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전쟁
마이클 케리건 지음 | 시그마북스
가짜전쟁
마이클 케리건 지음
시그마북스 / 2012년 6월 / 304쪽 / 16,000원
제1장 1939~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을 기존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한 가지 불가피한 현실이 초기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거나 정의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독일군이 병력, 장비, 전쟁 준비 측면에서 연합군보다 앞서 있었고, 기습의 이점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각은 옳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무대 뒤의 상황은 매우 불분명해 보였다. 오히려 연합군은 낙관적인 태도로 대담한 작전을 추진한 반면, 나치는 전쟁 초기의 승리를 끝까지 이어가는 데 실패해 엄청난 좌절을 겪었다. 됭케르크 철수로 프랑스에서 쫓겨난 영국군은 독일 공군의 대공습으로 본토마저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위축되기는커녕 독일군에 맞붙기 위해 각종 계획을 수립했다.
리신 비; 연합군의 비밀 병기
1941년 말, 영국은 실행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는데, 그것은 바로 수백만 개의 바늘을 이용해서 독일 전역에 죽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었다. 1941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재봉틀 회사인 싱어 소잉 머신(Singer Sewing Machine)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장을 영국 화학방어연구국에 썼다.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바늘을 재봉틀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실 것처럼 보입니다."
영국 화학방어연구국의 요구는 모호했지만 엄청나게 많은 수량의 바늘을 주문한 것이 분명했다. 요컨대, 이들은 바늘 수백만 개에 독극 물질인 리신(또는 탄저균일 가능성도 있음)을 묻힌 다음 항공기로 유럽에 있는 독일군에게 투하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렇게 많은 바늘을 하늘에서 떨어뜨리면 마치 비구름처럼 보이고, 땅에 도달할 즈음에는 적어도 옷 두 겹을 뚫고 피부 깊숙이 꽂히게 된다. 캐나다에 있는 비밀 연구 기지에서 염소와 양에게 전투복을 입힌 다음 실험을 했기 때문에 이 계획을 수립한 사람은 독침의 효과를 확신했다. 실험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고 바늘을 하늘에서 그냥 자유 낙하시키기보다 폭탄 하나에 바늘 3만 개를 가득 채워 넣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폭탄이 터질 때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독침이 주변에 방사될 것이다.
리신의 효과: 이 무렵 독일군의 영국 침공 위협은 줄어든 상태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여전히 위력적이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와 생화학 무기 연구 단지인 포턴 다운(Porton Down) 기획자들은 연합군 공격 전에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데 더욱 주력했다. 세균전은 비겁하지만, 오랫동안 영국이 지켜봤듯이 전쟁 자체도 비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생물학적 독극물은 무시하지 못할 효과가 있었다.
실제로 리신의 위력은 엄청났다. 살짝 찌르기만 해도 장애를 일으킬 수 있었다. 침에 찔린 사람은 30초 안에 빼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리신에 중독되면 설사, 구토, 발작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엄청난 고통은 희생자를 죽음으로 몰고 갈 뿐만 아니라 군 의료 체계를 마비시켜 침공격을 직접적으로 당하지 않은 인원들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독침 공격의 장단점: 더욱이 이러한 종류의 무기가 갖는 이점이자 훨씬 더 논란거리가 된 사실은 나중에 개발된 '중성자탄'처럼 인명에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점령하는 도시의 중심을 파괴하지 않고도 독일군 전력을 섬멸할 수 있었다.
"독침 피해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에는 근육 경련, 타액 과다 분비, 발한, 심한 설사와 구역질 등이 있다. 또 맥박이 매우 느려지고, 혈압도 떨어진다." _1945년 영국 리신 연구자
하지만 독침 공격이 지닌 명백한 단점은 이러한 장점을 가렸다. 예컨대 실내에 있기만 해도 이러한 '독비'를 피할 수 있다. 차량에 타거나, 그냥 벽 뒤에 숨거나, 심지어 운이 좋으면 헬멧만 써도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과연 독침이 전쟁에 사용되었을까? 영국은 독침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비경제적'이라고 판단해서 결국 이 계획을 보류했다.
