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마이클 샌델 지음 | 와이즈베리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마이클 샌델 지음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 336쪽 / 16,000원
새치기
대리 줄서기 사업: 여름마다 뉴욕 시의 퍼블릭시어터는 센트럴파크에서 셰익스피어 무료 야외공연을 한다. 오후 1시부터 배포하는 저녁 공연 입장권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몇 시간 전부터 줄을 서기 시작한다. 많은 뉴요커들은 연극을 보고 싶었으나 줄을 설 시간이 없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작은 사업거리가 새로 등장했다. 편리를 얻는 대가로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 사람을 위해 대신 줄을 서고 입장권을 받아주는 사업이었다. 대리로 줄 서는 사람을 가리키는 '라인스탠더'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고를 견뎌내는 대가로 무료 공연 입장권에 한 장당 125달러의 수고비를 청구했다.
대리로 줄을 서고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센트럴파크만이 아니다. 워싱턴에서도 '줄서기' 사업은 빠른 속도로 정부의 관행이 되어가고 있다. 의회 위원회는 발의된 법안에 관해 공청회를 열면서, 방청석 일부를 언론에게 제공하고 일반 대중에게도 선착순으로 분배한다. 사람들은 공청회 좌석을 확보하기 위해 하루 전이나 그보다도 일찍 줄을 서기 시작한다. 기업 로비스트들도 이런 공청회에 반드시 참가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은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이때 그들이 생각해낸 것이 바로 대신 줄을 서주는 회사에 수천 달러를 지불하고 대리로 줄 서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다.
새치기의 시장논리: 공항과 놀이공원, 의회 복도에서 '선착순'이라는 줄서기 윤리가 '돈을 낸 만큼 획득한다'는 시장 윤리로 대체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때 비시장 규범이 지배했던 삶의 영역에 돈과 시장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을 고용해 대리로 줄을 세우거나 암표를 파는 행동이 잘못일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줄서기에 관해 시장을 옹호하는 입장에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개인의 자유 존중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이나 사회적 효용의 극대화에 대한 주장이다. 첫 번째는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의 입장인데, 그들은 타인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 원하는 재화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주장은 경제학자에게 좀 더 친숙한 것으로 공리주의자(Utilitarian)의 입장이다. 공리주의자는 시장에서의 거래가 구매자와 판매자에게 똑같이 이익을 제공하고, 결과적으로 집단의 행복이나 사회적 효용을 향상시킨다고 말한다. 125달러를 내고 라인스탠더를 고용한 사람은 줄을 서지 않고 셰익스피어 연극을 관람함으로써 행복을 느끼고, 줄을 서서 125달러를 번 라인스탠더도 행복을 느끼며, 이렇게 시장 거래의 결과로 구매자와 판매자는 모두 행복해지고 효용은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시장이 재화를 효율적으로 분배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의 입장이다.
시장 대 줄서기: 그렇다면 줄서기의 도덕성 측면에서는 어떤 주장을 펼칠 수 있을까? 센트럴파크에서 열리는 셰익스피어 공연의 대변인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댔다. "대리 줄서기와 암표 판매는 공원에서 셰익스피어 공연을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서 좌석과 입장권을 빼앗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공연을 무료로 관람하기를 원한다." 이 주장의 앞부분은 오류다. 라인스탠더를 고용했다고 해서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의 전체 수가 줄어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변인의 주장대로, 공연을 보고 싶어 줄을 섰던 사람에게 돌아갔을 입장권 일부를 라인스탠더가 가로챈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입장권을 손에 넣은 사람들도 열렬하게 공연을 보고 싶어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125달러를 지불하고 라인스탠더를 고용한 것이다.
아마도 대변인의 의도는 125달러를 지불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암표 거래는 불공정한 행위라는 것이리라. 이 주장은 좀 더 설득력이 있다. 라인스탠더나 암표상이 입장권을 확보했다면, 그 뒤에 서 있던 사람, 즉 암표 가격을 지불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은 손해를 본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자유시장 옹호자들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극장 측이 연극을 열렬하게 관람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관람석을 채우고 공연이 주는 즐거움을 극대화하고 싶다면, 그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사람에게 입장권이 돌아가기를 원해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입장권에 최고 가격을 지불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공연에서 최대의 즐거움을 끌어낼 관객으로 극장을 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입장권을 자유시장에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우리의 목적이 사회적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유시장이 줄서기보다 믿음직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떤 재화에 기꺼이 가격을 지불하려는 것이 꼭 해당 재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 가격에는 자발적으로 지불하려는 마음만큼이나 지불할 수 있는 능력도 반영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연극이나 레드삭스 경기를 가장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도 입장권을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최고 가격을 내고 입장권을 손에 넣은 사람이라도 그 경험의 가치를 전혀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야구장에 늦게 도착해 비싼 관람석에 앉았다가 일찍 자리를 뜨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그럴 때면 그들이 야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의심스럽다.
