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톨랜드의 6·25전쟁 1
존 톨랜드 지음 | 바움
존 톨랜드의 6·25전쟁 1존 톨랜드 지음바움 / 2010년 6월 / 436쪽 / 16,500원
전쟁의 발발
1950년 6월 24일 밤, 어둠에 잠긴 38도선에는 소련제 112밀리 곡사포, 76밀리 평사포, 자주포가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소련 군사고문으로부터 훈련을 받은 약 9만 명의 전투병들이 소련제 T-34전차 150대와 함께 최종 공격위치로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마침내 남한을 기습적으로 침공할 태세에 돌입한 것이다.38도선 건너편에는 전력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한국군 4개 사단이 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대대적인 침공을 알리는 징후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허위 남침경고가 너무 잦았기 때문에, 전선의 병사들 대부분은 그날 밤도 평온한 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농촌 출신 병사들은 얼마 전에 농번기 일손을 돕기 위해 15일간의 휴가를 떠났다. 그날 밤, 이미 수적으로 열세에 있던 한국군의 전선은 위험할 정도로 병력이 고갈된 상태에 있었다.전선의 일부 지휘관들은 육군회관 개관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나중에 일부 미국인들은 진주만 공격 전야에 호놀룰루에서 열렸던 미군 파티를 떠올렸다. 토요일 밤에 파티가 열린 것도 공통적이었다.
새벽녘에 참혹한 내전이 발발해 자신의 삶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잠자리에 든 사람은 남한에서 거의 없었다. 도쿄에서는 미국 극동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미국 대사관 침실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북한군의 침공 가능성에 대해 워싱턴에 경고했지만, 어떠한 위급상황도 서울로부터 보고받은 바 없었다. 워싱턴 시간으로 정오 무렵이던 그 시각,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 즉 유럽에서 증대되고 있는 공산주의의 위협 및 창설된 지 얼마 안 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운명에 대해 고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한밤의 어둠을 뚫고 세찬 비가 38도선에 간간이 내리고, 길게 이어진 전선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38도선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다소 수상쩍은 소리가 우르르 울리고 있었다. 트럭과 전차가 최종 공격위치로 서서히 접근하는 소리였다. 기갑여단, 독립 보병연대, 모터사이클연대, 국경경비여단과 함께 북한군 7개 사단이 38도선에 은밀히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8만 명에 달하는 이 병력은 이미 배치되어 있던 1만 명의 다른 병력과 더불어 길게 전열을 형성했다. 또 다른 1만 명은 예비병으로 남았다.38도선에 접근한 병력의 절반 및 대다수 소련제 T-34전차들은 한반도 서쪽 끝 지역에 40km 길이의 반원을 그리며 집결했다. 서울에 주공(主攻)을 가할 이 부대들은 예로부터 서울을 침입하는 통로였던 의정부 회랑을 통해 남진할 예정이었다. 첫 번째 공격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개성이었다.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북한군 병사들이 오래전에 파괴된 철도 선로를 조용히 복구하고 있었다. 드디어 개성에 대한 고도의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보병들이 열차에 올라타기 시작했다.***전선의 한국군 병사들은 지축을 흔드는 포성에 단잠을 깼다. 혼란스럽고 통신조차 두절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립된 각 부대의 병사들은 소규모 적군이 또다시 습격을 가해온 것이라고만 생각했다.주한 미군사고문단의 핵심요원인 하우스먼 대위가 전화벨 소리를 듣고 잠이 깬 시각은 오전 4시 30분경이었다. 서둘러 옷을 입은 그는 몇 분 후에 주한 미군사고문단 본부에 도착했다. 곧이어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도 도착했다. 그는 대전에서 서울로 북상하고 있는 2사단에 연락을 취해, 의정부에 주둔 중인 7사단과 함께 반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사단장인 유재홍 준장 역시 전화벨 소리 때문에 잠이 깼다. “사단장님, 적군이 우리의 모든 전선에 포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정보장교가 보고했다. 유재홍은 모든 장교들에게 비상소집을 발령하라고 그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는 일요일 아침이었고, 사단병력의 1/3이 휴가 중이었다. 전선에 배치된 2개 연대의 병력은 약 4,000명이었고, 나머지 1개 연대는 서울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1/4가량의 병력만으로 적군을 막아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38도선 연변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30세의 한국군 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오전 7시에 작전참모에 의해 잠이 깨어 개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보충수업을 받기 위해 임시휴가를 얻어 서울에 체류하고 있었다. 백선엽은 급히 옷을 입고 거리로 뛰어나갔다.