제2장 1942년
미국이 전쟁 초기에 직면한 커다란 도전은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에 따른 충격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되찾는 것이었다. 1942년 6월 4~7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 사이에 영국은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롬멜을 물리쳤고,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을 저지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부터 마다가스카르와 실론 섬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의 공격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지만, 연합군은 공세를 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스탈린은 서방 연합국에 '제2전선'을 구축할 것을 요구했다. 그때까지 소련의 붉은 군대는 독일군을 상대로 고전하며 버티고 있었다. 서방 연합군 최고사령부 내에서는 독일이 장악한 프랑스를 직접 침공할 것인지, 좀 더 간접적인 방안을 선택할 것인지에 관해 분열까지는 아니더라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었다.
베른하르트 작전; 독일의 영국 경제 붕괴 계획
이러한 상황에서 거액의 위조지폐를 유통시켜 영국 경제를 무너뜨리고자 한 나치의 대담한 계략은 용두사미로 끝났다. 이른바 베른하르트 작전(Operation Bernhard)은 1981년에 방영된 TV시리즈 <프라이벗 슐츠>로 영국 대중에게 알려졌다. 이 프로그램은 액션 스릴러가 아니라 코미디물로, 영국의 유명 극작가 잭 풀먼이 극본을 썼다. 세부적인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잭 풀먼이 쓴 시나리오보다 실제 사건이 더 극적이었다.
베른하르트 작전의 명칭은 베른하르트 크뤼거라는 실존 인물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크뤼거는 전쟁 발발 전 섬유 산업 기술자로 일한 경험이 있는 친위대 소령이었는데, 친위대장 힘러(Himmler)의 명령에 따라 1942년부터 독일의 강제 수용소를 샅샅이 뒤졌다. 수감자들 중에 위조지폐 제작팀에 합류시킬 만한 기술자를 뽑기 위해서였다. 크뤼거는 최종적으로 140명이 넘는 인원을 브란덴부르크에 있는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모았다. 이곳은 1939년부터 죄수들이 위조지폐를 효율적으로 제작하는 데 필요한 매우 정교한 조판 기술뿐만 아니라 (진짜처럼 보이는 워터마크를 포함한) 특수 종이제작과 인세 기술을 익힌 장소였다.
대담한 목표: 크뤼거는 위조지폐로 재수 없는 몇몇 개인을 속이는 데 그치지 않고 영국 경제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구멍가게 주인, 술집 직원, 택시 운전사뿐만 아니라 은행원, 심지어 금융 당국까지 속이려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암호 해독 기술도 필요했다. 이 정도 규모의 작전을 추진하려면 위조지폐가 눈으로 보아서 진짜 지폐와 똑같을 만큼 정밀해야 하는 것은 물론, 일련번호도 제대로 표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크뤼거는 1942년 중반 무렵,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2년 반 동안 5·10·20·50파운드짜리 지폐 800만 장 이상을 찍어냈는데, 총액이 1억 3,200만 파운드에 달했다. 이는 잉글랜드 은행의 총 자산보다 많고, 영국에서 유통된 전체 지폐의 약 15%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폭력기 부족: 최초 계획은 말 그대로 돈을 영국 하늘에서 뿌리는 것이었다. 폭격기를 이용해 위조지폐를 공중에서 투하하면 영국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작전에 사용해도 될 만큼 정교하고 충분한 위조지폐를 제작했을 무렵, 영국의 하늘 위로 날아가 지폐를 뿌릴 수단이 없었다. 당시 독일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한 뒤 병력을 동부 전선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베른하르트 작전에 폭격기를 동원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제작된 위조지폐는 특수 작전용 자금이나 암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하는 데 사용했다. 이러한 용도도 유용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의도한 금융 대혼란과 비교하면 연합국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했다.
1945년 초, 베른하르트 작전팀은 미국 달러화에도 관심을 돌렸다. 이 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때까지 사용하지 않은 거액의 위조지폐는 팔레스타인에 있던 유대인 지하 조직의 손에 들어갔고, 이들은 이 돈을 영국에 대항하는 작전을 수행할 자금으로 사용했다.