시장이 자발적으로 돈을 지불하려는 마음과 능력을 바탕으로 재화를 분배하듯, 줄서기는 자발적으로 기다리려는 마음과 능력을 바탕으로 재화를 분배한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가격을 지불하려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려는 마음보다 더 나은 가치 평가 기준이라고 추정할 근거는 없다. 따라서 줄서기보다 시장논리가 더 낫다는 공리주의자의 입장은 우연에 상당한 지배를 받는다. 왜냐하면 그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사람에게 재화를 분배하는 역할은, 시장이 수행할 때도 있고, 줄서기가 수행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시장과 부패: 그런데 줄서기보다 시장논리를 옹호하는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은 더욱 근본적인 반박에 부딪히기 쉽다. 퍼블릭시어터에서 주관하는 무료 공연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문제는 공정성만이 아니다. 공립극장의 무료 공연이 시장 상품으로 바뀌면 무언가가 사라진다. 그 상실의 결과는 가격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이 느끼는 실망만이 아니다. 퍼블릭시어터의 취지는 관람료 지불 능력과 전혀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셰익스피어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입장료를 받거나 암표상이 이득을 취하게 허용하는 일은 이러한 취지에 어긋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돈을 받고 국회의사당 앞에 대리로 줄 서는 관행이 왜 잘못인지 알 수 있다. 한 가지 이유는 공정성 때문이다. 부유한 로비스트가 평범한 시민의 기회를 빼앗아 의회 공청회 방청권을 독점하는 행위는 불공정하다. 하지만 불공평한 방청권 획득만이 문제점은 아니다. 의회 공청회 방청권을 상품으로 바꾸는 행위는 의회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부패시킨다는 더 심각한 반대에 부딪힌다. 부패라고 하면 흔히 부정 이득을 연상하지만 부패는 뇌물이나 불법 거래 그 이상을 의미한다. 어떤 재화나 사회 관행을 부패시키는 행위는 그 평판을 깎아내리는 행위고, 가치를 합당한 수준보다 낮게 평가하는 행위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회 공청회 방청권에 가격을 매기는 것은 일종의 부패다.
줄서기의 도덕: 새치기하는 방법으로 라인스탠더 고용, 입장권 암표 구매 등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거래는 자기 차례를 줄 서서 기다리는 줄서기의 도덕을, 더욱 빨리 서비스를 받으려고 가격을 지불하는 시장의 도덕으로 대체한다. 시장과 줄서기, 즉 가격을 지불하는 행위와 기다리는 행위는 재화를 분배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며, 각 방식에 적합한 활동은 다르다. 줄서기 도덕은 '선착순' 원칙으로 평등주의적 매력을 지닌다. 그런데 줄서기 도덕이 모든 상황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집을 팔려고 시장에 내놓은 경우에, 단지 첫 번째라는 이유만으로 매수 제안을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 집을 파는 것과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서로 다른 행위로 각기 다른 규범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모든 재화가 줄서기나 돈을 지불하는 것 중 어느 한 가지 원칙에 의해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시장과 줄서기가 재화를 분배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가치나 필요, 혹은 추첨이나 우연이 재화를 분배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대학교는 가장 먼저 지원하거나 가장 많은 돈을 등록금으로 지불하는 학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재능이 많고 장래가 유망한 학생들에게 입학을 허가한다. 그리고 병원 응급실은 환자가 도착한 순서나 진찰을 먼저 받으려고 기꺼이 추가비용을 지불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증상의 위급한 정도를 기준으로 환자를 치료한다.
줄서기를 비롯해 재화를 분배하는 기타 비시장적 방식이 시장논리로 대체되는 경향은 현대 생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현상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예시한 셰익스피어 축제, 의회 공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치기 권리 구매 현상은 3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으로, 대부분 최근에 발달했다는 사실이 이목을 끈다. 이러한 영역에서 줄서기 관행의 종말이 신기한 현상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장이 침범하고 있는 영역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시장은 어떻게 도덕을 밀어내는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 사람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대답한다. 우정을 생각해보자. 친구가 지금보다 많았으면 좋겠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친구 몇 명을 사겠는가? 아닐 것이다. 잠시만 생각해봐도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용된 친구는 진짜 친구와 같을 수 없다. 노벨상을 생각해보자.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정상적으로는 받을 수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노벨상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설사 매년 노벨상 하나를 경매로 판매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돈을 주고 산 상은 진짜 노벨상과 같지 않다. 시장 교환은 노벨상을 가치 있게 만드는 선(善)을 변질시킬 것이다. 노벨상은 명예로운 재화이기 때문이고, 이를 사는 행위는 상에서 얻으려는 선을 훼손한다. 아마 노벨상이 거래되었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수상자는 더 이상 명예를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그럼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사면 안 되는 대상이 있을까?' 예를 들어 사람의 신장처럼 살 수는 있지만, 거래하면 도덕적으로 논란거리가 될 만한 재화를 생각해보자. 장기 이식에 필요하므로 장기거래 시장을 옹호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도덕적으로 불미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신장을 사는 행위가 잘못이라면, 노벨상의 경우처럼 문제는 돈이 재화를 변질시킨다는 데 있지 않다.
