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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아리랑

최범산 지음 | 달과소
압록강 아리랑

최범산 지음

달과소 / 2012년 7월 / 524쪽 / 20,000원



역사의 도시 환인현의 항일유적을 찾아서



고구려의 천년고도(千年古都), 환인현으로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했던 역사의 땅, 요녕성 환인현(桓仁懸)으로 가던 중 관전현에 들르게 되었다. 관전현은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곳이다. 1920년대에는 광복군사령부와 총영, 대한독립단, 광제청년단 등이 활동하였고, 1930년대에는 상해임시정부의 참의부(육군주만참의부의 약칭), 정의부, 조선혁명군이 활발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현재는 만주족의 자치현이 되었지만 1945년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관전현은 우리 민족이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 환인행 버스를 타고, 중국 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한 조선혁명군이 만주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를 맞아 대승을 거뒀던 강산령(剛山嶺: 해발 1,050m)을 넘어가면 환인현 지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고갯길을 내려가다 보면 길옆에 한중연합군의 승전기념비가 있었다. 낯설고도 서러운 만주땅에서 오로지 조국광복을 염원하며 갖은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야 했던 독립군 장병들의 피와 눈물로 쟁취한 그날의 승리는 이역만리 외로운 산중에 남아 있었다.

대한통의부 창설지를 찾아서 - 환인현 마권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창설되었던 마권자(馬圈子: 현재 환인현 향양)는 우리 민족 항일투쟁사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대한통의부의 창설 유적지이다. 대한통의부는 1922년 남만주 통일회의를 결성한 뒤에 만주지역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항일단체들이 통합했던 항일무장단체이다. 1921년 1월, 남만주지역에서 가장 큰 항일단체인 한족회, 서로군정서(西路軍政暑), 대한독립단이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는 1922년 6월 3일 중앙회의를 열어서 여러 기관과 함께 마권자에서 남만통일회를 구성하였다.

서로군정서의 의용대 총사령관은 의용대 지휘부의 결의를 촉구하는 제안서를 발표하였으며, 의용대 18명이 찬성한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그리고 관전현 일대 최대의 항일무장 조직인 광복군 총영(光復軍總營)에서는 총회를 열고 남만통일회에 대표 4인을 파견하여 회의에 참석케 하는 동시에 불참한 단체를 순회하며 통일회의 참여를 권유하는 등 적극적 입장을 표방하였다. 1922년 8월 23일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광한단, 보합단, 관전동로한교민단, 대한광복군영, 대한정의군영, 대한광복군 총영, 평안북도독판부 등 이른바 8단(團) 9회(會)의 대표 71명이 환인현의 마권자에 모여 대한통의부 결성 등 6개 항을 결의하고 8월 30일 남만한족통일회 회장 김승만 명의로 이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대한통의부는 산하에 5개 중대의 의용군을 편성하여 일본군경의 관서를 습격하거나 러시아를 통해 무기를 매입하여 무장하고, 일본관리 및 악질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을 처단하였다. 압록강 국경지역을 시작으로 경기, 충청, 전라, 경상지역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조선총독부의 탄압정책을 응징하고 관련자를 처단하여 경찰 치안을 조롱하고 마비시켰다. 그러나 대한통의부 내부에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복벽계와 공화주의계의 대립과 불화, 중국 관헌들과의 마찰, 중국 마적단의 습격 등의 분열이 시작된 후 그 세력은 많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1924년 정의부 창설에 참여하며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여성의병장 윤희순 의사의 유적을 찾아서



우리 안사람도 의병에 나서야 한다

1860년 6월 25일 서울에서 태어나 유학자 집안에서 자란 윤희순은 16세 되던 해에 춘천 의병장 유홍석(柳弘錫)의 장남인 유제원(柳濟遠)과 결혼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져 전국 각지에서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윤희순은 나라를 구하는 데 남녀의 구별이 없으며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여 의병대를 도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안사람 의병가> 등의 노래를 지어 여성들도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윤희순의 시가는 일반 백성들의 항일의식의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

아무리 왜놈이 강한들 / 우리들도 뭉치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냐 /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보세 /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서 붙잡히면 왜놈시정 받을소냐 /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 우리 안사람 만세 만세 만만세로다



윤희순이 지은 <안사람 의병가> 전문이다. 봉건사회였던 당시로서는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많았던 시기였으나 윤희순은 여성들도 의병에 참여하여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윤희순은 의병 진압을 빙자하여 군대를 이끌고 무단으로 침략한 일본군 대장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우리 민족의 단호한 항일의지를 온누리에 천명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시아버지 유홍석이 춘천 진병산(陳兵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윤희순은 진병산으로 달려가 의병들의 식량 등을 준비했고, 의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항일저항시가를 지어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환인현 괴마자에 노학당 분교를 세우다

윤희순은 의병대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1912년에는 환인 보락보진 남괴자(保樂堡鎭 南拐子) 마을에 동창학교 분교를 세웠다. 한인 젊은이들을 모아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투쟁에 나설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13년 유홍석이 세상을 떠났고, 2년 후에는 남편 유제원마저 세상을 등졌다. 멀고 먼 타국땅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윤희순이었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족을 이끌고 관전현 고려구로 이주하여 1919년 3월 6일 환인현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세상에 알렸고 관전현과 환인현을 오가며 여성들의 독립투쟁 참여를 촉구하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1934년 겨울, 윤희순의 소재를 정탐하고 다니던 왜놈앞잡이의 신고를 받은 일본군이 윤희순의 집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윤희순은 일본군의 계속되는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어린애만 있는 집에다가 불을 지르는 잔악한 왜놈들로부터 손자와 딸을 보호하기 위해 해성시 묘관둔촌으로 피신했다.

