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비스마르크를 만나다
강미현 지음 | 에코리브르
또 다른 비스마르크를 만나다
강미현 엮음
에코리브르 / 2012년 3월 / 288쪽 / 13,500원
1 광포한 융커_ 최고의 룸펜 아니면 최고의 인물
출생 신고: '어제 아내가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모든 친지들께 알립니다. 아울러 답례 인사는 사양하겠습니다. 4월 2일 쇤하우젠, 페르디난트 폰 비스마르크'
명랑하고 활발한 학생: 다섯 살 위인 형 베른하르트가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 가면서, 비스마르크는 베를린에 혼자 남아 김나지움의 마지막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베렌 가의 집을 팔아넘기는 바람에 프레보 교수 댁에서 1년 정도를 지낸 뒤, 프리드리히-빌헬름 김나지움 교장의 장인이자 자신의 선생님인 본넬 박사 댁으로 옮겼다. "매사에 성실하고 의무를 다하라"는 본넬 선생님의 가르침만 생생할 뿐 비스마르크는 그 시절의 일들을 더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본넬은 당시 열두 살이던 비스마르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긴 했으되 밝고 다정한 소년이었죠. 동급생들 사이에서는 눈을 빛내며 명랑하고 활발하게 어울렸습니다."
가장 작은 둥지: 괴팅겐 대학 시절 비스마르크는 귀족 자제들이 선호하던 향우회 성향의 하노베라 서클에 가입했다. 그러나 방탕이나 방종이란 말이 제격인 양 대학생다운 생활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일삼았다. 비록 금지되긴 했지만, 괴팅겐 법대생 대다수가 가입한 하노베라에서는 결투가 관행이 되다시피 한 탓도 있었다. 비스마르크 역시 그들만의 공식 입회 절차라고 일컫는 격투를 벌이고 나서야 정식 회원이 되었다. 그 후 술집을 전전하며 과격한 행동을 일삼았고, 3학기 동안 30차례에 가까운 격투를 치를 정도로 '싸움꾼'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러던 어느 날 비스마르크가 동창들 가운데 한 명과 최고의 결투를 막 벌이려던 참이었다. 수위가 그 유명한 결투장을 찾아냈고, 때마침 입구를 감시하고 있던 학생이 달려와 소식을 알려주었다. 비스마르크와 대적할 동창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 닭장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런데 닭장의 판자벽에는 두 사람이 피하기 전에 비스마르크가 써놓은 글귀가 눈에 띄었다. '가장 작은 둥지에서 행복하게 사랑하는 한 쌍을 위한 공간입니다.'
최고의 룸펜 아니면 최고의 인물: 방탕한 대학생이었음에도 비스마르크는 장래 희망으로 외교관을 꼽았고, 줄곧 미련을 버리질 못했다. 어느 날 외무고시 결과에 가문의 배경이나 관료와의 친분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특히 프로이센의 평범한 지방 귀족 자제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버리고 주저앉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는 외교 업무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는 등 사생결단의 각오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심중을 털어놓았다. '나는 프로이센의 최고 룸펜(Lumpen, 독일어로 부랑자 또는 실업자라는 뜻), 아니면 최고의 인물이 되고 말 테다.'
집중적인 강화 요법: 정확성에서 분초를 다툴 정도였던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사법관 시보 시절 한 구두 수선공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수선공은 단 한 번도 약속한 날짜를 맞춘 적이 없었다. 때마침 수선을 부탁한 부츠가 급히 필요하던 차에 비스마르크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약속한 날이 되었다. 아침 6시 비스마르크는 작업장을 찾아 구두가 다 수선되었는지 확인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러나 10분 뒤 두 번째로 불쑥 나타나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이번에도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 오후 늦게까지 동료들의 도움까지 이용해 똑같은 방식으로 재촉한 비스마르크는 밤늦게야 수선된 구두를 돌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구두 수선공은 두 번 다시 비스마르크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영원한 휴가: 상관들의 권위의식에 거부감을 떨치지 못하던 비스마르크에게 예상보다 빠르게 그들과 '절교'할 기회가 다가왔다. 비스마르크가 휴가를 청하기 위해 상관들 중 한 사람인 메딩을 찾아갔다. 그러나 대기실에서 1시간 이상 무작정 기다려야 했는데, 하는 일도 없이 탁자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반쯤 열린 문으로 보고 있자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마침내 황송하게도 면회가 허락되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상대가 누구든 불손한 태도에는 민감하게 보복하던 비스마르크로서는 불합리한 관료체계에 대한 혐오감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비스마르크가 분명한 의사를 밝혔다. "사실 저는 며칠 휴가를 내고자 왔습니다만, 감사하게도 당신께서 즉각 저를 해고해도 좋을 정도로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사표를 제출합니다!"