얼마 후 11연대장 집에 도착한 백선엽은 사단본부에 전화를 걸어, 11연대와 여타 부대들을 문산 인근의 방어진지로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그는 1사단 수석고문 로크웰 중령과 함께 북쪽으로 질주했고, 미군이 전선에 파견해놓은 유일한 군사고문인 다리고 대위를 문산에서 만나 개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했다. 1사단 2개 연대, 즉 11연대와 13연대는 이미 임진강변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12연대가 임진강 이남으로 아직 철수하지 못했지만, 정찰을 마친 백선엽과 로크웰은 다리를 폭파시켜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수 킬로미터 반경 내에 다리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윽고 공병이 기폭장치를 작동시켰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화선이 끊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차질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이 임진강 남쪽 강변으로 줄기차게 사격을 가함으로써 북한군은 다리를 건너올 수 없었다. 전력이 고갈된 12연대 역시 다리를 건너오지 못했다.그 시간, 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서는 북한군 2개 보병사단이 105기갑여단 전차들의 지원을 받으며 서울에서 불과 32km 거리에 위치한 의정부를 향해 두 개의 도로를 따라 남진하고 있었다. 이들의 첫 번째 공격에 큰 타격을 입은 한국군 7사단 1연대는 서울에 있는 국방장관에게 절박한 상황을 보고했다. 주요 진지들이 함락되었고, 증원부대의 투입이 시급했다.그곳에서 동쪽으로 더 떨어진 곳에 춘천이 있었다. 이곳에는 한국군 6사단의 1개 중대가 예비대로 머물고 있었다. 중대장 이대용 대위는 도서관으로 가는 도중에 전령의 말을 듣고서야 적군이 실제로 쳐들어온 사실을 알았다. 116명의 중대원 중 40명이 주말외출 중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트럭을 보냈다. 그리고 귀대한 부하들을 데리고 북쪽의 전투장소로 향했다.임진강 상류 쪽으로 약 20km 올라간 지점에는 백선엽 예하 13연대가 적군의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진지를 계속 고수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대전차 무기가 없었다. 미군이 남기고 간 소형 2.36인치 바주카포는 소련제 전차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전차에 맞은 포탄은 마치 탁구공처럼 되팅길 뿐이었다. 이미 90명의 병사가 자진해서 육탄공격을 감행했다. 그중 일부는 고성능 폭약을 안고 전차 밑으로 몸을 던졌으며, 다른 일부는 배낭형 또는 막대형 폭발물을 들고 앞으로 돌진했다. 또 다른 일부는 전차 위로 뛰어올라 필사적으로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파괴된 전차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적군의 전진속도가 떨어졌고, 비록 측면이 거의 포위되긴 했지만 북부전선이 계속 유지되었다.***서울에서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의 침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시간은 6월 27일 오전 2시였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 합니다.” 이승만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안 떠나!” 그리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몇 분 후에 한 경찰관이 도착해, 북한군 전차가 서울 외곽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건네주었다. 이때서야 대통령은 황급히 옷을 입었다. 그러나 그 보고서는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작성된 가짜 보고서였고, 대통령은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승만은 보좌관들을 만나 서울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전직 국무총리는 한강 이남으로 내려간 후 한강철교를 폭파하자고 건의했다. 그렇게 하면 북한군이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고, 또한 서울에 있는 한국군 병사들이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정부의 고위관리들과 이들의 가족은 오전 7시발 특별열차를, 하급관리들은 그로부터 1시간 후에 두 번째 열차를 타고 대피할 예정이었다. 대통령 일행은 한곳에 모여 있다가, 오전 4시경에 자동차를 타고 어둠에 싸인 도로를 지나 특별열차가 대기하고 있는 철도역으로 질주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한강을 건너 대전 쪽으로 내려갔다.***채병덕이 미군 선발대 사령관인 처치 장군과 함께 군사상황에 관해 의논하고 있을 때, 적군은 한국군 1사단과 7사단 잔여병력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한국군은 9만 8천 명의 병력 가운데 거의 절반을 사망, 생포 또는 행방불명으로 잃었다.서울을 점령한 적군은 아이들을 전차에 태워주기도 했다. 또한 일부 시민들을 대상으로, 부패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진정한 민주주의 군대가 온 것이라고 선전했다. 서울이 점령된 후, 정부와 시청에 근무했던 관리들과 부유한 일반시민 수천 명이 체포되었다. 그중 일부는 반역자로 분류되어 곧바로 처형되고, 이용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북으로 압송되었다. 청년들 또한 의용군에 들어와 조국통일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대거 체포되었다. 