돈을 지불하든 하지 않든 이식한 신체에 거부반응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신장은 기능할 것이다. 따라서 신장이 거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탐구가 필요하다. 장기매매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주장을 살펴보고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지 결정해야 한다. 언뜻 보기에는 친구와 노벨상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재화와 신장처럼 돈으로 살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논란이 생기는 재화가 명확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처음 언뜻 생각할 때보다 명확하지 않다.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금전적 거래가 구입한 재화를 명백히 퇴색시키는 경우와 거래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재화를 변질시키고 그 가치를 부패시키거나 저하시키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경우 사이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리 사과 서비스와 결혼식 축사 판매: 이 연관성은 우정과 신장의 중간 단계에 속한 사례를 생각해봄으로써 살펴볼 수 있다. 우정을 돈으로 살 수 없다면, 우정의 표시나 친밀감, 애정, 후회의 표현은 어떨까? 2001년 《뉴욕타임스》는 한 중국 기업에서 제공하는 특이한 서비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사이가 서먹해진 연인이나 관계가 틀어진 동업자 등 누군가에게 사과를 해야 하지만 직접 하기가 영 껄끄럽다면, 톈진사과회사에 의뢰해서 대리 사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돈으로 산 사과가 효과가 있을까? 돈으로 구입한 사과가 얼마나 현란하든지 간에 직접 하는 사과의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사과 또한 친구와 마찬가지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신랑신부를 위한 결혼식 축사를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온라인으로 결혼식 축사를 구매하기도 하는데, 친구가 축사를 손수 쓰지 않고 온라인에서 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어떤 면에서 사과와 결혼식 축사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재화다. 하지만 이를 사고파는 것은 그 재화가 지닌 속성을 변질시키고 가치를 감소시킨다.
돈으로 구입한 명예: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과, 결혼식 축사는 상품으로 바뀌더라도 전부 파괴되지는 않지만 그 의미가 약해지기는 한다. 그 이유는 돈으로 친구를 살 수 없는 이유와 비슷하다. 우정과 우정을 유지하는 사회적 관행은 어떠한 규범, 태도, 그리고 미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을 상품화하면 공감, 관용, 배려, 관심 같은 규범의 자리에 시장가치가 들어선다.
명예를 기리는 재화도 비슷한 방식으로 변질되기 쉽다. 노벨상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명예와 인정은 어떨까? 명예학위를 생각해보자. 대학은 탁월한 학자, 과학자, 예술가 그리고 공직자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한다. 하지만 명예학위를 수여하는 기관에 거액을 기부한 자선가에게 수여하기도 한다. 돈으로 산 학위가 과연 명예로 올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모호하다. 대학이 명예학위 수여 이유를 대담하게 설명한다면, 그 투명성이 재화를 변질시킬 것이다. 학위 수여식에서 표창장에 "본 대학은 업적을 이룬 탁월한 과학자와 예술가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귀하가 도서관을 신축하는 기금으로 1천만 달러를 기부한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학위를 수여합니다."라고 쓰여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라면 명예로운 학위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일류 대학교의 입학허가를 사고파는 문제를 놓고도 비슷한 의문을 던질 수 있다. 대학은 입학허가를 적어도 공개적으로 경매에 부치지는 않는다. 만약 최고 입찰자에게 입학허가를 판다면, 많은 상위권 대학들은 수입을 늘릴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은 설사 수입을 극대화하고 싶더라도, 입학정원 전체를 경매에 부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학문의 질이 떨어질 뿐 아니라, 대학입학의 명예가 훼손되어 수요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교 입학정원 대부분은 우수성을 기준으로 분배되고, 일부만 조용히 거래된다고 가정해보자. 또한 입학허가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학점, SAT 점수, 과외활동, 인종적ㆍ민족적ㆍ지리적 다양성, 체육 능력, 특혜 대상(동문의 자녀) 등 많은 요소가 고려 대상이 되어, 어떤 상황에 어떤 요소가 결정적으로 작용할지 알 수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조건에서 대학교는 상위권 대학교에 입학하는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부유한 기부자들에게 입학정원의 일부를 팔 수 있을 것이다. 대학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각본이 오늘날 많은 대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 밀접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입학사정에서 동문의 자녀를 우대하는 '동문 자녀 우대 제도'가 부자 우대 정책의 한 형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행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사립대학교가 동문과 부유한 기부자에게 재정적 기부금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부금을 사용해 부유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기타 재정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입학허가 거래에는 두 가지 반박이 따른다. 하나는 공정성에 관한 반박이고, 또 하나는 부패에 관한 반박이다. 공정성을 이유로 반박하는 사람들은 대학교에 거액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부유한 기부자의 자녀를 입학시키는 정책은, 사람은 부유한 부모를 선택할 수 없으므로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입학허가 거래가 부패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은 대학의 품위를 언급한다. 이들은 고등교육이 보수 높은 직업을 갖도록 학생들을 준비시켜줄 뿐 아니라, 진리 추구, 학문적ㆍ과학적 탁월성의 증진, 인도적인 교육과 학문의 발달, 시민 덕성의 고양 등을 비롯한 이상을 구현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