조그마한 왕국의 왕: 사법관 시보를 그만둔 비스마르크는 1838년 3월 포츠담 친위대의 저격부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10월 22일 이마저 버리고 공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으며, 완전 무지한 농업의 세계로 낙향을 결심하게 되었다. '비록 시골 농장의 지주로 머물지라도 조그마한 왕국의 왕처럼 살고 싶다.' 그동안 강력히 거부해왔던 고향 폼메른의 영지인 크니프호프를 넘겨받은 비스마르크는 누구의 눈치도 간섭도 신경 쓸 필요 없는 농장 경영에 뛰어들었다. '경직된 관료주의적 국가체제에서는 나같이 창조적이며 고집 센 인물이 뜻을 펼칠 자리가 없다. …… 프로이센의 관료들은 오케스트라의 구성원과도 같다. 그들은 제1바이올린이나 트라이앵글을 연주하려 하나, 전체를 통찰하거나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좋든 싫든 자기 파트만을 연주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다고 인정하는 음악을 연주할 뿐, 그럴 수 없다면 아예 연주를 하지 않겠다.'
이루지 못한 사랑: 시골생활에 지쳐 염세주의에 빠져 지내던 무렵, 비스마르크는 절친한 친구 블랑켄부르크의 약혼녀인 마리를 만나면서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게 된다. 친구의 약혼녀이니만큼 삼각관계로 심화될 법도 했으나, 마리가 유행성 열병에 시달리던 어머니를 간병하던 중 뇌막염을 앓더니, 그만 스물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뛰어난 감성에 경건한 의식까지 겸비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존재인 마리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비스마르크는 살아 있는 동안 그녀를 잊지 않았다. '내가 한 여인을 마음에 들어 했다면 그 여인에게서 영락없는 마리의 일부를 보았기 때문이다.'
운명적인 파트너: 비스마르크는 생의 파트너인 요한나를 블랑켄부르크와 마리의 약혼식에서 처음 만났다. 그 자리에서 블랑켄부르크는 요한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는 당장이라도 그녀와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아주 사려 깊고, 음악적 소양도 풍부한 여성이라네. 총명할뿐더러 보기 드물게 신실하기도 하지. 자네가 싫다면, 내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할 걸세." 그러나 여전히 마리를 마음에 품고 있던 비스마르크는 블랑켄부르크의 언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블랑켄부르크의 신혼집에서 재회했지만, 그의 심경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1846년 여름 친구들과 함께 휴양지 하르츠로 여행을 떠났고, 그 후 형 베른하르트에게 고백했듯이 서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비스마르크의 심중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요한나는 귀족 출신으로는 보기 드문 정신의 소유자이며 특별한 기질을 가진 여인이다. 사랑스럽고 너무나 고귀한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더없는 행운을 잡은 셈이다.'
천생연분: 비스마르크와 요한나는 기질이 서로 달랐지만, 무엇보다 가족적인 삶을 지향했다. 그들은 소박하고도 도덕적인 가정환경을 중시했으며 이런 생활방식은 부부의 사랑처럼 늘 한결같았다. 훗날 비스마르크는 친구 샤를라흐에게 요한나와 부부로 함께한 48년의 의미를 진솔하게 얘기했다. '신께 감사드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은 독일제국을 통일한 재상으로서 맘껏 누린 영광이 아니라, 요한나와의 결혼생활을 통해 지금의 나 자신이 있게 된 것이네.'