제3장 1943년
스탈린이 '제2전선' 구축에 혈안이 되었듯이, 미국과 영국은 직접 공격(프랑스 침공)과 간접 공격(북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을 경유) 사이에서 격론을 벌였다. 서방 연합군이 태평양에서 (좀 더 작게는 아시아 지역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앞으로 갈 길이 멀고 험난했다.
당연하게도, 이 시기에 수립된 작전들은 기발한 해결책에 대한 갈망이 반영된 것이었다. 상대방의 허를 찔러 수개월 동안의 (또는 수년간의) 싸움, 고통, 고난을 교묘하게 피하려 한 것이다. 1943년에는 교황 12세의 납치는 물론 주요 전쟁 지도자를 모조리 암살하려는 음모도 있었다. 얼음으로 만든 항공모함, 엄청나게 크고 무거워 전선으로 이동조차 할 수 없는 전차와 같이, 필사적인 시기에 필사적인 방안들이 나왔다.
불꽃 작전; 독일의 히틀러 암살 계획
히틀러에게 염증을 느낀 독일군 장교 중 일부는 총통 암살 음모를 진지하게 꾸몄다. 이 계획이 불씨를 제대로 당겼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헤닝 폰 트레스코브 소장은 '전 세계 최대의 적'인 히틀러에 대한 저항의 불길을 폭발적으로 일으키는 데 단 한 번의 불꽃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군이 주도한다면 독일 대중도 반 히틀러 전선에 가담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불길이 이미 훨훨 타오르고 있었는데, 왜 불꽃이 필요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스코브 소장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트레스코브는 동부 전선에 있던 중부 집단군의 참모장이었다. 트레스코브가 맡은 자리는 히틀러가 조국 독일에 불러온 위기가 얼마만큼 심각한지를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종의 반독재 활동을 위해 군 지휘부와 고위 관료들을 설득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불안한 출발: 트레스코브는 동부 전선의 핵심 지휘관이었던 권터 한스 폰 클루게 장군과 페드로 폰 보크 원수를 설득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고속 진급 이력으로 볼 때 클루게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고위 계급에 있던 보크 원수가 벼락 출세한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를 경멸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아무리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더라도 둘 중 어느 누구도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 했다(특히 클루게는 클라우스 솅크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1944년 7월에 계획한 히틀러 폭탄 암살 음모에 더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계속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자신과 음모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낙담한 트레스코브에게 또 다른 행운이 찾아왔다. 프로이센 군국주의 전통의 또 다른 산물이자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히틀러를 비판해 온 루트비히 베크 상급 대장을 만난 것이다. 트레스코브의 부관이던 파비안 폰 슈라브렌도프와 그의 정보 연락 장교 루돌프 크리스토프 폰 게르슈도프도 서둘러 총통 암살 조직에 가입했다.
연이은 암살 음모 실패: 그러나 마치 신이 음모자들에게 불리한 음모를 꾸민 듯했다. 1943년 3월 13일 히틀러가 탄 전용기를 폭파하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항공기가 높은 고도에서 비행했기 때문에 차가운 공기로 인해 시한폭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추정된다. 쿠앵트로 술병 2개에 숨겨 둔 폭탄은 나중에 안전하게 회수되었다.
한 주 뒤, 베를린 박물관에서 포획한 러시아 군기(軍旗)를 전시하는 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곳에서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폰 게르슈도프는 오늘날 자살 폭탄 테러범처럼 폭탄을 몸에 지닌 뒤 히틀러가 전시장에 들어오는 순간 자폭하는 임무에 자원했다. 결국 히틀러의 부관이 일상적인 경호 조치 차원에서 일정을 바꾸는 바람에 이 행사에 할당된 시간이 줄어들었다. 히틀러는 전시장에 들어왔다가 2분 만에 나갔고, 폰 게르슈도프는 히틀러를 만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게르슈도프는 폭탄이 설치된 옷을 어렵게 처리해야 했다.