해성시 묘관둔

해성시 묘관촌으로 이주하게 된 윤희순은 중국인 녕수부(寧守富)의 집에서 방 한 칸을 얻어서 살며 이웃집에 사는 한족의 도움을 받았다. 낯선 이방인에게 방을 마련해주고 식량을 나눠주던 묘관촌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던 윤희순은 묘관촌 사람들에게 벼농사와 채소 농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일본인들의 억압과 횡포를 알리고, 항일의식을 불어넣는 교육을 은밀하게 실시하기도 했다. 조금씩 심신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무렵 대한독립단 청년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던 장남 유돈상이 왜경에게 체포되어 무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일본 경찰들의 가혹하고 모진 고문을 당해 생명이 위독한 상태라는 소식에 차남 유민상이 급히 달려가 무순 감옥에 도착했을 때 유돈상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1935년 7월 19일 유돈상의 나이 42세였다. 유민상은 어머니에게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동지들과 함께 무순에서 장례를 치른 뒤에 묘관둔으로 돌아왔다.

아들의 죽음을 접한 윤희순은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웠다. 일제의 온갖 탄압에 추호도 굴복하지 않고 3대에 걸쳐 항일투쟁을 벌였던 윤희순이었지만, 항일운동의 동지이자 아들인 유돈상의 갑작스런 죽음에 더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에 빠졌던 것이다. 유돈상의 죽음 이후 식음을 전폐하던 윤희순은 후손들에게 남기는 『서정록』을 저술하고 1935년 8월 1일 7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1994년 11월 11일 묘관둔 정부는 묘관촌 북산에 있는 윤희순의 묘지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 여성의병장 윤희순의 유해는 1995년 고국으로 돌아와 향리인 남면 관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남만주 항일투쟁의 횃불을 들다 - 대한독립단



항일무장투쟁에 횃불을 들었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1895년 8월 20일 경복궁의 건청궁(乾淸宮)에서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고 사무라이로 가장했던 일본군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 우리나라의 궁궐까지 일본군이 무단으로 침입하여 황후를 살해하고, 건청궁에다가 불을 질러서 시해를 은폐하려 했던 전대미문의 잔인무도한 사건이었다.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왜군들과 전투에 나섰다. 충청도 보은에서 시작된 을미년(乙未年) 의병투쟁의 불길이 전국으로 거세게 퍼져 나갔다. 항일의병투쟁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당황한 일본은 군대를 파견하고, 조선정부를 협박하여 잔인한 의병 진압작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왜군들은 곳곳에서 의병들에게 패했다. 황후 시해를 저지른 일본에 대한 분노와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궐기한 의병들의 거센 불길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07년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1만여 명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결성하였다. 13도 창의군은 24개진을 편성하고 1908년 1월 한양 진공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300명의 선발군이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동대문 밖 서울 근교(경기도 남양주 화도읍)에서 패하였다. 그리고 국내지리를 잘 아는 조선 관리들을 앞장세운 채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잔인한 진입작전으로 한양 진공작전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양작전이 실패한 후 전국 각지로 퍼져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의병들이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조국광복을 쟁취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10년 겨울에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로 수많은 의병들이 집결하였고,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 회원들, 영남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안동유림의 애국지사들 등도 압록강을 건너 삼원포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항일의병장 유인석은 집안현의 패왕조(覇王朝)에서 보약사(保約社)란 자치단체를 조직하였고, 백삼규, 조병준, 전덕원 등은 관전현과 환인현에서 농무계(農務契)를 만들었으며, 이진룡, 조맹선, 홍범도, 차도선은 장백현과 무송현 등지에서 항일무장단체인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만주지역까지 확산되어 독립투쟁의 열기가 점차 고조되던 4월 13일부터 삼원보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 항일의병과 애국지사들이 모여 항일독립투쟁의 방안을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4월 15일(음 3월 15일)에 각자 분립하였던 여러 단체를 해체하고, 한인 560명이 운집한 가운데 군중대회를 열어 독립 쟁취를 위한 단일기관으로 대한독립단을 결성하였다. 결사복국(決死復國)을 위하여 항일투쟁에 헌신하기로 의결한 대한독립단은 국내외 모두 100여 개소의 지단, 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지역에는 한인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구관을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대한독립단 국내 총지단장은 홍제업(洪濟業)이었다. 홍제업의 아들 홍주는 참의부에서 활동한 독립투사였으며, 독립운동사를 편찬하려 했던 애국지사였다. 이들은 3, 4명씩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경찰대를 습격하였고, 애국지사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대시켜 나갔다.