열렬히 호응하는 청년들도 다소 있었으나, 대부분은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갔다.***7월 6일, 맥아더사령부에는 8군이 한국에 파견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 8군 산하의 4개 사단은 일본 전역에 널리 산재해 있었다. 한국의 전황을 보고 받은 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7월 7일에 자진해서 대전으로 날아갔다. 24단장 딘 소장이 그를 영접한 뒤 전술상의 실패와 지휘 문제, 그리고 심각한 물자부족에 관해 브리핑했다. 상황은 워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도쿄와 워싱턴의 당국자들은 실제상황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워커는 딘에게 브리핑 내용을 요약해 맥아더에게 보고하라고 말했다. ***7월 17일, 워커는 이승만의 요청으로 자신이 한국의 모든 지상군을 지휘하게 된 사실을 통보받았다. 워커는 대구의 8군사령부에서 전황을 살폈다. 절망적인 국면에 들어선 것이 분명했다. 동쪽에서는 한국군과 미군 25사단이 점차 뒤로 밀리고, 경부국도 상에서는 게이 장군이 이끄는 1기병사단이 적군을 막는 데 실패했다. 서쪽에서는 막강한 북한군 사단이 부산을 향해 돌진 중이었다.많은 참모들이 상황을 비관적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워커는 서쪽에서 북한군 사단의 진격속도를 늦출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사단은 현재 용감한 미군 병사들에 의해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워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벌지 전투에서 미군들이 허둥지둥 철수했지만 결국 수주일 만에 돌아와 독일군을 격파했던 사실을 상기했다. 따라서 무장을 적절히 갖추고 유능한 장교의 지휘를 받는다면, 미군들이 한국에서 똑같은 일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7월 29일 오후, 1기병사단 지휘소에 도착한 워커는 게이 장군이 철수명령을 내린 것을 문제 삼았다. 게이 장군은 명령이 적절치 못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단지 병참선이 끊기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워커는 더 이상 그러한 철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이후 25사단장 킨 장군과 의논하기 위해 동쪽으로 간 워커는 사단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퇴각이나 철수 또는 방어선의 재조정 같은 일들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각 부대들은 반격을 가하여 적들을 혼란과 불안정 상태로 몰아넣어야 한다. 부산으로 퇴각한다면 사상 최대의 살육이 자행될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적에게 사로잡히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 우리는 하나의 팀을 이루어 싸울 것이다. 우리 중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우리 모두가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퇴각하는 자는 수천에 달하는 전우들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여전히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으나, 그의 마지막 말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내 말을 모든 부하들에게 전해 주기 바란다. 또한 우리가 이 방어선을 고수할 것임을 모두가 이해해주기 바란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워커는 대구를 꼭짓점으로 삼아 부산 앞쪽에 말굽 모양의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이미 갖고 있었으나, 이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는 교두보 역할을 할 부산으로 한국군과 미군을 철수시키고, 곧 투입될 예정인 해병대로 하여금 서쪽에서 그 교두보를 강력하게 지원하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워커의 연설은 곧바로 모든 부대에 전달되었다. 일부 지휘관들은 그의 명령을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고, 다른 일부 지휘관들은 그것이 “현 위치에서 끝까지 버티다가 죽어라”라는 뜻으로 병사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전선의 많은 병사들은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적군을 앞에 두고 도망치던 때는 끝나고, 바야흐로 일치단결해서 싸울 때가 온 것이다.***그날 밤, 이승만 대통령은 영부인에게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로 즉시 떠나도록 권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다. 고민에 빠진 이승만이 말했다. “여보! 만일 적군이 대구방어선을 돌파해 우리에게 접근해 오면, 나는 먼저 당신을 쏜 다음 전선으로 가야만 할 것이오.” 그녀는 부담을 주지 않을 테니 끝까지 남아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승만은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또다시 망명정부를 세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오. 이곳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우리의 최후를 맞이합시다.”
