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에 만난 지혜가 평생을 먹여 살린다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 명진출판
스무 살에 만난 지혜가 평생을 먹여 살린다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명진출판 / 2012년 3월 / 256쪽 / 14,000원
PART 1 스무 살, 교실 밖에서 인생을 배울 나이
사랑에 대한 지혜_ 사랑의 이유를 따져 묻는 너에게
얼마 전 실연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조카와 술을 마셨다. 비록 스물 몇 살에 불과한 짧은 인생이지만, 그의 생애에서 처음 해본 연애다운 연애였기 때문에 더욱 충격이 큰 것 같았다. 조카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다고 넋두리했다. 그녀 또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으며,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구구절절이 회상했다. 그랬는데, 그 아름답고 진실한 사랑이 1년도 안 되어 공수표가 되어버렸으니 얼마나 상실감과 배신감이 크겠는가. 녀석은 술주정처럼 그녀에 대한 원망과 사랑에 대한 불신을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스무 살의 문턱을 넘어선 많은 이들이 사랑 때문에 웃고 울고 고민하고 있을 거다. 20대의 가장 큰 화두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물론 새로운 경험과 많은 선택과 다양한 인생의 통과의례도 중요하겠지만, 그 중심축은 역시 사랑일 것이다. 30∼40대의 중심축이 일과 가족, 성공에 있다면 20대의 중심축은 사랑에 있다. 그들은 사랑 때문의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을 경험하며 한 뼘씩 더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나의 20대 역시 사랑 때문에 웃고 울고 고민하고 방황했던 시간이었다. 그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이 중요했으니까. 사랑이 시작될 때는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이 내 심장에 들어와 버리면서 사랑이 시작된다.
"누가 내게 왜 그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니까. 나는 나니까'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 몽테뉴
몽테뉴의 이 말처럼 오직 그 사람이기 때문에 내 마음이 끌리는 거다. 그 사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그 무엇, 예를 들어 쾌락이나 행복, 경제적인 지원 같은 것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그 사람을 원하는 거다. 그래서 사랑이 시작되는 초기에는 그 사람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진다. 보통 이런 상태를 두고 사람들은 "미쳤다."라고 말한다. 사실 틀린 표현은 아니다. 눈에 콩깍지가 완전히 씌어서 상대의 '장점'과 '좋은 점'들만 보이는 상태이니까.
하지만 사람이란 완전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나에게는 상대가 좋아하는 점도 있지만, 못마땅한 점도 있을 것이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만남이 거듭되면서 점점 서로의 단점과 못마땅한 점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못마땅한 점과 고쳤으면 하는 점이 보이면서 상대에 대한 불만도 차츰 늘어간다. 그리고 갈등과 싸움이 잦아지면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간은 끝나고 점점 갈등과 고통의 시간이 늘어난다. 보통의 사랑과 연애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파국의 과정을 파스칼은 매우 냉정하고도 단호하게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결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장점들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팡세》567편
파스칼은 참으로 잔인하다. 그는 내가 눈물 콧물 짜면서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한 방에 삽질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파스칼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마도 이 문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파스칼이 진실한 사랑을 완전히 부정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세상에 진실한 사랑이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런 사랑이 어렵다는 것을 강조했던 게 아닐까? 세상에 '진실한 사랑'의 표본이나 기준이 정해져 있는가?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에게 "이것이 진실한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점은 없다.