2 정계의 신출내기_ 여우굴의 제일인자
철군에 대한 분노: 1848년 3월혁명이 일어났을 때였다. 비스마르크는 반혁명의 선봉장이 되어 베를린으로 진군하려 했다. 그리고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대중에게 허리를 굽혔다는 소식에도 비스마르크는 분개했다. 그는 군주제 옹호자로서 무엇보다 보수적인 융커-귀족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국왕이 포츠담에서 당시 통합의회 보결의원이던 비스마르크와 만날 기회가 있어 진의를 알고자 했다. "어떻게 지내셨소?"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폐하." "잘 지내지 못했다고? 자네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오, 아닙니다, 폐하. 이전에는 좋았습니다만, 왕실이 혁명을 받아들이는 조치를 내리신 후로 비참해져버렸습니다. 국왕을 지지하는 데 신뢰가 없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왕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국왕께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시는 게요?" "엘리제, 그냥 계시오! 내가 그와 곧 얘기를 끝내겠소. 그대가 나를 비난했던가?" "베를린의 철병… (때문입니다)!" "그건 내 의도가 아니었네." 왕후가 다시 나섰다.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국왕께서는 분명 죄가 없소. 국왕께서는 당시 거의 사흘 동안이나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하셨소." 그러자 비스마르크의 대답은 냉혹했다. "어떤 국왕이라도 항상 주무실 수는 있어야 합니다." 결국 국왕은 얘기를 중단해버렸고, 의기소침해진 두 사람은 곧 다른 손님들과 어울렸다.
극한 상황에서 요긴한 인물: 3월혁명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브란덴부르크 백작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구성했다. 백작은 국왕에게 각료 명단을 제출했고, 거기에는 비스마르크의 이름도 있었다. 비스마르크 자신은 국민의회에 대항해 최후의 순간까지 과감하게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으나, 국왕의 생각은 달랐다. 명단에 자필로 써놓았듯 비스마르크는 '총검이 무제한으로 지배될 때만이 필요한' 인물로 인식될 뿐이었다. 국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지 못했으나 비스마르크는 '내각의 관리자'로 발탁되어 브란덴부르크 백작을 보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만토이펠을 만나 장시간 논의한 끝에 내무장관직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새 임무를 완수해냈다.
용기: 1850년 말 프로이센의 수상이 된 만토이펠이 어느 날 비스마르크를 불러 물었다. "그대는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의 프로이센 대사직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소?" 비스마르크는 대답했다. "예!" 그 뒤 국왕이 다시 불러들였다. "친애하는 비스마르크, 그대가 낯설기만 한 이 직책을 지체 없이 받아들이다니 용기가 대단하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재치 있게 답했다. "그런 자리를 제게 맡기시다니 폐하야말로 용기가 있으십니다. 제가 그 직책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 해임에 누구보다 침통해할 사람이 바로 저일 것입니다. 폐하께서 명령할 용기가 있으시니 저로서도 복종할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비스마르크의 대답에 흡족한 듯 국왕은 최종적으로 그의 임명 문제를 매듭지었다.
똑같은 행위로: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서 비스마르크의 정적은 단연 의장국인 오스트리아 대표 툰-호엔슈타인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대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스마르크와 똑같이 지독한 애연가로 상대에게 굴욕감을 주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비스마르크가 찾을 때마다 한결같이 앉아만 있는 데다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는 식으로 한시도 입에서 담배를 떼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툰-호엔슈타인은 어김없이 그런 모습으로 비스마르크를 맞이했다. 그런데 비스마르크가 느닷없이 그와 똑같이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까지 청하는 것이었다. "불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의장님?" 이후로 거만한 백작 툰-호엔슈타인은 프로이센 대사 비스마르크를 자신과 동급으로 대우했다.
