의 배후를 기습 공격하여 로마의 주력군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카르타고는 스페인 통제의 핵심기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BC 208년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이 2.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과 베큘라에서 맞섰다. 하스드루발은 스페인 및 아프리카 군대와 함께 한니발의 부대를 보강해주기 위해 이탈리아까지 육로로 행군할 계획이었다.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에 맞서 대규모 병력을 적진을 향해 곧바로 전진하는 방식에 의존하던 로마군의 전통을 깨뜨리는 전략을 세웠다. 과거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이 중앙으로 돌진하도록 유도한 뒤 로마군의 노출된 측면을 우회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한니발에게 이런 수법을 배운 스키피오는 군대를 3등분하여 중앙에는 경부대, 양쪽 날개에는 중부대를 배치했다. 이런 작전으로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베큘라 전투를 치른 뒤 군사력이 약화된 하스드루발은 BC 207년 이탈리아에 도착했지만 메타우루스 강에서 로마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전멸했고 하스드루발은 전사하고 말았다. 동생의 죽음에 한니발은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이탈리아 맨 끝 브루티움으로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편 카르타고 본국에서는 스페인에서 스키피오를 몰아내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국의 군대는 배티스 강가에서 대치하였다. 스키피오는 중앙에는 스페인 군대를 배치하고 양쪽 날개에는 로마군을 배치했다. 중앙의 스페인 군대는 느린 속도로 진격하면서 카르타고군 정예 부대를 묶어두고, 그 틈을 타서 양쪽 날개의 로마군이 적의 측면을 공격했다. 동시에 경부대와 기병은 밖으로 선회하여 적 측면의 보다 먼 곳을 우회 공격했다. 마침내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의 날개를 무너뜨렸고, 스키피오군의 거친 공격에 카르타고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스페인에서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본국을 직접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전장을 아프리카로 옮기겠다!” 그가 보기에 평화의 주된 방해물은 전쟁 그 자체보다 전쟁을 계속하려는 적의 의지였다. 그는 아프리카 원정만이 카르타고의 의지를 깨뜨려서 로마에 영구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침내 BC 204년 스키피오가 이끄는 3만 명의 로마군이 아프리카 침공을 시작했다. 겁에 질린 카르타고 원로원은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에게 본국으로 빨리 돌아올 것을 명하였다. 이는 스키피오가 예견했던 일이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군대와 멀리 떨어진 방향으로 남서쪽 바그라다스 계곡 내의 모든 도시를 공격했다. 이곳은 카르타고에 보급품과 병력을 공급하는 원천이었다. 이렇게 되자 카르타고 원로원은 한니발에게 스키피오의 약탈과 파괴를 종식시킬 것을 긴급하게 명령하였다. 이에 한니발은 자마라는 곳에서 스키피오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 스키피오는 중앙에는 중무장한 로마군단을 좌우에는 기병을 배치했고, 후방에는 경보병을 두었다.

반면 한니발은 선두에 코끼리와 경무장 부대, 그리고 1.1만 명의 무어인 용병을 배치했다. 둘째 열에는 1.1만 명의 카르타고군을 배치했고, 마지막 열에는 2.4만 명의 예비대를 두었다. 양 날개에는 기병을 배치했다. 한니발은 코끼리와 최정예 부대를 동원하여 로마군을 밀어붙였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공격이 시작되자 트렘펫을 요란하게 불어 코끼리를 놀라게 하여 코끼리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공격을 중앙에서 막으면서 기병에게 최대한 빨리 돌아와서 적의 후방을 공격하도록 했다. 만약 기병이 제 시간에 돌아오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엷은 로마군 대열이 산산조각이 날 상황이었다. 결국 스키피오의 기병은 카르타고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데 성공했고, 이로써 한니발군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카르타고군은 2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한니발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갔다.

자마 전투는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의 하나이다. 이를 계기로 카르타고는 힘을 잃고 사라졌으며, 로마는 서부 지중해를 장악하여 세계 제국을 향한 로마의 행진은 확실한 것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두 사람은 간단명료한 전략적 선택을 했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대열을 깨뜨려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코끼리를 가지고 싸우는 방법을 준비했고, 최후의 결전에 앞서 자신의 두 개 대열에서 로마군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썼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는 두 개의 요소가 로마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트럼펫으로 적의 코끼리를 놀라게 한 스키피오의 기발한 발상과 로마 기병의 우세가 그것이다. 고대 전쟁에서 기병이 제공할 수 있는 기동성과 공격력의 결합을 통한 승리를 보여주었던 한니발이 바로 그 무기로 인해 패배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스톤월 잭슨 : 적을 혼동시키고, 오도하고, 기습하라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에 비해 병력이 1/3에 불과한 남군이 소모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남부군의 장군이 한 사람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면 공격을 피하고 간접적인 수단이나 기만적인 전술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이름은 토머스 조너선 잭슨으로 사람들은 그를 흔히 스톤월 잭슨 장군으로 불렀다. 스톤월 잭슨은 북군을 우회하여 워싱턴 후방에 있는 북부 연합군의 철도와 도시들을 공격하는 전략을 제안했다. 그는 이 방법으로 북측의 재산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힘으로써 북부 사람들이 남부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부 동맹 대통령 데이비스는 이 제안을 일축해 버렸다. 그럼에도 잭슨 장군은 이 전략을 계속 추구했다.