9개월 뒤 공모자들은 신형 동계군복 전시회장에 폭탄 장치를 설치할 음모를 꾸몄지만, 이들이 탈 예정이던 기차가 전날 밤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어 이마저도 물거품이 되었다.
제4장 1944년
처칠의 말을 빌리자면 1944년은 '끝의 시작'이었다. 추축국(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싸웠던 나라들이 형성한 국제 동맹)은 심하게 삐걱거리고 있었다. 1943년 9월에 이탈리아가 항복했고, 독일과 일본도 크게 수세에 몰린 상태였다. 양측은 여전히 획기적인 돌파구를 원했다. 영국은 히틀러를 암살해 독일을 무너뜨리는 방안을 모색했고, 독일은 스탈린을 암살해 어떤 식으로든 소련군의 공세를 막으려 했다.
양측은 이러한 방안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예상되는 비용과 인적 손실을 고려할 때 내키지는 않지만 좀 더 현실적인 방안도 갖고 있었다. 서방 연합국은 이미 유럽과 아시아에서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었고, 독일군은 상황을 역전시킬 가능성이 있는 무기를 이제 막 가동하고 있었다. 문제는 남은 시간 안에 전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였다. 연합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비밀 무기를 막고, 이미 붙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다.
A10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독일군 비밀 병기
끔찍하기만 했던 1944년과 1945년의 몇 개월 동안, 영국 런던은 독일이 개발한 경이로운 무기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V1이 자체 추진력으로 전체항적을 이동했다면, V2는 최대 193km 고도까지 올라갔다 다시 땅에 떨어졌다. 1944년 9월 9일부터 총 3,000기가 발사되었고 파리, 브뤼셀, 안트베르펜도 공격 목표에 포함되었다.
'개미귀신'이라고 불린 V1과 달리 V2의 속도는 음속의 4배에 달해 피해자들은 사전 공격 경고를 전혀 받지 못했다. 충돌 시점에 시속 4,000km로 땅속 깊이 들어간 다음, 탄두가 폭발했다. V2 설계자들은 목표 위에서 폭파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지만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낼 수 있었다.
대륙 간 공격 능력: 만약 V2가 미국을 공격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위력적이었을까? 물론 그렇게 하려면 당시 사용된 A4형보다 사거리가 크게 향상되어야 했고, 이러한 이유로 V2에 대형 보조 추진 로켓을 장착하는 문제에 관한 이론적인 논의가 있었다. A10이라고 불린 이 무기는 사정거리가 4,000km가 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과학적인 담론에 불과했다. 이 단계에서는 오히려 잠수함에 탑재해 미사일을 미국 동부 해안가에서 발사하는 방안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이 방안 역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었지만 이 프로젝트는 집중적으로 추진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유보트 갑판에 설치된 로켓 발사대는 1942년 이미 성공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수면에서 또는 수심 최대 12m에서 작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성능이 확실하지 않았고, 잠수함의 다른 성능을 희생하면서까지 로켓을 장착할 필요성이 있는지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험이 더 진행되지 못했다. 1년 뒤 V2의 출현으로 개발이 재개될 때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때도 로켓 자체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어야 했기 때문에 정작 발사 기술 개발에 쓸 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불발탄: 프루프슈탄트 12 작전(Operation PrufstandⅩⅡ)이라고 불린 이 계획은 기술적으로도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혔다. 길이 14m, 지름 1.65m 크기의 로켓을 유보트 내부에 실을 방법이 없었다. 대신 안전을 위해 연료 없이 방수 처리된 별도 용기에 넣어 견인해야 했다. 발사 시에는 적절한 자세를 갖춘 상태에서만 로켓을 갑판 위에 설치된 발사대에 장착해 에탄올, 물, 액체산소를 채워 넣을 수 있었고, 이 물질들이 제대로 섞였을 때에만 발사에 필요한 폭발력이 나왔다. 개발을 완료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독일군은 연합군이 파괴한 고정식 기지를 대체하기 위해 이동식 발사대를 개발했지만 전쟁 말기에 기반 시설이 파괴되면서 보급에 차질이 생겨 결국 이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