낙동강전투(8.14~23)
8월 14일 월요일, 북한군이 낙동강방어선에 접근함에 따라 주된 공격목표인 대구는 공포의 도시가 되었다. 워커 장군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서쪽에서는 킨 특수임무부대의 반격이 좌절되었고, 대구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지점(영포)에서는 적군이 낙동강을 건넜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은 대구를 방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강이었다. 북한군 2개 사단이 낙동강을 건넌 지는 일주일도 더 되었고, 그 선두부대는 대구 북방 약 30km까지 육박했다.대구에서 남쪽으로 57km 떨어진 곳, 즉 영산 인근지역에서는 또 다른 재앙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었다. 8일 전에 낙동강을 건넌 북한군 4사단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방어선을 돌파하여 밀양을 향해 돌진 중이었다. 바야흐로 주 병참선인 대구-부산 국도가 절단될 위기에 처했다. 일부 참모들은 절망감에 빠졌지만, 워커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가장 위태로운 진지들에 특별부대를 신속하게 투입함으로써 방어선이 와해되는 것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포성이 점점 더 커지자 대구 시민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김일성 군대가 곧 낙동강을 건너와 도시를 점령해버릴 것 같았다. 이승만 대통령 관저를 방문한 무초 주한 미 대사는 대통령의 안전을 염려하여 정부를 남쪽의 제주도로 옮길 것을 제의했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 전체가 북한군 수중에 떨어져도 대통령만큼은 안전할 것이고, 망명정부의 수립도 가능할 것이었다.격분한 이승만 대통령은 권총을 꺼내 들고 무초에게 다가갔다. 무초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영부인 또한 충격에 휩싸였다. “적군이 나타나면 이 총으로 내 아내를 쏠 작정이야. 그리고 마지막 1발은 내 자신에게 사용할 것이야.” 이승만은 얼굴에 노기를 띠고 부들부들 떨었다. “우리 정부를 육지 밖으로 옮길 생각은 없어.” 무초는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지만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급히 자리를 떴다.