찬밥 신세: 독일연합을 주장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로이센 국왕들 가운데 광신자이자 몽상가로 알려졌다. 그는 건강이 온전치 못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어려웠다. 결국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던 그를 대신해 1857년 10월부터 동생 빌헬름 왕자가 정무를 담당했고, 이듬해엔 섭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빌헬름의 치하에서 1859년 1월 비스마르크는 8년간의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대사에서 물러나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대사로 옮겨 가게 되었다. 그로서는 프랑크푸르트에 더 머물고 싶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비스마르크로서는 베를린에서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 위축되었다. '네바 강에 내버려진 찬밥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주로 독일 국내정세를 다룬 반면, 이제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 페테르부르크의 경력은 결코 '찬밥'이 아니었다.
현격한 입장 차이: 1862년 수상에 임명되기 직전 비스마르크가 페테르부르크에 이어 프랑스 대사로 몇 개월간 파리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다른 나라 대표들은 나폴레옹 3세 앞에서 몸을 낮춘 반면, 그는 유일하게 목을 꼿꼿이 세운 외교관이었다. 나폴레옹은 그런 '프로이센 사람'에게 실로 친절한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한번은 가족도 없이 파리에 머무르는 그에게 연인까지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정중히 거절했다. "저는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연인을 만나지 못합니다." 황제는 비스마르크의 답변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 아내가 여기 있는 것도 아니잖소!" 비스마르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상관없는 일입니다, 폐하."
서투른 판단: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대사로 파리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고위 관료들에게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의 정신, 풍자,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 게다가 친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밖에 없었다. 다만 비스마르크가 오랫동안 선호한 게임이라 할 수 있는 아주 비외교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가 천부적인 국가 원수감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나폴레옹 3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때마침 수상에 임명될 비스마르크가 소환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나폴레옹은 고별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비스마르크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나중에 측근에게 속내를 밝혔다. "그는 예의주시할 인물은 아니다." 훗날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을 호적수임을 그때 알아차렸더라면 어떠했을까.
3 호의적인 '악동'_ 독일 전역에서 사랑받는 인물
혁명의 발기인: 빌헬름 1세는 병에 걸린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대신해 졸지에 1861년 왕위에 오른 탓에 통치술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1862년 크나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프로이센의 국력 강화를 위해 군제개혁을 시도했으나 의회 내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로 구성된 진보당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그 무렵 비스마르크에게 국왕이 속내를 털어놓으며 의사를 타진해왔다. "상황이 이렇게 지속될 경우 프로이센에 머지않아 혁명이 일어날 것이오." 사실 비스마르크는 국방장관 론의 천거로 수상직과 관련해 베를린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그는 혁명의 위협을 느끼는 국왕의 면전에서 그의 두려움을 해소하고 향후 정책에 대한 소견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프로이센에서 혁명은 국왕만이 일으키십니다."
피와 철을 둘러싼 진상: 1862년 군제개혁으로 인한 위기 국면에서 수상이 된 만큼 헌법 분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해 9월 30일 의회 예산위원회에서 비스마르크는 마침내 철혈정책을 표명한다. "독일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닌 프로이센의 힘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 프로이센은 일치단결해 여러 번 놓쳐버린 기회를 적절한 시기에 다시 잡아야만 합니다. 빈 의정서에 따른 프로이센의 경계선은 견실한 국가적 생존에는 유효하지 못했습니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1848∼1849년의 커다란 실수와는 달리 연설이나 다수결이 아닌 오로지 철과 피로써 결정될 것입니다."
비스마르크의 '철과 피'라는 발언은 삽시간에 유명해졌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투쟁 선언으로 받아들였고 정국은 더욱 더 경색되었다. 강압적인 발언이었지만, 비스마르크로서는 국왕의 군제개혁을 성사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런 발언을 했을 뿐인데, 그 결과가 심각한 분쟁으로 확산되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사실 정적으로 둘러싸인 의회 단상에 오를 때만 해도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들어 올려 의원들에게 화친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강력한 프로이센 건설을 촉구했다. 하지만 사태는 실제 취지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말았다.