사랑은 찬란한 무지개 같지도 않고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끝없는 인내와 희생과 양보를 장시간 요구하는 게 사랑이다. 이기적이고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에게 사랑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진실한 사랑을 원하면서도 자신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사람은 결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파스칼의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존재에 대한 지혜_ 끊임없이 진리의 존재를 의심하는 그에게
철학에서 신의 존재 여부는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전제가 된다.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가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인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명제의 진위를 알 수 없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이다. 불가지론자의 입장에서 신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사람이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신의 존재도 부재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신의 존재는 믿음의 영역인 신앙에 속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마음'이나 '공기'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으며 증명도 가능하다. 신의 존재 여부는 인간의 인식으로선 알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다는 게 불가지론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불가지론자를 무신론자라고 단정 짓는 건 옳지 않다. 그들은 한 번도 "신은 없다."라고 주장한 적이 없었다. 역사상 가장 엄격한 불가지론자였던 칸트는 '신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이 있다는 근거'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돈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지금 내 지갑 속에 들어 있는 100탈러는 앞으로 생길 수도 있는 100탈러와 다르다. 나는 머릿속에 있는 100탈러의 단순한 개념보다 지갑 속에 실제로 100탈러가 있을 때 더욱 부유해진다. … 단순히 생각만으로 지식이 풍부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상인이 장부에 0을 몇 개 덧붙여 자기 재산을 늘려놓아도 돈이 많아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순수이성비판》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신의 존재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물의 돈이 아닌, 생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일확천금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형이상학자들은 주식이나 채권처럼 가상의 가치를 다루는 트레이더와 비슷하다. 그러나 불가지론자들은 신의 개념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으며, 현실이 아닌 가능성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신의 개념이란 더는 완벽한 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영원불변의 절대적이고 완벽한 진실이란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간 죽는다."라는 자연법칙밖에 없다. 절대적이며 완벽한 진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교조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신의 주장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게 철학자의 입장이다. 이것은 철학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과거의 진리가 현재에 와서는 폐기되고, 그들의 진리가 우리에겐 거짓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귀족과 평민의 차별을 진리로 받아들였지만, 현대에서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이렇게 진리나 상식, 관습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때로는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변하기도 하니까. 중요한 건 모든 건 변한다는 가능성이다.
문제는 이런 변화의 가능성을 이용하는 몇몇 불가지론자들이다. 그들은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므로 현재에 대한 확신이나 약속을 꺼린다. 지금은 너를 사랑하지만, 이 사랑이 언제 변할지 모르니 너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겠다는 식이다. 지금은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이 생각이 변할지 모르므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과연 이런 행동이 칸트가 주장하는 불가지론에 맞는 것일까? 이것은 불가지론이 아니다. 그
저 자신의 철학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부족할 뿐이다. 또한 미래에 받을지도 모를 비난을 사전에 차단하는 비겁한 회의주의자의 행동일 뿐이다.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은 변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해야 한다. 스무 살 때 가진 생각을 마흔 살이 되어서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면 이것은 엄밀히 말해 발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의 생각이 바뀌는 것을 거부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단,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좋은 쪽으로 변하려는 노력,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할 때 겸허하게 바꿀 줄 아는 유연성이다. 현명한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다고 현재를 유보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현재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미래에 그것을 수정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자이다.
PART 2 선배들도 모두 같은 고민을 했다
정의에 대한 지혜_ 착해서 늘 손해만 본다고 투덜대는 너에게
'착하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하나는 보편적 기준에서의 '올바름'과 '정의로움'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상대적인 기준에서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나에게 좋은 사람'이란 어떤 의미일까? 냉정하게 말해, 자신의 이익이나 처지보다는 타인의 이익이나 처지를 배려하고 쉽게 양보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착한 것'은 '정의'와는 상관이 없다.
사실 누군가에게 착하다는 평을 듣기는 쉽다. 그의 이익을 위해 나의 이익을 얌전히 양보해주면 된다. 이렇게 상대적 의미의 착하다는 평가에는 '자신의 손해'라는 부분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너무 착하면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므로 논쟁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러나 '착하다'의 의미가 '올바름'과 '정의로움'일 때 '너무 착하면 손해'라는 명제는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가 된다.
사적인 이익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착하다고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이 도덕적이고, 양심적이며, 정의롭고 이타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손해를 본다는 것은 바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이며 정의롭고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손해'라는 뜻이 된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착한 사람이 사는 그 사회가 부도덕하고 불공정하고 불법과 편법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착하면 손해'라는 말에 대한 사람들의 공감도는 그 사회의 도덕 지수와 공정 지수를 측정하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그럼 이제 '착하면 손해'라는 말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자. 우리는 저 말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가. 아마 대부분이 저 말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심정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부도덕하고 불법적이고 이기적으로 살아도 보란 듯이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불의에 너그러워진다. 그래서 '착하면 손해'라는 말은 진실이 되어버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게 최고라는 인식이 정의로 둔갑해 버린다. 그런데 이런 혼란이 현재에만 일어나는 문제일까? 아니다. 기원전, 아주 오래된 시대에도 정의와 불의에 대한 혼란은 있었다.