당시 북부 연합의 링컨은 수도 워싱턴을 방어하는 데 극도로 민감했다. 이에 따라 북군 사령관 매클레런은 워싱턴 주변에 3개의 야전군 부대(맥도웰 부대, 뱅크스 부대, 프리몬트 부대) 9만 명을 배치했다. 남군은 불과 5만 7천 명이었고, 스톤월 잭슨이 이끄는 병력은 4천6백 명에 불과했다. 당시 잭슨에게는 3가지 과업이 있었다. 첫째는 셰넌도어 계곡을 방어하는 일이었다. 이곳은 남군이 북부지역으로 침공하는 발판을 제공해 주는 곳이었다. 둘째, 셰넌도어 계곡 쪽에 있는 뱅크스가 매클레런을 돕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일이었고, 셋째, 맥도웰 부대가 매클레런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1862년 뱅크스는 공격을 감행하여 윈체스터에서 잭슨을 몰아냈다. 이에 잭슨은 북군에 대한 야간공격으로 반격했다. 이 전투의 전략적인 결과는 놀라웠다. 북군은 잭슨이 소규모 부대로 공격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링컨은 셰넌도어 계곡의 안전을 염려한 나머지 맥도웰 부대에 합류할 예정이던 뱅크스 부대를 원상 복귀시켰다. 잭슨은 비록 전투에서는 졌지만 북군의 주력이 매클레런 부대에 집결하는 것을 막았고, 뱅크스와 프리몬트 장군의 두 북부군 주력부대의 주의를 끌어들였다.

뱅크스와 프리몬트는 해리슨버그에 위치한 잭슨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뱅크스가 이동해 오자 잭슨은 동쪽에 있는 콘래드스토어로 행군했다. 하지만 잭슨의 소규모 군대로는 뱅크스와 프리몬트를 분리시켜 놓을 수 없었다. 그동안 맥도웰의 군대는 계속 이동하여 리치먼드 입구에서 매클레런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맥도웰의 군대를 멈추게 하려면 어떤 조치가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잭슨은 전쟁사에 있어 가장 기만적인 작전을 감행했다. 그는 부하인 이웰 장군에게 콘래드스토어에 머물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버지니아 중앙철도의 메컴스리버역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러한 이동을 통해 북군으로 하여금 매클레런과 싸우기 위해 리치먼드로 향하고 있거나 또는 맥도웰을 저지하기 위해 프레더릭스버그로 향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로 인해 북군 국방장관 스톤턴은 맥도웰에게 잭슨의 의도가 정확히 간파될 때까지 프레더릭스버그에 머물도록 지시했다. 그동안 잭슨은 메컴스리버에서 열차를 이용하여 서쪽으로 이동하여 스톤턴에 도착하였다. 이제 그는 프리몬트와 뱅크스 군대 사이에서 두 부대를 각개 격파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잭슨은 스톤턴에서 프리몬트군을 공격하여 그들을 앨러게니 산맥 깊숙이 몰아냈다. 프리몬트군이 없어지자 불안해진 뱅크스는 북쪽 스트라스버그로 철수했다. 이곳은 윈체스터에서 남쪽으로 14마일 떨어진 곳으로 철도를 통해 워싱턴에서 군수품을 보급받고 있었다. 뱅크스는 이곳에 요새를 구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그러나 잭슨은 요새 안에 있는 뱅크스군을 직접 공격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기만전술로 적으로 하여금 남군이 스트라스버그를 곧바로 공격하기 위해 전 병력을 집결시킨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아침 일찍 군대를 이끌고 매사누텐 산맥을 넘어 북군의 후미를 공격했다. 잭슨은 단 한 번의 신속한 기동으로 뱅크스와 워싱턴 간의 직통 철로를 차단하고 북군의 동쪽 퇴각로를 끊어버렸다. 당황한 뱅크스는 윈체스터로 철수하였고 북군의 전선이 붕괴되는 것을 발견한 잭슨은 전 남부군 부대에 돌격을 명했다. 잭슨이 뱅크스군을 격멸하고 포토맥 강 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은 워싱턴에 커다란 공포를 불러일으켜, 링컨은 맥도웰 부대가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를 공격하기 위해 행군하는 것을 중지시켰다. 잭슨의 전략은 적의 취약점(북군의 수도인 워싱턴)에 대한 간접 공격이 어떻게 적을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잭슨은 데이비드 대통령과 리 장군에게 병력을 증원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잭슨의 계획은 블루리지 북쪽 협곡으로 올라가 뱅크스군의 배후를 습격하여 그를 패퇴시킨 다음, 메릴랜드와 펜실베니아를 침공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군의 배후로 역공을 취하려는 잭슨의 꿈은 데이비스 대통령과 리 장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잭슨의 제안이 리치먼드에 대한 북군의 포위를 종식시킬 뿐 아니라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잭슨이 리치먼드로 이동해서 북군을 물리쳐 주길 원했다. 1862년 6월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은 매클레런을 공격하여 리치몬드에서 몰아냈지만 엄청난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마침내 잭슨은 1863년 5월 챈슬러스빌에 위치한 북군의 배후를 공격하라는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잭슨은 이런 극적인 기동을 실행하려는 순간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고, 결국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두 달 후에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리 장군은 다시 북군의 정면을 공격하는 직접적인 전투방식으로 돌아갔지만,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면서 남북전쟁의 결과는 북군의 승리로 바뀌고 말았다.