인천(8.21~9.15)
해군, 해병대, 그리고 합참은 맥아더가 극비리에 추진 중인 인천상륙작전을 처음부터 반대했다. 재앙을 초래할 허황된 계획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인천항에 이르는 수로는 좁고 위험하며, 기뢰를 부설하기에 용이했다. 게다가 상당한 시간 동안 광활한 갯벌이 드러났다. 맥아더는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적의 의표를 찌르는 공격이 가능한 것이라고 단호히 주장했다.그는 참모장인 아몬드 소장을 작전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맥아더의 절대적인 신임에 보답이라도 하듯 맥아더를 진심으로 존경했던 아몬드는 인천상륙작전에 모든 정력을 쏟아부었다.합참은 이번 작전이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하다가 마지못해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8월 21일, 맥아더를 직접 만나 작전을 검토할 사람으로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과 해군참모총장 셔먼 제독이 지명되고, 도쿄에서 있을 브리핑과 회의 날짜는 8월 23일로 잡혔다.그 전날 오후,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할 해병사단 지휘관인 스미스 소장을 만났다. 스미스 소장은 인천에 상륙하는 것에 대해 점잖게 의문을 제기했다. 스미스를 따뜻하게 맞이한 맥아더는 자신이 생각하는 상륙의 ‘개념’에 관해 열변을 토했다. 그것은 군사적 의미의 ‘개념’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승리에 대한 일종의 환상과 유사했다. 단칼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스미스가 보기에, 맥아더는 자신의 승리에 대해 신비에 가까울 정도의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 1달 안에 종결될 수 있으며, 이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해병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해병대가 1950년 9월 15일을 영광의 날로 미국 역사에 기록하게 될 것이라며 스미스를 치켜세웠다. ***회의는 8월 23일 오후 5시 30분에 도쿄의 다이이치 빌딩 6층에서 열렸다. 맥아더는 콜린스와 셔먼을 설득하지 못하면 인천상륙작전이 합참의 최종 승인을 받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회의를 용의주도하게 이끌었다. 회의에는 극동해군사령관 조이 해군중장, 7함대사령관 스트러블 해군중장, 그리고 상륙군을 인솔할 도일 해군소장도 참석했다.먼저, 도일 제독 휘하의 상륙작전 전문가 8명이 자연 조건에 관해 발표를 했다. 그들에 의하면, 가을철에 인천항 갯벌 위에 상륙정과 보급선이 뜰 만큼 밀물이 들어오는 날은 며칠밖에 안 되기 때문에 공격이 기습공격이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또한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월미도에 적군의 대포가 설치되어 있어서, 상륙정들이 전멸을 당하지 않으려면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무력화시켜야만 했다. 게다가 항구로 들어가는 수로에는 기뢰가 부설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마지막으로, 9월 15일은 한창 태풍이 불어올 때였다. 결론적으로, 도일은 인천상륙작전을 권고할 수 없다고 말했다.1시간 반 동안 침통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던 맥아더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열변은 45분 동안 이어졌다. 마치 대화를 하듯이 말을 했지만, 모든 참석자들이 감명을 받았다. “대부분의 공산군은 현재 워커 장군의 방어선 주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나는 적군이 인천에서 적절한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기습이 불가능하다며 여러 가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나는 그것들이 오히려 기습의 요건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적군은 우리가 그렇게 불가능한 일을 무모하게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습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그는 해군의 반대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반대이유는 극복이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해군을 전폭적으로 신뢰합니다. 해군도 나름대로 자신감에 넘쳐 있겠지만, 해군에 대한 내 신뢰는 아마도 그것보다 더 클 것입니다.”맥아더에 따르면, 적군의 병참체계는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와해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현재 워커 장군에게 맞서고 있는 적군의 전투력이 마비될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타가 없다면 미군 병사들은 부산 지역에서 계속 무참한 희생을 당할 뿐이었다. “우리 병사들을 도살장에 끌려간 소처럼 피비린내 나는 방어선에 그냥 내버려 둘 작정입니까? 그러한 비극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질 것입니까? 확실히 말하건대, 나는 책임을 지지 않을 것입니다.”6·25전쟁은 서방세계의 위신이 달려 있는 문제였다. “현재 수백만의 사람들이 결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인천이 5천 대 1의 승률밖에 안 되는 도박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이런 도박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반드시 성공을 거두어 10만 명의 생명을 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입니다.” 맥아더가 결론지어 말했다. “나는 그들을 박살낼 것입니다!”