"불의를 저지르기보다는 불의를 당하는 편이 낫다." -《고르기아스》469c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 혼란에 대해 이와 같이 단호히 선언했다. 그는 악한 사람은 언제나 불행하지만, 선한 사람은 잘 속고 놀림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고통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불의를 행하면서도 벌을 받지 않는 사람은 '위중한 병에 시달리면서도 치료를 원하지 않는 사람'과 같고 '아프다는 핑계로 치료를 거부하는 어린아이'와 같다며 그들을 동정했다. 권력과 불의의 핍박에 목숨을 걸고 대항한 철학자다운 생각이다.
비록 지금 당장은 인과응보의 쾌감을 느낄 수 없지만, 우리는 언젠간 불의가 단죄될 것이며 불의로 얻은 성공은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범죄 속에는 어떠한 행복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불의가 눈앞에 성공을 보장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행하는 데 망설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의가 응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동안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점 때문에 칼리클레스(Callicles)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현실 감각은 결여한 채 지나치게 철학적 사유만 즐기는 이상론'이라고 맹비난했다.
"진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불의를 당하는 것이 불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나쁘다. 이때 피해자는 모욕에 대해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노예'와 비교할 만하기 때문이다." - 칼리클레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칼리클레스는 불의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의 주장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불의에 대항하는 방식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불의에 대한 저항을 '정의로운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했고 칼리클레스는 불의에 대한 저항을 '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은 언제나 정의롭게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소크라테스와 칼리클레스는 의견을 달리한다.
법의 존재 목적은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을 정의이며 선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법의 존재 목적이 정의 구현이라는 것은 맞지만, 현실에선 약자를 보호하는 법이 불의를 저지른 강자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일이 많다. 때로는 법의 목적 자체가 약자가 아닌 강자를, 정의가 아닌 불의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법을 만들고 제정하는 사람들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불의를 통해 강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법의 이런 속성을 잘 알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약함이 미덕이고 힘이 악이라고 믿게 하려고 법이 발명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늘 하는 것이다.
유혹에 대한 지혜_ 착한 남자는 지루하고 나쁜 남자가 멋있다는 그녀에게
좋은 남자, 좋은 사람들은 좀 지루해 보일 수 있다. 좋은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행동해서 타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조심하기 때문에 소심하고 굼떠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싸움보다는 평화를 원하기 때문에 분란이 생기면 되도록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해서 때론 무력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태도 때문에 종종 이용해 먹기 좋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논쟁이 벌어졌을 때도 신랄하게 공격하거나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에둘러서 말하기 때문에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누군가 상처 주는 말을 해도 똑같이 되갚아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이기 쉽다. 그래서 이런 좋은 남자와 연애하는 것은 평화롭고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재미가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의 지고지순하고 한결같은 사랑이 지겹고 하찮게 보일 수도 있고, 그런 해바라기식 사랑은 오히려 보답 받지 못할 위험이 더 크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대개 자신의 손안에 있는 파랑새는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가지지 못한 숲 속의 어떤 새를 더 갈망하고 원하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게다가 수많은 경쟁자가 있다면 꼭 자기가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정복욕이 갈망의 정도를 높여준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격렬하게 사랑을 표현하고 갈구하지만, 상대의 태도는 언제나 불만족스럽기만 하다. 설령 그의 사랑을 쟁취하더라도 잠시의 승리감을 맛보겠지만, 안정적인 만족감이나 신뢰감을 얻기는 어렵다. 내가 가진 마음과 내가 보인 열정만큼 그도 나에게 뭔가 보여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착하고 옳은 것보다 나쁘지만 강한 것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독재자의 독선을 카리스마라고 미화하고, 남을 무시하는 안하무인격 태도를 도도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과 자유로운 것을 혼동하며, 고집을 소신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도 참회하지 않는 태도를 대범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을 오직 목소리 큰 걸로 밀고 나가는 걸 보고 자신감이라고 칭송할 때도 있다. 때로는 부당하고 비열한 술수로 성공한 것을 능력 있는 것으로 여기고, 위기의 순간을 임기응변이나 거짓말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걸 위기대처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못된 사람을 우러러보고 좋은 사람을 멸시한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모순이다. 사람들이 선보다 악을 선호하는 건 강해보이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은 물러터지고 답답하고 만만하게 보이지만, 나쁜 사람에겐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에겐 함부로 말해도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쁜 사람에게 그랬다간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사람의 본능 중에는 지배하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그만큼 지배받고 싶은 욕망도 있다. 마치 인질범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처럼, 사람들이 나쁜 것을 선호하는 심리에는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나보다 강한 것에 복종하려는 본능이 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