윌리엄 셔먼 : 남북전쟁을 종식시킨 북군의 명장

1864년 초 북군은 1861년 전쟁이 시작될 때에 비해 별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북군은 남부전선에서 전투를 할 때마다 큰 손실을 입고 퇴각을 거듭했다. 반면 서부에는 북군의 그랜트 장군과 그의 수석 부관 윌리엄 셔먼이 전과를 올리면서 남군을 북부 조지아 산맥으로 몰아냈다. 1864년 링컨은 그랜트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그랜트를 서부 사령관에 임명하면서 남군을 무찌를 계획에 착수했다. 주요 공격 대상은 버지니아 레피단 강 뒤편에 주둔한 리 장군의 군대와 달턴에 있는 존스턴 장군의 군대였다. 그랜트는 리에 맞서고 셔먼은 존스턴에 대항하여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랜트는 단순한 전략을 채택했다. 남군의 야전요새에 정면 공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셔먼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적의 군대를 격멸하는 것보다 전쟁을 하고자 하는 남부인의 의지를 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남군의 존스턴은 셔먼이 달턴을 직접 공격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군대를 집중시켰다. 하지만 셔먼은 양동작전을 전개하여 존스턴의 군대를 달턴에 묶어 두는 한편, 2만 4천 명의 군대를 산맥을 통해 존스턴 왼쪽 측면으로 보내 달턴 남부 15마일 지점 철로 변에 있는 레사카를 장악하도록 했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전법, 즉 배후기동 작전이다. 레사카를 장악한 셔먼의 군대는 나폴레옹이 과거 진군했던 방식으로 넓게 펼쳐진 그물 대형으로 이동을 했다. 이렇게 하면 어떤 적군에 대해서도 신속하게 병력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존스턴은 북군을 습격할 수가 없었고, 잘못하면 북군의 대형에 포위될 위험에 빠져버렸다. 어쩔 수 없이 존스턴은 에바토 강의 남쪽으로 철수했고, 북군은 남부의 비옥한 농장지대에서 식량을 약탈했다.

1864년 5월 리 장군과 그랜트 장군은 버지니아에서 한 달간의 전투를 치렀다. 그랜트의 버지니아 작전 결과는 끔찍한 사상자와 희망의 좌절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북부를 휩쓴 침울함 속에서 유일한 위안은 셔먼의 계속되는 전진이었다. 셔먼은 채터후티 강에 요새를 구축한 존스턴의 군대를 우회하여 강을 건너 교두보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애틀랜타 북부 5마일 지점의 피치트리 샛강을 따라 구축된 남군의 진지를 휩쓸어버리려 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데이비스 대통령은 존스턴을 해임하고 후드 장군을 새로운 사령관에 임명했다. 후드는 강을 따라 구축된 진지에서 나와 북군을 정면 공격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사상자만 늘어갔다. 그러는 사이 북군은 애틀랜타 동쪽 측면을 위협했고, 결국 후드는 애틀랜타 주방어선까지 후퇴를 했다. 셔먼은 애틀랜타를 공격할 충분한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철로를 차단하여 남군을 아사 직전에 몰아넣는 작전을 썼다. 셔먼의 작전은 성공하여 결국 9월 2일 애틀랜타는 북군의 손에 함락되고 말았다.

셔먼의 의도는 남부인들이 북군이 제발 떠나 줄 것을 바라게 될 때까지 계속 그들을 응징하는 것이었다. 셔먼은 군대를 진격시키면서 농장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 방화와 파괴를 자행했다. 남군의 후드 장군은 셔먼군을 내버려 두고 테네시로 진격하여 내슈빌을 탈취하고 철도선을 단절시켜 셔먼이 보급선 차단 때문에 조지아를 포기하도록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셔먼은 후드를 쫓지 않고 대신 조지아를 가로질러 해안 쪽으로 계속 진격하였다. 후드가 테네시 쪽으로 떠났기 때문에 해안으로 가는 길에는 남군이 없었다. 1864년 북군은 애틀랜타를 모조리 불태우고 도시를 떠났다. 북군의 행군은 남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50마일 간격을 두고 4개의 제대로 나누어 다른 루트로 기동하는 바람에 남군은 셔먼의 실제 목표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북군은 저항을 받지 않고 조지아 중부를 가로질러 해안으로 이동하면서 가옥, 창고, 건물들을 불태웠다. 남부인들은 궁핍해졌고, 셔먼의 진격은 남부군이 그들의 영토와 국민들을 절대로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는 남부연방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과 그들의 대의명분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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