회의 참석자들은 넋을 잃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가장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셔먼 제독이 일어나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의에 입각한 위대한 연설이었습니다.”***맥아더가 상륙작전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합참은 상륙이 실패하거나 상륙 후 조기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비참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마지막 경고를 보냈다. “최대한 빨리 한국에서 반격을 가하는 것에 찬성은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상당한 우려를 갖고 그곳의 최근 동향을 주시해왔다.”이 말은 전체 계획이 파기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맥아더는 뼛속까지 소름이 끼쳤다. 그는 적으로부터 주도권을 뺏을 수 있는 방법은 상륙작전밖에 없다고 즉각 응수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를 무한전쟁으로 내모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마침내 합참은 맥아더의 주장에 수긍하고, 상륙작전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승인되었음을 알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막판에 계획이 취소될 것을 우려하여, 세부계획이 첨부된 작전 명령서를 9월 10일까지 합참에 보내지 않았다.맥아더는 명령서를 전달하러 떠나는 스미스 중령에게 말했다. “너무 빨리 도착하려고 하지는 말아.” 그가 농담처럼 내뱉는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그들이 만약 너무 큰 도박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내기에서 1달러를 건 후에 5센트를 더 보태는 것과 같다고 내가 말하더라고 전해. 아시아대륙에 미군을 보내기로 한 워싱턴의 결정이 사실 큰 도박이었지.”스미스 중령이 도쿄를 떠나 워싱턴으로 가고 있을 때, 5해병연대는 목적과 행선지도 모른 채 부산에서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3대대장 태플리트 중령은 그의 대대가 월미도에 제일 먼저 상륙할 것이라는 얘기를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작은 섬인 월미도에는 상륙작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 만큼 많은 포대들이 도처에 숨겨져 있었다. 9월 10일, 태플리트의 부하들이 체력단련을 하는 동안, 28대의 해병대 폭격기들이 월미도를 네이팜탄으로 무력화시키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공습으로 섬의 동쪽이 초토화되었고, 두 번째로 출격한 비행편대는 포연 때문에 공중을 빙빙 돌아야만 했다. 월미도와 육지에서 대공사격이 가해졌다. 몇 시간 후에 세 번째 공습이 가해지고, 곱사등이 모양의 섬은 화염에 휩싸였다.***9월 13일, 이미 해군 폭격기에 의해 무력화된 월미도를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기 위해 미국 구축함 6척이 전방 700m까지 접근하여 포격을 가했다. 동시에 미국과 영국의 순양함 4척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고, 공중에서는 폭격기들이 폭탄을 투하했다. 30분 동안 당하고만 있던 북한군이 마침내 손상되지 않은 대포로 응사하기 시작했다. 구축함 3척이 포탄에 맞았다. 큰 손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북한군은 이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응사로 말미암아 아직 파괴되지 않은 포대들의 위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순양함과 구축함에서 날아온 포탄들은 그곳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중했다.그날 저녁 한국군 1개 사단이 영천에서 북한군 15사단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8군사령부에 전해졌다. 워커는 곧바로 정일권 장군을 방문하고, 약 40명의 장교들에게 한국군의 승리를 치하했다.D데이 전날인 9월 14일 아침, 미국 구축함들이 월미도에 다시 1,700발 이상의 5인치 포탄을 퍼부었다. 적의 응수는 약간의 산발적인 사격에 그쳤다. 대포들이 제압된 것이 분명했다.***사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통보를 받고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만일 맥아더를 비롯한 마운트매킨리호의 탑승자들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틀림없이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8월 말, 마오쩌둥은 불길한 첩보들을 검토한 후, 낙동강방어선의 전황을 면밀히 조사했다. 심상치 않은 동태가 눈에 거슬렸고, 미국 해병대가 모종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젊은 보좌관들과 함께 상황을 분석하고, 맥아더가 과거에 승리를 거두었던 전투들을 재검토했다. 그리고 미군이 상륙작전을 펼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맥아더의 전문분야가 상륙작전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논리적으로, 상륙지점은 서해안의 다섯 개 항구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컸다. 특히 인천이 유력했다. 한국의 심장부인 서울에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상륙날짜는 특이한 조수간만과 날씨를 고려해 볼 때, 9월 15일이 가장 유력했다.이 예측이 김일성에게 통보되고 나서 며칠 후, 북한 첩보기관은 마오쩌둥의 의견에 동의를 표시했다. 미국 해병대 폭격기들이 네이팜탄으로 월미도를 공격한 9월 10일 이후에는, 인천상륙에 대한 어떠한 의구심도 사라졌다.김일성은 맥아더가 곧 상륙한다는 것을 알고, 격렬한 논조의 명령문을 작성해 예하부대에 하달했다. “모든 해방지구를 보호하고 방어하라! 피와 목숨을 바쳐 모든 산과 강을 수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