신흥무관학교 유적지를 찾아서



간도의 눈물로 설립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1911년 압록강을 건너 추가로 온 망명객들에게 중국인들은 토지와 가옥의 매매를 거부했다.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촌 대고산(大孤山) 기슭에서 창립되었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어쩔 수 없이 중국인 옥수수 창고를 임시로 빌려서 신흥강습소를 세웠었다. 중국인의 경계와 냉대, 풍토병의 만연, 수년간 몰아닥친 흉년, 식량과 자금난 등으로 갖은 풍파와 고초를 겪다가 1912년 가을 합니하에서 새로운 한인 자치단체인 부민단(扶民團)과 신흥학교로 개편되어 다시 웅비의 날개를 펴게 되었다. 애국지사들이 당초 계획했던 것은 정식으로 토지를 매입해서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12년 음력 3월부터 합니하로 이동하여 교사와 학생들이 무관학교 신축공사를 시작했던 당시의 상황을 무관학교 교관 원병상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삽과 괭이로 고원 지대를 평지로 만들어야 했고, 내왕 20리나 되는 좁은 산길을 오가며 험한 산턱의 돌산을 파 뒤져 돌과 흙을 어깨와 등으로 날라야만 되는 중노역이었지만, 우리는 힘든 줄도 몰랐고 오히려 원기왕성하게 청년의 노래로 기백을 높이며 진행시켰다."

1912년 합니하의 심산유곡에서 학습과 노동, 군사훈련을 병행하며 항일독립투쟁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던 젊은 청년들의 어깨에 조국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신흥학교 학생들은 이러한 현실을 가슴속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에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신흥학교의 방침에 따라 공부하면서 농사를 짓는, 고된 노동과 훈련도 즐겁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1920년 5월,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강점한 뒤 만주까지 마수를 뻗쳤다. 그들은 대한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만주군벌 장작림과 결탁하여 중일합동 수사대를 만들기로 합의한 뒤, 봉천성(奉天省: 현재 요녕성 일대)에서 일본군과 중국경찰이 연합하여 합동수색대를 각 지역에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경찰 우에다와 사카모토가 이끄는 중일합동수색대는 1920년 5월부터 서간도 일대(현재 요녕성 단동에서 길림성 유하현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을 색출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군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립군을 후원하고 있는 한인마을도 습격하였다. 독립군은 한인마을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산중으로 이동했다.

독립군 토벌에 실패한 수색대는 양민들이 살고 있는 한인마을을 공격하여 무차별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고, 독립군에게 협조했다는 죄를 씌워 어린애들까지 무참하게 살해했다. 서간도 일대에서 벌어진 일제의 만행은 잔인하고 참혹했다. 중일합동수사대는 연속적인 토벌을 감행해 왔다. 무고한 양민들의 피해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서로군정서 수뇌부는 1920년 8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주축으로 교성대를 편성하여 이청천이 이끄는 군정서와 함께 백두산 기슭 안도현 내두산으로 이동하였다. 마지막까지 신흥무관학교를 지키던 추산 권기일과 독립군은 일본군 공격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설립 이후 1920년 폐교될 때까지 2,000여 명의 독립군 장병을 길러냈으며, 대한민국 항일투쟁사에 영원히 빛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의 유적을 찾아서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양세봉(梁世奉)은 1894년 평안북도 철산군 세리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인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고, 농민들은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할 땅마저 잃게 되었다. 1917년 여름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안도 일대에 혹독한 가뭄이 몰아쳤다.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양세봉 역시 소작을 잃게 되었고, 1917년 겨울 가족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눈보라 치는 압록강을 건넌 양세봉 가족은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하며 고향사람들이 먼저 이주해 살고 있는 흥경현 영릉가(永陵街: 현재 신빈현 영릉가)를 찾아갔다. 낯선 타국땅에서 양세봉 가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이들은 고향사람들이었다. 먼저 이주한 고향사람들의 도움으로 남의 집 행랑채를 얻을 수 있었고, 중국인의 논을 빌려 농사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양세봉, 항일투쟁의 전선에 서다

1919년 봄, 양세봉 가족은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신빈현 홍묘자(紅廟子) 사도구(四道溝)로 이주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흥동학교(興東學校) 교장 이세일(李世日)이 주동하는 만세운동에 양세봉도 참가했다. 조국이 독립하면 왜놈들이 쫓겨 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정든 고향으로 돌아가 옛날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22년 양세봉은 대한독립단 홍묘자의 공작원이 되어 독립군 식량을 공급하는 지원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리고 천마산유격대에 입대하여 창성군 대유동의 경찰서, 금광사무소와 영림창을 습격, 군수물자와 금괴 등을 뇌획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천마산대는 의주와 삭주 사이에 있는 천마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무장투쟁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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